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의 바다/박영근-
너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먼 데 섬들이 파도에 쓸리던
겨울바다에서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노을에 홀로 취해가던
사내의 뒷모습을
너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할 말은 모두 소주병에 갇혀
소리도 없이 미쳐가던
술집 탁자에서
붙잡을 것이 없어 허공엔 듯 술을 붓던
사내의 떨리는 손을
불면의 뜨거운 이마에 떨어지던 파도소리
새벽술의 벌건 눈동자
물길에 누워 흘러가고 싶었다
바람과
햇살에
환하게 부풀어오르던
만조(滿潮)의 바다
물너울바다 웬 꽃들이 부시게 피어났던 것인지
너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바람이 텅 빈 갯벌을 쓸고 가던
겨울바다에서
갈대숲엔 듯 홀로 남아 떠돌던
사내의 발자국 소리와
젖어가던 네 얼굴을
-겨울 바다/강세환-
아침 동틀 무렵
어머니는 아버지 잠바를 걸치고
잠든 우리들 머리맡을 지나
돈 벌러 어판장에 나갔다
겨울 내내 어머니는 바다를 상대로
허기진 살림을 꾸려 나갔다
저녁 해질 무렵
아버지는 술집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나와 동생에게 막국수를 삶아 주었다
겨울 내내 아버지는 바다를 등진 채
낡은 그물만 손질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겨울 새벽 포구에는
뱃사람들이 속 쓰리는 배를 움켜쥐고
거칠게 노를 저으며 바다를 향해 떠나갔다
그해 겨울 바다에는
밤마다 눈이 하염없이 내렸고
고깃배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너무나 배가 고팠다
-바다가 보이는 교실 9 /정일근-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첫눈이 오는구나
은유법도 문장성분도 잠시 덮어두고
저 넉넉한 평등의 나라로 가자
오늘은 첫눈 오는 날
산과 마을과 바다 위로 펼쳐지는
끝없는 백색의 화해와 평등이
내가 너희들에게 준 매운 손찌검을
너희들 가슴에 칼금을 그은 편애를
스스로 뉘우치게 하는구나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순결의 첫눈을 함께 맞으며
한 칠판 가득 적어놓은
법칙과 법칙으로 이어지는
죽은 모국어의 흰뼈를 지우며
우리들 사이의 먼 거리를 하얗게 지우자
흰 눈발 위로 싱싱히 살아오는 모국어로
나는 너희들의 이름을
너희들은 나의 이름을
사랑과 용서로 힘차게 불러 껴안으며
한몸이 되자
한몸이 되어 달려나가자
-그 바다가 그리운 것은/유인숙-
쏟아지는 햇살 눈이 부셔라
바람에 밀려 흔들리던
잔물결 사이로
진한 그리움은 살아 오른다
켜켜이 채석강에 쌓인 흔적들
썰물에 밀려 빠져나가고
눈에 드러나 보이는 단층 위엔
오랜 추억만이 서려있구나
겨울 해풍海風이면 어떠랴
봄날 같은 마음들이 모여든 자리에
외로운 갈매기도
가던 길을 돌아 날개를 펴고
바다여, 그리운 바다여
가는 목청 돋우어 끼룩거리는데
나는 또 한날을 그리움 속에
풍덩 빠뜨려야 하는구나
그 바다가 그리운 것은
사랑이 물거품을 뿜어내며
하얀 파도로 밀려들기 때문이다
눈부신 햇살이 알알이 부서져
내 안에 아쉬움으로
눈물겹게 쏟아지기 때문이다
-여름바다/윤정옥-
여름에는 바다가 지쳐
길게 엎드리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현미경 조명 아래 플라나리아처럼
축 늘어져 모래언덕에 걸쳐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하루 하루가 웃자란 쑥갓대처럼
바람 불면 흔들려
다 쏟아낼 듯 위태하고
빈집으로 배달된 신문들이 쌓여가도
사람들은 바다로 나와 바다를 건드린다
그늘진, 고인 물 속의 미물처럼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 바다의
가누지 못하는 머리
하루종일 젖은 모래 밟아도
차갑게, 명징하게 나와 만날 바다는 없더라
그저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교감의 통로 하나
다소곳이, 수줍게
수평선 너머로 들어가는 해에 대한,
바다의 미소
나는 여름 바다에서 노을만 보았다
-바다를 주머니에 넣고/원재훈-
소라껍질 속으로 겨울이 온다
바람도 집을 짓고
수평선 너머 더 멀리 쳐다보기만 하는 달밤
한 평생을 걸어온 나그네 같은 달빛이
백사장을 서성거린다
'거기 누구요?'
