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요원 시인>>
<<장요원 시인의 양력>>
* 전남 순천 출생.
* 201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와 201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 『우리는 얼룩』
*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을 수혜함.
<<장요원 시인의 시>>
우리는 얼룩/장요원
창으로 들어온 순한 햇빛이 꽃무늬 벽을 타고
나비의 자세로
어룽거린다
유리는 투명하고 객관적이지
투명한 바탕 위에 날개의 감정이 헛딛는 것처럼
약속이 비켜나간 손가락들 틈에서
얼룩이 자란다
온통 얼룩을 기워 입고 사는 말을 본 적이 있니?
얼룩말의 눈빛을 기억하니?
얼룩과 얼룩 사이에는
경계가 살지
두려움은 얼룩 속에 숨어서 자라나고 두려움을 먹고 얼룩은 화려해져서 얼룩을 입은 사람들로 세계는 번져가네
TV 화면에는
모자를 쓴 여인이 모자이크를 들쎡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울먹인다
축축한 물질들은 쉽게 어두워져
안으로 스미는 습성이 있지
울음의 속을 뒤집어 보면
끝물 같은 흐느낌이 묻어나올 것 같아
오늘의 날씨는 구김이 많고 신축적인 페이즐리 패턴이라고 했니?
날씨에 상관없이 우리는
약간의 울음과 무늬가 필요해
사람들의 손에는 매일 매일 클렌징크림이 들려 있지
브로콜리 주관적인 브로콜리/장요원
감각이 뭉툭해
혓바늘이 돋았어요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던 치통이 마취주사 한 방에
무능해졌어요
가끔 혓바늘이 푸르게 부풀죠
그린이에요
그린에는 홉컵이 없고
감은 눈을 빠져나온 눈알이 공처럼 굴러 다녀요
어둠은 울창하고
오돌오돌
소름이 돋아요
주먹을 꽉 쥐고 잠이 든 날에는 자꾸만
벙커에 빠져요
모래알 같은 생각들이
흘러내려요
울음이 닳아버린 암고양이의
발은 어디로 갔나
마이크처럼 나무를 움켜쥐던 매미들은
다
어디로 갔나
꾸욱,
다문 입이 다발로 수북해요
무반주첼로 소나타/장요원
현들이 공중에 매여 있다
빼곡이,
수직의 자세로 허공의 천장과 바닥을 잇고 있다
그 탄력을 터뜨리는 지상의 수많은 손가락들
빗방울의 형식으로 음표들이 터진다
비의 음계는 동물성일까요
우우 우짖는 소리
맹렬하게 열어젖히는 성대들
단풍나무의 무수한 손끝에서 울음이 흘러나오고 담장 밑에서 고양이의 신음이 끊어졌다가 이어진다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담쟁이넝쿨의 왼손과 오른손들,
지붕들은 범람하기 위해 솟고 있는 걸까요
팽팽하던 공중이 느슨해지자
가로등 불빛이 일제히 폐활량을 늘리기 시작한다
소리의 계단 뒤에는 내밀한 골목 하나 들어 있지
지루한 골목은
낡은 연인들이 헤어지기 쉬운 배경
길게 내린 그녀의 속눈썹도 슬픔에 매여 있었지
저녁이 낮은음자리로 몸을 낮추는 시간,
호흡이 느려진 후렴이
긴 목울대를 향해 강 쪽으로 흘러간다
물집들/장요원
바람이 수평선을 물고 해안선으로 왔다가
포말들을 몰아서 되돌아가요
바다가 기르는 건 바람인 줄 알았는데 물거품일까요
송글송글 맺혀 있는 아침 토마토는
지난 밤 몇 시의 달과 격정적인 인사를 나누었을까요
천 개의 눈을 매달고
등나무가 허공을 비틀며 오릅니다
이제 곧 가을이야,
속으로 말했을 뿐인데
서쪽 하늘은 왜 빨갛게 부어오를까요
물집들이 생겨날까요
근육질의 바람이 몰고 다니는 구름을
핀셋으로 당기면
자꾸만 내 입술이 짓물러요
바람의 내용을 다 비워내도
증발하지 못한 감정들이 욱신거려요
공중은 사무적으로 어두워지고
먼 바다에 맺혀 있는 작은 섬들이
거즈처럼 안개를 떼었다가 붙이는 저녁
결/장요원
사과는 조각을 내어 깎는 게
예의라지만
나는 사과를 둘둘 풀어내는 걸 좋아해
