[펌설] [시륜] 바람과 함께 11 - 完

[유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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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cafe.daum.net/noveloflove

* 작가 : 시륜 (bovos1st@hanmail.net)

* 펜카페 : 연소창에서는 타카페에 대한 링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찾지 못했습니다.

　　　　　 추후에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퍼오는 모든 소설은

　　　　　 펜카페 기재가 늦을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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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살짝 벌려진 문틈 사이로 다민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아무도 없는듯 쥐죽은듯한 분위기가 느껴지자 의아한 표정으로 원룸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문을 열어놓고 잠들면 안된다구요."




다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경아는 자신의 두팔을 배게삼아 식탁에 엎드려 잠에 취해 있었다.

다 식은 된장찌게와 그외 밑반찬들이 나머지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싱크대 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패션잡지 서너권이 올려있었다.

다민은 그녀의 엉뚱함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저녁 8시...




"누나... 기다린거예요? 이왕 기다릴꺼면 제대로 해달라구요.

오늘은 영화 관계자 들이랑 식사를 하고와서 늦었어요. 감독님과

한수형은 오늘 무척 기분이 좋은건지 마시지 않는 술을 잔뜩 마시더군요.

제가 아주 마음에 드는가봐요."




다민은 자고 있는 경아에게 대화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경아는 여전히 잠에 푹 빠져있는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보라!! 이곳엔 줄리엣이 잠들어 있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묘소를 휘황찬란하게 비추고 있다.

죽음이여, 여기서 잠들어라. 너를 묻는 이손도 죽음의 손이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들이 따로 명랑해진다는 얘기가 있지.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임종의 섬광이라고 한다지.

허지만, 이것을 어찌 섬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경아는 다민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듯 벌떡 일어났다.

잠이 덜깬 멍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왜그래? 무슨일이야?"

"오, 나의 애인이여, 사랑하는 아내여,

꿀같이 달콤한 너의 숨결을 빨아마신 죽음도 너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무력하구나.

그대는 아직 정복되지 않았다. 뺨에도, 입술에도 미의 깃발은 붉게 휘날리고 있다.

죽음의 창백한 깃발은 아직 여기까지 쳐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다민은 웅장한 목소리톤에 경아는 놀란 표정으로 빤히 그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경아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민이 말했다.




"아, 사랑스런 줄리엣, 어째서 그대는 그토록 아름다운가?

혹시나 저 망령 같은 죽음의 신이 그대를 사모하여,

피골이 앙상한 괴물이 이 어둠속에 당신을 가두어 두고 정부로 삼자는 것이 아닌가?

그 일이 두려워 나는 그대와 함께 있으련다. 다시는 이 캄캄한 밤의 궁전에서 떠나지 않겠다"




경아는 왜 자신의 앞에서 갑자기 이런 황당한 행동을 하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그가 하는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연기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웃을수밖에 없잖아?




"이곳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휴식의 장소다.

세상에 지친 이 육체에서 박명한 별들의... 별들의..."

"............"

"뭐였죠? 아, 까먹었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아니? 왜 뜬금없이 줄리엣 타령?"




경아는 나름대로 재미있는 구경을 한듯한 표정으로 다민을 바라보았다.

늘쌍보던 붉은머리 였지만 요란스러운 옷차림이 아닌 차분한 복장이였다.

반짝이는 귀걸이도, 반지도 모두 눈에 띄지 않았다.




"로미오의 독백대사예요. 얼마전에 하게된 학원 과제물."

"그래?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거야?"

"글쎄요. 그냥 하고 싶었을뿐이예요. 누나는 제가 연기하는거 한번도 본적 없잖아요."

"밥은? 밥은 먹었니?"

"아뇨. 배고파요. 빨리 차려주세요. 찌게도 데워 주시구요."

"치, 지금이 몇신데 밥도 안먹고... 너 나한테 밥해달라고 온거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경아는 밥을 안먹었다는 다민의 말에 식은 된장찌게를 가스렌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릇을 두개 꺼내 밥통을 열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정당히 퍼담았다.




"둘이 먹으니까 맛있지 않아요? 식사를 혼자 하는건 참 슬픈일이예요."

"슬플것 까지야..."

"누나가 만약 이 밥을 혼자 먹는다면 과연 맛있게 먹을수 있을까요?"

"그럼, 난 맛있게 먹을수 있다고..."

"에이, 거짓말 하지 말아요. 누나는 항상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군요.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구요. 그러니 저랑 이렇게 같이 밥을 먹는걸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뭐? 그래... 퍽이나 고마워. 근데 너한테 솔직해 져서 좋은게 뭐가 있는데?

적어도 나한테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요. 누나 말이 맞아요."




다민은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경아는 다민이 한 말에 덜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내색할수 없었다.

너에게 빠져들었다고... 널 좋아한다고 말할수 없었다.



---




오늘따라 유독 얌전한 다민의 태도에 경아는 미심쩍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민은 저녁을 먹고 난 후로 컴퓨터 앞에서 같은 게임을 세시간째 하고 있었다.




"걱정하시겠다. 집에 안가?"

"괜찮아요. 우리집은 콩가루 집안 이거든요."

"콩가루? 왜? 내가 보기엔 멀쩡한것 같은데..."

"애정없는 결혼은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가봐요. 아빠랑 엄마 모두

늘 밖으로 걷돌고 있죠. 물론 난 모르는척 할뿐이예요.

이혼을 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마치 제가 모를거라고 생각하시고 계세요.

그분들에게 저는 늘 어린아이 예요."

"................."





다민은 그제서야 게임의 EXIT 버튼을 누르고 경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야. 넌 어리지 않아. 어른스러워. 나보다 훨씬."

"누나 같아요. 누나가 누나 같군요."

"난 원래 누나였어."



경아가 다민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애정없는 관계를 지속하는건 무척 힘든일 이겠죠."

"............."

"난 우리가 애정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지금은... 누나 생각은?"

"............."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구요. 난 늘 솔직한데 너무해요."

"넌 늘 나한테 거짓말만 하잖아... 그것도 무척이나 달콤한..."

"역시 누나는 특이해요."




다민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추는고는 아주 느긋느긋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를 몇번 반복하더니 다시금 속도를 붙여

그녀의 입술을 유린하는것처럼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 지금 이순간만을 생각해요.'




---




"누나, 우리 놀러 갈까요?"

"어디? 넌 학교가야 되잖아."

"학교는 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해요. 잘 알잖아요."

"난 미성년자 데리고 놀다가 발각되서 혼나고 싶지 않거든요."

"겁이 많군요. 그저 하루 놀다 오는것 뿐인데... 싫으면 할수 없구요."

"누가 싫댔어? 어디 갈껀데?"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어디든 갈곳은 많으니까요."




갈곳은 많다.

그래 넌 어디든 갈곳이 많아.

그래서 언제든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지.

너의 자유로움은 부러우면서도 날 화나게 만들어...




"누나한테 좋은 냄새가 나요."




다민은 하얀이불을 살짝 걷어내며 경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을 조금더 꼭 끌어안았다.

경아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작게 속삭였다.



"좋아요?"

"알면서 왜 물어."

"좋으니까요."



그의 따듯한 숨결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다민은 피식 웃으며 미리를 점점 아래로 내리더니 그녀의 가슴에 멈춰섰다.

경아는 그런 다민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난 강아지가 아니예요."

"쿡. 예뻐서 그래."

"난 예쁘다는 말보다 남자같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구요.

처음 하는 칭찬치고는 대단히 실망스러운걸요."

"난 너한테 칭찬한적 많아. 네가 기억 못하는것 뿐이야."

"이제와서 그런변명은 소용없어요."




다민의 말투는 여전히 느긋했지만 그 느긋함에서 약간의 삐침을 느낄수 있었다.

늘쌍 같은 말투였는데 이제 그 말투에 어떤감정이 담겨있는지 알수 있게 되었다.

다민은 경아의 가슴을 할짝할짝 핥으며 입속에 집어 넣어버리곤 먹을것처럼

빨아드렸다가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아파... 그만해."

"잘 먹었어요. 이건 벌이예요."

"난 너한테 잘못한게 없는걸?"

"누난 나한테 반했으면서 끝까지 튕기잖아요. 난 튕기는 여자 싫어해요.

다 눈에 보인다구요. 하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아요. 누나는..."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어?"

"응. 듣고싶어요."




다민의 아이같은 표정에 경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좋아. 네가 쬐끔 좋아졌어."

"에이, 너무 약하다구요. 그게 뭐예요."

"약해? 난 엄청 힘들여서 말한거라구."

"다시 제대로 말해줘요. 제대로."

"알았어. 제대로... 흠흠. 좋아. 좋아해...."

"그게 뭐예요? 지금 그게 한거예요?"

"응. 한거야."



경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지만 다민은 영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다시해요. 다시."

"왜그래? 갑자기? 너 답지 않아..."

"난 늘 나 일뿐이예요."

"알겠어. 네가 좋아. 널 좋아해. 널 사..."

"사랑해요."




경아는 화들짝 놀란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입술을 부딪혀 오는 바람에 눈을 감을수 밖에 없었다.




'사랑해요.'




눈물이 날것 같았다.

분명 진심 이였겠지.

거짓이 아니였을꺼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내가 행복할수는 없는거야.




"사랑에 빠진다는건 정말 이루 말할수 없는 행복한 기분이예요."

"................"

"특히 오늘따라 더 그런것 같아요."




다민의 미소는 여느때보다 부드러웠다.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

녹아버릴것만 같았다.



'너한테 난 녹아버린거야.'





"하지만 사랑이 내 자유로움을 발목 잡을수는 없는일이겠죠."

"무슨소리야....."

"나는 늘 자유롭길 바래요. 언제나..."

"........."

"난 누구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좋아하지만 그 감정에 얽매이고 빠지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구속이나 다름없어요. 내 자유를... 내 심장을 구속시키는 일이라구요.

그래서 난 누구와도 오랫동안 사랑을 할수 없어요."

"이다민..."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마음이 아파요. 조금..."





경아는 다민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것일까.

아니면 알아도 모르는척 하는것일까.





"사랑해요."

"..........."

"지금 이순간 만큼은 누나를 사랑해요."




경아는 애써 눈물을 꾹 참고 있을뿐이였다.





지금 이순간이 아니면 날 사랑하지 않을꺼니.

날 떠나갈것처럼 말하지마.

이미 난 너한테 모든걸 뺏겨 버렸다구.

그런 목소리로... 그런 표정으로 말하지마.

다 진심인것 같잖아.

아니, 그게 진심이더라도 오늘뿐이라면 사양이야.

지금 이순간 만큼은 날 사랑한다고 말하면 안되는 거라구.

넌 새가 아니잖아.

날아갈 준비를 해서는 안돼.

난 이미 너한테 길들여졌단 말이야.

네가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12.






여태까지와의 상황과는 달랐다.

아직 끝나지 않은 감정인데 멈춰야 하는것이다.

멈출수밖에 없는 걸까?

마음먹은대로 내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걸까?

시험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분명 잘 해낼수 있을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일어나요. 놀러가기로 했잖아요."




다민이 경아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경아는 몹시 피곤한듯 들은척도 안하며 계속 잘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나, 나 그냥 혼자 가버려요?"

"가지마... 가지마..."

"가지 않아요. 그러니 일어나요."

".............."




