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 모두 소중하게 생각할 거야.
돈으로 살 수 없는 추억이니까, 나에게는 가장 행복하게 기억 될거야.
1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거야. 너와 함께한 날 모두를-
... 사랑해, 나도 내 마음을 아는 데 오래걸렸어.
그래서 너에게 미안해.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음 좋았을텐데 지금 이렇게밖에 못해줘서 미안해.
내- 마음을 받아줄래? 너만 괜찮다면 널 영원히 좋아해주고 싶어."
횡설수설 - 알 수 없는 말들로 가득한 내 모습에 그 애가 실망하진 않았을까.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눈을 살며시 떴는데-
..... 그 애는 화가 난 표정이었다. 왜지? .. 왜- 왜야?
"..너한테 실망했어, 신이백."
.... 실망 - ? ..... 그 애가 나에게 실망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머릿속이 깨끗해져버렸다.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 감동한 건 사실이야.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해준 너에게 감동한 건 사실이야.
그런데 넌 지금 너 조차도 돌보지 않고 있잖아- 난 그런 너한테 실망했어.
아침 잠 많아서 매일 지각하던 애가 새벽부터 아르바이트 하다가 지각하는 거,
너 매일 자율학습 빼 먹으면서 아르바이트 하는 거, 선생님한테 혼나는면서도 그러는 거-
매일 지켜보면서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서 너에게 뭐라고 하고 싶었는데도
니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냥 넘겼어.
... 날 위해 그랬다고 해도. 난 네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적어도 남을 사랑하려면
널 먼저 사랑했어야지. 널 돌보지 않는데 니가 어떻게 남을 아껴줄 수 있겠어.
너보고 잘못했단게 아냐. 단지, 난 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뿐야."
그 애는 그렇게 뒤 돌아섰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큰 보폭으로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한 다섯발자국 정도 옮겼을까, 그 애는 멈춰섰다.
".... 나 때문에 니가 고생했다는 거 알아- 그것 때문에 지금 너에게 굉장히 미안해.
그런데 난 널 좋아하지 못할 것 같아서. 미안해, 이백아."
그렇게 그 애는 내 눈앞을 빠져나가 버렸다.
... 그애는 항상 자기 관리가 철저한 아이였다.
완벽함을 추구했고, 완벽했다. 무엇하나 소홀하게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래, 그런애한테 이런 모습을 보인 내가 잘못한 거야.
그애를 좋아한다면서 그애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한 내가 잘못한 거야.
지우와 도채는 슬비가 가자마자 재 빠르게 내 앞에 나타났다.
걱정스러운 듯 ,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 녀석들은 이렇게 말했다.
"... 이백아- 너, 괜찮냐?"
"이백아, 너무 실망하지 마라- 세상에 쟤밖에 여자가 없냐?"
"그래- 지우 말이 맞아... 무튼, 기운내라- 이백아."
"....... 아니, 나한텐 윤슬비가 전부다."
지우녀석이랑 도채녀석을 집으로 들여보내놓고 혼자 남은 공원은
참 쓸쓸했다. 어둠이라던가 가로등이라던가, 달빛이라던가, 바람이라던가-
그 무엇도 내 신경을 건들지 않아서. 신경 쓰려고 해도 그것들이 신경쓰이지 않아
더 쓸쓸했다. 참- 외로웠다.
문득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저녁에 가족끼리 놀러왔던건지, 꼬마아이 2명이 뛰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내가 만든 촛불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장미 틈에 서 있는 나에게 달려와서는 내 바지를 잡았다.
나는 밑을 내려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형아- 왜 울어요?"
"오빠 울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대요."
".. 누가 운다 그래? 오빠 안 울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고 있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웃어보이자 그 꼬마녀석들도 예쁘게 웃어보이고는 자신의 엄마아빠 품으로
달려가버렸다. 엄마아빠 손을 잡고, 다른 손을 붕붕- 흔들어보이는 녀석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다시 외로움에 남겨진 나는 -
슬비에게 멋지게 불러주려 했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평소 하지도 않던 공부를 더 뒤로 젖혀두고 밴드하는 형을 조르고 졸라
곡을 하나 얻어와 온 세상 멋진 말을 다 가져다 붙이려고 했던 노래...
... 내 작은 노랫소리는 공원의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흘렀다.
노래가 끝날 때 쯔음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동안- 어두워진 그 공원에서,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그 어둠에서 난 웃었다.
하하하- 하하- 하- 하하..... 근데, 왜 웃음이랑 눈물이 같이 나는 걸까.
다음날, 학교에선 내게 꽤나 미안했던지 슬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 이백아, 어젠 내가 말이 좀 심했-"
"지난 일인데 뭐. 어제 늦게 불러내서 미안했다-"
"아, 아냐- 이백아, 저기-"
"어, 미안- 나 그동안 미뤄뒀던 공부좀 하려고. 먼저 간다"
"... 아, 으응- 잘가."
처음에는 슬비의 말대로 나를 돌보기 위해서 그랬다.
혹시나 그러면 날 다시 봐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닮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닮는다는 소리에 혹해서, 그래서였다.
그동안 친구들과 어울리며 논다고 뒤로 젖혀 두었던 공부를 하기로 했다.
주말이고 평일이고 밤낮없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게,
지금이라도 못 받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과제도 꼼꼼히 하기 시작했던 게,
어느 새 습관으로 자리 잡아버렸던 것 같다.
"... 이백이 너, 오늘도 독서실 가는 거야?"
"슬비 너도 지금 독서실 가는 길이면서, 뭘 물어?"
"으음- 이거 내 자리 뺏길 거 같아서 두렵단 말이야."
"말 나온김에- 뺏지 뭐."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독서실에서도 악착같이 공부하며
붙어있다보니 슬비와 함께 있는 시간은 늘어났다.
덕분에 취향과 취미는 같아져 버렸고, 혼자이면 왠지 어색해져 버렸다.
그러나, 우린 아직 '친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우릴 '우정'으로 굳혀가고 있다.
그게 마음아팠다. 가슴은 콩닥콩닥, 계속해서 뛰고 있는데,
우린 친구일 뿐이라는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읽어버려서 -
참 마음아픈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버려서 10대, 고등학생이었던 날 20대로 바꿔버렸다.
