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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54
5월8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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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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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EjvTlSyC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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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지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도와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의 정의, 본질, 의미는 무엇인가?’ 묻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듯 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고 있어야, 구성원으로서 합당한 가치관이나 지향점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웬만한 파도 앞에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 크고 안전한 배? 그 안에서 누리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 건강과 안전? 가화만사성? 끝도 없는 승승장구?
일정 부분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존경하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교회에 대한 정의는 참으로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동시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자라고 나약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비틀거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정의도 매력적입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세상의 박해 사이를 걸어가는 양떼들의 모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 한 가운데 굳게 현존하심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세상과 적대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멸시와 수모 역시 기정 사실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복음 15장 18~19절)
결국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상 여정을 나아가는 동안 겪게 될 다양한 고통과 시련 앞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박해와 미움 앞에서 너무 분노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쪽에서는 역동적인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우리 교회는 순풍에 돛단듯이 앞으로 전진하며 성장해 나가지만, 다른 한편에는 언제나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키려는 악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두 세력의 투쟁이 계속 되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교회가 적대자들과 세속의 권력자들로부터 받은 박해와 고통은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다 하느님의 더 큰 위로와 격려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과 구원이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라는 배 위에 승선한 우리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배와는 근본적으로 결이 다른 집단, 철저하게 차별화된 집단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세속적 가치의 충돌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로인해 발생하는 고통과 박해 역시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참으로 아이러니 한 공동체입니다. 거룩함과 공동선을 지향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흔들리며 틈만 나면 표류합니다. 근본적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의 집합체여서 그렇습니다.
쉼없이 흔들리고 표류함에도 불구하고 선장이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변함없이 현존하고 계심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잠시 휴식을 취하시거나 잠드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러니 견디기 힘들때, 감당하기 벅찬 파도가 밀려올 때면 목청껏 선장이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그분을 흔들어 깨워야겠습니다. 사도들처럼 말입니다. “주님, 지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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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5y0bFwW3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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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라,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을>
오늘 복음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받기 때문에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세상,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원수지간입니다. 요한의 세계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그러나 악마는 교묘하게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허물려는 시도를 벌입니다. 그래서 이원론은 나쁘다고 하며 통합을 강조합니다. 저도 처음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미워한다고 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저를 미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이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언가 허전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내가 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미움받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사랑하면 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독침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참으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머리를 짓밟는 이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전갈 한 마리가 개구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개구리들은 모두 전갈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워낙 착한 전갈처럼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구리들은 전갈이 자기 꼬리의 독침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존재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의 개구리들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그 전갈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곧 다른 고을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고을과의 사이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인 그 전갈을 자신들의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갈은 수영도 못하는 자기가 개구리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본성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태운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자신도 죽고 개구리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마치 이런 전갈처럼 오셨습니다. 그리고 등에 업은 사람을 당신 십자가에서 흐르는 피로 죽이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자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백성을 빼앗아가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악의 욕망, 즉 세속-육신-마귀의 지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본성, 즉 사랑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본성과 반대되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영화 ‘그린 존’(2010)은 2003년에 발생한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미국은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라크를 무력침공합니다. 미군 해병대 팀장 ‘맷 데이먼’은 해병대원들과 화학무기가 있다는 지역을 타격합니다. 그런데 매번 화학무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에 의문을 품은 팀장은 한 집을 습격하던 중 그곳에 이라크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를 추격합니다. 그 이라크 장군이 미국에 잘못된 정보를 주는 대상임을 알아낸 것입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장군을 찾아내어 왜 잘못된 정보를 주느냐고 하지만 사실 그는 미국에서도 이라크에서도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그가 처음 미국에 주었던 정보는 이라크에 생화학무기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전을 자신들 소유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에게는 이 정보는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화학무기가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고 속이고 일단 이라크를 침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공대원들을 시켜 그를 찾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맷 데이먼이 그를 찾게 만들어 그 뒤를 쫓아 장군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맷 데이먼은 미군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려고 하지만 결국엔 자기 나라 사람에게 사살당하고 맙니다. 그 사람들도 장군이 미국에 정보를 주어 미국이 자신들을 침공하게 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맷 데이먼은 미국이 승리한 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내각을 구성하여 이익을 챙기는 정치인들에게 맞서려고 하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화학무기도 없는데 그것을 빌미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흘리고 그렇게 전 세계가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이라크를 침공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진실을 말하는 이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 미움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싫어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권력을 좋아하고 편안함만을 찾습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곧 진실하지 못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 나라에 속하지 않았음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고 증거하면 개구리 마을의 전갈처럼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리 떼 가운데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과 세상 백성은 그 본성상 통합될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 백성은 세상을 미워하지 않지만, 세상은 하늘 나라 백성을 미워합니다.