경아는 따가운 눈을 비비며 어쩔수 없는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민은 경아의 부시시한 머리카락을 재미있다는듯 바라보더니

차분히 정리해주며 욕실로 들여보냈다.




"알다시피 미성년자는 돈이 없어요. 그러니 가는길에 음식을

사가지고 가는게 좋겠어요. 누나 생각은?"

"알아서 해. 넌 대체 정신연령이 몇살이니?"

"쿡, 비밀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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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부산하게 움직인탓에 이른시각에 기차를 탈수 있었다.

한가하기 짝이없는 평일의 아침이라 그런지 기차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완연한 봄기운이라는걸 느낄수 있었던 점은 차창밖으로 새어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이랄까. 덕분에 잠이 쏟아졌지만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누나에게도 관심분야가 생겼군요. 잘 된일 이예요."

"아직 몰라. 확신은 없어."

"확신을 가져도 돼요. 자신감을 가지는건 나쁜일이 아니라구요."

"알았어요. 잔소리 아저씨."




경아는 다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집에서 들고나온

한권의 패션잡지를 한장한장 들춰내고 있었다.




"혼자 있을때는 문을 열어놓고 자지 않는게 좋아요."

"날씨도 따뜻한데 괜찮아. 얼어죽지 않아."

"여자예요. 조심할 필요가 있다구요. 더군다나 혼자 살잖아요."

"걱정해 주는 거야?"

"그럼요. 난 누나의 남자친구니까요."

"고마워."




경아가 피식웃으며 그제서야 보고있던 잡지를 덮으며 눈을 감았다.

행복한데 왜 행복하지 못한걸까...

이게 끝인걸까. 믿고 싶지 않다.

그런 느낌이 드는걸 믿고 싶지 않아...




"궁금한게 있어. 왜 늘 하고 다니는 목걸이, 반지, 귀걸이를 하지 않는거야?"

"아, 그거 말이예요? 그냥요.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좋아했잖아..."

"싫어질수 있잖아요. 좋아하는걸 버리는일은 어려운게 아니예요."

"................."

"이 운동화도 곧 버려야 겠죠."




다민의 빨간 운동화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경아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 지고 있었다.



---



다민은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아보였다.



"차가 있으면 좋았을껄 그랬어요."

"난 면허가 없다구."

"풋, 난 면허를 딸수 없어요. 아직은..."




춘천역에 도착한후로 부터 이리저리 길을 헤매며 돌아다녔지만

두사람은 전혀 지친기색 없이 잡고있는 두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안되겠다. 그냥 택시타자. 버스정류장은 보이지도 않아."

"다음에는 지도를 가져와야 겠어요."



다민이 집을 나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알아본 정보를

A4용지에 대충 휘갈겨 적어 나왔을뿐 이라서 더욱 암담하기만 했다.

넓고 넓은 춘천을 어떻게 돌아다녀야 할지...



---



"싸가지고 온 음식이 소용이 없어졌잖아요."

"난 꼭 닭갈비를 먹어 보고 싶었어."




다민의 생각은 소양댐의 인공호수에서 배도타고 사진도 찍고

날씨도 화창하고 하니 간단히 도시락으로 밖에서 먹기를 원했지만

경아는 택시에 타자마자 만사가 귀찮은듯 표정으로 닭갈비집으로 가자고 말한것이였다.



"비싸기만 해요. 돈 아까워요."

"내 돈이잖아. 이다민 잔소리쟁이."



경아는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잘 익은 닭갈비를 하나 입에 넣었다.



"지금 하는일도 없으니 좀 더 아껴써야 한다구요."

"............"

"돈 떨어지면 다시 그 책방으로 돌아갈 건가요."

"왜그래. 갑자기..."




경아는 다민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단 한번도 자신에게 이런식으로 얘기한적이 없었는데...

늘 남의 인생은 관심없다고 하는 그가 왜 자신의 신세를 걱정해주고 있는것일까.

그것도 기분좋게 놀러온 기차여행인데...




"걱정해 주는거예요. 우린 연인사이 니까."

"내일은 연인사이 아니니? 굳이 오늘 같은날 이러지 않아도 되잖아."

"그냥 내 말 들어요. 들어서 나쁠것 없잖아요."

"너 답지 않게 왜그래. 네가 언제부터 날 걱정했다고...

네 스스로 그랬잖아. 남의 인생은 관심없다고..."

"남이 아니잖아요."




다민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경아는 여전히 놀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켜하지 않는 닭갈비를 맛있게 입에 집어 넣고 있었다.



"맛있니?"

"네."



맛있어서 먹는거 아니잖아.

거짓말 하지마.



---




식사를 마치고 다민이 우겨대는 바람에 결국 보트도 타고

전망대도 가보고 춘천시내도 돌아다니고 여차저차 바쁘게 시간을 보낼수 있었다.

경아가 다리가 아프다는듯이 투덜댔지만 다민은 오늘따라

유독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경아의 손을 놓지 않고

자신의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이였다.




"이제 집에 가자. 피곤해... 졸려. 아침부터 고생이야."

"나중엔 다 추억이 되는거예요. 분명 즐거웠을 꺼예요."

"............."

"이제 쉬러 가요."

"어디로?"

"예약 해둔 펜션이 있거든요."

"그걸 왜 말 안했어?? 뭐야. 진작 갔으면 좋았잖아."

"그렇게 나올까봐요."




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동수단이라고는 택시밖에 없었지만

다민의 전화 한통화에 펜션주인이 몇분이 되지 않아 도착한 것이다.

경아는 뭔가 당한듯한 표정으로 가는내내 다민을 노려보았지만

다민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얼굴 이였다.




"너 돈없는 미성년자 맞니?"

"미성년자라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지 그래요. 어차피 내년이면 저도 똑같은 어른인데..."

"네가 너무 날 깜짝깜짝 놀래키잖아."

"쿡, 놀라는것 같지도 않는데요."

"이제 그만 놀래켜. 멈춰줬으면 좋겠어. 별로 반갑지 않아."

"................"






그리 좋은경치와 분위기는 아니였지만 쉴곳이 있다는것만으로도

경아는 너무 기분이 좋은나머지 밝게 웃으며 서글서글한 인상의

아저씨가 안내하는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좋다."

"펜션이 좋다는 거예요. 쉬게되서 좋다는 거예요?"

"둘다 좋아."

"어차피 오늘은 못 쉴꺼예요. 각오 하세요."

".....???....."



---



어떤의미를 각오를 하라는건지 경아는 이제서야 알수 있었다.

물론 아주 몰랐었던건 아니지만 이런식의 행동은 그답지 않았다.



"아직 너무 이르잖아."

"상관없어요."



다민은 급한듯 그녀의 입술에 찾아들었고 경아는 놀란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살며치 밀쳐내려 했으나 몇초가 안돼 금새 포기할수 밖에 없었다.

그의 힘이 강하다는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13.






"이러지마..."

"........"

"다민아..."




왜 눈물이 나려는 거지?

너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거니.

뭐라고 하는거야.

제발 들리지 않게 해줘.




다민의 입술과 손짓이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닿은 곳이 없었다.

너무나 소중한듯 그녀를 안고있는 그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마지막 이니까요.'




"그만해!! 대체 왜그러는 거야."

"뭐가요. 그냥 사랑을 나누는것 뿐이예요."

"하지마. 싫어. 하지마..."

"..............."




경아가 다민의 몸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다민은 여전히 표정과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두팔에 알맞게 들어오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너 왜그래... 다민아. 왜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단 말이야. 말해줘. 응?"

"말해줄께 있어야 하죠."

"난 기분이 이상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나는 행복해요."




다민의 하얀피부와 붉은머리카락은 무척이나 대조되는듯 했다.

그의 분홍빛 입술을 왜 거절할수 없는걸까.




"궁금한게 있어요."

"어떤거?"

"누나는 여태까지 가장 사랑했던 남자가 누구였어요?"

"............."

"말해줘요."

"너."

"쿡, 진심인가요? 만약 진심이 아니면 나한테 벌받을 꺼예요."

"그러는 넌 누군데? 가장 사랑했던 여자... 그 수많은 여자들중에 나는 몇위야."




경아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기자기한 방 분위기에 맞게 천장에는 야광스티커로 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건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저한테 중요한건 현재니까요."

"..............."

"지금은 누나를 사랑해요."

"내일은? 내일도 날 사랑할꺼니? 언제까지? 과연 언제까지 날 좋아해 줄껀데?"

"그런질문은 곤란하다구요."

"대답해줘. 듣고 싶어. 확인하고 싶어."

"비밀이예요."




그가 피식웃으며 안고있는 경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




"피곤한데 이제 꿈나라로 여행이나 가요."

".............."

"자장 자장 우리 누나."

"듣기 싫어. 음치 주제에."

"음치? 그 정도는 아니라구요."

"됐어. 부르지마. 꿈에 나타날까 두렵다."

"꿈에 제가 나타나면 좋은거 아니예요?"

"아니, 하나도 안반가워."

"이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네요. 몇일동안은 솔직하더니

또다시 거짓말쟁이로 변신했어요."




이제서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경아는 마음한구석에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기분탓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자장가가 경아를 멀고 먼 꿈나라로 데려갔다.




"좋은 여행 되세요..."



다민이 깊이 잠든것 같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에... 코에... 입술에...




"사랑했어요."





---





경아는 왠지 모르게 휭한 기분에 몸을 뒤척이다가

창밖으로 비추는 따스한 햇살에 실눈을 뜨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다민을 끌어안기 위해 팔을 위로 올렸지만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




몇초동안 정지된 자세로 있다가 눈을 번쩍 뜨더니 햇살의 눈부심에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그제서야 자신의 원룸이 아닌 펜션이라는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키곤 알록달록한 색깔의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11:30]




"벌써 이렇게 잤나..."





경아는 의자위에 잘 포개진 자신의 옷을 보며 피식 웃으며 입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다민 지멋대로야."




경아가 고개를 흔들며 방안을 나와 거실과

다른 빈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다민을 찾으려 돌아다녔다.




"어디갔지?"




한참 다민의 걱정을 하고 있을때 마침 펜션주인이 아는척을 하며 경아에게 말했다.




"편하게 잘 지내셨어요?"

"아, 예. 감사합니다. 너무 잘잤습니다."

"식사 하셔야죠. 식탁에 차려놨으니까 씻고 나와서 드세요."

"감사합니다."




경아는 굉장히 친절한 인상의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하고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다민때문에 작게 인상을 쓰며 식탁앞에 앉았다.




"어제 사온 음식이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덜컥 들었던 탓이였을까...

경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는 휭한 방...




똑똑-



"네. 들어오세요."

"식사 하시고 나오세요. 기차역까지 데려다 드릴께요."

"네?"

"기차시간에 맞춰야 하니까 좀 급히 드셔야 할것 같네요."

"저기... 어제 저랑 같이 온 남자 어디간건지 혹시 아세요?"

"아... 그 학생 말인가요? 그 학생은 아침 일찍 먼저 출발하던데요."




경아가 놀란 표정으로 펜션주인을 바라보았다.

굳어버린 경아의 얼굴을 보며 의아스러운듯 주인이 말했다.




"요즘은 펜션에서도 싸우는일이 잦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따로따로 간 커플도 처음이 아니라니까요? 그 학생은 그래도

아가씨 생각해서 기차표도 예매 해주고 참 보기보다 괜찮더라구요."

