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사 불광지 2024년 3월호
< 수행ㆍ명상의 조감도인 ‘십우도’ >
십우도 대신에 말을 묘사한 십마도十馬圖가 있고, 티베트에서는 코끼리를 묘사한 십상도十象圖 등이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십우도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원고는 소[牛]를 배경으로 한 곽암 선사의 십우도를 중심으로 한다.
1.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축생 : 코끼리ㆍ말ㆍ원숭이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불교 경전이든 코끼리ㆍ사자ㆍ말ㆍ소ㆍ원숭이 등 다양한 축생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경전에 축생이 등장하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부처님께서 축생의 그 특징 및 현상을 비유해 수행으로 연결시켰다. 다음 하나는 축생의 행동이나 모습을 사람들의 마음에 비유하였다. 전후자 모두 수행자들이 정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법구경>을 중심으로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축생들을 살펴보자.
첫째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축생으로 코끼리를 꼽을 수 있다. 코끼리는 충직한 모습이나 정진 비유가 보편적이다. 먼저 정진을 비유한 코끼리 경우이다. 한 마리의 코끼리가 늪에 빠졌는데, 사람들이 아무리 구조하려고 해도 구조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혜를 발휘해 이 코끼리가 전쟁터에서 행진했던 경험이 있는 것을 알고, 코끼리에게 군악대의 음악을 연주해주었다. 그러자 코끼리가 웅장한 군악 소리를 듣고, 스스로 늪에서 빠져나왔다. 부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코끼리가 스스로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그대들도 번뇌의 늪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327]” 다음은 코끼리의 충직한 모습이다. 코삼비 지역 비구들이 두 팀으로 나누어 분쟁이 벌어졌다. 부처님께서 싸움을 말리다가 지쳐 숲속에 홀로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시봉했던 동물이 코끼리이다. 이후 부처님께서 코끼리와 헤어질 때, “진실되고, 지혜로우며 덕이 높은 도반을 만난다면 그와 함께 즐겁게 살며 수행을 잘 해서 삶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할 정도로 부처님께서 코끼리에게 애틋한 말씀을 하셨다. 한편 <법구경>에 코끼리를 주제로 하는 ‘코끼리품’이 따로 있을 정도로 홀로 고고하게 정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데서 기인해 대승불교에서 실천행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타고 있는 동물이 코끼리라고 본다.
둘째는 말[馬]인데, 말은 정진과 게으름, 분노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나 있다. 두 비구가 숲속에서 함께 수행하였다. 한 비구는 열심히 정진하는데, 한 비구는 게으름을 피웠다. 결제가 끝나고, 부처님께서 게으른 비구를 꾸짖으며 “게으른 비구는 둔마鈍馬와 같고, 부지런한 비구는 준마駿馬와 같다[#29].”고 말씀하셨다. 또한 말이 달리는 모습을 사람의 분노나 악한 성품에 비유해 이를 제어해야 하는 것[마음]에 비유하고 있다. “어리석은 이는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직 고삐만 잡고 있다[#222].” “조련사가 말을 잘 다루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잘 다루어야 한다[#380].”
셋째는 원숭이인데, 마음의 불안이나 번뇌에 비유한다. 원숭이는 <법구경>에 등장하지 않는데, 초기불교 경전인 <불유교경>에 “마음이 고요하지 못해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잠시도 머물지 않는 산란한 원숭이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 선사들의 어록에도 잠시도 안주하지 못하는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하고 있다.
2. 소[牛] 의 상징 및 의미
필자는 ‘stay foolish’라는 말을 좋아한다. 한 눈 팔지 않고, 꾀부리지 않으며 우직하게 한 길로 나아가는 진실한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서다. 여기서 우직하게 한 길로 가는 동물은 소[牛]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또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간다’고 했는데,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나 장인 정신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렇게 세간에서 소는 신뢰를 상징하며 우직한 동물이지만, 불교에서도 소는 매우 상서로운 이미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농업 문화로 사람들과 가장 밀접한 동물이 소라고 본다. 그러면 세간에서는 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자.
첫째는 인도인들의 소에 대한 예찬이 지극하며, 신성시한다. 뛰어난 사람을 표현할 때도 ‘소’에 비유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 전 성씨가 ‘고타마(Gotama)’인데, ‘최상最上의 소’를 상징한다.
둘째는 중국 도교의 시조가 노자이다[중국에 도교 사찰과 승려가 있지만, 도교는 중국에서 종교가 아닌 문화로 간주]. 중국인들은 노자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소를 타고 함곡관函谷關 너머로 멀리 사라졌다’고 하면서 신비스런 이미지로 여기고 있다.