우리가 사는 교회 안에도 세상에 속한 이들이 속해있습니다. 그들을 구별하는 법은 쉽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돈과 먹고 마시는 것과 권위와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세상 사람입니다. 이 경계선을 통과하는 것이 저는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면 경계하십시오. 나도 교회에 속한 척하며 실제로는 세상에 속해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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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8-21 :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8절)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들로 만드시려고 고난을 겪으셨다. 그러나 우리를 계속 하느님의 아들들로 계속 남아있게 해 줄 고난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지만, 주님께서 먼저 세상의 미움을 견디셨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비난을 받고 귀양을 가고 고문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일을 겪으셨다. 저주받은 세상은 박해를 하고 하느님과 화해한 세상, 즉 교회는 박해를 당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9절) 주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현세에 살지만 그것은 우리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 세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같은 행동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똑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은 진리의 원수들과 싸워야 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20ㄱ절) 이 말씀을 제자들이 온갖 종류의 박해를 당할 것임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도 사악한 자들이 방자한 말로 그분을 공격했고, 온갖 말로 당신을 모욕하였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이 받으신 모욕과 굴욕적인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그분께 싸움을 걸더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니까 제자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미 제자들에 앞서 당신이 먼저 박해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20ㄴ절)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그분이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이 각자 자신의 행실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박해를 받으셨다.우리도 그분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면 박해를 당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얻는 길이다. 이것 모두가 역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절) 여기서 ‘그 모든 일’은 세상이 당신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미원하고 박해하고 우리의 말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주님 대신 우리를 미워할 것이며, 주님 대신 우리를 박해할 것이고, 세상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완전히 다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으로 주님을 닮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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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오늘 복음 환호송을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선택된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도 당신처럼 적대자들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에게 받으신 고통과 어려움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세상의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뽑으신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그분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녹록하지 않은 세상의 많은 어려움 속에 살면서 그분을 따르는 힘은 ‘주님과 하나 됨’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성체송을 통하여 전해 주시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위하여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시어 그분 안에서 믿음이 충만하고, 희망을 넘어 희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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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갔던 것은 1982년 여름입니다. 당시 성소국에서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도보 성지순례를 기획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절두산 성지에서 함께 기도를 한 후에 대부분의 성지를 도보로 순례하였습니다. 미리내, 양지, 솔뫼, 해미, 갈매못, 나바위, 치명자산까지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모두 순례자들을 맞이할 수 있는 성지로 조성이 되어 있지만 40년 전에는 대부분 빈 공간에 성지라는 안내표시만 있었습니다. 본당신부로 있으면서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학역에서 내렸습니다. 구학 역에서 베론 성지까지는 도보로 순례하였습니다. 성지는 순례하는 사람이 없으면 잊혀지게 됩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던 곳,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여 묻혔던 곳을 찾아 순례하는 것은 우리들 또한 신앙의 선조들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다짐입니다.
