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대담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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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길을 만드는 여성평화운동가 김윤옥의 삶과 신학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크리스챤아카데미, 「기독교사상」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신학대화는 한국 기독교가 일구어온 사회참여적 신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함으로써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려는 시도로 기획되었다.-편집자
대담자 소개 / 김윤옥 선생은 한국의 여성해방과 평화운동의 새 길을 개척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사회운동가이다. 1935년 함경북도 성진 출신으로 한국신학대학과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상임총무,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원장, 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장,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등을 맡으면서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데 헌신했다. 저서로 『빗장을 풀다 평화를 살다』가 있고, 공저로 『한국여성의 경험과 여성신학』, 『교회와 여성신학』, 『영성과 여성신학』 등이 있다. 편저로 『여성해방을 위한 성서연구』가 있고, 『하나님의 새 이브』(쿠어트 뤼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여성신학의 전망』(몰트만 벤델), 『돌이 아니라 빵을』(피오렌자), 『평화윤리』(볼프강 후버), 『신약성서의 여성관』(아라이 사사구), 『천년과 하루』(베스터만), 『한일 그리스도교 관계사 자료』(공역) 외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송진순 박사는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신약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에서 강의하면서 젠더와 생태 영역에 관심을 갖고 대중과 함께 성서를 읽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연구실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 기후위기기독교신학포럼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로 『혐오와 여성신학』, 『한국 기독교의 보수화, 어느 지점에 있나』, 『코로나19와 한국 교회의 사회인식』, 『기후위기, 한국교회에 묻는다』,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 시대, 생물다양성에 주목하다』 외 다수가 있다.
두 신학자의 대화는 2021년 6월 29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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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순 안녕하세요? 대화를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회고록 『빗장을 풀다 평화를 살다』를 읽었는데요, 회고록을 읽으면서 감동받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삶에서 한국 여성운동의 생생한 현장들을 마주할 수 있어서 이 만남을 고대했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윤옥 여성신학과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는 후배를 만나니 참 기뻐요. 반갑습니다.
여성신학과 여성운동의 뿌리
송진순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의 선생님의 삶은 ‘여성’, ‘평화’, ‘인권’ 세 가지 주제로 묶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성차별적 교회 구조에서 여성해방운동, 원폭 피해자 지원 운동, 분단 극복을 위한 민간 최초의 남북 여성 교류 노력, 일본군 위안부 대책 운동 등 각기 다른 현장에서 여성해방과 평화, 그리고 인권 문제와 마주하면서도 이들이 다른 결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는데요, 이렇듯 역동적인 활동의 동력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윤옥 나의 활동의 동력이 어디서 왔는가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영향, 그리고 신학의 스승들의 영향이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제가 3대째 기독교인이에요. 외할아버지는 구한말에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구국의 뜻을 품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되셨어요.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외할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함경남북도를 넘나들며 가정교회를 여럿 세우셨지요. 외할머니는 신앙적으로 깨인 분이셨어요. 당시 두 아들뿐만 아니라 딸 셋을 모두 전문학교에 보내셨지요.
당시 함경북도 성진에 캐나다장로회에서 파송된 구례선 목사(Robert Grierson, 1868-1965)가 와서 교회와 학교, 진료소를 세웠어요. 이 진료소가 제동병원의 전신이에요.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한국인 의사를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함흥에 13명, 성진에 8명의 청년을 경성의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보내요. 그중 한 사람이 김성우, 우리 아버지셨어요. 아버지는 제동병원에서 의사로 계시다가 일본의 교토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성진에 병원을 개원하셨어요. 병원에는 간호사가 열세 명에 약사가 두 명, 병실은 스무 개가 있었지요. 우리 집은 병원 옆에 있었는데 늘 사람들이 오갔지요. 아버지는 의술은 인술(仁術)이라 하면서 돈이 없는 환자에게는 낼 수 있는 대로 내라고 하고 그냥 치료해주곤 하셨어요. 가끔 집에 들어오면 대문 앞에 쌀가마가 놓여 있었는데, 치료비를 내지 못한 환자가 추수를 마치고 쌀을 갖다 놓은 것이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쌀을 환자 가족들에게 나눠주셨지요.