"... 아이고 이 독한 것들- 둘이 똑같은 짓 하더니만 상위권으로 입학하셨구만?"
"하하하- 진짜 독한 것들."
"도채랑 지우, 너희들도 중위권 정도는 되는데 뭘."
"이야- 이게 승자 윤슬비의 여유라는 거구나?"
"신이백이나 윤슬비나 똑같으니까 입 다물고 있으라구-"
지우와 도채, 슬비, 그리고 나 -
모두 같은 꿈을 안고 같은 대학의 같은 과에 들어갔다.
....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옆집으로 이사왔던 윤슬비가-
중학교 때 문득 여자로 느껴져 버린 윤슬비가-
고등학교 때 날 멋지게 뻥뻥뻥, 하고 차 버린 윤슬비가-
더 멋지고 더 아름다운 여자가 되버린 윤슬비가 -
.....아직까지도 사랑하고픈 윤슬비가 ... 날, 변화시켰다.
"... 신이백, 너 또 무슨 생각해? 설마아- 공식 외우는 건 아니지?"
"아이고, 돗자리 펴세요. 아가씨."
.......... . . ........ .... .. . ...........
... 사랑은 내가 그녀를 닮게 하였다.
그러나 스물 두살인 지금은 다르다. 슬비에게 영향받아 생긴 행동과 생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긴 하지만, 내 사랑이 슬비를 닮게 했지만-
아직까지도 슬비를 보면 내 가슴은 고등학생이었던 그 때와 같이 뛰고 있지만,
아직도 그애를 사랑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겐 또 다른 사랑이 날 변화시키고 있다.
.... 운 좋게 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날 변화시키고 있다.
사랑은 내가 그녀를 닮게 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올 사랑이 내가 바다를 닮게 할 것이다.
──────────────'프롬:F' - 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1 이백번외 ]
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2 지우번외 ]
..... 용기없는 자에게 신은 냉정했다.
해도 맑고 하늘도 맑았던 날의 오후였다. 매 강의시간마다 쏟아져나오는
리포트들을 해결해야 했지만, 요즘 매일매일 밤을 새며 과제를 해결해 가고 있지만
오늘도 일주일 내내 비워져 있는 시간을 이용하여 복잡한 사람들 틈에 섰다.
... 그 시간을 비운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흑백으로 보인다면, 컬러로 보이는 사람도 있는 법.
언제나 같은 시간,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자가 있다. 오직 그녀만,
그녀의 모습만 '컬러'로 보일 뿐이다.
그녀가 스윽- 하고 내 옆을 지나갔다.
항상 그녀가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는 지 궁금했고
살짝 웃고 있는 입꼬리에- 혹시 날 보고 웃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별로 길지는 않았지만
검은 물감같이, 비단같이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가진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날 스쳐간 다음에도 내 주변을 맴도는
그녀의 향기가 - 날 기분좋게 했다.
"... 으음- 요즘 지우 너, 이상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2차 강의는 시간 늦어서 싫다고 하더니 시간도 옮기고 말이야."
"덕분에 누구 친구들도 시간 옮기고 말이지-"
"하하하- 친구 잘둬서 고생하는 거지 뭘."
눈치 빠른 슬비의 말에 도채랑 이백이도 가세해서 날 놀리고 있다.
괜히 얼굴이 붉어져서, 살짝 웃고 있는 그녀가 생각나서-
그 녀석들한테 들키면 또 놀림받을 거 같아서 주머니에 들어있는
박하사탕을 집어 던져주듯 주고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요즈음, 자꾸만 그녀가 떠올라서 좋은데도 걱정이 된다.
교수님한테 여러번 지적당했는데도 자꾸 그녀가 생각나서,
자꾸 그 얼굴만 떠올라서 정말 걱정이다.
... 그래도 기분은 좋다, 항상.
"여어-"
툭- 하고 내 어깨에 얹어진 손. 이백이는 내 옆에 웃으며 앉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앞만 보고 있던 이백이의 입이 열렸다.
"이쁘냐?"
"누가?"
"... 너-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아, 아냐-"
"어떤 여자야? 예뻐? 하긴- 니가 안 이쁜 여자 좋아할리가 없지만."
"아니라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티가 나?"
"이 형아가 눈치가 좀 빠르잖아. 하하하."
이백인 그런 소리도 참 뻔뻔하게 잘 해댔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하하하- 웃고 있던 이백이는
슬슬 웃음을 감추고 이것저것 물어왔다.
... 어떤 여자냐는 둥, 예쁘냐는 둥, 언제 만났냐는 둥,
그여자도 날 알고 있냐는 둥, 우리 학교 학생이냐는 둥 -
온갖 물음을 던졌지만 그에 대해 정확하게 답을 내려줄 수가 없었다,
착해보이는 여자였지만, 예뻤지만, 그녀를 처음 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날 모르지만, 우리 학교를 뒤져봐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 그렇지만 내가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거, 그녀가 날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에에, 그럼 그야말로 첫눈에 뿅- 하고 간거네?"
"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줄이야."
"하하-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봐."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이백이는 눈치 하나로 내 마음까지 뚫어보고 있었다.
.... 중얼중얼, 쫑알쫑알-
동네 녀석들한테 맞고 와서 형한테 이르고 있는 꼬마마냥
하나부터 열까지, 이백이에게 다 털어놔 버렸다.
뭐 하나도 숨기는 것 하나 없이.
이백이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얻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 30분동안 이야기 털어놓고 '기운내라, 그리고 힘내' 이 한마디 들은게 전부지만.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다.
그 다음날도 그녀를 기다렸고, 그 다음날 역시 그녀를 기다려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날이었나보다. 그 날도 그녀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그녀가 다가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그녀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살며시 빼는 그녀-
...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 아, 저어 저- "
"예?"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은- 왜요?"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혹시, 이름이- 하, 하지우 아니에요? 스, 스물 두살."
"..아닌데- 전 스물 한살인데- 연바다에요. 가볼게요-"
어이가 없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숙여 살짝 인사를 해주고
내 옆으로 빠져나가는 그녀. 연바다- 스물... 한살.
진작 왜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던 걸까. 한달여동안 서 있던 그자리를
바라보던 나는, 스물 한살의 연바다라는 그녀의 이름을 되 세기며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이백이한테 이름 알아냈다고 할까 하다 아무 말도 안했다.