"..................."




경아는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굳어있을 뿐이였다.

주인이 못마땅한듯 펜션을 나가자 경아가 급히 핸드폰을 찾았다.

가방에 들어있어야할 핸드폰이 보이지 않자 답답한 표정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정신없이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스탠드 탁자위에 있다는것을 발견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폴더에 하얀 종이가 꺼져 있는것이다.




[전화하지 말아요.]




예쁜글씨체가 아니였다.

분명 다민이 쓴 글씨였다.

경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전부 다 연기 였어요. 처음부터 모두 다 연기였어요.]

[이제 연기하는게 지겨워졌어요. 그만하려구요.]

[미안해요. 누나....]




팔랑 팔랑



하얀 종이가 경아의 손을 벗어났다.





"연기? 거짓말 하지마... 나쁜자식아. 거짓말 하지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슴이 미어지는것 같았다. 미어지는 기분이 어떤건지 실감이 난다.

죽어도 알고 싶지 않는 그런 끔찍한 기분...




"난 아직 꿈이야. 꿈나라 인거야. 깨워줘. 다민아... 깨워줘.

연기일리가 없잖아. 아무리 배우가 꿈이라지만... 연기일리가 없잖아."




경아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자 고여있는 눈물들이 흘러내렸다.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수 있어. 거짓말 하지마... 나쁜자식아."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대답 못했니?

왜 말 안했어. 차라리 어제 말해주지.

왜 사람 철썩같이 믿게 만드는거야.

왜... 날 이렇게 아프게 하는거야.

난 너한테 몸도 마음도 다 줘버렸다고...

이제 나한테 남은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그러니까 네가 이러면 난... 난....





"흐윽... 흑... 흑...."




넌 정말 나한테 꿈같은 존재였니?

잠에서 깨면 모든게 허상이 되는 그런 존재였어?

그럼 내 앞에 나타나질 말았어야지.

난 너의 장난감이 아냐.

가지고 놀다 버리는 장난감이 아니라고.

난 너의 악세사리도 운동화도 아니야.

그런 존재가 아니길 바랬어.

그렇게... 그렇게 쉽게 버리지 못할줄 알았는데...




'나는 자유롭길 원해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울면 지는건데 왜 눈물이 멈추지 않는걸까.

그렇게 슬픈일 이였나...

난 이렇게 아플정도로 그애를 사랑한 걸까...



경아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폴더를 열었다.

하지만 샌드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그의 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나랑 사귀려면 조건을 지켜줘야 해요.

제가 헤어지자고 하면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헤어져 주는거요.

최대한 깨끗하게 끝내길 원해요.

만약 누나와 제가 헤어지면 누나는 저라는 존재에 대해서 아예 잊어주셔야 되요.'




"흐윽.... 흑... 흑흑..."






'사랑해요. 누나...'








14.






그는 마약같은 남자였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수 없는 종류의 남자랄까.

이제는 웃음이 나온다.

정말 꿈이였을까?

내가 그를 만난건 정말 꿈이 였던 걸까?

그렇다면 난 이제 그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건가...

난 여전히 그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이건 억울하잖아.




"하여튼 넌 사람 놀래키는 재주는 타고났어.

난 전혀 그쪽길로 나갈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직은 배우는 단계야. 나간걸로 치면 1미터 정도?"

"이제 농담도 잘하네. 달라져서 보기 좋아."

"언제는 보기 싫다며."

"너의 근본적인 성격이 바뀐건 아니잖니."




미주는 여느때보다 밝게 웃으며 즐거운듯 경아를 바라보았다.

경아도 오랜만에 만난 미주가 반가워서 인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그간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옷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패션에 흥미를 느꼈고 정말 해볼까?

하는 생각에 고민을 했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확신을 가져도 되요. 자신감을 가지는건 나쁜일이 아니라구요.'




그래. 난 할수 있어.

난 잘 할수 있어...

해낼꺼야.




"나 이제 수업 때문에 가봐야겠다."

"좋아하는일은 열심히라서 보기 좋다. 얼굴좀 보고 살자.

이제 문자도 자주자주 보내고."

"응. 고마워. 미주야..."




경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전 자신의 목표를 말했을때 만세를 부르던 부모님들을 떠올렸다.

다시 학교를 가기에는 늦은감이 있어 패션스쿨에 등록을 해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다.

아무생각도 하지 않게끔 바쁘게 살고 싶었다.


그의 향기가 가득한 원룸은 더이상 들어갈수 없었다.

처분하지 못한채 외로이 남겨져 있을뿐이였다.

더이상 외롭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갔을때 무엇보다 반기는건 가족들이였다.

가족의 사랑도... 또다른 사랑이겠지.




"다 부질없는것 이였어."




집을 나온것도 학교를 그만둔것도 전부다...

괜한 객기였을까?

과연 자유란 뭘까... 그건 자유가 아니였어.

만족하며 살아가는게 다 인 그저 그런 인생일 뿐이였어.

그냥 남들처럼 살아가면 그만 이였는데...

정말 평범하게 사는게 좋았는데...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걸까.

뱅글뱅글 돌기만 하던 길을 이제서야 제대로 걸어갈수 있는거야.




"누나. 누나!!"



환청이 들려오는 걸까?

누나란 소리는 이제 정말 싫다.




"누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예요."

"아... 안녕하세요."




경아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인호를 바라보았다.

검은뿔테안경의 단골손님.



"그만 두셨다면서요. 그럼 말 놔도 되잖아요."

"아... 그래. 학교는 잘 다니니?"

"잘 다닐리가 있나요. 고3인데 말이죠."

"넌 고3이 열심히 만화책 읽었잖아."

"이제 안가요. 그 책방은..."

"왜?"

"누나가 없으니까요."




이 말은 무슨뜻 일까.

바보가 아닌이상 못알아 들을리가 없었다.


경아는 딱히 할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였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그냥 학원다니면서 공부하고 지내."

"그렇구나. 공부는 어른이 되서도 해야 하는건가봐요."

"맞아. 배우는건 분명히 손해보는일이 없지. 언젠간 다 써먹을 날이 올테니까."




경아는 자신이 이런말을 하게 될 날이

올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듯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직도 연하는 싫으세요?"

".........."

"졸업할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그럼 저도 어엿한 어른이 되거든요."

"미안해. 난 이제 연하는 싫어."

"네??"

"연하는 너무 무섭거든."



---



컷-




"좋아. 이번씬 아주 훌륭했어. 연기가 신인답지 않아서 아주 좋아. 다민군."

"감사합니다."

"그럼 잠깐 휴식 들어가지. 조감독 음료수 준비한것좀 나눠주라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촬영장의 분위기.

다민은 외운 대사를 까먹지 않기 위해 중얼거리며 자신의 전용 의자에 몸을 기댔다.

늘 바쁘게 살고 있지만 이렇게 잠깐씩의 틈은 견딜수 없을만큼 괴로웠다.




"마셔."

"고마워."

"녀석. CF반응도 좋고 넌 이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거다. 잘하고 있어."

"..............."




단정한 검은머리카락과 검은 양복은 다민을 무척 어른스럽게 나타냈다.

마치 다른사람인것처럼 차분하고 무뚝뚝한 모습.

모두들 그를 얼음왕자라고 부를만큼 촬영장안 에서의 말수가 적었다.



"무슨 음악인데 쉬는시간마다 듣는거야."

"말 시키지 말아줘."

"그래. 아무튼 수고해라. 사무실에서 보자."

"..........."



인사차 방문한 한수는 다민의 등을 두드려 주며 다른사람들에게로 걸어갔다.

다민은 이어폰을 귀에 꼽고 눈을 감았다.

늘쌍 듣는 락음악 이였다.

온통 정신을 빼놓을만큼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찼다.

여자와 헤어지면 듣는 노래. 그의 징크스...

왜 하루 이틀 듣는걸로 멈출수 없는건지.



어째서...




누나 울지는 말아요.

울면 내가 미안하니까...




분명 괜찮아 질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은 심해져갔다.

마음의 고통이라... 그에게 생소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였다.



끝을 보지 못해서 이러는 거야.

사랑의 끝을 보지 못해서 이러는 거야.

그렇게 헤어지는게 아니였는데...



언제나 마음의 정리를 끝낸상태에서 헤어지는것과는 달랐다.

아직 마음이 식지 않았는데 그 마음을 접어버리는건 처음이였다.

당연히 괜찮아 질꺼라고 예상했는데 왜 아니였을까.

분명 이건 착오였다.

대단한 착오.




"나는 자유로워..."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구속받는 일따위는 하지 않아.

내 감정은 내 마음대로 할수 있어야 해.

여태까지 처럼...



내가 원하던게 과연 이런거였나.

좋아하는 머리색깔을 바꾸고 좋아하는 악세사리를 버리고

좋아하는 운동화를 버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고...

그래서 얻은자리야.

지금 이자리는 모든걸 다 버려서 얻은 자리야.



난 늘 하고 싶은대로 살아왔잖아.

이건 내가 선택한 일이야.

후회는 하지 않아.



"아니... 난 후회하고 있어..."




누나 왜 오지 않는거예요.

와서 화라도 내보라구요.

나한테 단 한번이라도 화를 낸적이 있었나요?

왜 참고만 있는거예요.

욕이라고 해달라구요.

일부로 그렇게 쓴거였는데... 정말 믿은거예요?

돌아올줄 알았어요. 매달릴줄 알았어요.

그런데 누나는 왜 다르게 행동하는 건가요.

왜 내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건가요.





역시 누나는 특이하군요.





그래서 참 많이 힘들어요. 내가...







15.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나는 점점 괜찮아 지는 걸까?

아니 반대로 물어보자.

나는 아직도 괜찮지 않은 걸까?




"괜찮을리가 없잖아."




꿈속에서 그가 나왔다.

그의 붉은머리가 인상적이였다.

그의 화려한 옷차림과 악세사리도 눈에 들어왔다.

사근사근 말투와 빙긋한 표정이 떠올랐다.

몇일동안은 괜찮았는데 왜 또 이러지...

떠올리면 안되는거잖아.

하지만 그는 마약 같은 존재야.

끊을수가 없어.

가지고 있지도 않는데 끊을수 없다니... 정말 아이러니다.




"다녀 오겠습니다."

"그래. 면접 잘 보고! 우리딸 아주 훌륭해."

"걱정하지마. 잘 할수 있을꺼야."




그는 요술쟁이 인가보다.

꼭 내가 불안해 할때마다 귓가에 속삭이거든.



'누나, 자신감을 가지세요. 할수 있어요. 잘 될꺼예요.'



---




경아가 학원 원장의 소개를 받고 찾아간 곳은 K엔터테이먼트 였다.

그곳의 수석 스타일리스트와 면접을 보고 몇일후 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을수 있었다.

몹시나 기분이 좋았는지 경아는 그날 하루종일을 기분좋게 보낼수 있었다.



"나도 여기 얼마전에 와서 정신이 없는 편이야.

굉장히 힘들꺼야. 잠도 못자고 이쪽일이 워낙 고되는거 알지?"

"그럼요. 걱정하지마세요. 저는 바쁜게 좋아요."

"경아씨는 은근히 특이한 구석이 있네."

"지금은 일에 빠져야 하거든요."