불러도 아무 대답도 없이 사라지는 썰물
지나온 시간들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엔
그대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고
나는 없다
그래 내가 없다
바다를 떠 담는다
주머니 속에 쏙 들어오는 작은 바다
내 마음의 그릇모양으로 담긴다
손바닥 가득히 고이는 것은
이젠 슬픔이 아니다
맨발이 시렵지 않는 어느 오후의 서해바다
더 멀리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은
몸부림치며 그리워했던
사랑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잃어버린만큼 채워지는 바닷가
아무도 슬프지 않다
난 잃어버렸다
난 잃어버렸다
내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반딧불이 한 마리
내 기억의 나무에 무성한 불꽃으로 타오르던
아무도 다가설 수 없었던 聖樹에 달라붙어
빛을 내는 성스러운 곤충들
-꿈꾸는 바다/김인겸-
나의 꿈이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살아있음이 사는 일 보다 사소해 질 때
나는 길을 떠난다.
길은 항상 나를 바다로 이끌고
닿을 길 없는 섬을 보여주고
잃어버린 나의 꿈을 보여주고
섬으로 가는 흰 돛단배 하나 보여준다.
허허한 바다에도 꿈처럼 섬이 있고
길 없이도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잠잠히 타이르며 돌려보내는 바다..
살아있음이 다시 사소해 지고
개 같은 삶 속에서도 개꿈 하나 꾸지 못할 때
다시 찾아오라고
기다린다고
섬섬이 돌아선 나에게
파도소리 쉼 없이 들려준다.
-바다에 간다기에/목필균-
바다에 간다기에
밤새 몰아쳐줄 파도를 생각했지.
내가 부딪치다 지친 세상 때문에
거대한 바위섬과 부딪쳐 나자빠지는
그 거센 파도의 도전을 그리워했지.
바다에 간다기에
하늘 가득 펼쳐질 갈매기의 노래를 생각했지.
내가 못다 부른 노래를 마음껏 불러주다
가고 싶은 곳으로 미련없이 날아갈 갈매기
그 자유로움을 위해 박수를 보내려 했지.
바다에 간다기에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을 거니는 연인을 생각했지.
내가 못 다한 사랑의 몸짓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의 낭만
그 사랑을 위해 편지를 띄우려 했지.
바다에 간다기에
파도에 실려온 예쁜 조개껍질을 생각했지.
내가 못 다한 수많은 이야기를
조개껍데기에 담을 수 있는 바다의 꿈
그 꿈을 위해 빈 주머니를 가져가려 했지
-유폐된 바다/하재청-
감포 앞바다 지척에 두고
길을 잃어버린 바다 속 대게
설익은 까만 눈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꼼지락거릴 때마다
푸른 바다가 신기루로 활짝 웃는다
투명 유리벽 너머 바다로 가는 길
껌벅대는 눈 속에 떠 있고
투명 유리 속 다리
벌써 유폐된 고통 잊어버린 채
텅 빈 하늘 건너는 꿈을 꾸고 있다
수족관 물결 따라 파란 이끼가 출렁인다
감포 바다 떠나 바다를 헤매는 대게
출렁이는 수평선 끝을 바라보며 뒤척이자
흩어진 유품처럼 둥둥 떠도는
새로 치장된 분비물,
바다의 끝은 유리 속에 잠자고
뒤엉킨 폐선의 꿈이 꿈틀거린다
단단한 각질 위로 일어서는 문신들
산소 주입구에서 수시로 주입되는
푸른 기억을 더듬는 것인가
뽀글뽀글 솟아오르는 하늘사다리에 매달려
유리벽을 타고 눈앞에 성큼 다가선
감포 바다를 잡아당긴다
감포 바다와 수족관 사이에
실타래처럼 뒤엉킨 꿈들이 흔들리며
하얀 수증기로 솟아 하늘무덤을 건너고 있다
-바다는 아직도 멀다/손현숙-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알의 세계에서 깨어난 새끼바다거북
본능은 빛과 소리 쪽으로 촉수를 세운다
소금 젖은 밤바람이 모랫길을 헤친다
기억을 담았던 기억 없는 생각들
생명은 죽음을 담보하고
바다로 가야 하는 물빛 꿈이 눈부시다
몸체를 빼앗긴 알의 껍질 속으로
달빛은 여린 숨을 담는다
앞으로 혹은 사선으로
슬픔은 언제나 직선으로 내닫는 끝에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한 새끼바다거북
바다를 향해 가는 죽음은 삶처럼 집요하다
날것의 피 냄새를 배회하던 바다갈매기
순식간에 주린 배를 채운다
바다는 아직도 먼데
죽음은 살다 가는 저,지독한 설렘
-바다 유감/장철문-
사내는 토막난 갯지렁이를 바늘에 끼우고
아내는 어린 전복을 딴다. 아이들은
말미잘 주둥이를 꾹꾹 누르며 시시덕거린다.