...어차피 도움 되는 게 없지 않는가!
한 일주일 고민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고백'이었다.
꽃집에서 꽃을 살까 하다, 너무 흔한 것 같아서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서
주름지로 장미 만드는 걸 어설프게나마 배웠다.
99송이. 하루동안 다 만드려고 하다보니 미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그녀가 그 곳을 지나가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 포장까지 끝마치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후우, 후우, 후우- 하고 숨을 고르는 사이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 그래, 고백 하는 거야 -
"..저, 저기!"
... 노랫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혔는지 지나가 버리는 그녀.
그 다음날에도,
"... 저기요, 저기-"
..... 이 것이 또 한번, 또 다시 한번-
결국 고백은 하지 못했다. 고백 네 번만에 포기하는 건 좀 이르다 싶어
이번엔 정말. 정말 고백하기로 작정하고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항상 이곳을 지나가는 시간은 11시 26분, 47초.
그런데, 48초가 되도 49초가 되도 - 초시계가 한바퀴 돌아서 27분이 되도.
분시계가 33번 돌아서 12시가 되도.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아무리 그녀를 찾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3일인가, 4일인가- 지나갔다. 그 후로부터 한 번도 볼수 없던 그녀를
보게 된건, 무심코 쳐다본 하늘에서였다. 꽤나 높은 옥상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그녀를 -. 나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 높은 건물의 옥상까지 뛰어 올라갔다.
... 그리고 옥상에 도착했을 때, 그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날 조심스럽게 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데는 없죠?"
"누구 덕분에요. 차암, 고맙네요."
"여긴 왜 올라온거에요? 위험하게-"
"위험한 일 당하려고 올려왔어요, 왜요-"
.... 하나는 연바다, 그녀의 목소리였고 다른 목소린-
이백이였다. 나보다 먼저 올라왔는지 그녀와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녀석이었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그녀와 이백이의 모습을 보았다.
옥상 밑 계단에 주저앉았다. 내가... 늦었다는 생각이 날 더 주저앉도록 만들었다.
나는 무릎에 두 눈을 파 묻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있는데 내 옆을 지나가는
이백이와 그녀였다. 그녀의 향기는 처음으로 마음아프게 와 닿아버렸다.
....... 그녀가 서 있던 곳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그녀와 같은 자세로 그 곳에 섰다.
"... 당신의 이름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구요- 당신의 나이를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요, 당신을 보고 반한지는 얼마나 오래 됬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까만 머리카락이, 살짝 웃고 있는 입술이 좋았는데요- 지금은
당신 자체가 좋아요. 연바다라는 사람이 너무 좋아졌어요. 그래서 매일 당신이 지나가는
곳에 서 있었는데- 기억 못할지도 몰라요. 모를거에요, 아마도.
나는 연바다라는 당신의 예쁜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는데,
당신은 한 번도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잖아요. 많이 힘들었는데- 하하...
...지금부터라도 날 기억해주면 안 될까요? 하지우라는 내 이름 불러주면 안될까요?
내 상상이 아닌. 내 꿈에서가 아닌. 내 눈 앞에서 날 보고 웃어주면 안될까요?"
....... 그녀에게 하지 못한 고백을 했다. 그 곳에서-
이백이는 매일, 입가에서 웃음을 떼어 놓지 않았다.
은근슬쩍, 물어보기로 했다.
"이백아, 요즘 너 기분이 좋아보인다?"
"그래?"
"응,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미소짓고- 혹시, 애인 생긴거야?"
"애인은 무슨."
처음엔 그렇게 대답했던 이 녀석이, 슬비의 집요한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번에 수업 일찍 끝난 날 있지? 그 날, 집에 가는 길에 강아지 한마리를 주워왔거든."
.... 강아지 한 마리- 이백이는 그 강아지를 귀엽다고 말했다.
그것이 연바다, 그녀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척 이렇게 말했다.
"... 나 강아지 볼래."
설마, 아니겠지 하고 갔던 이백이네 집에서 -
혹시나 해서 갔던 그 곳에서 역시나 상처를 얻었다고 해야하나?
.... 박하사탕. 내 주머니에 항상 들어있는 내 보물을 바다에게 건넸다.
"자, 이거 니거야."
"에? ... 하하-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그냥 말 놔도 되니까 지우오빠라고 불러."
"저는 사양 안하는데- 하하, 그럴게요."
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럼 그렇지 -
.... 매일 그녀만 생각하다 며칠이나 지났다.
지금 이백이네 가면 - 속보이는 짓일거야. 조금만 참자, 시간이 지나면 - .. 그래. 시간.
그러다, 이백이한테서 바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 앞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그녀를 찾아갔다.
"... 여기서 일한다는 소리 듣고 왔어, 오랜만이야-"
"아, 지우오빠-"
"다행히 이름은 기억해 주네?"
"그럼- 이백오빠 친군데."
... 이백이의 친구라는 말 - 내가 그 녀석의 친구가 아니면
기억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설픈 웃음이 터져나와버렸다.
................... ... ....
"... 넌- 솔직하지 못해. 그런 자세로는, 너- 신이백을 사랑할 자격이 없는거야." 라고,
...날 사랑해 달라는 말을 빼버린. 그 녀석에게는 아플 말을 던지고 온 날.
이백이랑 싸우고 돌아가버렸다는 그 녀석의 있는 정보, 없는 정보를 털고 털어서
알아낸 그 녀석의 집. 정말 힘들어보이는, 괴로워 보이는 그 녀석이었다.
... 몇 병씩 술을 비워내도 아파하고 신이백, 그자식을 떠올리는 그 애에게는
미안했지만, 신이백에게 이야길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 .... 미안- 전해주진 못하겠다. 그 놈, 나쁜놈이니까-"
"...."
"너 하나 행복하게 못해주는 그 녀석한테 널 양보할 수 없으니까."
수많은 기회들을 놓쳐버린 내게, 신은 '기회'라는 것을 거두어 버렸다.