"좋아. 그 프로정신은 높이 살께. 엄살이나 피우지 말라구."

"걱정 마세요."




경아가 밝게 웃으며 건물을 나왔다.

일단 여러가지 취업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들릴때가 많았다.

늘쌍 타는 지하철을 타는 일은 요즘들어서 즐거운 일과중 하나였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는것도 즐거웠고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을 느낄때마다

'그래도 살아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니까.




"어머, 저기 이다민 아냐? 진짜 멋있지 않냐?"

"그래. 쟤 끝내주더라. 키도 크고 남자다운게 딱 내 이상형인데..."




열차가 오길 기다리는데 옆에서 시끄럽게 얘기하는 여고생들을 볼수 있었다.

경아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다민의 모습을 보았다.

지하철 광고에까지 출연하다니...

그는 날이갈수록 유명세를 타는듯 했다.


남자 향수를 들고 있는 그는 까만머리에 갈끔한 정장차림 이였다.

와이셔츠 단추를 살짝 푸르고 있었지만 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근데 되게 무뚝뚝하데. 별명이 얼음왕자 라더라."

"그래서 더 멋있지 않냐? 남자가 조잘조잘 말 많으면 싫잖아."

"맞아. 저런애랑 연애 한번 해보면 소원이 없겠다."




왜 그의 이야기를 하는데 자꾸 귀가 열리는지 모르겠다.

경아는 듣기 싫은 얘기를 들으려니 기분이 상했는지

여학생들과 조금 떨어지기위에 다른곳으로 걸어갔다.





그게 진짜 너였던 거니?

전부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 였어?

난 믿지 않았는데 그건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은 어째서 네가 남같이 보이는 걸까.

나를 속이기 위해 겉모습과 성격을 모두 감쪽같이 바꾼거였어.

까만머리가, 단정한 네 모습이, 무뚝뚝한 네 성격이

그게 너의 진짜 모습이였어.

난 가짜에 넘어간거야.

그런 가짜한테 사랑한다고 말한거야.

그런 가짜한테 내 마음을 뺏긴거야.

대체 난 왜이렇게 바보 인거지?



왜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거지.

울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곳에는 울면 안되는건데.



'울지 말아요.'



나한테 자꾸 말하지마.

나한테 자꾸 속삭이지마.

사라져. 가짜는... 환상은 사라져 버려. 제발...



---



영화가 성공적으로 흥행하고 그의 인기는 급상승 했다.

신인답지 않는 완벽한 연기력으로 언론의 찬사를 받았고

줄줄히 이어지는 CF쇄도, 영화는 물론 드라마까지 하루하루 바쁜날을 보내고 있었다.

연기를 하는건 즐거운 일인데, 다른 사람의 인생으로 살아갈때 만큼은 즐거웠는데

정작 본인 스스로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최실장이랑 미팅 약속 잊지 말라구."

"미팅? 언제 그런걸 잡은거야?"

"그걸 그새 까먹은 거냐. 요즘 정신이 없기는 하지만...

이번에 네 전속 스타일리스트를 맞게된 분이야.

얼마전까지는 신재석을 맞고 있었는데 이번 네 영화 때문에

특별히 스카웃 한거니까 멋진옷 입어봐."

"관심 없어. 그런건..."



다민의 무뚝뚝한 말에 한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예전보다 성격이 더 안좋아 졌다.

그런 성격이 물론 네 이미지로 박혀있어서 상관은 없지만

넌 그렇게 살면서 버틸수 있는 거야?"

"괜찮아. 형이나 신경써."

"이젠 개인적인 생활을 해도 말리지 않아. 이제 웬만큼 자리도 잡았고...

다시 예전처럼 여자도 만나고 머리색깔도 바꾸고 해도 된다고."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다민의 표정은 차갑다 못해 냉냉하기까지 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버리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상태인걸까.



"이번 영화만 끝나면 푹 쉬도록 해. 외국 여행을 다녀와도 좋고..."

"..............."




한수는 분명 리더쉽이 뛰어나고 남을 잘 휘어잡는 성격의 소유자 였지만

다민만큼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도통 무슨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



K엔테이먼트 회의실에 앉아있는 경아는 정신없이 올 봄의 트랜트를

분석하고 정리하고 있었다.

때마침 선경이 들어오자 자리에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앉으라고... 뭐 벌떡 일어나고 그래."

"버릇이 되서요."

"하여튼 예의도 발라. 하지만 난 경아씨가 워낙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하니까

특별히 이번일에 어시할수 있게 해주는거야."

"고맙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오늘 어떤 배우가 오는지 깜짝 놀랄껄? 경아씨 연예인은 처음 만나보지?"

"네."




선경은 서른을 약간 넘긴 상태였지만

세련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흥미로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아주 옷발이 잘 받는 스타야.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고 몸매도 좋고 얼굴도 작아서

어떤옷을 입혀놔도 다 소화낸다고..."

"아.. 그런 사람 정말 부러워요. 누군데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선경은 아주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다민씨 처음뵙죠?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최선경 이예요. 올해 고등학교 졸업하셨다면서요?

축하해요. 이럴줄 알았으면 졸업선물이라도 사오는건데."

"괜찮습니다."




다민은 선경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는걸 보니 얼굴을 잘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것 같았다.

그의 매니저와 선경은 쉴새없이 얘기를 오고가고 있었지만

굳어버린 경아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다민을 빤히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눈물이 말라버렸나보다.

널 보면 난 눈물이 쏟아질줄 알았어.

그런데 왜 아무렇지도 않을까.




"아, 참 소개가 늦었구나. 제 보조를 맏고 있는 채경아씨 예요."




다민의 얼굴이 그제서야 들어났다.








16.







정적...

분명 정적이 흘렀다.

선경은 밝은목소리로 얘기했지만 두사람의 시선은 멈춰버린듯 했다.



이렇게 만나는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걸 보면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걸 알수 있었다.



'어른이구나... 이제.'




"다민씨가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앞으로 자주 보게 될꺼야.

아주 예쁜 누나지? 성격도 참 좋으니까 잘 지내봐."

"............"




다민의 큰눈은 한번도 깜박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 시선이 경아에게로 향해 있을뿐이였다.



'날 버린건 너야. 그렇게 쳐다 보지마. 널 만나러 온게 아냐.

이건 우연이야. 너한테 매달리려고 나타난게 아니라고...

분명히 이건 신의 장난이야. 너랑 날 가지고 노는거라고...'




"어색한가보네? 그럼 컨셉상의나 하자. 내 생각에는 말이야.

영화 자체가 밝고 코믹하니까 그에 맞게 다양한 색상을 쓰는게 좋을것 같아.

다민씨는 딱딱한 역할을 많이 맞았으니까 이번에는 좀 이미지 변신을 할 필요가 있어."

"잠깐... 실례 하겠습니다."



다민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선경은 황당한 눈초리로 그가 나간자리를 바라보았고

경아는 여전히 굳은표정으로 앉아있을 뿐이였다.

그의 매니저 석영이 그를 따라 나섰다.




"아니, 이다민이 쟤는 왜 저러는거야? 나이도 어린게...

보기보다 영 버릇이 없네."

".............."

"경아씨, 우리 커피나 한잔 하자. 난 밀크커피로 뽑아줘."

"네..."




경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마 이게 꿈일리는 없겠지?



'그의 말대로 정말 연기였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진짜 이다민을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난 가짜를 사랑한것 뿐이야.'




힘이 빠진듯 축처진 걸음걸이로 자판기로 걸어가자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다민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푹 눌러쓴 모자를 벗은탓에 그의 감은눈이 경아의 눈에 들어왔다.




'허상이 아냐. 정말이야. 정말 그가 내 눈앞에 있다.'




챙그랑. 챙그랑.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자 그가 감고있는 눈을 떴다.

경아의 시선은 커피가 나오는 출구에 향하고 있었다.




"회의에 지장을 주는일은 하지 마세요."

"누나..."

"난 이제 더이상 그쪽의 누나가 아니예요."




경아가 두개의 종이컵을 들고 자리를 벗어났다.

다민은 그런 경아의 태도에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가 벗어난 자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




미팅 내내 다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선경은 그런 다민의 첫인상을 매우 못마땅하게 본건지

그가 나가버리자 마자 마음에 안든다는식의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스타라도 그렇지. 너무한거 아냐? 저런 연예인 살다살다 처음보네.

경아씨도 기분 상했지? 너무 신경쓰지마. 쟤보다 더한애들도 많으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오늘은 그만 퇴근해. 수고했어."

"수고 하셨습니다."




경아는 자동적으로 인사를 꾸벅하고 기운빠지는 몸으로 건물을 나왔다.

오늘 하루는 그렇다 치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버텨야 하는가가 문제였다.

차라리 일을 그만두는게 나을까.

그만두면 그동안 고생했던일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건데...




"얘기좀 해요."




갑자기 경아의 앞에 나타난 다민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는 아까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조금더 남자다워지고 어른스러워진 느낌...




"반가워요. 누나..."

"그래요. 저도 반가워요."

"일단 타세요."




그래. 피할수만은 없겠지.

넌 무슨말이 하고 싶은건데 헤어진 여자를 기다리는거니.

아니 네가 버린 여자를...



다민은 언제 면허를 딴건지 번듯한 자신의 차를 가지고 있었다.

경아는 그런 그의 차를 덜컥 탈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번에 확실히 정리하면 그만이야.'




그는 시동을 걸고 어디론가 향하는듯 했다.

가는 내내 두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꼭 그래야 할것처럼 아무말도 없었다.



"내리세요."

"..........."




경아가 차에서 내리자 그는 적당한곳에 주차를 하고는 말했다.




"따라와요. 지금 제가 지내는 곳이예요."

"............"




---




어린나이에 쉽게 돈과 명예를 얻어서 일까.

그는 꽤나 넓직한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었다.

경아가 살았던 원룸보다 훨씬 넓은 크기였다.



다민은 어두운 오피스텔의 조명을 켜고 조금은 헐렁한 자켓을 벗으며

막상 쉽게 발을 떼지 못하며 서있는 경아의 손을 잡아 끌었다.



"겁먹을 필요 없어요."

"난... 나는 할 얘기가 있어서 따라온거예요."

"얘기는 천천히 할수 있어요."

"아니, 할 얘기만 하고 갈께요. 그냥 거기서 들어주세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것에 대해

마음속의 동요가 시작되고 있었다.

분명 아까는 괜찮았는데...

경아는 점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경아에게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았다.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알수없는 묘한 눈빛이였다.




"난 몰랐어요. 그쪽 소속사가 여기 인지 몰랐거든요. 일부러 찾아온게 아니예요.

난 매달리려고 찾아온게 아니예요."

"누나..."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가보겠습니다."




다민은 경아의 차분한 말투에 조금은 놀라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화를내고 때려도 다 받아주려고 했었는데...

굉장히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존댓말과 겸손한 말투.

분명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이였다.

이제 완전히 모르는척 하겠다는건가.



'날 잊은거예요?'




경아는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다민을 애써 외면하며 뒤를 돌아서자

그의 기다란팔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렇게 가버리는게 어디있어요."

"원하던 일이잖아요."

"난 원하지 않아요. 누나가 가길 원하지 않아요."

"안녕히계세요."



울면안돼. 울면 지는거야.

난 지금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는거야.

내가 사랑한건 이다민이 아니야.