올해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 분은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다른 한 분은 길 위에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주춧돌을 놓았고, 최양업 신부님은 주춧돌 위에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유럽과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상해와 연길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좋습니다. 상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서품을 받은 성당이 있습니다. 연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부제품을 받은 성당이 있습니다. 두 신부님은 만주벌판을 지나서 그리운 조선으로 오는 길을 찾았습니다.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들도 만주벌판을 지나서 조선으로 입국했습니다. 말이 좋아 만주벌판이지 크기가 조선의 8배라고 합니다. 도중에 사나운 짐승도 있고, 도적 때도 있고, 살을 에는 추위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압록강 물이 어는 추운 겨울에 조선으로 와야 했습니다. 순례의 여정에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 입구에 있던 글입니다. “만일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만일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로 나가는 순례의 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취해서 여행객으로 머물다가 떠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선조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된 것처럼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비록 순례의 길에 고난과 유혹이 찾아오지만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많은 고통과 박해가 있었지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디모테오와 같은 좋은 협조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마케도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천상에서의 삶을 희망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비록 병고에 시달릴지라도, 비록 일찍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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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온 세상에 전파한 위대한 사도 바오로와 계속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마르코라는 요한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심하게 일어나지요.
바오로 사도는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일하지 않고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마르코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바르나바는 같이 데려 가자고 하였던 것이지요.
결국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져서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버리고, 바오로 사도는 실라스를 택하여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 16장부터가 2차 전도여행의 내용입니다.
리스트라에 도착한 바오로는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교우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티모테오를 동료로 삼아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1차 전도여행을 터키의 남쪽지방을 대상으로 삼아 전도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오늘 2차 전도여행의 목적지를 북쪽지방의 주요 도시로 삼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여행의 시작부터 바르나바와 갈라섰듯이 계속해서 예수의 성령께서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방향을 틀어서 비티니아 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또 실패했지요.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사도16,6-7)
그래서 그들은 터키 항구 트로아스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트로아스 해안에서 묵상에 잠겨 있던 바오로 사도에게 신비로운 영상이 전해집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 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사도16,9) 하고 간청했던 것이지요.
이 신비로운 영상을 접하고 난 뒤에 바오로 사도는 터키 북부의 전도지를 포기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나게 되었다고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사도16,10)
우리는 오늘 독서를 통해서 두 가지를 함께 묵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갈등하고 결별하는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나 인정하는 참으로 위대한 사도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이렇게 큰 인물이 나온 적이 없을 정도이지요.
구약에 있어서 가장 큰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도 모세를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신약에 있어서 가장 큰 인물을 꼽으라면 베드로 사도보다도 바오로 사도가 꼽힐 것입니다.
이렇게 큰 인물도 동료와 언쟁을 벌이고 결국 결별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도 다툴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사람은 모두 다 천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천사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지만 부족하고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의 인간적인 면 때문에 실망하거나 상처를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 축성 받은 사람이고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더욱 노력하는 사람들이지요. 세속적인 것으로 다투는 것은 논할 가치조차 없지만 신자들끼리도 복음 때문에 다툴 수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거나 신앙에 위기가 온다면 그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지요.
두 번째 또 생각할 것은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즈음에 성령께서 바오로 사도의 길을 계속 막아선 것입니다. 결국 마케도니아로 인도하시는데 도대체 왜 성령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길을 막으셨으며 마케도니아라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입니다. 터키는 아시아에 속하고 그리스는 유럽에 속하지요.
즉 아시아에 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오로 사도를 예수님께서는 유럽으로 불러 들이셨던 것입니다. 선교지가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 지방으로 그리고 다시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선교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의 성령이셨습니다. 트로아스는 터키의 항구도시입니다.
여기서 마케도니아의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까지는 바닷길로 185km 정도 떨어져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이 네아폴리스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유럽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네아폴리스에 가면 지금도 ‘바오로 가도(街道)’라고 불리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렵에서 처음으로 세례 받은 여인인 리디아를 기념하는 ‘리디아 성당’이 세워져 있지요.
왜 성령께서 바오로 사도를 유럽, 특히 네아폴리스로 이끄셨는지는 그 지리적 환경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네아폴리스에는 로마로 가는 길인 에그나티아 대로가 있지요.
‘모든 길을 로마로’라는 말도 있듯이 에그나티아는 로마로 직접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뜻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바오로 사도를 이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선교는 나의 의지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대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처럼 전도여행을 결심하고 트로아스 같은 곳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어느 날 신비스러운 영상이 뚝딱 떠올라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알려주는 것일까요?