짓무른 부위를 풀어낼 때면
상처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고 있는 것 같아
진물에 찌든 붕대를 풀어줘야 할 것 같아
머그잔 속의 커피를 돌려보렴 물레성형처럼 커피를 돌려보렴
나도 모르게 커피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는 건
어젯밤 우리가
공원 호수를 왼쪽으로 돌았기 때문이야
호수에
내리꽂히는 빗방울들
동그랗게 말고 있는 몸을 점점 커다랗게 풀어가는, 풀다가 사라지는 빗방울들
비 오는 날
호수에는
빗방울의 나이가 겹겹이 자라고 있지
오늘 아침 창밖은
잘 구워진 노을빛
부풀어 오른 구름이 페이스트리처럼 접혀 있네
접혀진 주름과
주름 사이의 바람이
바스라지지 않도록 한 겹 한 겹 풀어내야지
세상의 무늬들은
주름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자라나지
양배추로 만든 기분/장요원
감기몸살이야
으스스 오한이 들었어
자꾸만 옷을 꺼내
껴입었어
얼굴이 점점 부어올랐거든
가득 차고
텅 빈 얼굴
짧은 손목에서 뽑혀 나온 빠른 손뼉들이
지루한 얼굴을 감춰버렸어
의지와는 무관하게 광대뼈가 쑥쑥 자라나고 있어
압박붕대가 필요해
필사적으로 싸맸어
구불구불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겹겹이 속지에는
발열된 기억들이 소용돌이쳤어
키스처럼 전율처럼
어제 같은 아침은 따분해
신선한 기분을 배달해줄래?
감기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아
몸속의 압력이 결구結球를 압박해
팝콘처럼 튀어오르려고 해
동그란 압력을 공중으로 날려줘
바닥에 떨어뜨리는 건 파울이야
점프 점프
오른손으로 힘껏 패스해줘
운동장/장요원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돌고 있다
걸음에서 째깍째깍 소리가 나도록 돌고 있다
남자가 큰 보폭으로 뛰면서 여자를 반복적으로 앞지르고 있다
플라타너스들이 시계의 숫자판처럼
꾹꾹 박혀 있다
추 모양으로 주먹을 꾹 쥔 사람이 지나간다
척추를 바짝 세우고 양팔을 앞뒤로 저으며 지나간다
모르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인 양
다정하게 뒤를 따르고
같은 방향으로
운동장이 구겨지지 않도록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그네를 탄 아이가
운동장을 힘껏 밀었다 당겼다 한다
모래시계 같은 자세로 철봉에 매달린 남자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운동장을 뒤집는다
플라타너스와 플라타너스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줄기가
밤을 잘게 썰고 있다
데칼코마니/장요원
모르는 여자와 경비실에서 한바탕했다
멱살이 머리채를 잡고 빨강이 노랑을 잡아채고 손가락과 모가지와 팔다리가 뒤섞여 늘어지고
머리카락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입안에서 소용돌이 쳤지만
소리 밖으로 빠르게 번져나가지 못했다
모르는 여자 얼굴이 아는 얼굴과
자꾸만 겹쳐졌다
서로 당기고 미는 틈으로
자꾸만 아는 얼굴이
그러나 더욱 알 수 없는 얼굴이 나왔다
2인용 레일바이크 타기/장요원
페달을 밟자 선로가 감깁니다
길게 풀어진 강줄기가 팽팽하게 감깁니다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함께 펌프질을 합니다
정오를 지나가는 태양이 쏟아내는
홀씨와 정자들이 무수한 꽃들을 번식시킵니다
멈추면 안 돼
멈추면 안 돼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발음은 왜 동그랗게 말리는 걸까요