..... 용기없는 자에게 신은 냉정했다. 그러나 용기를 찾은 자에게 신이
냉정하지 않으리란 걸, 난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난, 하지우란 이름을 걸고 - 연바다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 기다려라 연바다. 세상 누구보다 널 행복하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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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3 ]
엄마랑 아빤, 내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도-
유리네 집에서 지낸다고 거짓말 한 것도-
생판 모르는 남자랑 한 집에서 같이 지낸것도-
... 모두 알고 있었다. 유리가 데이트가 물 건너갔던 날
집으로 와서 모두 말하고 간 모양이었다... 나쁜 기지배.
거짓말은 안 좋은거야, 거짓말하면 혼나- 하고
습관처럼 말하던 엄마아빠는 날 혼내지 않았다.
품 안의 아기 대하듯, 조심스럽게 - 날 달래고 있었다.
"나 왔어- 내가 좀 일찍 왔나?"
"뭐가 일찍이야, 벌써 12신데."
내가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지우오빠가 매일 집으로 찾아왔다.
덕분에 지우오빠랑 엄마는 안면을 트고 지내고 있으며
엄마는 지우오빠를 참한 사위로 점찍어 두고 있는 추세이다.
.... 아, 나 힘들다고-
지우오빠 손에는 봉지가 두 세개씩 들려있었다.
그 봉지를 가리키며 묻자, 지우오빠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 치킨 좋아한다며- 그래서 치킨 사왔지."
".. 치킨? 싫어, 안 먹을래-"
"뼈 없는거니까 추하지 않게 먹을 수 있어. 먹어-"
"피이-"
그래도 명색에 여잔데, 매일 볼 남자앞에서 추할수는 없단 생각에
먹지 않으려 했지만 지우오빠는 먼저 선수쳐 버렸다.
엄마 반 덜어줄까하고 있는데, 손에 들고 있던 다른 봉지를 엄마한테
건네고 오는 지우오빠. 그리고 또 다른 봉지에서는 죽과 내가 먹을 치킨이 나왔다.
".. 얼른 치킨 먹고 입가심으로 죽 먹어."
"오빠가 무슨 돈이 있어서 매일 이렇게 뭘 사와-"
"이래뵈도 이 오빠, 너 먹여살릴 돈은 있다고."
"오빠도 먹어- 점심시간 때 괜히 굶지말고."
계속해서 거절을 하는 오빠. 손으로 치킨의 살점을 적당하게 뜯어
오빠 입에 넣어주니까 이제야 잘 받아 먹는다.
나 한입, 오빠 한입 넣어주다 보니 무언가 어색하고 우스워서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래도 치킨 한 상자를 다 비우고
죽 한 통을 다 비워내고 나자 배가 좀 차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새,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는지.
지우오빠는 강의 들어가야 한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어질러진 것들을 다 정리하고, 버릴 것 버려준 지우오빠는
나에게 생긋- 웃어보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 강의 끝나고 쉬는 시간 될 때마다 전화할게. 심심하면 문자보내고-"
"알았어- 얼른 가봐, 늦겠다."
지우오빠는 그렇게 우리집을 빠져나갔다.
지우오빠가 옆에 있으면, 나에게 쉴 새 없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웃게 해주고 재미있게 해줘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데
지우오빠가 가고나면 그 허전한 자리에 신이백이 점점 차올라서
날 괴롭히고 있다. 신이백 생각이 점점 머리로 차올랐다.
... 열린 문틈으로 엄마는 날 쳐다보고 있었다.
불쌍하다는 듯, 안타깝다는 듯- 그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엄마-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우리 딸은, 뭐든 잘하고 있을거야."
".. 매일 지우오빠 찾아오는데, 지우오빠 보고 웃어주는데-
지우오빠 없어지면- 그러면 신이백이... 생각나... 힘들어, 엄마."
"두 사람이 받는 상처를, 한 사람이 받는 상처로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
.... 상처를 - 줄여라?
그런데, 누굴? 누굴 상처 입혀야 하는 거야?
... 지우오빠를? 지금 손 뻗으면 잡을수 있는 지우오빠를?
... 신이백을? ... 마음이 달려가고 있는데- 신이백을?
........ 난 나쁜애였구나.
"...모르겠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써 버리고, 눈을 꾹 감았다.
후우 - 한숨만 터져나올 뿐이다.
어제 하루동안 지우오빠의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도,
오빠는 오늘도 생긋- 하고 웃으며 나타났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 앉아서는 이렇게 말한다.
"... 어제 내가 학교 도착하자마자 전화 안하는 바람에,
니가 삐져서 전화 안 받는 줄 알았지-"
"내가 그런 걸로 왜 삐져-"
"난 삐졌어. 내 전환데 고의적으로 안 받기야?"
"..치이- 고의는 아니다, 뭐."
지우오빠는 날 따라 입을 삐쭉- 내밀어 보이더니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 우리 바깥으로 놀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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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4 ]
"... 안갈래- 바깥에 나가기 싫어."
바깥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가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이런 복잡한 감정이 또 다시 생기지 않을까-
쓸 데 없는 생각이고 걱정이란걸 알고 있지만 왠지 그랬다.
어느 새 굳어버린 내 표정. 지우오빠는 날 한동안 쳐다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내가 지우오빠 손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자,
내밀고 있던 그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내 어깨에 두 손을 올려 잡고 내 방 구석쪽에 무의미하게
돌려 세워져 있던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거울을 다시 돌리는 지우오빠- 거울엔 내 모습이 비췄다.
거울에 비춘 내 모습은 한마디로 흉악망측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터 버린 입술, 조금은 티 나게 들어가 버린 얼굴-
... 이딴 얼굴로 매일 지우오빨 맞이 했으면서,
치킨 먹는게 추하단 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 예쁜 꽃도 햇빛을 받아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거야-
햇빛을 받으려면 바람도 맞고, 비도 맞아야 하는게 힘들거야. 두렵겠지-
.. 그런데, 지금 당장 힘들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떡해?
얼마던지 더 잘 살수 있는데, 지금 이렇게 무너져 버리겠다고?
옆에 내가 있잖아-"
예쁜 꽃이 어쩌구- 햇빛이 어쩌구- 할 때는 들어오지도 않던
지우오빠의 말들이었다. 그런데 '옆에 내가 있잖아'라는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그 손등에 턱을 올리고 있는-
지우오빠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날 바라보았다.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거실에 있을테니까 준비하고 나와."
"응- 조금만 기다려."