난 진짜를 사랑한적은 없었어.




"가지 말아요."

"..........."

"보고 싶었어요."

"..........."

"많이 보고 싶었어요."



다민은 경아의 몸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가둬버렸다.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경아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향기와 느낌에 감각이 깨어나는것 같았다.



"가지 말아요. 나랑 함께 있어줘요."

"다른사람을 찾아보세요."

"난 누나가 아니면 안돼요."

"이제 그만해요. 두번은 안속아요."



두번은 당하지 않아.

절대... 두번씩이나 너한테 말려들어가지 않아.



다민은 그런 경아의 말에 거부감을 표현한다는 눈빛을 보내더니

빠르게 그녀의 입술을 찾아 들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연기가 아니였어요.'



그의 키스가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도 나를 원하고 있다고...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거지?



다민은 급하게 경아를 벽으로 몰아붙이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분홍빛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내려와 점점 아래로 향했다.



'난 널 거부할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멈춰야해. 멈춰줘... 제발.'



"싫으면 멈출수도 있어요."

"멈추지마. 나쁜자식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의 입술과 손짓에 반응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미치도록 그리웠다고 표현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멈출수 없어.

그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니까...



"더 말해봐요. 더 화를 내달라구요."

"나쁜놈. 나쁜자식. 넌 죽어도 마땅해."

"왜 그걸 이제 얘기하는 거예요."

"흑... 흑....흑흑..."

"울지 말아요. 울면 벌을 줄꺼예요."



---




난 왜 이렇게 사는걸까.

한 남자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릴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나뿐일꺼야.

다 거짓일 뿐인데 왜 그를 받아들인거지.

나는 바보야. 어리석은 바보... 멍청이.



서로를 미치도록 원하며 몇번의 관계를 가진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민은 새근새근 숨을 쉬며 깊은잠에 빠져있었다.

경아는 자신의 몸에 새겨있는 울긋불긋한 마크를 보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널 만난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아는 자꾸만 멍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살짝 흔들며 정신을 차리더니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를 벗어나려고 한 순간이였다.

뒤에서 갑작스럽게 자신을 끌어안는 그를 느낄수 있었다.

그는 경아의 하얀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가지말아요."

"............"

"난 아직 진행중이예요."

"무슨소리야."

"아직... 누나를 사랑해요."




인간이란 참 바보같은 동물이다.

알면서... 거짓인걸 알면서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걸까.




"다시 시작해요. 다시 내 여자친구가 되어주세요."







17.







"날 괴롭히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건 곤란해요. 나도 어쩔수가 없어요."

"제발... 다민아. 내가 이렇게 부탁할께. 나 잘 살고 있어.

이제 그만해. 너한테 언제까지 휘둘리며 살수는 없어.

나도 사람이야. 감정이 있는 동물이라고... 너의 연기에 언제까지 속아넘수는 없어."

"누나는 참 바보 같군요."




경아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다민이 입을 열었다.




"부탁해야할 사람은 누나가 아니라 저예요.

누나는 지금 저한테 부탁할 입장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누나는 지금 저한테 화를 내야 정상이라구요.

궁금한게 많을텐데 아무것도 묻지를 않아요.

화나고 힘든일이 많을텐데 결코 내색하지 않아요.

왜 늘 솔직하지 못한거예요. 왜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지 않는거예요."

"난 네가 아니야. 너처럼 언제나 하고 싶은대로 할수 없어.

난 항상 여유로운 너랑은 달라."

"내가 언제나 여유로울꺼라고 생각하는건 누나의 고정관념 일뿐이예요.

그 틀에박힌 사고방식은 여전하군요.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짓고..."




마치 예전의 모습을 보는것만 같았다.

다민은 자신의 생각을 주절주절 경아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대체 어느게 진짜 이다민인지 알길이 없었다.

지금도 혹시 연기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기다렸어요. 누나를 내가 기다렸어요."

"거짓말 하지마. 너 같은애가 날 기다릴리 없어."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아니, 한번 거짓말을 한적이 있어요.

그때 난 누나에게 거짓이였다고, 연기였다고 말했지만

사실 난 연기를 한적이 없었어요. 늘 진심이였어요."

"그럼 왜 그렇게 쓴건데... 왜...."




갑자기 눈물이 덜컥 나려고 하자 경아가 고개를 떨궈버렸다.

다민은 그런 경아를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겠어요. 왜 그런건지... 처음으로 후회했어요."

"............"

"난 누나가 나한테 올줄 알았어요. 조건 따위는 지키지 않을줄 알았어요."




그의 말소리가 작아지더니 이내 그녀의 귓가에 다시 들려왔다.




"핸드폰 번호도 바꾸지 않았어요. 늘 기다렸어요."

"네가 오면 되는거였어."

"난 갈수 없어요. 왜 갈수 없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누나한테 아마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나봐요."

"난 믿기지가 않아. 너란 존재 자체가 이제는 다 거짓으로 보여."

"난 누구보다 진실되요. 단 한번도 누나를 사랑하는 제 마음에 거짓은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내가 부탁하는 거예요."

"하... 정말... 너란 남자는..."




경아는 눈물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였다.

헤어진 남자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건 반겨야 하는 소리일까?



널 거부할수는 없어.

하지만 받아들일수도 없어.

넌 너무 위험해.

나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야.

바람은 싫어.

또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르거든.



---



그는 끝끝내 무너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버린 남자의 담담한 태도...

적어도 다시 사귀자고 부탁하는 입장은 그렇게 당당해서는 안돼.

그렇게 태연해서는 안되는 거야.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그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목소리란...



'다시 만나요. 다시 내 여자친구가 되세요.'



그렇게 쉽게 말할수 있는걸까.

참 너는 간단하다.

나는 이렇게 복잡한데...



경아는 오랜만에 들린 자신의 원룸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분명 그를 거부할수만은 없을것 같앗다.


마음을 조종할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내가 흔들리지 않게... 더이상 상처받기는 싫어요.

알면서도 넘어가는 내가 싫어요.

제발... 그를 사랑하지 않게 해주세요.

난 그의 자유로움이 싫어요.

그의 자유로움에 휘둘리는게 싫어요.




살짝 열어놓은 문틈사이로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시원한 느낌이 들었지만 잠깐뿐이였다.

잠깐의 시원함...



또 금새 사라져 버릴꺼니?

그때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겠지.

누나가 질렸다고... 싫어졌다고...

네 사랑은 항상 가벼울 뿐이야.



---



"얼마나 쉴껀데..."

"형이 최대한 허가하는 만큼."

"어째 위태위태 하더니 이럴줄 알았다."




늘 일에만 죽도록 매달리다가 갑자기 덜컥 쉬겠다고 선언하는 터에

한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그의 말뜻을 알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민의 얼굴이 몇일전 보다는 생기있어 보였다.




"일단 영화는 찍고 쉬도록해. 1년동안 어학연수를 다녀와도 좋고..."

"아냐. 그냥 쉴꺼야. 하고 싶은거 실컷 하면서..."



다민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한수가

놀란 기색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민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먼저 갈께. 갈때가 있어..."




---




다민의 겉모습은 고등학교 시절과 똑같아 보였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도 화려한 옷차림도 빨간 운동화도...



'난 믿어요. 누나가 있을꺼라고...'



다민은 좀더 속도를 밟으며 경아의 원룸으로 향했다.

한발짝 한발짝 다가설수록 이상하리 만큼 생소한 감정이 들었다.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사랑하고 사랑에 빠지는 그런 자신의 모습으로...




"쿡, 내 말은 절대 안듣는군요."



살짝 열려있는 문틈을 보며 다민이 피식 웃었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고요하기만 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역시 누나는 참 특이해요."



조금 휭한것 같은 원룸을 한번 둘러보며 잠들어 있는 경아를 내려다 보았다.

그때처럼 식탁에 자신의 팔을 배게삼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했잖아요. 방심한 거라구요."

"네가 올것 같았어. 이러고 있으면 네가 나타날것 같았어."

"자는척 했군요. 나를 속였어요."




경아의 고개를 서서히 위로 올라가더니 다민의 얼굴에서 멈췄다.

그는 빙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머리..."

"아, 머리는 어쩔수가 없었어요. 당장 다음주부터 영화 첫촬영이라..."

"어쩐지 이상하더라."

"예리해졌어요. 스타일리스트 다워요."




다민이 피식 웃으며 가발을 벗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났다.

경아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다민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꿈인걸까...

단지 그가 올것 같은 예감 이였을뿐인데...




"집에 물건이라고는 찾아볼수가 없네요. 언제 이사 간거예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간거겠죠? 하지만 이제 누나의 원룸은 필요없어요.

내 오피스텔이 있으니까..."

".............."

"누나가 이렇게 여기서 날 기다린건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결론은 딱 하나 같군요... 누나 생각은 어때요?"




그는 예전처럼 말이 많았다.

얼음왕자라는 별명이 무색할만큼...



다민은 확답을 얻으러 경아를 찾아온듯 했다.

자신감에 가득찬 그의 표정은 누구보다 이다민 다웠다.

늘 하고싶은대로... 원하는대로 다 이루고 사는...



난 널 괴롭혀 줄꺼야.

네가 원하는걸 주지 않아.




"난 이제 네 여자친구가 아냐."

"알아요. 오늘부터 다시 내 여자친구예요."

"네 마음대로 그렇게 말하지마."

"싫다는 소린가요. 아직도 내 말을 못믿는거예요?"

"아니, 네 말은 믿어... 믿지만 널 두번은 사랑안해."

"어째서 날 사랑하지 않겠다는 건데요."




다민의 밝은 목소리가 그제서야 가라앉았다.

경아는 가만히 식탁유리에 비치는 그의 형상을 바라보고 있을뿐이였다.




"난 바람은 싫어..."

"연애감정은 언제나 끝이 있는 법이예요.

그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수 있는일 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넌 그 끝을 보면 나랑 끝내겠구나..."

"............."




다민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경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렇게 말하는 네가 싫어. 넌 항상 이별을 예고하는것 같아.

그런 너랑은 사랑하고 싶지 않아."

"난 이별을 예고한적 없어요."

"이제 너 같은 남자는 버티기 힘들어. 사양할께."

"............"




경아의 말에 다민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표정변화는 없었지만 분명 미세하게나마 화가난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포커페이스는 여전했다.




나의 사랑을 원한다면 넌 좀더 굽히고 들어올줄 알아야해.

마치 내가 너한테 갈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은 고쳐.

나는 너한테 가지 않아.



다민은 몸을 아래로 숙여 경아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대었다.

잠시동안 말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맞췄다.



이러지마...

밀어낼수 없다고 했잖아.



"날 거부하지 못하잖아요. 솔직하지 못해요."

"............."

"날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못한다는건 바보같은 행동이예요."

"바보 같은 행동이라도 좋아. 널 사랑하는것 보다는 나아."




다민은 이해할수 없는 눈빛으로 경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달라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18.






"결국은 싫다는 소리네요."

"그래."

"사랑하는데 사랑할수 없다..."

"그래."

"결국은 날 사랑할꺼잖아요."




다민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지만 표정은 달랐다.

뭔가 조급해 하면서도 답답해 하는듯 했다.




"노력할꺼야. 나 노력할꺼야. 그러니까 너도 이제 나타나지마."

"괜한 힘 빼지 말아요."