무엇을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삶의 지향과 목표를 설정해 갈 것인지를 놓고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늘상 말씀을 통해 전해지지요. 또 사목자가 전해주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입니다.
요즈음 저는 계속해서 바오로 사도의 일대기를 그린 성경을 풀이하며 복음을 선포해야할 사명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목자로서 여러분에게 제시해 준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 학교>, <사회복지 시설 돕기> 등은 모두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목자의 가르침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 쓰기>로 얼마나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는지 써본 사람들은 다 깊게 체험을 한 바 있습니다. 또 <100권 신심서적 읽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를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요.
<기도 학교>또한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쓰고 신심서적을 읽고, 기도를 하며 신심을 키운 후,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통해 복음을 실천할 때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프로그램들이 하느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며 사목의 길을 걷는 사목자를 통해서 신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목자의 사목 방침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성모 마리아의 이 말씀을 일생 실천하였던 바오로 사도가 가는 곳마다 풍요로운 결실을 맺으셨음을 우리는 이천 년 교회 역사를 통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의지를 넘어선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성모 마리아처럼, 또 바오로 사도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풍부하게 내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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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동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얼굴을 고치고 화장을 하고 외모에 많은 공을 들입니다. 세상에서 뽑히기 위하여 생각을 모으고 몸을 놀리며 안간힘을 씁니다. 세상에서 뽑혀야 일자리를 얻고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분께서는 우리 중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자녀로 뽑아주셨습니다.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은총으로 불러주셨습니다.(갈라 1,15 참조)
당신을 뿌리로 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뽑힌 이들이란 말씀으로 에워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길라잡이로 삼아서 마음과 몸을 바로 잡고 곱게 단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앞장세운 말씀에 길들여지도록 안팎으로 애를 써야 합니다. 말씀 앞에 두 손 모아 머무르고 말씀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앞장세운 말씀을 뒤따라야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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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사람>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압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사랑받으려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열어야 합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린 사랑의 사람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와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필립2,7)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 팔을 벌립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가면 사랑 받습니다. 세리든 창녀든 죄인이든 예수님의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편 가르기와 이해득실(利害得失)에 길든 세상은 사랑할 줄 모릅니다. 자기편이면, 득이 된다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자기편이 아니면, 손해가 된다면 무조건 배척하고 박해합니다. 이해득실을 따지며 유유상종하는 곳에 편 가름과 싸움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죽음과 어둠만 있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당신을 미워하더라도 섭섭해 하지 말고 미움을 사랑으로 갚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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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이번 주 내내, 관계 안에서의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곧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제자들과 제자들이 관계에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에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신원과 사명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로부터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에서도 제자들의 사명 역시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15,19)이며, 또한 “내 이름 때문”(15, 21), 곧 “내 제자라 해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과, ‘예수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과, ‘예수님 이름’, 이 세 가지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는 <제자들 편>에서의 이유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 존재의 의미요, 우리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 편>에서의 이유는 “그들 곧 세상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모르기”(15,21)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에게 선택받았는지? 제자로서의 신분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의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꿋꿋이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비록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지라도 당신께서 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보내신 분을 알게 하여야 하는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한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았습니다.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당신을 보내신 분인 아버지께만 믿음을 두셨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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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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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토마스 머튼 영성 배움터)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세상이 큰가? 교회가 더 큰가?>
“세상이 큰가? 교회가 더 큰가?” 제가 신학생 때 가졌던 의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교회를 세우셨기에 교회가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말을 좋아해서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무시하였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생각이 미숙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교회, 육신과 영혼 등의 이원론적인 사고를 벗어나, 모든 것의 주인이요 모든 것을 하나로 이어주시는 주님과 하나되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합시다.