... 지우오빠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나는 내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난 뒤에
장롱을 열었다. 화악- 하고 옷 냄새들이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 신이백네 집 냄새가 났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이상은 생각하지 말자.
청바지 하나, 검정 반팔티 하나 -
대충 챙겨입은 나는 쭈뼛쭈뼛 거실로 걸어나갔다.
TV에만 향해있던 지우오빠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 우리 예쁜 꽃, 햇빛 받으러 가자-"
"닭살이야, 오빠- 예쁜 꽃은 무슨..."
"진짜 예뻐. 예쁘니까 다른 사람 주지 말아야지. 나한테만 꽃 해야된다?"
"날 꽃이라 불러줄 다른 사람을 찾는게 더 힘들걸?"
"후후- 그럼 나야 좋지. 가자, 얼른-"
지우오빠는 일어서며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왠지 선수같은 느낌이 들어, 걸어가지 않고 멈춰섰다.
지우오빠도 멈춰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더니,
내 표정을 금새 읽어내고는 이렇게 말했다.
"... 선수 아냐-너한테만 이러는 거고, 지금 심장 무지 뛰어."
지우오빠는 내 손을 한 번 힘주어 잡고는 걸어나갔다.
손을 뺄까- 생각도 했는데, 지우오빠 손이 너무 따뜻해서 놓지 않았다.
밖에 나가자마자,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와 내 손에 쥐어주는 지우오빠.
한 입 베어물고 오빠를 쳐다보았다. 나와 같이 아이스크림을 베어물고는
날 쳐다보는 지우오빠.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 매일 집에만 있다 나오니까 어때?"
"좋긴 한데- 좀 더운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밝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그럼 어디 들어갈래?"
"아니- 좀 돌아다니자. 지금 기분 무지 좋거든-"
지우오빠랑 한참을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 공원에 들어갔다.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지우오빠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 드라마에서 보면, 남자가 여자 발 마사지 해주던데- 해줄까?"
"그 여자들은 구두 신고 있던데, 나는 운동화 신고 있잖아-"
"뭐가 어때- 구두만 신발이고, 운동화는 신발아닌가?"
"땀 흘려서 냄새나- 오빠 쓰러질지도 모른단 말이야."
"... 그래도, 너 너무 많이 걸은 거 아냐? 매일 누워있었잖아-"
"다리 아프긴 한데- 그래도 발 마사지는 좀 그래. 간지럼도 많이타고."
내 말에 지우오빠는 겨우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한참동안 벤치 위에서, 지나가는 애기들이 장난치는 모습 보며
지우오빠랑 이야길 나눴다. 중간중간 다른 농담도 나누다보니
햇빛아래 너무 많이 앉아있었던 것 같았다.
'가자-'하고 말하자, 벌떡 일어나는 지우오빠. 많이 더웠던 모양-
".. 오빠-"
"응?"
"많이 더워? 땀까지 흘리고-"
"오늘따라 좀 덥네? 하하- 안 더워?"
"... 업혀도 돼?"
"응-"
"..속보여, 오빠- 덥다며."
"그래도 너랑 손 잡는 거, 팔짱 끼는 거, 니가 나한테 안기는거, 업히는 거- 다 괜찮아."
"진짜 속보여, 오빠-"
내 말에 지우오빠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들었다.
'무안하게 시리-'하고 중얼거리는 지우오빠의 말을.
뭐가 무안하냐고 장난치듯 묻는 내 말에 얼굴이 붉게 변한 지우오빠는
정말 귀여워 보였다. 어느정도냐고? ... 애기같이, 진짜 귀여웠다.
밖에 있는 것도 좋았지만 너무 자외선에 노출되는 것 같아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음악도 아닌, 신나는 음악이 틀려있는
카페라 더 마음에 들었다.
카페 중앙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자, 창가 쪽에 앉고 싶어했던 지우오빠는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창가가 좋아?"
"..드라마에서는 창가 쪽에 멋지게 앉는단 말이야."
"오빠 드라마 매니아구나?"
"응- 그래야 여자들이 맘에 들어하는 행동만 하지."
"여자들이?"
".. 아니- 연바다가 맘에 들어하는 행동."
지우오빠는 장난스레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은 내게 진심으로 들렸던 것 같다.
...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 솔직하게 말해줘. 나-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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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5 ]
지우오빠는 벙한 얼굴로 날 멍- 하니 쳐다보더니
옆에 놓여있던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 마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냐구?"
"혹은 사랑하거나-"
내 말에 지우오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 그 대답에 가장 진실된 내 마음을 담으라면, 맞다고 대답할게."
나는 싱긋- 하고 웃었다. 항상 내 얼굴의 표정을 읽어내던
지우오빠는 쉽게 내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 아까에 비해 너무 진지해진 지우오빠의 모습-
나는 계속 그 웃음을 유지한 채로 이렇게 말했다.
"... 난 오빠 안 좋아하는데 어떡하지?"
그제서 내 표정의 의미를 알아낸 듯한 표정의 지우오빠-
지우오빠는 정말 밝은 표정과 해맑은 모습으로,
다시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우오빠는 살짝 몸을 일으켜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
"... 괜찮아,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껴줄거니까-"
그리고 - 입술의 바로 옆, 볼 쪽에 살짝 입을 가져다 댄 지우오빠.
남자치고는 꽤나 부드러운 피부가 스치고 지나갔고,
지우오빠의 입술이 묻었던 자리는 달콤한 향이 맴돌았다.
무엇보다 아까 지우오빠가 들이마셨던 얼음물의
시원함이 볼에 맴돌아서- 그게 더 좋았다.
지우오빠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말을 끝마친 지우오빠는 생긋- 하고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장난스레 이렇게 말했다.
"112에 신고할까, 오빠?"
".. 연바다 사랑죄로?"
"웃겨-"
카페 안에는 마침 사람들이 몇 없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일과 이야기에 빠져 우리를 신경쓰지 않았다.
덕분에 얼굴이 벌겋게 변하지 않았고,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지우오빠의 앞에는 초코우유 하나만 놓여있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내 앞에, 내가 먹기 좋게 지우오빠가 놓아두었다.
내 앞에는 팥빙수 하나에 스푼 두개가 꽂혀있고,
모카 케이크와 치즈 케이크, 그리고 초코우유도 옹기종기 모여있다.