셋째는 중국에서는 위대한 사람을 묘사할 때도 소에 비유한다. 당대 조사선의 개조開祖인 마조(馬祖, 709∼788)도 그의 전기에서 ‘소처럼 걷고 호랑이처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牛行虎視]’고 묘사하고 있다. 우행호시는 『대지도론』에서 제시한 부처의 32상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 말은 성자를 지칭한다. 또한 남악 혜사(南嶽慧思, 515∼577, 천태지의의 스승)의 전기에서도 그를 ‘소처럼 걷고 코끼리처럼 바라보았다[牛行象視]’고 묘사하고 있다.
3. 불교 경전에 나타난 소[牛]
첫째, <대반열반경>에는 소의 우유를 ‘최상의 진리’나 ‘최상승의 경전’으로 비유하고 있다. 소에서 나온 우유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제호醍醐’라고 한다. 이 제호를 불교 최상의 진리에 비유하였다. 여기서 최상의 진리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과 열반사상이다. 또한 경전 가운데 <대반열반경>이 최고의 수승한 경전이라며, 제호에 비유하고 있다. <벽암록> 2칙 평창評唱에서도 “만약 참구하여 투철하게 사무치게 되면 자연히 으뜸가는 제호의 맛과 같다.”라고 했는데, 최상의 해탈을 말한다.
둘째, <법화경> 「비유품」에 소를 일불승一乘에 비유하고 있다. 한 장자가 있었는데, 대저택의 부호이다. 어느 날, 그 큰집에 불이 났는데, 혼자만 빠져나왔다. 저택 안에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집 밖으로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해 장자는 아이들에게 ‘양거羊車ㆍ녹거鹿車ㆍ우거牛車 장난감을 준다.’고 소리친다. 양거는 성문승, 녹거는 연각승, 우거[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승을 상징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오자, 장자는 가장 뛰어난 대백우거[大白牛車, 흰소가 끄는 수레]를 준다. 여기서 백우거란 <법화경>에서 최고의 진리인 일승[大白牛車]에 비유한다. 이는 화택에 비유를 들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삼승방편三乘方便 일승진실一乘眞實을 말한다.
셋째, 동양에서는 농업 문화로서 소와 매우 친숙하다. 동양종교인 불교는 선禪이 발달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와 관련한 비유와 상징이 많다. <법구경>에서 “목동이 채찍으로 소를 몰아 목장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처럼 노사老死가 목숨을 순식간에 (저 세상으로) 몰고 간다[#135]”고 하였다. <유교경>에 의하면, “그대들 비구들이여, 이미 능히 계에 머물렀다면, 마땅히 5근을 제어해 방일하거나 5욕에 빠지지 말라. 비유컨대 소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소들을 감시하면서, 남의 농작물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5근[안이비설신, 여기서는 번뇌를 상징]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마음을) 잘 보살피고, 길들일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셋째 항목이 십우도와 가장 밀접하다.
4. 십우도 등장 이전[唐代], 어록에 나타난 ‘소’
십우도는 12세기 이후 남송 시대에 유행한 것이다. 하지만 소[번뇌]를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마음 다스림]은 당나라 때, 선사들 어록에 등장하고 있다. 두 가지 선문답을 소개하기로 한다. 마조(709∼788)의 제자인 석공 혜장(石鞏慧藏, ?∼?)은 사냥꾼 출신이다. 출가해서도 수행하는데, 여일하게 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혜장과 스승 마조와의 선문답이다.
하루는 석공혜장이 공양간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마조가 와서 물었다.
“무엇을 하느냐”
“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돌보고 있느냐?”
“한번이라도 미망迷妄에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단번에 코끝을 잡고 끌어당깁니다.”
“너는 소 기르는 법을 잘 알고 있구나.”
석공 혜장이 소를 돌보는데, 미망에 떨어지면 코뚜레를 잡아당기는 것으로, 번뇌를 잘 다스리고 자신을 살피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 이런 유사한 선문답이 있다.
백장(百丈, 749∼814)과 그의 제자 서원 대안(西院大安, 793∼883)선사 이야기다. 대안이 백장 문하에 처음으로 찾아가 스승 백장에게 물었다.
“제가 부처를 알고자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처입니까?”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과 같구나.”
“그런 줄 알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다.”
“처음과 마지막에 어떻게 보림保任해야 합니까?”
“소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소를 감시해서 남의 밭에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어록 인용문에도 ‘무엇이 부처이냐?’는 제자 대안의 질문에 스승 백장은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바로 이런 선문답이 당나라 때에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로 접어들어 깨달음의 여정 그림과 게송이 발전된 것이다.