어머니는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를 나왔는데, 늘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다니면서 큰 집 살림을 시원하게 해낸 여장부였어요.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도 많아서 집안은 늘 시장 같았어요. 그때 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끄러워서 정원으로 난 뒷방에서 독서에 취미를 붙였지요. 한국전쟁이 나고 부산으로 피난하는 중에도 어머니는 신학원 동창회장을 맡으면서 피난민들에게 우유죽을 쒀주고 옷을 나누는 등 자선사업을 하셨어요.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레 인간관계 훈련도 하고, 일상에서 인간적 품위를 지키면서 남을 돕는 일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었지요.
우리 가족은 성진중앙교회를 다녔는데, 거기 담임목사님이 훗날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를 한 김춘배 목사님이었어요. 1934년에 교단 총회를 앞두고 목사님이 여성 장로 제도 청원에 관한 건을 지원하면서 「기독신보」에 “성서에서 여성에게 잠잠하라고 쓴 것은 2천 년 전 지방교회의 풍습이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해서 파장이 컸지요. 내가 그 목사님에게 유아세례를 받고 설교를 듣고 성장했으니 여성운동가의 삶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싶어요.
송진순 선생님의 유년 시절에 한국 근대사와 기독교 선교의 자취가 그대로 스며 있었네요. 특히 현재도 교인 절반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주요 직제에서 여성이 배제된 상황에서, 당시 여성 장로 청원은 파격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어머님의 신앙과 활동이 선생님의 모습 속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처음부터 신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김윤옥 아니에요. 처음에는 아버지와 같이 의사가 되려고 서울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해부학 수업 중에 졸도하고 포기했지요. 결국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숙대 영문과에 들어갔어요. 어릴 때부터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보면서 유럽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졸업하고 반도호텔에 있는 뉴스위크사에 들어갔지요. 1년 즈음 지나 파리로 갈 기회가 있었어요. 파리에 가면 대학에서 디자인이나 그림 공부를 하면서 멋있는 인생을 살 줄 알았지요. 어머니가 보기에는 딸이 신앙적이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였던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끌고 수유리의 한국신학대학에 편입시키셨어요.
그렇게 신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의외로 신학이 너무 매력적인 거예요. 그때 한국신학대학의 교수님들은 학문적으로도 우수했지만 인격적으로 너무 훌륭한 분들이셨어요. 구약학의 김정준 교수님, 문익환 교수님, 신약학의 전경연, 안병무 교수님, 이우정 교수님, 조직신학의 서남동, 박봉랑 교수님, 기독교윤리의 김재준 교수님, 기독교교육의 문동환 교수님 등 신학계에서 기라성 같은 교수진들이 가르쳤어요. 서남동 교수님은 수업에서 자기 시대의 신을 변증했던 신학자들의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학생들에게 신학적 사고의 토대를 마련해 주셨지요.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한신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기에 충분했어요.
더욱이 이분들은 신학을 지식으로 전달하는 분들이 아니었어요.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사회 속에서 신학의 위치를 진심으로 고민하고 실천하신 분이었지요. 신학이 한 인간의 삶과 신앙에서 분리되지 않고 그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로, 사랑으로 이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신학대학을 못 떠나고 디자이너 되는 것을 포기했지요.
송진순 인간미 있는 실력파 교수님들 덕분에 패션 디자인을 꿈꾸는 영문학도에서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의 길을 결정하신 것이네요.