모카 케이크 반조각, 치즈케이크 반조각을 잘라
한 접시에 담아서 지우오빠의 앞에다 넣어주고, 팥빙수는 중앙으로 밀어넣었다.
지우오빠는 그것들을 내 앞으로 놓아주려 했지만
나는 짐짓 인상을 쓰며 다시 오빠 앞으로 밀어 넣었다.
"... 내가 나중에 동그래져서 굴러다니면 어쩌려구-"
"걱정마- 너 굴러다니는 데 힘들지 않게 바닥에 매트 깔아줄테니까."
"오빠, 그거 알아? 너무 여자한테 잘해주면-"
"질려서 떠난다는거?"
"...아는 사람이 그러기야?"
"연바다라는 아가씨도 질려서 떠나갈거라고 하면 안하고-"
"... 떠나갈건 아니지만, 난 자기 이익도 챙겨가는 사람이 좋단 말이야."
지우오빠는 손을 뻗어 내 머리 위에 그 손을 얹었다.
살짝 내려간 고개. 누르고 있는 지우오빠 때문에 고개를 들지는 못하고
눈만 살짝 올려 지우오빠를 쳐다보았다.
뭐가 좋은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 너 누구 많이 닮았어-"
"누군데? 어떤 사람이야? 응?"
"그냥 너랑 무지 닮은 사람 하나 있어-"
닮은 사람? ... 뭐, 닮은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카페에서 주문한 음식을 다 헤치우고 나오는 길.
아까만해도 못 걸을 것 같이 후들거리던 다리는 어느덧 괜찮아져서
이제 좀 살 맛이 났다. 익숙해지기도 했겠지만 자연스럽게 잡고 있는
지우오빠의 손이 날 더 편하게 해준게 아닌가 싶다.
더 돌아다니고 싶긴 했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다니기로 했다.
지우오빠는 집 앞까지 날 데려다주었다. 내가 들어가려고 돌아서자
지우오빠도 내 행동에 맞춰 돌아서는게 살짝 보였다.
... 나는 조용이 중얼거렸다.
".... 오빠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 감정을 이용해서 오빠를 내가 잠깐 이용하는 거야.
오빠면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 이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오빠가 나한테 너무너무 잘해주면.. 미안하잖아.
... 미안해 오빠. 그런데, 조금만 이용할게. 그리고.. 아프지 않게 떠나갈게...."
고개를 돌려 지우오빠가 걸어가고 있을 쪽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멀리 걸어가지 않은 지우오빠-
어쩜, 내가 한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와서 소파에 거의 누워있듯, 한동안 기대있었던 것 같다.
너무 조용한 집.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낸 핸드폰. [ 유리♡ ] - 유리였다.
"오랜만이네- 핸드폰으로 통화하는거."
-그게 문제가 아냐, 너.
"그럼 뭐가 문젠데?"
-너 오늘 외출했었어? 공원이랑 시내랑 갔었냐구.
"응- 어떻게 알았어?"
-... 니가 웬일이야? 방에 콕- 처 박혀있더니만.
우리 엄마의 전화에 한 두번, 집에 들렸던 유리-
두 번, 집에 오면서 했던 말은 모두 '타박' 뿐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오늘 예소 집에 왔어. 한 일주일 쉬라고 보내줬나봐.
"정말? 그 일주일 쉬게 하고 나머진 공부시키겠다는 심보야, 혹시?"
-빙고. 무튼 말이지, 그녀석이 집에 오는 도중에 널 봤나봐.
"나를? .. 으음- 난 예소 못 봤는데? ... 아는척이라도 하라고 하지."
-오자마자 '바다언니 남자친구 생겼나봐-'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데,
그 녀석 핸드폰에 니가 몇 방 찍혀있더라고- 꽤나 잘 생겼더라, 그 남자.
... 누구야? 이백씨는- 으흠, 아닐테고. 소개팅이라도 한거야?
"아아, 지우오빤가 보다-"
-지우?
"응- 하지우라고 한 살 많아."
-남자친구?
"아마도- 어쩌면- 당분간-"
그 대답에 한동안 유리한테 욕 먹어야 했지만,
유리는 전화를 끊으며 이렇게 말했다. '축하해, 이제 좋은 짝 만났네.' .
..... 물론 난 들었다. 통화가 끊기며 아주 잠시 들려온 유리 목소리를.
"연바다 뭐가 이쁘다고 꽃미남들이 득실득실-"
다음에 내가 친히 놀러갈게, 유리야- 아, 하, 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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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6 ]
"꺄아아아- 언니, 우리 얼마만이에요?"
"글쎄, 정말 오랜만이다."
"그쵸그쵸!! 아, 언니 연애하더니 예뻐졌네요?"
"얘는 농담도-"
여기는 유리네 집- 원래 오늘 지우오빠랑 데이트 약속이 있었는데
지우오빠가 좋은 기회를 얻어, 한 이틀간 연수를 가게 되는 바람에
겸사겸사- 유리네 집으로 놀러왔다.
큰 방에는 다크서클이 축축축- 늘어진 유리가 누워있었고
날 반기는 건 유리와는 정 반대의 분위기인 예소였다.
... 따발따발- 공포스런 입담을 자랑하는 예소의 말을 들어주다 못해
쓰러진 유리로 추정되며 나도 머지않아 유리 꼴이 될 것 같다.
"...언니언니언니- 나 그보다요, 에헷. 남자친구 생겼어요."
"남자친구? 저엉말? 축하해, 예소야-"
"강우주라고 나보다 1살 어린놈인데요, 되게- 귀여워요."
"강우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그래요? 히이- 무튼 언니도 지우오빤가? 그 분이랑 잘 되시라구요."
"그래그래- 고맙다."
.... 강우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같긴 했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흔하고 흔한게 이름이라고 하니
그냥 그럭저럭 넘기기로 했다.
... 내가 원래 그럭저럭 넘기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예소는 남자친구 생각만 해도 좋은지 집 이곳저곳을
날아다니고 있었고 나는 친구라고, 유리의 안부를 물으러 걸어갔다.
".. 으흠- 어디 아픈거야?"
"너.. 너도 저리..훠이- 훠어- ... 가.. 훠이훠이-"
"왜그러는데-"
"...애인있는 것들은 죽어야 해. 죽어- 죽어어..."
