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옥계의 “순이”
다가오는 10월 둘째 주 토요일
어울림 산악회에서 강원도 정동심곡바다 부채길로 원정 산행을 떠난다.
정동심곡바다 부채길은 정동진에서 심곡항까지의 바닷가를 걷는 길인데
지금은 행정구역상 강릉시에 속한다.
거의 40년 전 2년간 내가 거주하였을 때 심곡항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명주군 옥계면(玉溪面)에 속하였다.
그때 심곡항은 세 살배기 어린 딸과 아직도 애티 가시지 않은 젊은 아내가 그리워
틈틈이 일손 멈추고 망망대해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던 그 고원의 절벽 아래 작은 어촌이었고
내가 거주했던 곳은 그 옆의 금진항이었다.
수십 년 전 나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던 ‘옥계’
마음에 커다란 아픔도 있었지만 아직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도 있다.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늦게나마 깨닯게 한 곳이 "옥계"다
그래서 ‘옥계’는 영원히 나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며칠 남지 않은 옥계로 향하는 날이 설레며 기다려진다
석병산 계곡의 옥같이 맑은 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는 ‘옥계’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이 아닌 피래산 삿갓봉 고원에서 망망대해 동해를 바라보며
이글이글 내려쬐는 태양 아래 폭염과 씨름하며 내 젊음을 붙태웠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태풍 애그니스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1981년...
그해 이른 봄부터 시작된 고난의 연속은 내 삶에 희망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낯선 타관 옥계의 삿갓봉 자락 드넓은 목초지와 기름진 옥토는 내 삶의 전부였다
날 밝을까 두려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이슬 헤치며 고원에 올랐고
밤 눈 보이지 않도록 넘어간 해 원망하며 부엉이 소리 들으며 고원을 내려왔다
기껏해야 하루 6시간 자는 것 빼고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멀리 집에 있는 아내와 어린 딸이 보고 싶고 그리워
그 흔한 작은 섬 하나 마저도 눈에 띄지 않는 망망대해 동해를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갈 그 날만을 꿈꾸는 것이 고작이었다
요즘 같으면 세 살배기 어린 딸이 보고 싶으면 스마트폰으로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마저도 어렵다면 메일에 파일 첨부하면 받아 보는 편한 세상이지만
그때는 지글~지글~ 대던 전화로나마 어린 딸 목소리를 들으려면
나름대로 큰 맘을 먹어야 했던 시절 이였다.
마음을 빼앗기면 눈은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
그저 내일만을 바라보며 일하고 또 일하는 것 밖에 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 일이 끝나 고단한 몸을 이끌고 텅 빈 거처로 돌아오면
어두컴컴한 방 한 구석에 네다리 달린 흑백 TV를 켤 엄두조차 못 내고 잠에 빠져들곤 했다
쉬면서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쩜 꿈조차도 꿀 수 없던, 그렇게 바쁜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하늘도 무심하여 그 해는 왜 그리도 가물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하늘이 야속하기만 하다‘
지금도 배낭 메고 산에서 가끔 쓸데없이 내리는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그 때가 떠오른다.
꼭꼭 빠짐없이 찾아오던 7월 장마조차도 대륙성 고기압의 위세에 밀려 한반도로 올라오지 못하고
먼 바다에서 소멸되어 버렸고 이글대는 태양 아래 말라 죽어 가는 어린 싹을 바라보면
나의 애간장만 한없이 타들어갈 뿐 이었다
내 평생에 장마가 없었던 가뭄은 그해 뿐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런 혹독한 가뭄이 다가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아지랑이 아롱이는 어느 봄날,
언제부터인가 나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찔레꽃 피는 이른 봄 계획된 영농일정에 맞추려 경운기 2단 놓고 사정없이 내달리며 밭갈이할 때
먼발치 소나무 아래에서 아기 업고 나를 바라보던 그 소녀였다
늘 아기를 업고 다니는 소녀이기에 그때 그 소녀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때 열여섯, 일곱의 아기 업은 소녀 ‘순이’
부모의 가난과 무지 속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그녀
어쩔 수 없이 태어났으니 어려서 그 구박이야 또 오죽 하였겠는가...