5. 십우도의 전체 졸가리
앞에서 살펴본 대로 경전에서는 ‘소’라는 존재는 최상의 해탈이나 경전에 비유하고 있으며, 뛰어난 사람을 표현할 때도 ‘소’에 비유하고 있다. 당대에 들어 선사들의 선문답에 소를 잘 길들여 번뇌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송나라로 접어들어 소를 인간의 번뇌적인 요소 측면에 두고, 소를 잘 길들이는 수행 과정 단계를 묘사한 그림이 발전하였다. 선자禪者들을 위해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북송 시대, 소를 주인공으로 여러 종류의 십우도ㆍ심우도ㆍ목우도 등이 등장하였다. 이후 남송 시대로 접어들어 곽암의 십우도가 나왔다. 즉 동아시아에서는 곽암 선사의 십우도가 가장 많이 유통되었으며, 우리나라 법당 벽화에 곽암의 십우도가 압도적이다.
곽암 선사는 송대 임제종 양기파 승려이고, 법명은 사원師遠이며, 대수 원정(大隨元靜, 1065∼1135)의 법맥을 받았다. 곽암은 청거 호승(淸居皓昇)의 목우도牧牛圖를 참조해 10장의 십우도송을 지었다.
곽암 십우도의 전체 졸가리는 마음[번뇌]을 소[牛]에 비유해 번뇌를 조복 받고 길들여[牧牛],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는[騎牛歸家], 결국 소도 잊고, 자신도 모두 잊어버리는[忘牛存人] 과정을 지나 해탈한다. 그런 뒤에 회향 정신으로 중생을 제도한다. 이러한 과정을 열 가지로 묘사한 것이다.
깨달음을 순식간에 이룰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다. 부처님을 비롯해 역대 조사들의 전적前績을 귀감으로 삼는다고 해도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들을 위해 깨달음의 과정을 그림으로 보여서 선적禪的인 향상일로向上一路의 구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십우도이다. 그럼 십우도 각각을 하나 하나 차근히 살펴보자[편의상 이해하기 쉽게 번호를 붙인다].
❶ 심우尋牛는 목동이 소를 찾는 모습이다. 이는 본성의 참됨을 잊고 찾아 헤매고 있다. 실은 잃어버린 소도 없는데, 그 ‘잃어버렸다’는 어리석음을 번뇌에 비유한다. 이 말은 본래성불ㆍ본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즉 돈오頓悟사상으로,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되는데 어리석게도 밖에서 찾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❷ 견적見跡은 목동이 여기저기 소를 찾아 헤매다가 소 발자국을 발견하고, 이를 찾아 나선다. 수행자가 수행하는 단초를 발견하고, 참 본성을 찾기 위해 정진하고 있음을 뜻한다.
❸ 견우見牛는 목동이 소의 뒷모습을 발견한 묘사이다. 수행자가 깨달음의 근원을 자각해 본성을 보아 오도悟道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뜻한다.
❹ 득우得牛는 목동이 소를 발견하고 소고삐를 잡아당기는 모습이다. 수행자가 본인이 본래 성불되어 있음을 알고, 본성을 꿰뚫어보는 경지에 도입한 단계를 뜻한다. 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니다. 곧 처음 견성한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❺ 목우牧牛는 목동이 소가 날뛰는 습성을 잘 길들이는 모습이다. 앞의 ❹득우得牛에서 얻은 (견성의) 경지를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진하는 단계로서 보림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고려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선사는 스스로 호를 ‘목우자牧牛子’라고 하였다. 목우자란 ‘소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지눌 선사가 ‘영원히 수행하는 과정의 구도자’로 살겠다는 서원을 엿볼 수 있다.
❻ 기우귀가騎牛歸家는 소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부대사(傅大士, 497~569)의 오도송 “빈손으로 호미를 쥐며 걸으면서 물소를 탄다. 사람이 다리를 지날 때 다리는 흐르나 물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한 경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대혜서> 「이보문李寶文에 대한 답서答書」에 “자기의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안주하는 곳[歸家穩坐之處]”이라고 하였다. 무자無字를 들고 참구하는 그곳이 바로 생사의 번뇌심이 끊어진 당처요, 깨달음의 근원지에 도착한 것을 자기의 본래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는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❼ 망우존인忘牛存人은 집에 도착해서 소는 없고 목동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소는 단지 방편일 뿐이므로 고향에 돌아온 이후, 방편에 마음 두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 번뇌가 남아 있지 않은 단계로서 평상심平常心과 무사無事ㆍ무심無心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단계를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 경지라고 볼 수 있다.