김윤옥 맞아요. 한 번은 김재준 목사님에게 “하나님 계시나요?”라고 물었더니 “너, 왜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찾니?” 그러면서 ‘생활신앙’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셨어요. “신앙은 생활신앙이야. 일상적인 생활 전반에서 신앙을 가져야 돼.” 그러면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이야기하셨어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신다. 교인들은 흩어지는 교회다.”라는 의미에서 생활신앙이 제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안병무 박사님은 성서를 사회사적으로 보는 눈을 키워주셨고요. 그리고 독일 생활 13년 동안 퇴트, 보른캄, 후버 등 독일 고백교회 신학자들을 배우면서 감명 깊은 대화도 나누고 강의도 들으며 나의 신학적인 관점과 의미 있는 기독교적 행위들을 배웠어요.
여성해방운동가로서의 삶
송진순 신학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이 이해됩니다. 이후 선생님은 한국에서 선구자적으로 여성운동과 여성신학의 길을 걷게 되셨는데요, 여성의식의 싹은 어떻게 틔우셨나요?
김윤옥 신학의 세계에 심취하면서 나는 신학대학의 유일한 여자 교수님인 이우정 선생님에게 헬라어를 배웠어요. 선생님은 여학생 기숙사 사감을 맡으셨는데 내가 선생님을 수시로 찾아가서 성가시게 해드렸지요. 이우정 선생님의 소개로 강원용 목사님과 만나서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짓기 전 초대 간사로 활동하게 되었어요. 강 목사님이 일본어로 된 1960년대 여성해방운동과 여성신학 책들을 빌려주셨는데, 당시 성차별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던 내게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어요.
여성의식과 여성의 인간화 운동에 대해 목사님과 많이 대화하고 배우면서 여성의 고유함을 신학으로 해석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누가복음의 여성들”을 졸업논문으로 썼지요. 여성의 관점은 교회와 사회에서 많은 억압과 차별을 분간하며 종지부를 찍도록 하는 관점이라는 부분에서, 이것은 본회퍼의 ‘아래에서의’ 시각과도 통하는 것이에요. 새로운 신학적 관점과 여성신학의 논의들은 그간 문학과 신학 사이에서 고민해왔던 내 안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어요. 예수는 교리나 신비에 갇힌 종교적 존재가 아니라 오늘도 나에게 할 일을 주고 있는 생명이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지요.
송진순 선생님은 교회의 성차별적 구조에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면서 활동하셨지요. 그중 개신교 최초로 여성 목사 제도 헌의 과정에 적극 참여하셨는데요, 지금도 여성 안수를 불허하는 교단이 있으니 당시에는 활동하시면서 우여곡절이 참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김윤옥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베다니평신도학원 간사로 일했어요. 베다니평신도학원은 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소속으로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졌어요. 1965년에 박형규 목사님을 초대 원장으로 맞이하면서 같이 일하게 되었지요. 당시는 평신도 운동의 시대여서 초교파적 성격의 남녀 교역자와 평신도 교육 프로그램들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1960년대 현실분석과 사회참여 시각을 바탕으로, 문익환 목사님의 “구약성서에 나타난 세속화 신학”, 서남동 목사님의 “현대신학의 특수문제와 전망” 강연이 있었고, 주목할 만한 성과로는 “여성평신도지도자훈련”이 있었어요. 목사 부인이나 여전도사들을 대상으로 여전도사의 교회사적 지위와 전통, 여전도사에 대한 교회법적 문제, 초대교회 여성 지도자에 대한 성서 연구들을 진행하면서 성차별적 구조에 대한 의식화 작업을 한 것이지요. 이것을 기반으로 ‘기장여교역자협의회’라는 조직이 결성되어요. 거기에서 전국의 여전도사들이 하나로 결집하고 자신들의 비인간적 처우를 인식하면서 총회에 시정을 요구했어요. 이 소식이 다른 교단에게도 알려지면서 예장(통합)이나 감리교에서도 여교역자협의회가 조직되었지요.