찬미 예수님! 예전에 토론토 교우들과 성지 순례에 다녀 온 다음 어느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신부님 순례 다녀 와서 보니 일상이 변한 것은 하나도 없고, 문제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이제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때 세상과 교회 사이의 이원론적 충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100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사상, 유대 문학, 원시 그리스도교 사상과 바오로의 신학, 그리고 필로의 철학 등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과 속, 교회와 세상, 영혼과 육신 등에 관한 이원론적인 사고가 스며들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마치 세상에 속하는 것과 예수님께 속한 것이 충돌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뽑힌 우리들은 교회를 미워하는 세상을 거부하고 박해를 견뎌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알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속된 것도 거부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거룩한 하느님을 발견하고 세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속적인 것들, 교회를 박해하는 정치적인 세력들, 혹은 영적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 나는 욕심과 욕망”들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세상 안에는 분명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에 걸림돌이 되거나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 안에 있는 이런 문제들에 직면하셨고, 이 문제를 인간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늘의 방식으로 해결하셨습니다. 박해를 받으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방식의 문제 해결은 ‘눈 앞에 보이는 생존’이 아니라, ‘온 인류와 우주 만물의 구원’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께서 사랑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사랑을 택하게 될 때, 내면으로부터 혹은 외부로부터 박해와 오해와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이를 극복하라는 가르침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하나 되어 갈 때, 모든 경계가 무너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경계, 나와 너의 경계, 교회와 세상의 경계, 거룩함과 속됨의 경계, 나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 마저도 무너지고, 오늘 나와 너가 예수님 안에서 지금 여기에서 나누는 사랑이 진정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말은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말고 내적인 것에 더 마음을 써라는 말이지 외적인 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이 중요하지 않다면 왜 예수님께서 육신을 취하셨겠습니까? 왜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만드셨겠습니까?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모든 것들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임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던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 계십니다. 어두운 밤처럼 절망 속에서 하느님께서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 듯 할 때 명상의 집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시며 지금의 어둔 밤 역시 우리가 내가 아는 하느님을 넘어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임을 깨닫고 묵묵히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주님께서는 침묵의 사랑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가장 크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날,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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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15,18)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미워한 사람들,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들도, 그리고 지금의 우리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분의 뒤를 '삶으로' 따라가는 사람들, 곧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이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예수님의 오심과 예수님께서 흘리신 땀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미움과 박해를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스테파노 죽음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움과 박해가 오히려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전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사도16,1-10)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그 미움과 박해가 이제는 복음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더 나아가 온 세상으로 전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15,18)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15,20ㄴ)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러니 나로 인해 너희가 겪는 미움과 박해를 견디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오늘은 '어버이 날'입니다.
모든 부모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영적 꽃다발인 미사와 기도 올립니다.
저도 천상에 계신 부모님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엄마이신 성모님 앞에 카네이션 꽃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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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런 것입니다>
요한 15,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미워하는 세상이
주님을 사랑하는
나를 미워한다면
나는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미워하는 세상이
주님을 사랑하는데도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주님을 말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미워하는 세상을
주님을 사랑하기에
내가 미워한다면
나는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미워하는 세상을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내가 사랑한다면
나는 주님을 말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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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는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출세에 제약이 많은 서자 출신이었지만, 정조대왕에게 발탁되어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학문은 훗날 정약용, 김정희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이런 학문적 깊이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엄청난 독서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온종일 책만 읽어도 될 정도로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책 읽은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많은 이가 책 읽는 분위기를 신경 씁니다.
조용해서 책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집에서 주로 책을 읽었고, 그의 집은 당시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종로 사거리였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었고, 가장 시끄러운 곳이었지만 책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는 것만 그러할까요? 사실 많은 상황에서 안 되는 이유를 찾는데 익숙한 우리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 공부 안 되는 이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취업이 안 되는 이유…. 이런 식으로 안 되는 이유를 얼마나 많이 찾고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실학자 이덕무처럼, 위대한 위인들은 모두 안 되는 이유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되는 이유를 찾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되는 이유가 참 많았습니다. ‘안 한다, 못한다.’ 등의 결론을 미리 내리고 보니, 되는 이유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나햐면 세상이 주님을 먼저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미워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또 세상의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볼 수도 없고 하느님의 일을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표징과 하늘나라의 말씀을 전해주셔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움’이라는 감정으로만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도 미움으로 가득 찼던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직접 보이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는 우리는 어떠할까요?