외로움에 몸서리 치는 유리. 그러나 그런 유리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소는 유리 옆에 앉아있는 내 목에
팔을 두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기쁜 건 알겠다만 왜 내 등에 볼을 문지르면서
기쁨을 표현하냐는 것에 대해 살짝- 불만이 생겼지만 말이다.
집 안에만 있기도 그렇고 해서 바깥으로 놀러나왔다.
유리는 "애인있는 것들끼리 가셔-" 라고 중얼거리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버렸고, 결국 예소랑 사이 좋게
걸어가는 길- .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예소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 언니언니- 내 남자친구 보러가면 안될까요오?"
"이 근처래?"
"응- 잠깐 시내 나왔다는데. 한 번만 보고 가요, 응?"
"뭐어- 그래. 이 참에 예소 애인이나 소개받지 뭐."
예소는 얼굴의 반이 미소로 가득찰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 손목을 꽈악- 붙잡더니 와다다다, 하고 뛰어가는 예소-
그 녀석에게 잡혀 정신없이 뛰다 멈추어섰는데,
횡단보도 건너편에 한 남자가 예소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애야? 우주라는 애가-"
"아뇨. 아는 선배에요-"
아는 선배- 그래.
횡단보도를 건너서 왼쪽으로 꺾고 다시 쭈욱 걸어가자
가로수 옆,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그 남자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예소.
"이 남자니?"
"..아뇨- 너무 무섭게 생겨서. 한 대 맞을 것 같잖아요."
"한예소! 너 장난칠래?"
"..장난 아닌데- 요기에서 만나기로 했단 말이에요."
그래, 요기에서 만나기로 한 건 알겠다만-
무슨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이니 내가?
"이 남자가 이 애인이냐, 아니면 이 남자가 니 애인이냐?"
"아니옵니다. 제 남자친구는 더 귀엽게 생겼사옵니다."
"그래? 저 두녀석까지 줄수는 없고, 이 녀석만 받거라-"
"고맙습니다, 연 산신령님."
...... 정말, 금도끼 은도끼나 지금 상황이나 별반 차이가 없구나.
여튼 - 계속해서 두리번두리번 거리던 예소의 눈에 한 사람이
발견 되었고, 예소는 그 사람을 향해 미친듯이 손을 흔들었다.
예소의 빠르게 흔들리는 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예소의 애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예소의 앞까지 다가왔다.
"누나, 오래 기달렸어? 미안, 좀 늦었지-"
"아냐. 아, 소개시켜줄게- 이 쪽은 내 애인 강우주구요, 이 쪽은 우리 언니 친구 바다언니."
드디어 예소가 조금 몸을 틀었고, 그제서 그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응? 이름 뿐만 아니라 어디서 본것 같다.
"...어어- 이 누나 어디서 많이 본 것같은데."
"우주야, 먼저 인사 해야지-"
"아아, 안녕하세요- 저는 강우주라고 합니다. 어디서 봤었나요?"
"그래 안녕- 어디서 만난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도 그래-"
인사는 대충 - 서로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던 우리 둘과
그런 우리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예소.
예소는 뒷전, 얼굴 살피기에 바쁘던 그 녀석과 내 입에서
동시에, 아주 동시에 터져나온 한 마디.
"...신이빈!"
"...이빈이!"
그래그래, 어디서 많이 봤나 했더니이-
전에 이빈이가 나한테 사진 한 장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 헤어진 남자친구라며- . 그 녀석이 이 놈이었구나.
우주라는 그 놈은, 이빈이랑 그냥 친구사이로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빈이의 지갑속에 나와 이빈이, 그리고 이백이 그놈- ...
함께 찍은 사진이 항상 들어있었다고.
우주란 녀석은 예소와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자리를 뜨게 됬다. 그 녀석의 말은 즉,
"실은 3학년 1주일 쉬고 돌아오면 그 때 2학년 쉬도록 보내주거든-
지금 오후 쉬는시간인데, 살짝 빠져나온거야. 나 갈게, 누나.
아, 바다 누나도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기회있으면 또 보구요."
이랬다. 여자친구가 아무리 좋대도, 이 근처에 있다고
학교에서 낼름 빠져나오는 저 나쁜 녀석- 학생은 학교에!
.... 그나저나 예소네 학교는 참- 독특하게도 돌아간다.
기숙사 제도라 토요휴업일에는 집에 올만도 한데
애들끼리 서로 눈치만 보다 집에 안가고 공부만 한다고-
... 애들이애들이, 정말 - .
이런 학교에, 이런 학생들이니 1주일 턱- 휴가 내줄만도 하지.
예소는 그 쪽에서 빠져나오는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예소랑 나는 유리네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만 한 봉지
사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왜? 매우 더웠기에
"... 애인 있는 것들은.. 아주 그냥- 화악... 아이고, 내 팔자야-"
..... 그 때까지도 커플타도를 외치고 있던 유리였다. 독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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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7 ]
유리의 길고 긴 지독한 커플타도 소리에 못 이겨
집을 나오는 길. 내 의지대로 한 일이 아니면 기분이 좋지 않은 나로써는-
떠밀려 나오듯, 빠져나온 지금의 상황이 맘에 들지 않을뿐이었다.
예소가 선물이라고 쥐어준 모자를 뱅뱅 돌리다
아무런 생각없이 머리에 푹- 눌러쓰고 아무런 생각없이 걷고 있는데
소란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발악을, 누군가는 그를 말리는 목소리.
힐끗- 하고 눈동자만 살짝 돌려 그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씨- 놓으라고, 놔, 놓으라고 했어!!"
아주 힐끗, 눈동자만 돌린 수준이라 그 사람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떤 여자가 그의 팔을 두 손으로 애절하게 잡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느라 격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 그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놓으라고, 제발 놔!! 니가 아무리 날 잡고 끌어도- 난 내 강아지, 봐야겠어- 놔...."
"... 너 가고 몇 분 안 지나서 이백 씨, 우리집에 윤슬빈가 하는 여자랑 쳐들어왔더라.
들어오자마자, 연바다 어딨냐고 다 죽어가는 소리로 묻더라.
차라리 고래고래- 소리나 지르면서 행패라도 부렸다면 내가 덜 미안했을지 몰라.