이 과정에서 저는 교회 여성의 경험을 생생하게 접하면서 성차별적 교회 문화와 제도에 분노했어요. 그리고 1969년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상임총무로 취임하면서 ‘여목사 제도 헌의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지요. 물론 기장 여신도회는 해마다 교단 총회에 이 안건을 제출했지만 번번이 부결당했어요. 저는 기회가 되는 대로 지방에 내려가 이 문제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어요. 어떤 교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단에 못 올라가게 해서 헌금 주머니 놓는 책상에서 말하고, 어떤 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연 자체를 거부해서 YWCA 강단을 빌려서 모인 적도 있지요. 여성 목사 제도 자체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력 구조에서 수용하기 힘든 의제이지요. 교회 직제의 하위 70%가 여성으로 이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성 뒤에서 침묵을 지키고 순종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지요. 이러한 인간차별, 성차별이 얼마나 비복음적이에요? 그렇게 기장 여신도회와 전국연합회 실행위원들의 노력으로 1974년 여성 목사 제도에 대한 헌의안이 통과되었어요. 그 기쁨을 안고 나는 독일로 떠나게 되었어요.
송진순 강단이라는 상징적 권력에 남성과 여성 모두가 함께하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만드셨네요. 그런데 선생님은 기독교 여성교육과 여성운동에 힘쓰면서도 막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으셨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김윤옥 헌의안 통과라는 성과를 안고 여신도회 40차 총회를 치르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첫째는, 안수만 받고 목회 현장은 갖지 않은 목사가 진정한 목사인가? 존경받는 목사는 고사하고 목사다운 삶에 대한 고민이었지요. 그보다는 여성운동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둘째는, 여성운동은 권력의 집중을 반대하는 운동이에요. 권력 분산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회와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하는데, 가부장적으로 주조된 교회는 여성 목사가 대안적 목사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구조예요. 여신도들도 위계적 문화를 내면화하고 수동적으로 안주하고 있기에 여성 목사들의 교회 개혁이 좌절되곤 했지요. 그래서 저는 목사 안수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권사나 장로라는 계급도 거부했어요. 이후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평등한 목회를 지향하는 ‘형제교회공동체’나 ‘소교파운동’을 보면서 이러한 저의 신념이 더 확고하게 되었어요.
송진순 한국에 여성학과가 신설된 것이 1977년인데요, 어느 분야보다 신학에서 발 빠르게 여성신학과 여성해방운동이 진행되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더욱이 선생님의 선구자적 시각과 실천들이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었는데요, 그때와 비교해서 한국교회와 교단이 위계적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 얼마나 평등한 공동체로 나아갔는가 생각해보면 반성할 부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유학 시절
송진순 독일에서의 유학 생활은 어떠했는지, 선생님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윤옥 독일 유학의 길은 남편인 손규태 교수 덕분이었어요. 당시 남편은 민중신학의 모태인 한국신학연구소의 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소장인 안병무 교수님의 소개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하인츠 에두아르트 퇴트(Heinz Eduard Tödt) 교수님과 연락이 되어 가게 되었어요. 독일에 가는 과정에 우여곡절도 많았어요. 남편이 먼저 독일에 들어가고 나는 두 아이들과 있다가 출국해야 했는데, 내가 반정부 운동을 하는 여성단체 총무이자 실력자로 알려져서 유럽에 가도 반정부 활동을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출국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한독교회협의회에 참석하러 우리나라에 온 독일교회 대표들이 항의문을 써서 지원하게 되면서 우리 식구는 1년 반 만에 재회할 수 있었지요.
한국의 투쟁 현장에서 지치고 거칠었던 마음은 독일의 자연과 상식적인 생활들 속에서 치유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가 남편이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학생목사 자리를 제안받았어요. 퇴트 교수가 논문에 치중하라고 강권해서 하지는 못했지만, 그 후 1977년에는 급한 사정이 생겨 공석이 된 프랑크푸르트의 라인마인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었지요. 교회는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와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기독교와 상관없이 그 지역 한인들의 친교공동체 성격이 강했어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 집이 언젠가부터 한국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참새 방앗간이 되었지요. 7년의 목회 기간 동안 민주인사들, 유학생, 은사님을 포함해서 1,000여 명의 손님들이 다녀간 듯해요.