우리가 더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힘을 넣어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서, 세상이 미워해도 사랑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어떤 이유를 말하며 사는 나 자신인지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되는 이유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일 때,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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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사람을 만들지 마세요>
언젠가 우편물 하나를 받았는데, 그 안에 ‘금가락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게 뭐야?’ 하면서 동봉해 있는 편지를 읽어보니, 저를 아들로 삼고 싶다면서 ‘엄마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유품’으로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금가락지를 다시 그분께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 한 통을 남겼습니다. ‘저는 누구 한 사람의 사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제입니다. 따라서 저를 아들로 삼고 싶으셔도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자매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금가락지를 돌려드립니다.
본인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면 좋은 곳에 쓰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자기만의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차갑게 대하고 그 자리를 도망칩니다. 그렇게 친한 관계를 만들면 저부터가 사제로 온전히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주님 곁으로 가시고, 종종 “신부님, 제가 신부님 엄마 해 줄게요.”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고마운 마음이지만 솔직히 자기만의 사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모두 한 형제, 자매입니다. 소유하겠다는 마음에서는 불편과 어려움이 가득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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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 큰 사랑으로>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맞은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부모의 자녀에게는 바른 인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자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가치를 두지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저 멀리 하늘의 가치를 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극복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로움과 영원함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표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발판이고 세상을 회피할 수 없기에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힘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갚아 주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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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하느님처럼, 어머님처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 하느님처럼! 을 넣어도 되겠습니다. 하느님처럼의 삶을 그대로 사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하느님 사랑을 닮은 분이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어머니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어 ‘어머니처럼! 넣어도 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이 살아야 할 삶은 파스카의 삶뿐이겠습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저 역시 나이를 먹어 갈수록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회한悔恨만 가득한 마음이 됩니다. 죽을 때까지 어머니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잘 해드린 것은 별로 없고 잘 해드리지 못한 것만 생각이 납니다. 가장 보고 싶은 분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과 더불어 어머니를 꼽을 것입니다.
거의 50년 전 여섯째 숙부 환갑 때 어머니(제 할머니)를 그리며 ‘어머님 은혜’를 부르다 목이 메어 흐느껴 우시던 숙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린이 날은 ‘어린이 날’노래를 불렀는데 오늘은 ‘어머님 은혜’를 불러봐야 되겠습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어머님의 희생을 가이없어라.”-
3절 까지 이르는 구구절절 감동적인 가사와 곡을 전 세대에 걸쳐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읽은 춘천교구 카톨릭 문우회 회원인 시인 심순덕 자매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시가 감동적이라 소개합니다.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일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이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 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코이노니아 한 자매님의 자전적 고백도 감동적이라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저희 아들이 6살 때 일이 생각납니다. 집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줬는데도 거실에서 공을 갖고 놀다 남편이 귀하게 여기는 도자기를 깨서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는데 아이가 엉엉 울면서 ‘엄마가 날 때려도 난 엄마를 사랑해요’라고 하더군요. 울면서 하는 말에 가슴이 찡했습니다. 저도 주님이 지금 저를 때려도 사랑합니다.”
“자매님, 아드님 6살 때 울면서 한 고백이 감동입니다. 지금 몇 살 되었나요?”
“지금 울 아들이 벌써 33살이네요.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보면 한편의 드라마같은 일들이 참 많네요.”
“분명 효자 아드님일 것입니다.”
“네, 중학교때는 말안들어서 제가 야단을 치고 속상해 하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의 길은 참 멀고도 험난하네요. 엄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하더라구요. 믿고 기다려주니 지금은 든든한 아들이 되었네요.”
“‘저도 주님이 지금 저를 때려도 사랑합니다’란 자매님 주님 사랑 고백도 감동입니다.”-
바로 주님으로 인한 어떤 시련이나 고난, 박해가, 순교의 죽음이 와도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순교자들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지금도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무수한 형제자매들 마음안에 끊임없이 타오르는 주님 사랑의 불입니다.