저 일상으로부터 나는 언제나 멀었다. 오늘까지
저 바라보이는 것들을 향하여 걸어왔다.
아이들은 불가사리를 실에 묶어 웅웅 돌려댄다.
어린 전복을 따다 허리를 펴며 희게 웃는 아낙.
사내는 빈 낚싯대를 들어올리며 아내를 본다.
바라보이는 것들과 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
내가 바라보며 걸어온 지평선은
언제나 내 앞에서 바다에 몸을 부렸다.
썰물진 한낮이 무료한 말미잘아,
너도 참혹한가.
몸통뿐인 네 몸뚱어리가,
갯벌 위에 페허로 드러난 네 꿈이.
-비 내리는 바다/김석규-
종일을 두고 비 내리는 바다를 본다.
하루도 젖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오늘도 젖어서 함께 젖는 바다를 본다.
물 묻은 발자국을 지우며 따라 가는 해안선
고삐를 풀고 파도는 더 젖지 않으려고 달려오지만
길게 돌아누운 백사장은 아무 소용도 없다.
젖어 있지 않고서는 시들어버리는 이 풍진세상
비우고 나면 이내 차오르는 안개빛 우울
속절없이 젖어서 빗소리로 떠도는 삶의 자리에
씻겨져 내리는 하늘로 더 멀리 나가 앉는 수평선
멀리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주의 가슴 가득히
하루도 젖지않고는 살 수 없으므로
허기지도록 비내리는 바다는 종일을 적신다.
-바다에서 바다를 못 읽다/유안진-
바다에 와서 바다를 읽어봤다,
바다의, 망망함을 물빛을 물비늘을 깊이를
수평선을 파도를 해일을.....,
물의 변신 물의 언어를,
물에 쓰이는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없는 태초의 말씀을,
방대한 바이블을
태초의 언어로 된 태초의 경전
창조신의 말씀책을
알아 못 듣는 목소리로 갈매기가 읽고 가도
알아 못 듣는 목청으로 바람이 읽고 가도
나의 문맹(文盲)은
어느 구절에다 붉은 줄을 그어야 할지
어느 페이지를 접어두고
어느 대목을 괄호쳐둘지 몰라
바다에 와서 바다는 못 읽어도,
내가 알아낸 건,바다야 말로 하늘이라고,
하늘이기 때문에 읽어내지 못한다고,
밤이 되자 바다는 달과 별무리
찬란한 하늘이었으니,
아무리 올라가도 하늘밑일 뿐이던 그 높이가,
눈 아래 두 발 아래 내려와 펼쳤다니,
가장 낮은 데가 가장 높은 곳이라는,
어렴풋한 짐작 하나 겨우 얻은 것 같다.