송진순 독일에서 유학 생활과 목회 중에서도 어머니처럼 큰 살림을 이끄셨네요. 한인교회라는 특성상 목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더 많은 도전이 있었을 텐데요. 그곳에서도 여성단체를 결성하신 이야기와 선생님의 행보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김윤옥 독일의 한인교회 여성들은 대부분 파독 간호사들이었어요. 이들에게 한인교회는 한국말을 하고 같이 밥과 김치도 나누는 친정과 같은 곳이었어요. 나는 이들을 위한 교회 여성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교봉사국의 바이싱거(Weissinger) 목사를 찾아가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했어요. 그는 이미 독일교회여성연합회(Frauenarbeit)를 잘 알고 있어서인지, 두말없이 장소와 교통비를 포함한 재정지원을 약속했지요. 여성들이 신앙생활로 위로만 받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주적인 조직이 필요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재독한인교회여성연합회’를 만들고 제가 초대 회장으로 4년 동안 활동했어요. 강의와 성서연구, 아침기도회를 지속했고, 사범대를 나온 임영희 선생님의 관심으로 재독한인 청소년 세미나도 조직하게 되었지요. 한인 여성들의 주체적인 모임을 넘어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연대를 만들었어요. 구속자 가족에 대한 후원이나 원폭 피해자 지원 활동과도 연대하게 했어요. 독일의 한인 여성들도 보람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지요. 이 모임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하는데, 제가 더 감사하게 생각해요. 여전히 원폭 피해자 2세, 3세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지속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독일개신교 선교봉사국의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독일 여성들과 각 지역을 돌며 회의한 것도 제게는 귀한 경험이었고, ‘기생관광반대운동’을 보고한 것도 기억에 남아요. 독일에서 활동하면서 더욱 한국 여성과 세계 여성이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지요. 당시 한 회의에서 한국과 대만에서 벌어지는 일본 남성의 성매매 관광 실태를 보고했는데, 이것이 그들에게 깊은 울림이 되었지요. 그리고 성적 착취와 억압 및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은 독일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 미국 등 여러 곳에서 일어났지요.
그동안 반정부 인사로 주목되어 출국이 거부된 이우정 선생님을 대신해서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교회여성연합회에 참석하거나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세계개혁교회연맹 100주년기념협의회, 비엔나에서 진행된 유엔인권위원회 소위원회에 참석해서 한국교회와 아시아 여성인권 운동에 대해 보고하는 등의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여성평화운동가로서의 삶
송진순 한국을 넘어 국제 사회에서 여성해방을 위해 활동하셨네요. 그러면 언제부터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게 되셨나요?
김윤옥 내가 귀국해서 하고 싶었던 일이 독일교회가 노력하던 평화운동이었어요. 분단국가였던 독일에서 평화를 향한 교회의 노력을 보면서 한반도의 적대적 상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어느 해였는지 잊었지만 독일 시민들이 미국의 퍼싱Ⅱ 미사일 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아우토반을 꽉 메운 평화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서 미국대사관과 소련대사관을 에워싸는 거예요. 자기 나라를 지키려면 저 정도는 해야지 싶더라고요. 특히 생명과 모성, 그리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유럽 여성들의 여성주의적 반군사주의 평화운동을 알게 되면서 한국의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의 결합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독일개신교의 세계원조국 아시아 담당인 한네로레와 바이싱거 목사에게 한반도 여성주의 평화운동에 대해 논의했어요. 그리고 이들은 제가 한국에서 평화운동 프로젝트의 재정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어요. 귀국하고 1년 정도 준비를 마치고 1989년 서울 양재동의 한 건물을 빌려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기여평)을 창설했어요. 한국 최초의 여성평화연구원이었고, 이사진은 이우정, 이효재, 박순경, 장상, 한명숙, 이문우, 이현숙 등 여성계 지도자들을 모셨지요.
