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의 여행은 여행객으로 하여금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육지와 바다. 세계를 이분화한다면, 바다는 육지에 비해 ‘자유’와 더욱 맞닿아 있지 않을까. 내륙을 벗어나 섬으로 떠나는 여행은,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여행자의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리는 일본의 오키나와 또한 누구나 가 보고 싶어 할 매력적인 섬이다. 미야코지마-새하얀 모래사장이 인상적인 투명한 바다의 섬 류큐왕국의 오랜 역사와 평화의 염원 오키나와 현은 일본 큐슈에서 대만까지 이어지는 류큐 열도를 가리킨다. 크고 작은 160여 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섬을 포함해 유인도는 48개가 있다. 일본 유일의 아열대 기후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연평균 기온이 20도가 넘어 눈도 거의 내리지 않으며, 크게 남부·중부·북부 지역으로 나뉜다. 오키나와 여행에 앞서 알아야 할 기본지식. 1879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탄생한 오키나와 현이 있기 전,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이 있었다는 것과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에 휘말려 전후 27년 동안 미군이 통치했다가, 1972년 일본에 복귀됐다는 사실이다. 자, 이제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나하에서 오키나와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나하 공항에 내린 후 버스와 모노레일을 이용해, ‘슈리성 공원’에 도착한다. 이곳은 옛 류큐왕국의 거성터로 오키나와 전쟁 때 소실됐다가 1992년 다시 복원돼 현재의 공원이 되었다. 건물들을 보면 중국의 건축양식이 가미된 느낌이다. 슈리성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용의 그림과 선명한 붉은색의 조화는 그러한 느낌을 더해 준다. 공원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오면 류큐왕국시대 국왕의 별장인 ‘시키나엔’에 닿는다. 화려함은 떨어지지만, 연못 주위를 걸으며 자연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정원은 일품이다. 중국의 사신인 책봉사를 접대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이제 오키나와 제일의 성지를 찾아가 보자. 오키나와 남부 지역에 있는 ‘세이화우타키’는 류큐 개벽신화의 성지로 국가적인 제사가 열리며, 국왕이 몸소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거대한 석회암 바위와 울창한 나무들에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이곳으로 옛 조상신들이 찾아온다고 믿는다. 세이화우타키 기념비 앞에서 잠시 기도를 드리고, 경건한 마음을 갖고 몸을 가다듬는다. 시키나엔 - 류큐왕국의 별장으로 왕족들의 휴식처로 쓰였다. 세이화우티키 - 류쿠왕국의 제사를 지낸 곳으로 최고 신성지역 전쟁의 아픔을 딛고, 기적을 창조하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쟁 최후의 장소인 마부니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희생된 사람들의 평화를 기리는 장소이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평화의 초석’ 앞에서 쉽게 한국인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약 24만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 초석 앞에 서니, 암울했던 과거 전쟁의 역사가 회상돼 가슴이 아려온다. 서둘러 준비해간 꽃을 내려놓고, 엄숙한 마음으로 공원을 빠져나온다. 전쟁의 아픔은 크지만, 그 속에선 언제나 새로운 희망의 꽃이 피어난다. 오키나와의 ‘국제거리’는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곳이지만, 그 뒤 급속한 성장을 통한 발전으로 ‘기적의 1마일’이라 불린다. 재미난 얼굴의 인형들과 전통주 등 다양한 현지 기념품들과 먹거리들이 즐비해 사람들의 활력이 넘쳐나는 곳으로 전쟁의 아픔은 찾아볼 수 없다. 이왕 온 김에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어 ‘마키시 공설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야채, 열대 어패류 등 다채롭게 진열된 형형색색의 식자재들을 보면, 눈이 황홀할 지경이다. 1층은 생선과 육류, 반찬 등을 볼 수 있으며, 2층은 식당가로 구성돼 있다. 2층 식당에 올라 담백한 맛이 일품인 오키나와 소바를 맛보고, 다음 여정을 시작한다. 챠탄쵸에 있는 ‘미하마 아메리칸 빌리지’에는 미국 서해안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곳은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시포트 빌리지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60m 크기의 대형 관람차는 아메리칸 빌리지의 상징이다. 어디에서도 쉽게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으며, 기념품들을 파는 쇼핑몰과 극장, 레스토랑 등이 많아, 일본 속 미국 문화를 느낄 수 있다.
평화 기념공원 - 2차 세계대전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린 곳 아메리칸 빌리지 - 미국의 서부를 느낄 수 있는 곳
만자모에 앉아 다양한 ‘자유’를 선택하다 드라마 촬영지로도 알려진 ‘만자모’에 도착하면, 무엇보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푸르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한 천연색의 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만 명이 앉을 수 있는 잔디밭’이라는 이름처럼 침식된 단애절벽 위에 푸른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특히 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코끼리 코 모양의 바위가 인상적이다. 잘 정비된 산책길을 걷다 보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며, 흡사 이곳이 천국의 길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서두에도 말했듯이 오키나와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만자모의 푸르른 잔디밭에 앉으니, 솔솔 부는 바람소리가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갈 것만 같다. 이것이 누구나 꿈꾸는 ‘자유’의 순간이 아닐까.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새하얀 구름만이 끝없이 흘러간다.