"정말이야. 정말 나 이제 널 잊을꺼야."

"난 이기적 이예요. 누나 마음보다는 내 감정이 중요해요.

난 누나를 놓치지 않을꺼예요. 그러니 이제 그만해요."

"싫어. 나도 싫다고 할수 있어. 너만 싫다고 할수 있게 아냐.

나도 네가 싫다고 말할수 있어..."




경아가 다민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는 경아의 어깨를 세게 잡으며 소리쳤다.



"내가 싫은게 아니잖아요!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어렵게 생각하는 거냐구요."

"너처럼 쉽게 생각할수 없는거야. 난 정상이라구."

"그래도 이제 놓아줄수 없어요. 누나는 날 사랑해요."



그는 확인이라고 시킬것처럼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경아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그의 어깨를 밀쳐냈다.




"봐! 나도 할수 있어. 그니까 너도 멈춰줘. 넌 잘할수 있잖아..."

"안된다구요! 그게 진작에 됐으면 다시 찾아오지도 않았어요..."

"뭐??"

"내 자유를 누군가가 구속해 버렸으니까..."

"............"




구속이라... 그의 자유를 구속할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말인가?

경아는 믿겨지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지독한 포커페이스가 무너져 내렸다.

늘 여유로운 표정과 말투가 사라졌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이제 그럴수 없다구요. 그러니까... 어쩔수 없어요."

"제대로 잘 얘기해봐."

"난 이제 누나가 없으면 버틸수가 없어요."

"..............."

"끝을 보지 못해서 이런건지는 몰라요. 하지만 확신은 있어요.

내 마음에 확신은 있어요. 아마 오랫동안 누나를 사랑할꺼라는거..."

"거짓말 하지마... 또 다 연기였다고 할려는 거지.

너 놀리는거잖아. 네가 나를 한두번 속였니?"




알수 없는 감정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분이 기쁜건지 슬픈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사랑해요. 두번다시 거짓말은 하지 않겠어요. 맹세할께요."

".............."

"그러니 날 받아들여요. 결국은 넘어 올꺼잖아요."

"난 너의 이런점이 정말 싫어... 그런데..."

"그런데...?"




그가 경아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눈빛을 반짝였다.




"미치도록 좋아."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다니... 유머겠죠?"

"다시는 가지마. 내가 버릴때까지 가지마."

"가지 않을께요. 약속할수 있어요."




바람은 분명 잡아지지 않는건데...

나는 오늘 바람을 손에 넣었다.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바람을 내것으로 만들었다.



---




"가지마... 가지마..."




경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허공에 손짓 했다.

다민이 그런 경아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가지 않아요."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눈물이 날것 같다.



꿈속에서 네가 나왔어. 넌 나에게 자유롭다고 말했어.

어디든 갈수 있다고... 난 중요하지 않다고...

너는 유유히 손을 흔들며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난 이제 어떤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 풋..."




자신을 꼭 안아주는 다민의 행동에 경아가 피식 웃어버렸다.

결국은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일까.




"의심하는 마음은 이제 버리세요.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건 좋지 못한 태도예요.

그런 꿈은 날 믿지 못하니까 꾸는 거라구요."

"난 그런꿈 이라는걸 설명한적이 없는데?"

"가지마 라는 소리가 나오는 꿈이야 뻔하죠."

"넌 나한테 그런 말 자격 없어. 날 버린 주제에..."

"이런, 그렇게 말하면 제가 할말이 없잖아요."




다민이 경아가 한말에 반감을 표시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헤어져 지낸지 1년이 넘은 시간 이였지만 둘의 사이에는 전혀 어색함이 보이지 않았다.

헤어진 시간동안 정말 서로만을 애타게 그리며 살았던 것일까.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난 정말 평생 슬플줄 알았어. 세월이란 무서운 거야."

"난 내내 슬펐다구요."

"그건 너 답지 않은 행동이야."

"물론 고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뎌지기 마련이예요.

하지만 근본적인 아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상처가 생긴거예요.

상처는 내 마음속에 자국으로 깊이 새겨지죠.

난 기다리는 내내 잊지 않았어요.

분명 누나가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건 신이 내린 운명이예요."

"말만 번지르르 하지. 밥이나 먹자."

"가만히 있어봐요."




경아가 침대속을 빠져나가려 하자 다민이 그녀의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벗은몸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옷... 입혀드릴께요."

"됐어. 이 변태야."

"나는 변태가 아니예요. 남자친구 라구요."

"넌 플레기 기질이 너무 철철 넘쳐."

"난 기질이 아니라 천성이예요. 태어났을때부터 가지고 있는..."




경아는 오랫만에 화가 끌어올랐지만 간신히 참으며 그를 거부하는 행동을 보였다.

궁금한것 투성이였다.

1년 내내 그는 정말 내 생각만을 하며 지내 왔을까?

다른 여자는? 다른 여자와의 잠자리는? 다른 여자와의 연애는 어땠을까...

이제와서 이런생각을 하는건 무척이나 우스운 일이지만 신경쓰이는걸.




---




선경의 어시를 하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민과 마주칠일이 많았다.

그는 새 영화 때문에 지내는 오피스텔과 촬영장 말고는 늘 경아와 함께였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관심 없어요."

"너 그러다 스캔들 터진다."

"관심 없어요."

"넌 괜찮지만 너네 사장님은 괜찮지 않을텐데... 한창 뜨는 새내기 스타가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그런 얘기는 분명 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경아는 그제서야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촬영장 구석에 경아를 데려가 다민이 집요하게

그녀의 목덜미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분명 자국이 남을텐데...




"내 전속 코디네이터로 들어와요."

"왜?"

"같이 있고 싶으니까요."

"넌 늘 네 생각대로 결론만 얘기하더라. 내 생각은 묻지도 않니?"

"쿡, 맞아요. 오늘도 결론만 얘기하는거예요. 사장님에게도 허가를 받은 일이예요.

최실장님은 아마 누나에게 그 일을 넘겨주고 다른 연예인에게로 갈꺼에요."

"넌 정말 무서운 놈이야."

"무서운게 아니라 준비성이 좋은거죠. 누나는 결국 내 뜻대로 하게 되있으니까..."




그가 빙긋이 웃으며 경아의 입술에 키스했다.

좋은기분이 가득해야 할것 같은데 어째서 좋지 못할까.

분명 내가 잡은 바람이였지만 역시나 휘두르는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넌 날 이리저리 흔들어.

내껀데 너무 막나간다고...



---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일을하고, 같이 밥을 먹고, 늘 함께였다.

촬영장에서의 그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경아에게만은 달랐다.

여유로운 미소와 말투는 여전했다.

누가 그를 얼음왕자라고 했던가.. 조잘조잘 말도 참 많다.




"내 핸드폰은 아무것도 볼께 없어요. 재미있는 일도 나오지 않아요.

벌써 누나가 그 핸드폰을 바라본지 5분이 지났어요.

나에게는 전혀 눈짓을 주지 않는군요."

"유명한 사람들이 많아."

"일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예요."

"여자도 많아."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요."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경아에게 다민이 미소지으며

핸드폰을 빼앗아 가듯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가르쳐 주고 후회 하기는 처음이예요."

"............."

"날 의심하고 오해하지는 말아요. 난 현재 여자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알았어."

"벌을 줘야 할것 같아요. 날 의심하는 표정... 싫어요."




다민은 직업적 특성상 예쁜 여자연예인을 만날기회도 많았고

그에게 유혹하는 여자들은 수없이 많았다.

경아는 당연히 불안한 눈치였지만 다민은 그런 경아를 이해하지 못할뿐이였다.

다민이 경아의 손을 잡아끌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뭐하자는 거야?"

"벌을 주려구요."



밖은 사람들로 시끌벅쩍하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는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경아를 끌어안았다.

입술을 맞추고 그녀의 브라우스 단추 하나하나를 끌르고 있었다.

경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다민이 말했다.



"스릴 있지 않아요?"






19.






그녀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거추장한 물체를 저리 치워버리고는

급한듯 입술을 부딪히며 흥분한듯 그녀의 몸에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잘못했어. 안그럴께. 여기서는 싫어."

"하아. 의심하는 버릇은 고치라구요."

"알았어. 미안해. 그만..."

"아쉬워요. 사과하지 않을줄 알았는데..."

"변태짓은 집에가도 얼마든지 할수 있잖아."

"쿡, 맞는 말이예요."




다민이 금새 빙긋 웃으며 떨어진 옷가지들을 입혀주며 말했다.




"그때처럼 또 놀러가고 싶지 않아요?"

"아니, 난 절대 가기 싫어. 안좋은 추억이야."

"뭐예요. 혼난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소릴 하는거죠?"

"헉... 알았어. 잘못했어."

"누나는 또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런 표정은 절대 잘못했다는 얼굴이 아니잖아요."




경아의 붉어진 얼굴에 살짝 입맞추며 그는 유유히 피팅룸을 빠져나갔다.

벙찐 얼굴로 다민이 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을때 그가 다시 들어왔다.



"곧 놀러갈수 있을꺼예요."

"............."

"그땐 남겨두고 가지 않을께요. 겁먹지 말아요."

"응..."



---



경아는 황당한 표정으로 다민에게 말했다.

서울 톨게이트를 막 지나고 있을때였다.




"어디 가는거야?"

"나는 누구처럼 약속을 어기지 않아요."

"또 그소리..."




영화촬영이 끝나고 그가 그토록 원하는 휴식을 얻게 되었을때

경아는 다민과 한 약속을 깜박잊고 선경을 돕기위해 방송국으로 가버린것이였다.

그 일을 몇일동안 내내 울궈먹으며 말하는 다민의 행동에

경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을수 있었다.




"놀러가자고 말했잖아요."

"오늘 갈꺼라고 단 한마디도 한적이 없어. 너는 항상 네 마음대로야."

"그래서 싫은가요?"

"아니."

"그럼 솔직하게 표현하는게 어때요? 좋잖아요... 좋으면서."




다민의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경아는 당했다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휘둘릴수 밖에 없지?




"너는 여태까지 늘 네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해.

날 사랑한다면서 나의 의견은 결코 중요하지 않아. 네가 결론나는 대로 행동할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미워. 미워 죽겠어."

"나도 누나가 미워요. 내 자유를 뺏어가버린 누나가... 다시 되돌려줘요."




다민의 포커페이스는 여전했지만 요즘들어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억울한 눈빛으로 잠깐이나마 경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운전했다.




"싫어. 절대 안줄꺼야. 그것만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어야지."

"쿡, 당했네요. 그러면 나한테 너무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말라구요.

적어도 내가 하는 행동이 다 좋으면서 싫은척 하잖아요."

"싫은척 한적 없어!"

"거봐요. 지금도 싫은척 하잖아요. 이제 이런말 하는것도 지겨워요.

남자친구에게 늘 거짓말만 하잖아요. 솔직해 지세요."

"너는 늘 솔직하니?"

"네. 그렇습니다."




경아는 벙찐표정으로 다민을 바라보았다.

살다 살다 이렇게 말빨이 쎈 남자는 처음이였다.




"좋으면 좀 더 표현을 하라구요.

언제나 늘 내가 해주길 바라잖아요.

연애는 주고 받는거지 한쪽의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예요.

나는 늘 주고 있지만 누나는 먼저 주지 않아요."

"............."