송진순 차별과 억압을 발견하고 극복하는 여성운동과 생명살림의 평화운동을 하나로 엮어내셨는데요, 이것을 엮어내시는 선생님의 실행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당시 통일담론도 아니고 평화담론과 평화운동을 한다는 것이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초기에 어떤 활동을 하셨어요?
김윤옥 내가 평화학으로 학위를 한 것도 아니고 개척하는 입장이어서, 여성주의적 평화연구가 자리잡는 데에는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우선 신학 전공 후배들이 모였고, 기독교 여성들의 평화연구원이라는 이름대로 평화에 대한 새 연구를 시작한 것이지요. 나는 원장이었고, 상임연구원으로 양미강, 김정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모두 평화운동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지요. 매일 모여 공부하고 토론과 기획을 고심하면서 소식지를 내고, 기수별 교육 프로그램과 토론마당을 진행했지요. 유대인들의 인사가 ‘샬롬’이죠. 샬롬이 평화거든요. 그런데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샬롬은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해요. 평화는 예수가 말하는 기독교의 진수예요. 그건 일상의 모든 과정에 스며 있는 물리적 폭력, 심리적 폭력,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요.
송진순 우리 안에 있는 차별적인 구조를 해체하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포괄적 의미의 평화를 이야기하셨네요. 여성주의적 관점이 평화에 대한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되었고요.
김윤옥 차별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요.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인종이 다른 사람들까지 곳곳에 차별과 억압이 있으니까요. 폭력 없는 사회를 꿈꾸고 인간화를 실현하는 과정이 평화로 가는 과정이지요. 여성주의 관점에서 평화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사실 가장 급진적으로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서 생명주의 입장에 서는 것이죠. 교회의 위계적, 복종적 군사주의 문화와 제도, 정부의 파병 움직임, 군사비 증강과 복지비 삭감 문제, 사회 곳곳에 있는 군사주의 문화 등 비판할 것이 너무 많아요. 여성평화운동은 긴 호흡으로 지속적인 의식화 작업을 통해 가야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성신학자들의 평화 연구에는 한계도 있었어요.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평화도, 여성문제도 설명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기여평은 여성단체연합과 연대하게 되었고, 이후에 기여평은 독일교회의 재정지원이 끝나면서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의 병설 연구원으로 편성되어 ‘여성평화연구원’으로 개명했어요.
여성평화운동을 하면서 큰 보람으로 남아 있는 것은 30년 전의 남북 여성교류 행사를 들 수 있어요. 1991년 6월에 이우정 선생님이 5월 말에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심포지엄에 참여했다고 하셨어요. 북측, 남측, 일본측, 그리고 재일여성들이 만났던 감격스러운 모임을 이후에도 이어가자고 하시면서 다음에는 서울에서 심포지엄을 하자고 제안하신 거예요. 기여평과 교회여성연합회와 여성단체연합이 모여서 실무진을 구성했어요. 11월에 서울에서 열린 2차 토론회에서 나는 토론 진행위원장으로 나서며 평화 부문 발제자로 역할을 했어요. 다음 해 1992년에는 평양 토론회, 그리고 1993년 4월에는 다시 도쿄 토론회로 모였어요. 세 번의 토론회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며칠을 걸려 이야기해야 할 거예요. 남성들도 못 하는 남북 민간교류를 여성들이 처음으로 이뤄낸 것이죠. 이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남과 북이 냉전 태세가 되면서 이 토론회는 중지되었어요. 그래서 남북여성교류 실행위원회를 해체하고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라는 여성평화운동체를 만들었어요. 이 단체는 지금까지도 존속하면서 평화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여성신학자로서의 삶
송진순 여성들이 회의를 통해서 평화의 물꼬를 튼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인데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쉬워요. 선생님은 여성들의 연대와 평화운동을 통해 진취적인 운동가다운 면모를 가지셨지만, 신학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셨어요. 한국여신학자협의회(여신협)와 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시면서 번역도 많이 하시고 지금도 발간되는 논집 「여성신학」의 발판도 마련하셨어요.