-바다를 보았네/김완하-
봄날 당신과 함께
무창포 바다를 보았네
바다는 당신의 이마쯤에 닿아
눈썹 짙은 그늘로 젖어 있고,
당신과 나 사이에도 쏟아지는
햇살, 잠시도 가만히
쉬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와 당신 사이에도
저리 많은 파도가
출렁였던가, 저렇게도 많은
물결이 부서졌었던가 생각했네
무시로 다가와 무너지는
저 바다를 향해서
내 안에 거듭 거세게 일어서던 파도
잦아들며 점 점 떠오르는 섬
무창포를 보았네
당신과 나 사이의
저 수많은 파도를,
봄날 당신과 함께
-바다로 간다/고혜경-
먼 섬이 가까운 풍경처럼
물결치는 날
페트병에 가득 넘치길
소망하는 사람의 일
해풍에 시달려 휘어진 억새풀
가슴에 삭혀진
정제된 소금 한 줌 얻으러
바다로 간다
노을보다 더 깊은 사랑
세월이 평생 걸고
고목의 군살 걷어내고
초록의 생명 틔운 날
내 안의 부패 속에 건질 목숨
정제된 소금 한 줌 얻으러
바다로 간다
뼈가 시린 아픔 추위를 앞세운
슬픔도 취하면 한 잔의 기억에
잠이 드는 날
고통에 농익은
정제된 소금 한 줌 얻으러
바다로 간다
기온차로 봄 앓이 해대는
지면에 널린
낮과 밤을 잊은 욕망의 잦은 기침소리
비릿한 내장 털어낼
정제된 소금 한 줌 얻으러
바다로 간다
-바다가 사랑이라면/최진호-
바다가 사랑이라면
일었다 사라지는 파도는
시나브로 흘러가는 세월이겠지
바다가 사랑이라면
태풍으로 후려치는 폭풍은
양심 불량 다스리는 죽비 소리겠지
바다가 사랑이라면
해수욕장에서 광란의 발광은
임포텐츠 고치는 치료약이겠지
바다가 사랑이라면
독성 뿜어내는 환경 호르몬은
양심을 마비시키는 마약이겠지
바다가 사랑이라면
갯벌 위에 쏟아 붓는 햇살은
바다 생물 키워 내는 보약이겠지
-바다 시장/신용목-
바다 시장에서는 바다를
팔지 않는다 밀물처럼 드는 사람들이
저마다 죽음을 흥정하는
그곳에는 살아 있는 것이 없다 아직
마르지 않은 바다를 담고
눈깔들은 쌓여 있다 벌렁이는 아가미는
죽음을 위한 마지막 유혹 다만
한 마리 상어만이
살아 좌판 사이를 헤엄쳐 다닌다
길게 잘라 엮어댄 튜브가
비늘 대신 하반신을 감싸고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 지느러미처럼 달려 있다
수초 같은 다리들 사이를 힘겹게
기어가는 형상이지만
간혹 던져지는 거스름돈을 먹고사는
상어는 유일하게 그곳을 바다로 만든다
파도처럼 높은 이문으로도
바다 시장에서는 상어를 살 수 없다
그가 사라지면 아무도 그곳을
바다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너무 넓은 해협을 가르며
파장의 달이 뜨고
썰물처럼 사람들 빠져나간 자리에
상어만이 외로운 저녁을 건너고 있다
그가 잃어버린 다리처럼
바다는 수조 속에서 출렁이고 있다
-바다/채호기-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 열린 그
거대한 눈이 내 눈을 맞췄다.
눈을 보면 그
속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이었다.
쉼없이 일렁이는
바다의 가슴에 엎드려
숨을 맞췄다.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
눈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임을 알았다
-주머니 속의 바다/정일근-
그 마을 사람들은 바다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설마?하고 물어보면 불쑥
주머니 속의 바다를 꺼내 보여 준다
놀라지 마라,
그것은 마을의 아주 어린
꼬마 녀석도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제법 사랑을 아는 나이가 된 친구들은
사랑으로 외롭거나 쓸쓸할 때에는
손바닥 위에 바다를 올려놓고
휘파람을 분다
아무래도 마을 어른들은 한 수 위다
흰 손수건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갈치 떼로 변하고
손금 위로 바다가 흐르게 하고
흐르는 바다 위에 섬을 띄운다
아주 오래 전 그 섬을 찾아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안부까지 전해 준다
떠나오던 날 마을 사람들이
주섬주섬 챙겨 선물로 건네주던 바다
읽다 만 시집 속에 곱게 접어 온 바다
삶에 지칠 때,
누군가가 아득히 그리울 때
나는 손바닥에 그 바다를
올려 놓고 엽서를 쓴다
아침이면 사람과 함께 눈뜨는 바다
저녁이면 사람과 함께 잠드는 바다
사람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바다를
나는 알고 있으니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