한쪽 심장이 덜컹거리자
베낭 속의 김밥이 풀립니다
페달을 더 세게 밟아
꾹꾹 말아야지
등 뒤에서 자꾸만 풀어지는 너를
꾹꾹 말아야지
내리막은 발목을 들어 올려도 발목이 조여 옵니다
나는
제자리를 구르는데
풍경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감깁니다
빠른 풍경들이
롤 블라인드처럼 촘촘하게 풀어집니다
람부탄/장요원
붉은 빛깔은
흰 접시 위에서 약간 젖은 채 발랄하다
처녀에서 나오지 않는 둥근 몸을
부드러운 털이 감싸며
아무렇게나 터져버리지 않으려고 단단하다
쉽게 벗기지 못하여
나이프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나는
비윤리적이고
완고한 솔기가 툭, 벌어질 때
동그란 방 하나
당돌하게 빠져 나올 때
싱싱한 어둠은 은밀하게 녹아들지
접시는
침들이 고이는 세계
혓바닥들의 세계
테이블 위의 감정들이
시럽으로 흐르고
나는 생크림으로 만든 케이크가 될래
벗기지 않은 너를
토핑처럼 푹푹 박을래
*말레이지아가 원산지인 열대과일
허공의 사생활/장요원
나무들이 손가락 모양으로 길어지고 간략해졌다
손톱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그늘이 벌겋다
공중이 핼쑥해졌다
단단해진 공중을 뜯고 나온 꽃망울을
따라 나온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은
장미의 기분이 아니야
구름을 탕진하는 일은 바람이 관여한다 해도
그것은 허공의 권리,
구름의 성분이란 죽은 새의 울음과 기억이 빠져나간 그을음 그리고 물컹거리는 무릎들
빗방울에서 저녁 냄새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지
어제를 잊어버리기 위해 눈송이들은 하얗게 태어나네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이 골목으로 모여들어
웅성거리다가
하얘지다가
눈과 입술을 두고 사라졌다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눈사람 속으로 들어가 부풀었다
장미의 몽우리가 점점 진해지자
어둠이 허공을 닫는다
담장이 그리운 장미가 공중의 허벅지를 끌어당긴다
풍선들/장요원
빵빵하던 이팝나무들이
끈만 남겨진 채
푹,
꺼져 있다
쭈글쭈글한 바람이 펴지려고 나무의 그늘이 가렵다
온통 코를 땅에 박고 숨을 불어대던 여름
바람이 쑥 쑥 자라나고
부풀던 폐는
여름의 기억으로 꿈틀거린다
가끔, 커다란 허파를 가진 바람이 공중으로 날려 보내려고 안달이 나지만
끝내
주둥이를 놓지 않는다
마주 보고 스틱을 휘휘 저을 때면
카푸치노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지
푹 푹 꺼지지
가을은 어지러움증을 앓고
허공의 손톱은
자꾸만 까칠해지지
어둠이 불어놓은 태양이
빈 끈에 매달려 있는 아침,
주저앉은 둥그런 그늘이 일어서고 있다
저수지/장요원
커다란 눈을 멀리서 들여다본다
고요가 출렁임을 꾹 누르고 있다 가라앉히지도 엎지르지도 못한 마음들이 수피(水皮)처럼 일어,
고여 있는 듯 같은 자리를 부유한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것은 품는 습성이 있다지
이미 떠나버린 철새들의 발가락이 꿈틀거린다 지난밤 달이 부려놓은 시름을 토닥거린다
저 온몸은 태(胎)인지도 모른다
소나기가 발끝을 세우고 빙글빙글 돌자 어지러운 듯 울컥거린다
꼬리 긴 바람이 마법을 걸어 파동을 일으킨다
수만 번 제 숨을 조였다가 푸는
물의 태동,
오랜 시간 자신의 씨앗을 품지 못한 태동은
이 계절을 분만하고 나서도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서쪽 하늘에 걸린 생리혈이 눈망울로 번지고 있다
풀리고 있는 오전/장요원
검은 뭉치가 마당 한쪽에서 풀리고 있다