이런 대화의 계기가 된 숙소에서 집무실 문앞까지 엊그제 깔린 카페트(야자매트;야자수로 만들었다 하며 요즘 공원이나 등산로에 많이 깔아놓는다 함)입니다. 사진에 담으니 흡사 수도원길 하늘길이 연상되는 천국에 오르는 하늘길을 상징하는 듯 하여 사진과 함께 다음 댓글도 달았습니다.
“집무실 가는 카페트 깔린 길이 흡사 천국에 가는 하늘길, 파스카의 길, 겸손의 길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려 감으로 올라가는 역설적 겸손의 하늘길!”
평생 내려감의 섬김과 순종의 사랑 길을, 비움의 길을 가시다가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파스카의 길과 더불어 역시 평생 떠남의 비움의 길을 가시다가 임종후 하늘길에 오르시던 사부 성 베네딕도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성인의 제자가 성인 임종 시 본 환시입니다.
‘성인의 방에서부터 동쪽을 향해 하늘에 이르기까지 똑바로 나있는 길을 보았는데, 그 길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수없이 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자 그 위에 빛나는 옷을 입은 존엄한 분이 나타나시어 이 길이 누구를 위한 길인지 알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모른다고 하자, “이 길은 주님께 사랑받는 베네딕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베전 37장)
참 깊은 깨우침을 주는 상징적 구원의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이 파스카의 하늘 길을 따라 이미 예수님에 이어 성모님이 올라가셨고 무수한 성인들, 그리고 성모님을 닮아 희생적 사랑을 다하시다 돌아가신 익명의 성녀들인 우리 어머니들이라 주저없이 말하고 싶습니다. 파스카의 하늘길,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용기백배하여 백절불굴, 칠전팔기의 순교적 삶을 살게 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을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한 말을 기억하여라.”
예수님 당시 세상에 미움받고 박해받던 제자들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신앙 자유의 좋은 세상이라 눈에 보이는 박해나 미움은 없지만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원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외적 박해나 미움보다는 세속화로 세상에 동화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존재이유를 잃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 탐욕으로 인한 세속화와 더불어 내적부패와 분열은 외적 박해나 미움보다 더 무서운 악마의 흉계입니다. 정말 대적하기 힘든 것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탐욕안에 숨어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입니다.
악마의 간교한 획책으로 인해 부패와 분열로 안에서 부터 무너져 내리면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요, 세상을 성화해야할 마지막 세상의 희망의 보루와 같은 교회가 속화되어 부패하고 분열된다면 대안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여기에 있다 봅니다. 세상의 성화가 아니라 세상에 속화되어 세상을 닮아 세상에 동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과 교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코로나 사태요 기후재난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으로 순교적 삶이, 자발적 극기와 절제의 삶, 생태적 회개와 내적혁명의 삶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요, 주님 사랑의 관상적 차원을, 삶의 깊이와 순수를 회복해야 할 절박한 시기같습니다. 제1독서 바오로 일행의 성령에 따른 제2차 선교열정이 놀랍습니다. 바로 주님 사랑에 불붙었기에 지칠줄 모르는 자발적 순교적 선교활동이요, 마침내 순교로서 주님 사랑을 입증한 바오로 사도입니다.
우리 어버이들, 특히 어머니들은 익명의 파스카 삶의 증인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날마다 죽고 부활하는 파스카의 삶과 길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이미 하늘길 등정登程에 오른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파스카 잔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파스카의 신비를 실천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할렐루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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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나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영의 세계와 구분되는 영역일 겁니다.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성령의 인도에 마음을 여는 이는 세상의 지배 아래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세상과 별개로 살아갈 수는 없지요. 이천 년 전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려고 돈과 권력을 탐하며 불법과 불의도 마다 않고 달려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에 철저히 역행합니다. 가진 바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며, 약하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여기에 계시니까요.