뱃속 순이를 지우려 복용했던 약물로 인해 선천적으로 어눌한 용모와 말이 없는 무표정, 그리고 갸냘프고
빈약한 체구, 그 어느 한 군데라도 그 또래 소녀다운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녀였다
늘 업고 있는 아기는 항상 위태로워 보였다. 힘없이 비실비실 걷는 걸음에 행여 떨어뜨리거나
넘어지지 않을까.....그러나 내가 그녀를 볼 때마다 등에 업힌 그 아기는 얼마나 순이 등이 편안했는지
늘 단잠을 자고 있었다. 단잠에 빠져 있는 그 아기는 순이 오빠의 아기다
순이네 집은 내가 경운기를 몰고 고원으로 올라가던 그 언덕 초입에 있다.
순이네 집을 지나 가파른 비탈길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삼청교육대원들이 닦아 놓았다는 비탈길은 포장이 되지 않은, 돌이 많은 비탈이다
짐 없이 빈 경운기로 올라가도 숙련된 운전자가 아니면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조금만 섣부르게 운전하다 보면 앞이 뒤틀리고 뒤에 짐수레는 요동친다.
옆은 까마득한 절벽이다
고원으로 오르는 그 길로 경운기를 몰고 올라가면 꼭 순이가 쫓아온다
그것도 아기를 업고서...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위험하니 경운기 뒤는 따라 다니지 말라 하여도 순순히 나의 말을 들을 순이가 아니다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순이는 나에게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급기야 그녀의 부모에게 제발 경운기 뒤를 따라다니지 못하게 해달라고 사정까지 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그곳을 오르고 내릴 때 경운기 뒤를 쫓아오는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산을 오를 때나 내려올 때는 언제나 그 집 앞 에 그녀는 서 있었다.
실로 백년 만이라는 혹독한 가뭄을 이겨낸 옥수수가 탐스런 열매를 맺고 무럭무럭 익어갈 무렵
잠시 한가한 틈을 내어 꿈에도 그리던 집을 찾았다
그런데 하루를 자고 나니 태풍이 몰려온단다.
급한 마음에 울며불며 따라오는 세 살배기 어린 딸을 간신히 떼어놓고 강릉행 동부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봄 가뭄 그때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제발 비 좀 내리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한계령을 넘으며 쏟아지는 세찬 빗줄기에 강릉 시내는 주유소 주유기마저 잠겨 버렸고
옥계로 가야할 길목 남대천 다리도 태풍 애그니스에 휩쓸려 떠내려가 모든 교통이 끊겨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숙박료가 가장 저렴한 퀘퀘한 냄새나는 여인숙에서 내 생애 가장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워야만 했다
날이 밝자 서둘러 옥계로 걸었다.
강릉에서 버스를 타고 안인리 바닷가 작은 언덕빼기에 올라서면
갑자기 나타나는 드넓은 동해의 푸른 바다에, 파도 따라 너울너울 춤췄던 갈매기의 모습이 마치 신세계가
열리는 양 황홀하고 가슴 시원했던 옥계 가는 길...
기껏해야 소나무 몇 그루 초라하게 서 있고 눈 씻고 찾아봐야 겨우 한 두 사람 찾을 수 있었던 정동진 해수욕장을 지나니 간밤의 폭우로 산에서 무너져 내린 흙더미에 논밭은 모두 폐허로 변해 버렸다.
길 끊어진 신작로를 돌아 논길을 건너니 하나같이 모두 물에 휩쓸려 누워버린 벼가 시야에 들어온다.
강릉에서 아침 굶고 출발한지 반나절이 지나서야 옥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처로 들어가는 것은 둘째고 서둘러 고원으로 향했다
땅이 해토되지 않은 이른 봄부터 자는 시간도 아까워하고 무더위와 싸워가며 두 팔 걷어붙이고
흥겹게 일했던 2만여평의 고원..
요행을 바라며 행여나 했던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만여평 넓은 옥토에 푸르고 탐스럽고 싱싱하게 서 있던 나의 혼이 듬뿍 담긴 이십삼만여 그루의 옥수수는
한 그루도 빼놓지 않고 모두가 쓰러져 버렸다. 태풍 애그니스는 그렇게 나를 짓밟고 지나갔다
쓰러진 옥수수를 바라보는 눈가에 눈물이 흐른다.
