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치료의 Erickson식 모델(model)
Milton Erickson(1901-1980)은 일반적으로 최면의학을 이끌었던 임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생에 걸쳐 최면현상의 탐구에 헌신하였으며, 그는 전문직업인으로 생활하는 동안 그가 흥미를 가진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1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그의 환자들을 치료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가끔 최면을 사용하는 그 자신의 접근법을 혁신적으로 도입한 사람이었다. 그는 치료라는 것을 환자들이 가진 자기인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돕는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비록 이러한 견해가 현재는 치료자들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Erickson이 전문직업인으로 생활했던 상당기간동안 이러한 언급은 전통적인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보다 환자들의 한계를 확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1919년에 그는 소아마비에 걸렸고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많은 시간을 소아마비에 의해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지 않은 근육들의 느낌과 감각을 발견하는 것을 배우는데 보냈다. 일년 안에 그는 클러치(crutches)를 사용하여 걸을 수 있었다. 그는 한때 이러한 신체적인 결함이 자신을 더욱 관찰을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개발해낸 관찰하는 기술들을 다른 사람에 대한 관찰에 이용하였다. 그는 만약 사람들이 관찰하는 것을 배우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사용하는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면 그가 음치였기 때문에 피아니스트가 사용하는 건반을 두드리는 터치(touch)의 정도로 피아니스트의 질을 구별하는 것을 배웠다. 고난도의 연주는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건반을 두드리는 터치(touch)가 요구된다.
Erickson이 말했다.
내가 음치이기 때문에 나는 음의 굴곡 즉, 억양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는 그 사람의 말의 내용에 내가 덜 방해를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의 많은 양상들이 사람이 말하는 내용보다는 말하는 방식에 반영되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의 한 특별한 경험이 후에 그가 전문직업인으로서의 공헌을 하게 되는데 특히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17세에 소아마비에 걸린 후에 그는 세 명의 의사들이 그의 부모들에게 아들이 아침에 죽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그는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 그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데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의사들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그의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어머니에게 가구배치를 특별한 방식으로 하도록 부탁했다. 가구가 재배치되었을 때 그는 서쪽 창을 통해 밖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번 더 해가 지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 사람의 실제의 한계나 인식하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Erickson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강력한 힘이 되었다. 물론 그는 살아서 그 자신이 가진 많은 한계들을 극복하고, 수많은 환자들이 가진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게 도우면서 사는 동안 수많은 석양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