그러니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신자들을 불편해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발 맞추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의심과 무시의 눈초리로 보기도 하고 심지어 박해까지 일삼지요.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5,21)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세상이 저지르는 미움과 증오의 이유를 "무지"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모르고, 구원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사랑도 모르니 그런 것이라고 여기시지요. 만일 세상이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을 알았다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서 응당 아버지를 섬기고 아드님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이 지닌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거룩함을 믿어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선교 여행이 어떤 원동력으로 이루어지는지가 드러납니다.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사도 16,3)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며 지키게 하였다."(사도 16,4)
사도행전 저자는 이방 지역에서 바오로가 행한 이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가감 없이 전합니다. 전통이라는 예민한 쟁점에 대해, 그 고장의 유다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누구에게는 할례를 베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한 예루살렘 회의의 규정을 알려 주지요.
이는 바오로의 사명이 단 하나의 목적, 구원을 향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일 겁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선교 방식에 대해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19-23 참조)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틀을 넘어섭니다. 그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들이 무지를 깨고 비로소 알게 된다면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통과 관습, 기득권과 평판이라는 세상의 틀을 과감히 뛰어넘는 그의 원동력은 복음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저마다 상황이 다른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식별을 하고 방향을 잡았을까요?
"성령께서 막으셨으므로"(사도 16,6)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사도 16,7)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은 철저히 성령께 의지해 나아갑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의탁하고 순중하여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며 움직였습니다. 막으시면 멈추고 열어 주시면 담대히 발걸음을 옮겼지요.
세상의 방식으로 인간적 기대와 욕심이 앞섰다면 계획이 틀어진 것을 불편해하고 고집을 부려 강행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순히 따릅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의 주도권을 오로지 성령께 일임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잘 가꾸어 나가며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터전임이 분명하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세상 논리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세상은 크고 강하고 높고 많은 것을 추구하느라 작고 약하고 낮고 미소한 것을 착취하고 무시하며 소외시키기 일쑤니까요. 거기 하느님이 계심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무지"한 세상이 하릴없이 지배당하고 있는 물질 논리와 힘의 논리는 선하고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더라도 세상과 야합하지 않고 성령께 이끌려 살아갈 때 유지됩니다. 물론 거센 세속의 물살을 역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거고요, 주위에서도 그런 우리가 불편해서 그냥 대충 살라고 끌어내리기도 할겁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해 나아가는 영의 사람들인 것을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의 사람으로서 사랑과 겸손, 나눔을 통해 얻는 평화와 행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순종하며, 복되고 복된 기쁨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영의 사람들인 벗님을 이렇게 만나고 함께 나아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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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기도 생활의 기본은 가정에서 시작해야
프랜시스 맥넛의 「치유 기도」라는 작은 책에서 부부가 함께하는 법을 배우라고 촉구한다. 매일 부부가 함께 기도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 외에도 기도 생활이 중요한 이유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아플 때 부부가 함께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맥넛은 가톨릭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자 중 20퍼센트만 어머니와 함께 기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3퍼센트는 아버지와 함께 기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기도 생활의 기본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곧 기도 생활이 중심이 되는 삶을 바탕으로 한 헌신은 각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을 외면하게 된 이유도 바로 각 가정에서 그 기본을 세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맞는 기도 방법 찾기」에서
♣갓난애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즉시 탯줄을 끊고 발목을 잡고 거꾸로 해서 첫 숨이 터지도록 해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롭게 새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탯줄을 끊고 비로소 하느님의 숨결로 숨을 쉬어야 영혼이 살아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의 숨결로 숨쉬게 되어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가족 기도 생활을 통해서 튼튼한 심장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비로소 살아갑니다. 가족 기도 생활을 통해 기도가 삶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영혼의 숨이 끊겨 죽은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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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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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j6rebzrGK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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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 19)
어버이
날이다.
조건없는
부모님의
사랑에
머리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역동적이다.
뒷걸음질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주님께서
직접
뽑으신
우리들이다.
우리를
뽑으신 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신앙은
확신이다.
확신은
착각을
걷어낸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뽑으셨다.
하느님
사랑안에서
살아간다는
이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기쁠 수 없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뽑으신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미움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보다
더 크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 모두를
살리시는 것이다.
뽑힌 이들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다.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사랑이
우리 모두를
더 좋은
사랑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믿는다.
사랑은
모두가
소중하며
모두를
철들게 한다.
하느님
사랑으로
성장하는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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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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