김윤옥 1987년 10월 독일에서 귀국하고 여신협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여신협은 한국의 여성신학과 교회개혁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인데, 여기에서 신학위원장과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어요. 여성신학이 신학이라는 종교적 프리즘을 통해 여성차별에 대해 연구하고 행동하는 학문인 것이니까요. 교파를 초월해서 여성들의 연대와 자매애를 공부와 운동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지요. 그 당시 나는 매일 여신협, 기여평, 그리고 교회여성연합회와 여성연합을 오가며 활동하고, 밤에는 매일 2시간씩 독일과 일본의 여성신학 책들을 번역했어요. 버지니아 울프가 매일 2시간은 부엌에서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 나도 2시간은 꼭 좋은 책을 번역하기로 한 것이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여성신학의 전망』(몰트만 벤델), 『돌이 아니라 빵을』(E. S. 피오렌자), 『신약성서의 여성관』(아라이 사사구) 등 그렇게 여성신학 책들을 번역했어요. 남편과의 공역도 많은데 본회퍼의 윤리나 베스터만의 『천년과 하루』 등 서너 권이 되지요. 베스터만의 책은 구약학자이신 민영진 교수님이 번역해주어 고마웠다고 말씀하셔서 보람을 느낀 책입니다.
그리고 한국여성신학회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여성신학회는 정숙자, 최만자, 한국염 선생이 이끌었는데, 남성 신학자들 중심의 기독교 공동학회에 가입하는 성취를 이뤄낸 에피소드를 여러 번 들었어요. 당시 공동학회에서 여성들이 여성신학회의 가입을 주장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남성 신학자들이 꽤 있었다는 거예요. 그로부터 3년 뒤 변선환 선생님이 회장으로 계실 때 학회 가입을 거론하며 용감하게 발언한 사람이 최만자 선생이었어요.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것입니다.”라는 말에 남성 신학자들이 침묵에 빠졌고, 그해 여성신학회가 정식으로 공동학회에 가입하게 되었답니다. 1995년은 한국교회가 ‘희년’으로 설정한 해였는데, 공동학회에서도 여성 회장을 선출해야 하지 않느냐고 강력하게 발언했고, 이것이 효력을 발휘해서 손승희 교수가 공동학회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회장이 되었지요. 이 모든 일들이 남성 중심적인 신학계에 여성의 시각으로 새로운 신학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나는 학회 회장도 맡고 여성신학의 발전을 위해 해마다 연구집을 발간하기로 했어요. 마침 내가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으로 있었고, 진보적 신학사상을 향해 열려 있던 서회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한국여성의 경험과 여성신학』, 『교회와 여성신학』, 『성서와 여성신학』, 『영성과 여성신학』 등 서구 여성신학이 아니라 민중 여성의 경험에 입각한 한국의 여성신학을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지요. 당시 편집위원은 손승희, 최만자, 이경숙, 최영실, 이은선, 김순영, 정현경, 강남순이었지요. 우리는 지금도 만나서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송진순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을 따라가니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네요. 지금처럼 전화와 인터넷을 통해 바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는데,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여성들 간의 대화와 모임이 활발하셨어요. 또한 각 현장에서 차별과 억압을 파악하는 통찰도 있었지만, 여성 연대의 활동과 결과물로 옮기신 실행력도 대단하세요.
김윤옥 내가 혼자서 한 일은 아니고 모두가 자매애로 뭉쳐서 함께 한 것이지요. 지나고 보니 나는 정말 흐르는 강물처럼 살았어요.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일이 생기니까 하고, 다음에 생기니까 또 하고, 그래서 흐르는 강물 같다고 생각해요. 나는 매 순간 어려움보다도 보람을 느꼈어요. 인생이라는 게 삶의 의미를 느끼고 뛰어야 되거든요. 그래야 기운이 생기고, 목적이 생기고 희망이 생기잖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생활 태도이죠. “다른 사람의 곤궁이나 다른 사람의 어려운 것을 나하고 떼어서 생각하면 안 된다.” 김재준 목사님의 가르침이신데, 다른 사람 일을 다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나가는 것, 이것이 본회퍼가 말하는 성숙한 인간이고, 김 목사님이 이야기하신 생활신앙이지 싶어요. 제가 그분의 제자죠.