조용히 접혀 있는 작은 새의 비행 궤적을
개미 떼가 풀어내고 있다
오전을 다 왕복해도 사라지지 않는 어둠
새의 몸에서 날갯짓이 길게 풀어진다
오그라든 발에서 실밥이 풀어진다
움켜쥐었던 허공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없다
몸을 부풀린 바람이 다녀간다
바람의 혀에
팽팽해지는 검은 실뭉치
허공엔 하현달이 날아간다
여전히 파닥거리는 깃털이나 마지막 비틀거림은 지상에서 배운 것
몇 개의 깃털은 아직 바람에 매여 있고
몸은 공기의 관(棺)에 들어있다
먼저 떨어진 나무 그늘 위로 붉은 이파리 하나가 떨어진다
잎들이 다 날아간 빈 가지 아래
개미 떼가 다 풀어간 실패 같은
뼈들만 얽혀 있다
새의 몸에서 검은 실이 길게 풀려나오고 있다
아니, 오전의 햇볕 한 줄기가
처마 밑 어둠 속으로 오래 감겨 들어간다
외출을 벗다/장요원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벗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각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정유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고여 있는 잠/장요원
꽃잎이 딛는 자리마다 꽃의 족적이다
울음에 갇힌 족적들이
가라앉지 못하고 고요 속에 떠 있다
목백일홍의 기침 소리가 고였다 가고
밤새 흔들린 나무들이
뜬 눈으로 졸고
뒤늦게 당도한 밀봉된 울음들이 툭툭 뜯겨진다
검은 리본을 두른 영정에
환한 웃음이 울고 있다
썩지 않으려고 아무리 환하게 웃어도
울음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녀가 고였다 간다
다시 몸속에 통증이 고이지 않도록
꽁꽁
묶여간다
울음은 어둠을 구부리고
상복 입은 열두 살 아이의 울음이
고인 자리를 흔든다
숲/장요원
헐거워진 벽에 매달린 뻐꾸기 둥지에는 알이 없다
울음이 열릴 때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시간들만 튀어나온다
고개를 내밀고 우는 저 환지통
목청이 터질 때마다
늙은 시간들이 사라진다
부화되지 않은 시간을 떠서 세안을 하고 뻐꾸기가 내어놓은 숲길을 걷는다
발자국 뗀 자리마다 소리가 고여 맑아지는 수위水位가 있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날 때도 꾹, 백화점 바코드에도 꾹,
소리를 다 소비하고 돌아와 다시
충전하는 몸들
울음이 부리를 침대에 묻는 시간,
현관 신발엔 하루치의 울음이 단단히 묶일 것이고
어둠은 캄캄한 잠을 품고 있다
이미 떠나간 시간들, 낯설지 않은 울음의 횟수가 집안을 울린다
시간이 날아다니고
부화되고 있는 숲이 뒤척이고 있다
노병의/장요원
수련의 수많은 잎은 늘 오므리고 있는
단단한 입술,
단추처럼 단정하다
오후 5시에는 꽃뱀이 개구리의 울음을 물고 사라지고
오후 5시의 그림자들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긴 혀를 늘어뜨리고 생각이 골똘하다
누군가 벗어놓은 사라진 신발을 끌고
절벽은 바쁜 걸음으로 오기도 하지
공항으로 가는 구름이 불시착하는 건
개떼들의 공증을 끌어내렸기 때문
햇빛과 빗방울이 동시에 투신한 까닭은
그들 사이에
분홍의 감정이 관여했기 때문
정오의 체위를 모방하는 수초들
그것은 그들만이 아는 비밀
속눈썹처럼 나무들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어지고
눈을 감은 늪
세계의 모든 비밀들이
완강하게 입술을 채우고 있네
춤/장요원
바람의 손끝에 춤이 묶여 있다
몸을 벗어버리자
바람들이 옷으로 들어온다
옷이 한번도 해보지 못한 동작을 한다
그림자들이 바닥에서 춤을 춘다
바람이 손끝으로 줄을 밀고당기는 동안