"날 사랑하잖아요. 반했으면 표현하세요."

"알았어."




경아는 그의 말이 맞는것처럼 수긍하듯 대답을 하자

다민이 조금은 놀란듯 경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아가 갑자기 씨익 웃더니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자, 됐지? 나도 먼저 할줄 알아. 안한것 뿐이지."

"이런곳에서는 먼저 해주지 말라구요. 잘하면 둘다 황천길 가게 생겼으니까..."



다민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자 경아가 입술을 삐쭉이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이겨야겠어. 난 너한테 말로 이기는걸 포기했으니까."

"쿡... 쿡쿡..."

"웃지마. 무슨 남자가 입맛 살았니?"

"저의 가장 큰 매력이죠."

"그것도 선천적인거니? 아니면 후천적?"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누나를 만나서 더 그렇게 된것 같아요.

누나는 내가 말이 많아지게 행동하거든요. 그러니 후천적이라는 답이 맞겠어요."



또 졌다.

경아는 다민의 말에 어떤말로 받아쳐야 할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분명 말로는 대항하기 힘든 상대이니...

생각하다 치진듯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네 얼굴들고 어디가기는 쉽지 않을텐데 생각해 둔곳이라도 있어?"

"나는 어디든 갈수 있어요. 나한테 어려운 일은 없어요.."

"이제 자유롭지 못하잖아."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건 당연한거예요.

그런걸 신경쓴다면 어떤곳도 갈수 없어요."

"그래서 가고 싶은곳이 어딘데?"

"비밀이예요."




궁금한 마음에 운전을 하는 다민을 귀찮게 하며 물어보고 있을때

경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어쩔수 없는 표정으로 폴더를 열자 그녀의 엄마가 시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어떻데 아버지 생일도 잊을수가 있니?

대체 정신이 있는거야? 일가친척들 다 와있는데. 냉큼 들어와.]




"맙소사..."

"그 맙소사 라는 소리는 어째서 하는거죠?"

"차 돌려."



---




다민은 크게 유감을 표하지 않고 순순히 경아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경아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말 어쩔수 없는듯 차에서 내렸다.

사랑을 때문에 가족을 외면할수는 없는 일이였다.




"왜 싫은 소리 안하니?"

"나중에 쌓아뒀다 한꺼번에 풀려구요."

"....??...."

"침대에서 보자구요."




다민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경아는 귀까지 빨게져 그를 외면하며 집으로 들어가려 하자

다민이 그녀의 몸을 끌어 당기며 자신의 품에 가뒀다.




"누나의 아버지는 왜 오늘 태어난걸까요."

"그건 할머니 마음이였겠지."

"쿡, 싫은소리 안하려고 했는데 싫은소리가 하고 싶어져요."

"어떤 싫은소리?"

"보내고 싶지 않아요. 꼭 가야 하는건가요? 보여주고 싶은곳이 있었는데..."

"............."




보여주고 싶은곳이라.

분명 서울까지 벗어났었는데 다시 돌아오는 건 맥빠지는 일이였다.

경아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




"언제든지 갈수 있잖아. 영화촬영도 끝났고..."

"맞아요. 오늘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것도 아니죠.

그런데 왜 오늘 가고 싶은걸까요. 나는..."

"어딘데? 나도 가르쳐줘. 궁금하단 말이야."

"비밀 이라니까요?"

"됐어. 끝까지 치사하게 나오네. 맨날 비밀이야. 비밀은..."

"내일 가요. 내일 아침 일찍 올께요."

"응."




경아가 그의 품안에서 벗어났다.

왠지 모르게 휭한 느낌이 가득했다.

이렇게 헤어지는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민아..."

"네?"

"아니야. 아니야... 잘 들어가. 운전 조심하고."

"늘 조심하고 있다구요."

"응."



---



경아의 집은 시끌벌쩍 정신없는 분위기로 가득차 있었다.

명절때나 보는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라서 그런걸까 그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때마침 경아의 등장으로 더욱 분위기는 고조 되는듯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일 때문에 많이 바쁘다며? 스타일리스트? 연예인도 많이 보겠네?"

"아... 네."



여전이 그렇게 돌려보낸 다민이 신경쓰이는듯 경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연예인을 상대하는 직업이다보니 자신보다 어린 친척동생들의

궁금한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경아언니, 이다민 코디네이터라며? 진짜야?"

"응. 그건 왜?"

"우와, 언니 나 싸인 좀 받아줘. 우리 반 애들 이다민 이면 아주 미친다니까?"




여고생이 남자스타를 좋아하는건 아주 당연한 일이였다.

친척동생인 연희는 경아가 그렇게 해주겠다는 말에 뛸듯이 좋아하며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는듯 했다.



'사귄다고 하면 더 난리 나겠네.'



예비스타가 진짜 스타가 될줄이야.

그때는 막연히 먼 미래라고만 생각할 뿐이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멀고 먼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나의 남자친구이다.



"보고싶어..."



그렇게 보내는게 아니였는데.

왜 이렇게 아쉬운 기분이 들지?



경아는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지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폴더를 열어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그새 보고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치, 내가 보고싶어서 전화한줄 알아? 어디야?"

[또 거짓말을 하는 군요. 그럼 걱정되서?]

"거... 걱정은 무슨. 잘 들어갔어?"

[말을 더듬는건 분명 거짓말을 해서 겠죠? 저는 잘 들어가지 못했어요.]

"왜?"

[지금은 빠져 나올수 있죠? 누나 집으로 다시 가고 있는 중이예요.]

"뭐??"




경아가 놀란듯 말했지만 입은 저절로 웃고 있었다.

안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가족들 한테는 미안함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지금은 사랑이 우선...



[직진해서 우회전만 하면 누나 집이 나와요.]

"알았어. 지금 내가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께."

[쿡, 알았어요.]

"나 사실 보고싶었어. 그래서 전화 한거야. 네가 다시 와줘서 너무 기뻐."

[갑자기 왜그래요? 솔직한척 하는거예요?]

"너 내가 큰맘 먹고 이러는거 몰라?"

[알았어요. 칭찬으로 선물을 드릴께요.]

"쿡, 어떤선물?"

[사랑해 드릴께요. 영원히....]

"치, 말만... 얼굴이나 보면서 그런얘기 해줘. 빨리와."




다민의 다정한 목소리에 경아는 뿌듯하게 미소지으며 말하자

대답해야 하는 다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왜 아무말이 없어?"




갑자기 핸드폰 넘어로 빵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이익-

쾅-




쿵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연결이 끊어졌다.





"다민아. 다민아...?"






20.






"이다민... 왜그래? 왜 말이 없어?"





경아는 놀란듯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한번 말했다.

심장박동수가 급속도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야아... 무슨소리야? 응?"




빨리 아무일도 아니라고 말해.

제발... 내 심장이 떨리는걸 멈추게 해줘.

날 안심시켜줘. 다민아...




경아는 놀란 심장으로 끊어진 핸드폰을 붙잡고 다민의 이름을 부를뿐이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발... 제발."



경아가 방을 빠져나와 급히 집을 뛰쳐나가자 동생들이 왜 그러냐는듯

그녀를 따라 나왔지만 경아는 마치 정신이 나간것처럼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한창 정신없이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을때

구급차 여러대가 눈앞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경아는 망설임없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빠르게 지나가는 하얀색차를 쫒아 달렸다.

그리고는 얼마가지 않아 차가 멈춰선 곳에서 그녀의 몸도 멈춰섰다.

익숙하게 들어오는 차량 한대에 눈을 깜박였다.

그와 어울리는 빨간색 승용차.




"다... 민아..."




경아는 계속 눈을 깜박깜박 거렸다.

그의 빨간색 자동차는 처참한 몰골로 찌그러져 있었다.

고개를 살짝 흔들며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변한것이 없었다.




"이봐요! 사고현장에는 들어갈수 없습니다."

"들어가게 해주세요. 다민아!!!! 이다민!!!"




경찰이 들어가려는 그녀를 저지하자 경아가 울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에게 다가갈수 없다.

피투성이가 된채로 하얀색 차로 옮겨지는 그에게 다가갈수 없었다.




"흑... 흑... 다민아. 아저씨. 제발 가게해주세요."

"이다민씨 보호자 되십니까?"

"흐흐흑... 흑... 다민아..."




경찰들이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의 교통사고라서 그런지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

몇분이 채 되지 않아 취재진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민은 병원에 옮겨진 상태였지만 현장은 요란하기 그지 없었다.

경아는 제정신이 아닌듯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가만히 운다고 해결될일은 결코 아니였다.




"어머, 이다민이 사고 났다고? 웬일이야? 어쩌다?"

"저 큰 트럭이 글쎄 음주운전을 했다지 뭐야? 중앙선 침범을 하더래."

"어쩌면 좋아? 죽은거 아냐?"




마치 남일 인것처럼 말하는 그들을 보며 경하는 눈물을 닦고 급히 택시를 탔다.



남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죽는다는 소리하지마.

제발... 제발... 다민아.




"흑.... 흑...흑흑..."






심장이 너무나 세차게 뛰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나를 미치게 하는것 같다.

온 몸이 뜨겁게 변해가는게 느껴진다.

눈물이 멈춰지지가 않아.














[오늘 저녁 8시경 영화배우 이다민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어제 매우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드라마와 스크린을 오가며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다민씨가 어제 저녁 음주운전으로

중앙선을 침범해 오는 트럭과 부딪히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세한 상황은 이진석 기자가 알아보겠습니다.]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의 팬들이 그를 위해 거리에 국화꽃을

한송이씩 올려놓는 장면입니다.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현장에서 바로 숨졌습니다. 사망입니다.'




"거짓말 하지마."



경아가 눈을 떳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쿡, 또 꿈을 꾼건가요. 내가 이번에는 거짓말을 했어요?"

"응. 넌 거짓말을 했어."



다민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정신없는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

"꿈속에서 내가 어떤거짓말을 했는데요?"

"네가 날 두번 버렸거든..."

"한번 버린것도 이렇게 벌받고 있는데 두번은 분명 무리가 있죠."



맞아. 넌 날 두번 버리지 못해.

너의 자유는 내꺼야.

네 마음대로 갈수 없어.

죽는것도 그렇게 되지 않아.



경아는 차마 꿈을 꾼 얘기를 하지 않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다민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향기에 눈물이 날것 같다.



"넌 살아 있어."

"쿡, 당연한걸 왜 얘기하는 거예요."

"아냐. 우리 놀러가기로 했잖아. 어디 가는건데?"

"따라와요."




다민이 경아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새하얀 공간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하얗고 하얀 공간을 지나 아늑하고 따듯한 느낌이 나는 저택에 도착했다.



"신기한걸? 너 방금 어떻게 한거야?"

"마법을 부린거죠. 난 사실 마법사 거든요."

"장난 하지마. 차라리 외계인이라고 하는게 훨씬 어울려."

"내가 요즘 돈을 많이 벌거든요. 그래서 누나를 위한 깜짝 이벤트."

"응? 이벤트?"



경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말하자 다민이 말했다.




"우리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아요.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아요.

상쾌한 바람도 멈추지 않고 부는곳이예요."

"멈추지 않는 바람?... 좋은곳이구나."

"이곳의 바람은 나 처럼 누나를 떠나지 않을꺼예요."

"응. 떠나지 않아."