오키나와는 본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수많은 섬들이 있다. 그 섬들은 각각 다양한 ‘자유’를 내재하고 있다. 이제는 선택의 시간만이 남았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푸른 자연의 섬, ‘쿠메지마’(지마는 섬이라는 뜻)에서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거닐어 볼까, ‘이에지마’에서 스킨 스쿠버를 즐겨 볼까, 아니면 ‘미야코지마’에서 산호초와 모래에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푸른 색깔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볼까…….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사실 어디를 선택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미소가 흐른다. 선택하는 것 또한 자유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언제든 또 어디를 향하더라도, 푸르른 바다와 드넓은 하늘이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해줄 테니까. 오키나와에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역사와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 그리고 ‘자유’가 있었다.
여행정보 세계유산에 등록된 류큐왕국의 문화 - 슈리 성터, 시키나엔, 세이화우타키를 비롯해 총 9군데가 2002년 12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여기에는 슈리 성터의 일부인 스누햔 우타키 성문, 류큐 왕가의 묘릉인 다마우둔, 그리고 성터인 나카구스쿠, 가쓰렌, 자키미, 나키진 등이 있다.
가는 길 인천공항에서 오키나와 나하 공항까지 약 2시간 15분이 소요된다. |
갤러리
슈리성 공원 - 류쿠왕국의 상징이자, 오키나와의 상징
국왕의 상징인 33마리의 용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만명이 앉을 수 있는 잔디밭'이라는 뜻으로 최근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가 많다.
마시키 공설 시장 - 오키나와의 식재료로 가득 스쿠버 다이빙
오키나와 소바 - 담백한 맛이 일품으로 면과 국물이 시원한 조화를 이룬다.
쿠메지마 하테노하마 - 쿠메지마 동쪽에 있는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섬
나키진 성터 - 성벽이 길어 만리장성을 연상시킨다.
나카구스쿠 성터 - 가장 잘 보존된 성터 중 하나로 15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쓰렌 성터 - 외적의 침입에 강한 성으로 성내에서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오키나와 상식
일본 큐슈 남단으로부터 약 685㎞ 떨어진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57개 섬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현(沖繩懸)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섬으로, 오키나와현 인구의 88%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아름다운 산호초가 있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 해안으로 관광지로도 유명한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지만,
1879년 메이지정부에 의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이후 미국 점령을 거쳐 1972년 다시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
17세기까지 류큐(琉球)왕국으로 불렸던 오키나와는 중세 조선과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간의 무역중계지로서 번영을 누리며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해 온 독립국가였다. 그러나 일본은 1609년 사쓰마(薩摩)를 시켜 류큐를 정복, 완전히 복속시켰고 1879년
메이지(明治) 정부는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편입시켜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상륙, 3개월간 계속된 전투로 민간인들까지 전투에 말려들어 20여 만 명의 사망자 중 주민이 9만 40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때부터 미군에 의해 점령되어 27년간 군정 통치를 받았다.
1950년 12월 '류우큐우 열도 민간정부에 관한 명령'을 통해 미국의 신탁통치 관할지역으로 지정된 이래 오키나와 주민의 일본으로의
복귀운동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1960년 오키나와현 일본복귀협의회가 결성되었고, 1969년 11월 당시 미국의 R.M. 닉슨 대통령과
일본의 사토(佐藤) 총리 간 회의에서 1972년에 반환을 약속한 미ㆍ일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결국 1971년 6월 17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오키나와 반환협정이 조인되고, 1972년 5월 15일에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26년 만에
오키나와는 일본으로 복귀했다.
1972년 미군의 반환 이후에도 오키나와는 지정학적 위치로 미군기지가 계속 남아 있게 되고, 자위대 기지까지 설치되었다.
현재도 일본 내 미군기지의 74.8%가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이 섬에 집중돼 있다.
한편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에 의한 성폭행 등 미군 관련 범죄가 잇달아 일어났는데, 1995년 3명의 미군에 의한 12세 소녀 성폭행사건은
미군기지에 대한 오키나와현 주민의 쌓였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오키나와현 지사와 중앙정부가 정면 대립하는 단계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군은 범인의 신병인도를 거부했고, 이후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이전 요구가 본격화됐다.
이 오키나와 기지사태는 일본 전국적으로 보도됨으로써 크나큰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에 주민들의 반미 감정이 높아지자 일본 정부는
1995년 미국 측과 협의를 거쳐 관련 협정의 운용 방안에 관한 개선안을 마련한 바 있다.
2005년 10월에는 미국과 일본이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 병력 7000명을 감축하기로 합의해 현재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대 병력의
46%가 줄어들게 되었다.
특히 오키나와와 일본 정부 간의 최대 현안은 16년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후텐마기지 이전문제다.
후텐마 기지는 오키나와 인구 밀집 지역에 위치해 안전 및 소음 문제를 야기한다는 이유로 2006년부터 오키나와 외곽 나고시 지역으로 이전이 추진됐다.
2008년에는 일본 민주당이 집권 후 후텐마 기지를 지역 주민의 뜻에 따라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공약했다가 미국 측의 반발로 포기했다.
이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는 미국과 일본 정부, 오키나와 지자체와 지역 주민의 이해관계가 얽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2012년 10월 수직이착륙 수송기 V-22 오스프리가 후텐마 기지에 배치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출처] 여행레저신문, 네이버 지식백과
첫댓글 멋진사진과 정보 감상 잘했습니다
두번이나 다녀왔는데 미세먼지와 추위에 당장이라도 오끼나와로 떠나구싶네요
저도 마음은 이미 오키나와에 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