빨래집게가 햇볕을 꽉 물고 있다
날아가지도 못하는 공중에 관절들이 가득 들어있다
셔츠를 입은 바람이 줄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안간힘을 쓰며 놓지 않는 햇볕의 어금니
미니스커트 속으로 바람이 든다
수백 마장 바람의 층에 동작들이 접혀 있고
한 호흡 한 호흡,
넘어갈 때마다
눅눅한 관절이 경쾌해진다
바닥에 매달린 춤이 다 마를 때까지
오후는 햇볕을 끄지 않았고
공중은 매여 있어
몸을 비워낸 춤들이 반듯하게 개켜지는 저녁
가지마다 서랍처럼 은밀한 파동이 들어 있다/장요원
가지마다 붙어 있던 소리들을 나선의 밑동으로 밀어 넣고
새들이 푸른 귀를 찾아 날아갔다
펄럭거리던 그늘이
떨어진 소리를 다 싸서 가고 가끔
햇볕의 뼈대만 흔들리고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이 머플러처럼 가지를 감고
남아 있는 몇 장의 귀가 따뜻한 소란을 듣고 있다
나무의 소임은 햇볕의 등에
그늘을 붙였다 떼는 일
엽록의 달팽이관에 새들의 졸음을 재워주는 일
가지마다 서랍처럼 은밀한 파동이 들어 있다
햇빛 두어 채 개켜 두거나 혹은
새들의 사서함이거나 노숙하는 구름이 묵어 갈 서랍들
따뜻하라고
은색의 머플러가 감겨져 있다
늙은 오동나무는 늙은 바람의 목덜미이다
무거운 귀를 툭툭 흘리고
맨몸으로 서 있는 은밀한 서랍이지만
봄이 오면
푸른 귀들이 빼곡, 차오르겠다
말뚝/장요원
초록이 접힌 들판에
겹겹이 바람을 껴입은 느낌표 하나 서 있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제 그림자를 묶어 두고 있다
몸집 큰 바람이 그림자를 넘어뜨릴 때도 있지만
그림자는 한번도 줄을 놓지 않았다
어린 그늘에
스스로 묶였던 기억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수만 겹의 바람이 묶였다 가는 곳,
말뚝은 처음 묶였던 목덜미를 기억한다
가끔 바람을 타고 온 굽소리를 되뇌이며
느릿한 되새김질을 한다
그때마다 머리에선
구부러진 각질 덩어리가 자라곤 한다
애기덩굴 한 줄기가
더딘 걸음으로 뒤늦게 노을을 감는다
허리 굽은 저녁을 끌고
누군가 말뚝을 쑥 뽑아 풀숲으로 던진다
흩어졌던 풀벌레들이 누운 말뚝 근처로 모여든다
풀숲이 와글와글 소란스럽다
속이 다 타버린 것을 어둠이 뒤꿈치로 비벼 끈다
한 개비의 저녁이 꺼져가는 풀숲,
말뚝이 사라진 들판엔
캄캄한 씨앗들이 뿌려질 것이다
나무들이 일제히 바람의 고삐를 풀어주고 있다
드라이플라워/장요원
해를 보면 자꾸만 어지러워
거꾸로 매달렸다
꽃대가 밀어올린 향이 오르던 그 보폭으로 흘러내렸다
향기의 내용이 다 비워지기까지
붉어진 시간만큼 외로웠다
문득,
유리병 속을 뛰어내리는 코르크 마개의 자세가 궁금했다
핑킹가위 같은 비문들이 잘려나갔다
창백해졌다
소소한 바람에도 현기증이 난다
무릎이 잘린 낯선 걸음들이 유리문을 지나갔다
유리에 서성이던 웃음들이 싹둑 잘렸다
통점은 훼손된 부위가 아니라 향기의 왼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붕대처럼, 향기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나팔꽃을 본 적이 있지 그들의 심장이 왼쪽에 있을 거라는 편견도
흘러내렸다
내력 없이 내리는 안개비에도 쉬이 얼룩이 번진다
허공이 우산처럼 접히고 있다
홀쭉해졌다
장미의 유전자를 가진 나는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고,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
할퀴었다