경아가 활짝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가 준비한 깜짝 선물은 둘만이 살수 있는 아늑한 저택이였다.

너무나도 큰 감동 이였다.

넌 정말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를 가졌구나.



"날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이제 난 누나를 벗어나지 못해요. 약속 같은건 굳이 할 필요 없다구요."

"그래도... 약속해."

"알겠어요. 약속할께요."



다민이 웃으며 경아와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경아는 그제서야 안심이 된건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오래오래 영원히 함께 살수 있는거야.



"어디가? 다민아... 이다민."



점점 흐릿해져가는 다민의 모습에 경아가 그에게 달려갔지만

그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아늑한 저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새하얀 공간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어디간거니... 다민아. 날 버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약속했잖아. 어디 간거야... 돌아와."




경아가 온통 새하얀 공간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다민의 이름을 불렀다.




"다민아.. 흑... 흑흑... 다민아. 가지마. 가지말란 말이야."




난 너 없으면 안돼.

이제는 네가 없으면 버틸수 없단 말이야.

네가 내 눈에서 사라지는걸 눈뜨고 바라볼수 없다고.

바보야. 빨리 돌아와.

난 알아. 넌 나한테 돌아올수 밖에 없다는거...



제발 날 버리지마.

부탁이야.




정신이 흐릿해져 온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수가 없어.

이대로 죽는게 차라리 덜 아플것 같아.



'누나,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할 시간이예요.'



"다민아... 너 어디 있어? 응? 말해봐."



'누나,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할 시간이예요.'



"지금 나 꿈꾸고 있는거야?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 빨리... 응?"



'누나,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할 시간이예요.'



---



번쩍-

경아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잠결에 흘린 눈물을 소매로 쓰윽 닦아냈다.



"난 어떤게 꿈인지 현실인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경아가 힘이 빠지는듯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널 만난것 자체가 꿈인걸까... 아니면 지금도 내가 꿈을 꾸는걸까."



경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똑똑하고 노크를 하며 그의 동생

경진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들어왔다.



"언니, 우편물 왔어. 책상에 올려놓고 갈께."

"응."

"계속 잠만 자는건 이제 그만해. 그건 현실도피야."




현실도피...






21.






네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말이 뭔줄 아니?

난 그걸 잊을수 없어.

절대 죽을때까지 잊지 못해.



'사랑해 드릴께요. 영원히....'



바보야. 영원히 사랑해 준다고 그랬잖아.

넌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니.

그렇게 가버리면 내가 또 용서해줄것 같아?

장난 하지마. 넌 나한테 자유를 뺏겼어.

네 마음대로 그렇게 함부로 바람처럼 사라지지 마.




경아는 움직이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고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눈만 감으면 이상하게 그의 모습이 보인다.

참 이상한 증상이다.

그래서 난 그토록 눈을 감고 있었던 걸까.



부시럭-



우편물에 들어있는 주소와 열쇠를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보내는 사람이 아이러니 하게도 [이다민] 이라고 써있었다.

누군가의 장난인것일까...



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내린곳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마을 이였다.

공기도 좋고 푸른 나무들도 눈에 띄는 아름다운 곳...

무엇보다 상쾌하게 부는 바람이 기분을 좋게 해주고 있었다.



'환영해요. 어서오세요.'




느릿한 발걸음으로 어느정도 걸어가자 하얀지붕의 저택의 보였다.

메모에 적혀있는 그림과 아주 조금 흡사함을 나타냈다.

경아는 조금씩 속도를 높여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뛰어갔다.


열쇠를 꼽고 돌리자 찰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리 만치 가슴이 벅차 올랐다.



"맙소사..."



경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저택안을 두리번 거렸다.

어렴풋이 기억에 나는 꿈의 일부와 흡사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경아가 바닥에 주저 앉았다.



"정말 너였던 거야? 네가 정말 나한테 보여주고 싶었던게 이거였어?"



들어주는 이도 없는데 경아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하게 다민이 들어주고 있을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바보야? 왜 이런걸 나한테 보여주는 건데? 가버려 놓고 왜 이걸 나한테 보여주는건데?

나혼자 이곳에서 네 생각하면서 평생 살라고? 대체 날 더러 어쩌라는 거야."



경아가 화가난듯 허공을 향해 외쳤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가득 고이더니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아요.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아요.

상쾌한 바람도 멈추지 않고 부는곳이예요.'



"흑... 흑흑... 나쁜자식... 흐흐흑... 흑..."




너 지금 날 보고 있으면 당장 나타나. 숨어 있지 말고 나타나...

왜 날 그렇게 떠나야 했는지 말이라도 해봐.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게 부탁했는데.

바람처럼 사라지지 말라고 간절히 빌었는데...



머리가 띵해올만큼 펑펑 울며 정신을 차리자 이미 해가 지고 난후였다.

주저 앉은 몸을 일으키며 어두운 저택안의 불을 켰다.

느릿한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때 눈에 띄는 서류봉투를 발견할수 있었다.

봉투에는 하얀메모 한장과 빨간 편지봉투가 들어있었다.



[이다민씨의 재산을 정리하던중 발견된것이라 이렇게 부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편지 입니다. 이 저택의 소유는 이경아씨 앞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제가 남긴 번호로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무슨 소리지..."




정체불명의 메시지에 경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빨간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예쁘지 않은 글씨체...

분명 그가 맞았다.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질것 같았다.



---




누나가 이 글을 읽고 있을때면 난 벌써 누나에게 청혼을 했을꺼예요.

나에게 진실된 사랑을 깨우쳐준 누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드립니다.

왜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줄 아세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냥 누나에게 직접말하는건 아무리 뻔뻔한 나 라지만

조금은 쑥스러운 일이거든요. 우리는 행복할수 있을꺼예요.

제가 조금만 더 돈을 벌면 이곳에서 함께 살수 있어요.

저는 작은 극단에서 연극을 하고 누나는 나에게 따뜻한 아침밥을 만들어 주는거예요.

난 이제 더이상 화려한 길을 걷고 싶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눈을 뜨고 아름다운 아침을 맞이하기를 바래요.

그렇게 할수 있게 누나가 도와주세요.

누나는 그럴수 밖에 없어요. 왜냐면 날 구속해버렸으니까 책임 지셔야 한다구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무척이나 심장이 뛰어요.

나는 이럴때 살아있다는걸 느끼는것 같아요.

빨리 누나가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지금 밖에서 산책 중이거든요.

내가 들어오면 날 사랑한다고 귀에 속삭여 주세요.

그리고 내 입술에 입맞춰 주세요.

영원히 함께할꺼라는 맹세를 해주세요.



---



투둑...

눈물들이 종이 위로 한방울 두방울 떨어졌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사랑해요. 경아누나.]




"나쁜자식... 넌 죽어도 마땅해."




아니, 벌써 죽었잖아. 젠장... 왜 죽은거야.

왜 이런걸 남겨서 날 이렇게 아프게 만드는거야.

뭐? 작은 극단에서 연극을 해? 아침에 함께 눈을 떠?

청혼을 할꺼였어?

넌 한가지도 나한테 해준게 없이 그냥 가버린 거야.

아무것도 주지 않고 그냥 세상을 떠난거라고...




"너... 내가 가면 혼날줄 알아. 이제 가만히 둘수 없어."




눈물을 닦고 경아가 굳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널 따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죽는게 무섭지 않아. 아무리 겁이 많지만 무섭지 않아.

그런데 죽는 방법을 모르겠어.

널 빨리 보고 싶어. 너한테 빨리 가고 싶어...

다민아... 네가 나 마중나와줘.



저택의 살짝 열려진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는것이 느껴졌다.

약한사람도 세찬 바람도 아니였다.

저절로 눈이 감기는 이상한 바람이다.




"내가 말 끝날때까지 절대 눈뜨면 안돼요."

"다민아..."



눈을 감았더니 정말 다민의 모습이 보였다.

빙긋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

유난히 예쁜 그의 미소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난 누나를 영원히 사랑할꺼예요. 어디에도 가지 않을꺼예요."

"내 눈에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게 전부는 아니예요. 그러니까 죽을 생각 하지 말아요."

"그 곳은 좋니? 괜찮은 거야?"

"난 괜찮아요. 아, 참. 오해는 하지 말아요. 누나를 버린게 아니예요.

여전히 누나와 함께라구요. 약한 소리 하면 혼내줄꺼예요."

"네가 날 어떻게 혼내 줄수 있는데?"

"쿡쿡, 내가 바람과 친구를 먹었거든요."




다시한번 몸을 스치는 바람의 느낌에 웃음이 나왔다.

거짓말이 아니다.

이 느낌은 분명 현실이야.




"난 영원히 누나를 사랑할꺼예요. 하지만 누나는 이제 날 잊으세요."

"어째서? 싫어. 그렇게 하지 않을꺼야."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나타날수는 없는거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얘기할수 있는걸로 만족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런 능력도..."

"영원히 함께 할꺼라며..."

"맞아요. 영원히 함께..."

"무슨소리 하는거야. 응?"

"죽지 말아요. 죽으면 안돼요..."

"가지마... 다민아... 가지마."

"이제 눈을 떠요."




이제 다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떳다 다시 감아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분명 보였는데...



"넌 정말 바람이였구나..."



---



저택에서 돌아온후로 꿈을 꾸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그의 모습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현실은 혈실일 뿐이다.

언제부터 난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걸까.

지금은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눈물이 말라버린걸까... 아니면 이제 그만큼 괜찮아 지는걸까...

그가 했던말이 떠올랐다.



'고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뎌지기 마련이예요.

하지만 근본적인 아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상처가 생긴거예요.

상처는 내 마음속에 자국으로 깊이 새겨지죠.'



그래... 난 그 상처가 너무 깊이 새겨졌어.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상처...

이제는 상처가 아물어서 흉터가 된것 같아.

정말 네 말처럼 자국으로 남아버렸어.

난 아마 평생을 너라는 자국을 잊지 못할꺼야.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잊지 못할꺼야.

어떤 누구도 너 많큼 사랑할수 없겠지.



영원히...






END

[하이하이하이]

정말슬프당 ㅜㅜ~~~~~~~

[행복1004]

왜 다민은 꼭 죽어야만 했나요? 경아만 슬퍼지잖아요. 다민이 아닌 경아가 죽었다면 다민이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정말 죽었어야만 한걸까요? 죽지 않고 살아서 둘이 행복했으면 좋았을텐데......

[행복1004]

다시 만났을 때 경아가 다민이를 받아 주지 않았으면 다민이는 경아에게 사궈 달라고 빌었을까요?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파요. 눈물도 흘러요. 경아는 그 집에서 잘 살 수 있을까요. 아님 자살을................

[동태물산낙지]

엄청 재미있고 슬퍼요 .. 교통사고 .. 아버지의 생일이 다민이의 기일이 되었네요

[클로이]

정말 잘봤습니다,, 끝은 슬프게 끝났지만 말이예요ㅠ

[윤정민]

반전이다.....졸라 슬퍼,,,,,으앙,,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HellAngel╋◀]

다민이가 안죽었으면 좋았을 텐데,,ㅠㅠ

[쪼꼬렛]

ㅠㅠ 많이 슬퍼요.... 헐 그럴수가.. 많이 반전적이네영

[바보♥진경]

많이 슬프네요.. 다민이가 꼭 죽었어야 하는지..ㅠㅠ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