저 옥수수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했고 쏟았던 땀방울은 그 얼마인데....
유일한 운반수단인 경운기가 올라오지 못하여 등짐으로 거의 300포대의 비료를 져 올릴 때에는
파란 하늘이 노랗게 변해 있었고, 비탈길에서 쓰러진 경운기를 세우려 발버둥칠 때 혼자임이 서러워
엉엉 울어 보았고, 옥수수 재배에 가장 큰 적인 장끼, 까투리와 이십 여일에 걸친 처절한 싸움 속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맞으며 이름 모를 무덤가에 지쳐 쓰러져 잔디 움켜잡고 잠들었던 일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순이보다도 더 힘이 없는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오는데 그 길목에 순이가 서 있었다
어떻게 내가 지금 그곳에서 내려올 줄을 알았을까...애그니스가 휩쓸고 간 이 난리통에...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실의에 젖어 슬픈 마음을 억누르며 산을 내려오는 나 보다도 더 슬픈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렇게 슬퍼 보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녀를 그냥 스쳐 지나가 거처로 향했다
한동안 나 자신과의 싸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옥계가 두렵기도 했다
아직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리고 꿈과 희망이 부풀었던 이곳이 싫어지기도 했다.
뻔한 이야기지만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점차 강렬해지기만 한다
그 생각이 강해지는 만큼 자연히 고원에 올라가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 곳에 오르는 일이 줄면 줄수록 나의 고민은 커질 뿐이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 그래도 쓰러진 강냉이(강원도에서는 옥수수를 강냉이로 부른다)는 추수해야 했다
가뜩이나 험한 길이 태풍 덕에 아예 경운기는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밧줄을 나무에 묶어 도르래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군에서 유격 훈련시 하강하는 시설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참 요즘 같으면 이런 짓을 누가 하겠는가....
그러나 작은 어촌인 이곳 ‘건남’에는 밧줄에 능한 어부들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하강시설을 설치할 수가 있었다
한 포대 한 포대 도르래에 달려 내려온 강냉이 포대는 내가 받아서 경운기에 실어 옮긴다
그 때도 순이는 여전히 내 옆에서 쏜살같이 내려오는 강냉이 포대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강냉이가 잔뜩 실린 경운기 뒤를 쫓아왔다.
평지이고 위험하지도 않은 길이여서 쫓아다녀도 그냥 놔두었다. 그날은 마지막 날인데 아무래도 짐이 좀 벅찰 것 같았지만 또다시 오기도 그렇고 하여 무리가 되어도 한 번에 싣기로 하였다
순이는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나를 쫓아다닌다. 역시 아기를 업고서....
기마봉과 삿갓봉에서부터 내려오는 계곡물을 건너야 한다. 수없이 건너다닌 길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경운기가 얕은 계곡길을 건너지 못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동차나 동력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이 언덕을 올라갈 때 끝에서 채지를 못해
넘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여러 번 후진을 했다 다시 속도를 내어 채보지만 넘질 못한다
몇 차례 반복을 하니 식은 땀이 난다. 이 고생 말고 짐을 덜어 놓고 두 번에 옮길까 생각도 해보지만
경운기나 화물 자동차 운전해 본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죽기보다 더 싫은 게 싣던 짐 내려놓고 두 번에
나르는 일이다. 다시 몇 차례 시도를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옆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순이의 얼굴 표정은 나보다 더 울상이다. 마치 자기가 운전을 하는 것과 같은
표정이다. 헛바퀴 도는 앞바퀴에서 마찰 수증기가 뿌옇게 인다. 다시 숨을 고르고, 사력을 다해
계곡물 튀기며 전진을 시도하는데 움찔하던 경운기가 슬그머니 계곡에서 올라서는 게 아닌가.
휴~ 다행이다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작은 언덕을 다 올라섰는데도 사력을 다해 경운기를 밀고 있는
순이의 모습이 보였다.