가시와 향기는 다른 구조를 가진 같은 슬픔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몸속에서 너라는 물질이 다 휘발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바로 설 수 있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벽에 걸린 캔들 홀더 속
검은 심지가
잊어버린 어제를 켜고 있다
부다페스트/장요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들을
다뉴브강 물결이 신었다 벗었다 하는 것은
걸음의 의지와는 무관하지
강으로 뛰어든 노란 버스가
유람선의 기분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구급차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지퍼처럼
배를 신은 버스가
여미고 있는 강을 열어젖히네
호텔식 아침 식단에 놓인 무화과는
너무 단단해
무화과를 신고 있을 사과를 생각하니
껴입은 기분이 헐렁해진다
지하철에서 만난 여인은
아침 사과처럼 주근깨가 박혀 있고 붉은 기운이 돌아
아는 말을 건네면
모르는 말이 튕겨 나올 것 같아
흠집이 없는 사과는
꼭 죄는 신발일 거야
오랫동안 주인을 신지 못한 신발들은
햇빛 아래서도 스폰지 같은 어둠을 신고
브론즈가 되어간다
걸음들이 맨발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걸어도 닳지 않는
바닥을 견디고 있다
프러포즈/장요원
너는 왜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웃음을 상자 안에 담아 달라고 부탁하는 거니?
상자에 웃음을 담는 순간
너의 입술은 기울고 웃음이 엎질러지네
눈가와 입가
사이의 거리를 팽팽하게 당기지만
간격은 어느새 느슨해지지
구름다리 한가운데 서서 너는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구름 위로 밀어 달라고 하지
급하게 미는 바람에
V는 구름에 걸려 넘어지고
허공은 출렁거리네
장미정원을 도는데 문득
꽃들이 리본처럼 허공을 묶고 있구나
꽃잎이 여러 겹인 꽃은 매듭이 많을 거야
허공은 미끌거리거나 밀어내는 습성이 있는
질기고
고집스러운 물질
보호막처럼 허공 안에 들어 있는 우리는 마치
몸이 없는
파충 같구나
너는 왜 자꾸만 주머니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꺼내
상자에 담아달라고 하는 거니?
줄넘기 하는 여자/장요원
양손으로 빠져나온 커다란 혀가
제 몸을 친친 감는다
아직 나오지 않은 그림자를 몸 안으로 끌어당기며
질겅거리는 생각들을 툭툭 뱉어내며
밤새 녹이 슨 여자가
뻑뻑해진 아침을 감고 있다
빠른 줄이
허공에 튀어오르는 여자를 방에 가둔다
오늘 아침 여자의 기분은 체크무늬 노랑
방방마다 갇혀 있는 농익은 기분을 터뜨리려는
노랑이 통통 튄다
지칠 줄 모르는 노랑
줄장미가 담장을 넘는다
여자와 장미가
마주보고 줄을 넘는다
반복적으로 분홍이 솟는다 넘어지는 분홍을 자꾸만 세우는
줄을 놓지 않는 줄장미들
박자와 박자 사이에 끼어 분홍이 늙어간다
박자와 박자 사이에 앉아 고양이가 운다
점점 불안해지는 박자의 틈새로
헐렁해지는 여자가
튕겨져 나온다
커다랗고 긴 혀가
친친 감은 여자의 거친 숨을 가지런하게
풀고 있다
금요일/장요원
고장난 바람을 가슴에 가득 채운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속도가 빠져버린 바퀴가 허공을 굴리고
바람이 트랙을 돌자 지나온 골목들이 굴러 들어와 바퀴살에 감긴다
창문에 번진 햇살이 바퀴살을 묻혀 꽃을 찍어낸다
노란 수선화가 꽃잎을 궁글리는 오후
여자가 젯상에 올릴 모서리들을 가위로 오려낸다
목이 긴 선인장이 그림자를 구부린다
옥상 위 환풍기 축이 겨울의 근육을 풀어가며
허공의 감정을 순환시킨다
벽에 걸린 시계가 해를 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