아주- 애원을... 하더라.
윤슬비라는 그 여자는 계속해서 이백씨 말리고, 이백씨는 그 여자한테
신경질까지 내면서 너 찾았어. 그래서- 미안했지만, 이백 씨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다 말해드렸어. 너, 하지우란 사람이랑 사귄다고.
그 말 하고 나서, 이백 씨 얼굴을 살폈는데- .. 넋 나가서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을 하고 앉아있는데- 소름이 아주, 온 몸을 뒤 덮었어, 아주 뒤 덮었다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지우오빠의 따뜻한 손이 내 손 위에 얹어졌다.
".. 그런데 그 여자가 이렇게 말하더라. '연바다, 걔 나쁜 년이야. 널 배신했다고-' .
그 말 끝나기도 전에 이백씨가 그 여잘 때렸어. 그 말 취소하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그 여자는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했고- 내가 둘 다 말려 놓고, 가달라고 부탁했어.
그 여자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한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이백 씨 부축하고 우리집에서 나갔어. 그래서 창문 밖으로 그 사람들 가는 것 지켜봤는데-
... 이백씨는 몇번씩이나 무너졌고, 그 여자는 몇 번씩이나 이백 씨 일으켜 세웠어."
"..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 얘기를 굳이, 바다와 제게- 들려주는 이유는 뭐죠?"
지우오빠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지우오빠를 한동안이나
바라보던 유리는 지우오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 바다- 잔 정 많은 애 아니에요- 정을 주면 그건 곧 진실이라구요.
가려도 가릴 수 없고, 잊어도 잊을 수 없는 진실이란 말이에요.
분명- 이 녀석, 이백 씨를 아주 조금이나마 생각하고 있었을 거에요.
난, 연바다 친구 한 유리 생각으로 이백 씨 옆엔 윤슬비 씨가 어울린단 생각이 드네요.
조그마한 상처에 주저앉는 바다보단, 몇 번씩이고 일어나는 윤슬비 씨 말이죠."
"... 그만, 그만하세요-"
"아뇨- 계속 해야겠네요. 이 녀석, 내 친구라지만 너무 약하거든요-
얘, 작은 상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분명, 분명 그럴거니까."
"제발 그만 하라구요!"
"... 연바다, 너 신이백 잊어. 난 널 응원할 거야. 하지만-
이백 씨 옆에 서 있는 널 응원해줄 수는 없다. 지우 씨랑 잘해봐. 나 간다-"
"어, 언니! 같이가- 바다 언니, 미안해. 우리 언니가 좀- 나도 갈게."
유리는 내 방을 빠져나갔다. 그 녀석의 눈가, 아주 얇게 퍼져 있는
눈물들을 보지 말아야 했지만- 그걸 발견해 버려서.
온통 모진말만 하고 가버린 유리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지우오빠는 창가를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오늘은 나도 안정이 필요할 것 같네. 하하- 먼저 가봐도 되니?"
"응- 조심해서 들어가. 마중 안 나가-"
"내 생각 나면 전화하고... 갈게."
지우오빠는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내 방을 빠져나갔다.
우울하다거나 하는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도 미운 윤슬비 얼굴이 떠올랐다.
그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떠오른 그녀의 얼굴만
한참이나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신이백을 부탁해."
──────────────'프롬:F' - 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8 ]
주워온 길 잃은 강아지 [ 29 ]
"...이래서 니가 얻는게 뭐야? 그 애 때문에 니가 이래야 하니?"
"목소리 좀- 줄여줘... 머리 아파."
"신이백- 후우... 너, 정말."
유리 씨네 집에 찾아갔던 그 날 이후로, 슬비는 매일 집으로 찾아왔다.
슬비가 차려준 밥상도 다음 날까지 그대로 였고,
이불이나 옷가지나 - 슬비가 정리해주고 간 그대로였다.
슬비는 매일 집에 오면, 긴 한숨부터 내 쉬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는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 이백아, 연바다 그 앤- 지우랑 사귄다잖아. 둘이 행복하다는데,
넌 왜 이래야 해? 응? 너 제발 이러지 마. 니 옆엔... 후우, 내가 있다구."
"내 옆에 윤슬비라는... 하하하- 내 첫사랑이 있는데 마음이 돌아서버렸나보다."
슬비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그리고 내 무릎에 두 팔을 얹고 그 위로 엎드려 버렸다.
슬비는 내 무릎에, 나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이 벌컥- 하고
시원하게도 열렸다. 고개조차 돌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사람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귀에 익은 소리였다.
"... 신이백."
지우, 하지우였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 저 녀석이 그런다면
진짜 중요한 일이겠거니 싶어 고개를 돌렸다.
... 씩, 씨익- 거리고 있는 지우. 거친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하고 있었다.
"... 씨발, 난 니가 그딴놈인지 몰랐다. 아오-"
".. 바다네 집, 그리고 바다- 어디있는 지 알지?"
"여자 울리는 놈, 세상에서 가장 못된놈이거든? 더불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놈이기도 하고."
".. 알려줄래? 바다.. 어딨어?"
"너 같은 놈, 친구로 둔거- 정말 후회해. 열받아, 내 자신에게 미안해. 알아?"
".. 바다한테 데려다 줘-"
"경고해. 너- 바다는 물론이고 주변사람에게라도 찾아가지마. 그땐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몰라."
".... 보고싶어, 그 애가-"
나와 그녀석은- 서로가 하고 싶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딱 미친사람 취급 받기 좋은 말을 했네-
... 그런데 이 순간도 바다가... 보고싶다.
"그만해!! 너희 둘 다 그만하라고- 연바다가 뭔데!! 어? 뭔데, 못 잊는건데!!"
슬비가 소리쳤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과 목소리로
우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지우의 입이 꾹 다물어졌고,
나도 따라 입을 다물었다.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던 슬비-
슬비는 몇 번씩이나 넘어지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뛰쳐나가다 싶이 걸어가, 현관문 부분에서 멈추었다.
".. 니들, 무서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 하고 서로 바라보지 말란말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니들 이럴 수 없어. 아니? ... 그 애 하나가. 니들을 이렇게
망쳐둘 줄 알았다면- 걔, 어떤 짓을 해서라도 쫓아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