당신의 죽음과 소망
송진순 코로나19팬데믹 상황에서 수많은 죽음이 있었고, 종교가 종교의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팬데믹이 이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그대로 보여주게 되었는데요, 선생님은 지금 이 사회의 모습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윤옥 이렇게 과학이 발전된 시대인데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이 숨졌지요. 그런데 죽음도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코로나 초기 위기 상황에서 죽음은 선택되었으니까요.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요양원에 있는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병원에 넘기지 말라는 행정명령이 있었고 많은 숫자의 고령 인구가 사망했으니 비극인 것이지요.
사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눈앞의 코로나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인 것 같아요.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주요 글로벌 대기업(GAFA)이 자본을 독식하고,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해지고, 기후변화도 점점 극단적이 되는 것을 보면, 인간에 대한 존엄이나 생명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시대인 것 같아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공성을 실현하고 진정한 의미의 생명 살림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야 한다고 봐요. 그게 평화운동의 흐름이 되겠지요.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는 남편이 떠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손규태 교수가 1993년부터 26년간 투석을 했어요.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하면서 강의하러 다녔지요. 투석하고 오는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안되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열심히 음식해서 대접하고 그러면 회복해서 또 투석하고 그러면서 이리 활동을 한 거예요. 손 교수가 윤리학을 하고 나는 여성운동을 했으니까 결혼하면서 우리는 평등 부부로 살자고 하고 토론도 많이 하고 책도 같이 번역하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손 교수가 많이 양보하고 지원해주었지요.
그런데 남편의 마지막 14년간은 내가 간병인으로 살았지요. 나중에는 심장 판막에 문제가 생겨서 인공판막수술도 했는데, 심장과 폐에 물이 차니까 투석도 어려운 거예요. 남편이 진료를 보고 나오면서 “삭카쎄”(Sackgasse)라고 하더라고요, 독일어로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인데, 의사의 태도를 보고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때부터 투석을 그만두고 떠날 생각을 하더라고요. 내게 너무 오래 고생시켰다고 하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지요. 두 아이들이 독일에서 와서 가족이 일주일을 함께 보냈어요. 마지막에 독일 맥주를 사서 이별을 하자고 해서 네 식구가 “츄스![Tschüss, 안녕(헤어질 때)] 그래 또 만나자.” 그러면서 담담하게 헤어졌어요.
마리아 릴케가 죽음은 자기의 책임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곱고 아름답게 떠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어요. 손규태 교수는 정말 아름답게 떠났어요. 그렇게 깨끗하게 말이지요.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거는 1인칭이 아니에요. 1인칭은 내가 죽어야 아는 거고. 3인칭도 아니고 2인칭이라고 생각해요. 배우자가 떠나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죽음이라는 게 가까이 오거든요. 바로 2인칭 죽음인데, 역시 종교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해요. 종교라는 게, 진짜든 가짜든 간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부활과 다시 만날 소망을 이야기하면서 지금의 우리를 살게 하고 다음의 죽음을 준비하게 하잖아요. 그렇게 희망을 주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해요. 나 역시 여기서 마감하면 어머니도 보고 남편도 만나고 자식처럼 아꼈던 우리 고양이 소오냐도 만나겠지 하는 희망을 안고 있어요.
송진순 저도 동감합니다.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강물처럼 사셨다는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선생님의 삶과 학문의 여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여성신학과 여성해방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의 선구자로 신학과 실천의 본이 돼주셔서 후배로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윤옥 저는 지금 더욱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이 빛을 발하리라 생각합니다. 여성신학을 하는 후배들의 활동도 기대합니다. 제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