내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놀랐다
아니 저 허약한 것이 아기도 업고 밀었는데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찡한 마음으로 경운기를 그 자리에 멈춰 세웠다
처음 내가 이 마을에 와서부터 지금까지 누가 피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혼자 아기를 등에 업고 오로지 자연만을 벗 삼아 얕은 아까시사 꽃을 따며
이따금 히죽거리며 중얼대기도 하는 것이 그녀의 하루 일과였고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 귀찮게 느껴지기만 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조차 꺼림칙하게 느껴졌고 그 동네 모든 이들에게 순이는 그저 바보천치일 뿐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그녀는 지금 좋아라 손뼉치며 환호하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서울 아저씨가(그 동네 사람들은 나를 서울 아저씨로 불렀다) 모는 경운기가 무사히 언덕을 올라가서일까,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역력한 그녀의 갸름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 역시도 고맙고 찡한 마음으로 핏기없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순이를 덜덜거리는 경운기에 태워 따뜻한 봄날 고원을 올라갈 때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운전하면서 그녀의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불과 3,4백m 의 짧은 거리였지만 경운기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며 나를 바라보던 행복한 순이의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남이 보기엔 보잘 것 없고 하찮게 보일 것 같은 그녀의 진솔한 마음에서 태풍 따위에 흔들리고 있는 나약하기만한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고 도움을 주고 그처럼 기뻐하는 모습에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저 귀찮고 꺼림칙하기만 했던 바보 천치 순이는 그렇게 나에게 삶이 무엇이고 진심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 후 가끔씩 다시 다듬어진 비탈길을 올라가 망망대해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순이를 경운기에 태우고 마음껏 달렸다
그때 그렇게 좋아하던 순이의 모습은 그 후 그 누구의 모습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 인간의 의욕이 아무리 크고 강하여도 대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순이를 태우고 함께 달렸던 경운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희망을 가지고 금의환향을 꿈 꿨던 바램은 위대한 자연과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경운기에 아무 것도 싣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결코 빈 경운기만을 끌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 경운기 뒤에는 여린 힘으로 경운기를 밀어 올리던 순이가 타고 있었다.
그 작고 보잘 것 없었던 그녀는 늘 나를 그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를 태우고 달릴 때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처럼 그녀를 태우고 이 세상을 달려 왔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그 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P.S>
그 곳은 강릉시 옥계면 금진리 건남부락이다
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순이는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같은 처지의 장애인과 결혼을 하여
자녀도 낳았다고 한다.
자식을 낳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댁에서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산다고 한다‘
내가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 중 제일 순하고 착하다고 느껴졌던 순이였다.
첫댓글 감동적인 글이었슴니다. 잘읽었스미다
루이스님!
한편의 감동적인 소설을 보는것 같았습니다.
젊은날에 모든것을 녹아 낸 삶에 열정과 애환, 사랑이 녹아낸
따뜻한 글 잘 보고 갑니다.
소설 작가로 등단하셔도?… 늘 건강하시고, 저희 가까이에서
오래오래 뵙기르르 바레봅니다.
곱고 순수한 루이스형님의 삶에 아름다운 역사가있었네요 감동입니다 잘읽었습니다
화요일마다 상남도서관에서 다양한 ㅊ책을 다운받아보는데 루이스님 글을 읽을때마다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요 지금도 예전에도 멋있게 사셨네요 다음엔 어떤글이ㅣ 올라올까ㅏ 기대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 잘 읽고갑니다.
루이스님
마음이 찡 했다 짠했다 합니다
옥계 와 순이 그리고 강냉이
그 끝에서 부딪친 자연의 거대한 힘을 아니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자연
젊은 날에 루이스 님의 꿈을
따라 걸었네요
이번 주 산행이 루이스님께는 가슴을 설레게 할 것 같습니다
벌써 이미 눈가가 촉촉해질거 같기도 하고…
옥계의 추억 잘 들었습니다. 아주 서글프지만 동화같은 이야기가 있으셨습니다. 옥계 나들이 잘 다녀오시고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슴 찡한 영화 한편을 감상 한 것 같습니다 저도 예전에 시골에서 경운기를 뭐라봤기에 루이스님 예 시절 이야기가 경운기 모는 주인공을 저로 바꿔 상상해 보며 울다가 읏다가 했습니다 순위가 해피엔딩으로 되어서 저절로 성벽이 처지네요 따뜻한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