❽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사람도 소도 모두 잊은 모습이다. 언어도단 심행처멸心行處滅의 경지로서 텅 빈 원상만 그려져 있다. 위앙종의 종지 가운데 하나가 원상이다. 또한 신라의 요오순지는 위앙종의 앙산 혜적(仰山慧寂, 815∼891)에게서 법을 받아와 원상의 선풍을 전개하였다. 이외 조사선 시대 선사들에게서 원상의 선문답이 어록 곳곳에 나타나 있다.
❾ 반본환원返本還源은 본래면목의 본 자리로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풍경만이 그려진 모습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경지로, 여여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❿ 입전수수入纏垂手는 포대화상과 동자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다. 후대에는 행각승이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포대화상은 중국에서는 미륵부처라고 호칭한다. 포대화상은 뚱뚱한 몸집에 큰 배를 내밀고, 늘 웃음을 띠고 있으며, 등에 포대를 짊어지고 있는데 중생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 포대화상은 당나라 말기, 절강성浙江省 봉화현奉化縣의 승려 계차(契此, ?∼917)를 모델로 한다. 계차는 늘 길에서 생활하고, 길에서 잠을 청했으며, 중생들과 저자거리에서 함께 했던 승려이다. 계차가 입멸한 후 중국인들은 그를 ‘미륵의 화신’으로 받들어 희망의 아이콘으로 섬기고 있다. 필자는 포대화상을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에 비견한다. 십우도를 도표로 만들어보면 이러하다.
순 서 | 깨달음의 과정 및 전환 |
❶ 심우尋牛 | 불각不覺 단계 → 시각始覺 단계로 전환 |
❷ 견적見跡 | |
❸ 견우見牛 | |
❹ 득우得牛 | |
❺ 목우牧牛 | |
❻ 기우귀가騎牛歸家 | 시각始覺 단계 → 본각本覺의 경지로 전환 |
❼ 망우존인忘牛存人 | |
❽ 인우구망人牛俱忘 | |
❾ 반본환원返本還源 | 본각의 경지 |
❿ 입전수수入纏垂手 | 본각本覺[智] → 대비심으로 중생에 회향 |
6. 십우도의 전법傳法 사상 및 현대적 의미
수행자가 수행을 시작해서 번뇌를 조복 받고, 해탈을 성취한 뒤에 고요한 경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중생세계로 와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이 십우도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십우도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이 십우도는 12세기 남송 시대 작품이지만, 근자에도 수행자ㆍ명상자들에게 수행 방법의 나침반 역할을 할 거라고 본다. 20여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명상이 유행하고 있고, 유행을 넘어 일반화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도 선명상을 보급해 불자 및 국민들에게 명상 지침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수행하는 방법 및 번뇌를 조복하고, 공부를 마친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표본이 십우도라고 본다.
둘째, 마지막 열 번 째인 ❿입전수수는 깨달음 이후 중생구제이다.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불하고, 첫 제자들인 5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하늘과 인간 세계에서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해 자유인이 되었다. 이제 유행遊行해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법을 전하러 가자. 전도하러 갈 때는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지 말고, 한 사람 한사람씩 다른 길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야 한다[잡아함경].” 근자는 불교에서 전법과 포교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인 ❿입전수수는 현 승려들과 불자들에게 반드시 새길만한 내용이다. ❿입전수수 그림의 서문을 보면, “표주박을 들고 저자거리에 들어가며, 지팡이를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술집도 가고, 고깃간도 들어가서 교화를 펼쳐 성불케 한다.”고 하였다.
곧 중생 구제를 위해서는 수행자가 그 어떤 곳[혹 지옥]이라도 가야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사상은 중생과 함께 한다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할 수 있다. ‘화광’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인격적 품성이나 재능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요, ‘동진’이란 오염된 티끌 세상에 들어가 그들과 동화되어 함께하는 것이다. 또한 4섭법 가운데 동사섭同事攝[중생 속으로 들어가 중생과 더불어 함께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좌선 수행에 대해 설명해놓은 종색의 <좌선의> 첫머리에서도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먼저 대비심을 일으켜 서원을 세우고, 삼매를 닦되 중생을 제도할 것이요, 자기만을 위해서는 수행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불교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행법으로 한다. 십우도의 ❶∼❾ 그림이 자신만의 수행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❿그림은 타인을 위한 사상이다. 곧 자신의 수행 완성을 물론이요, 타인을 위한 구제도 겸해야 한다는 명상의 표본이 바로 십우도라고 본다.
첫댓글 심우도와 마조대사와 제자들과의 문답 감사합니다
그동안 금바위가 전하려고 하였던
무상대사=금타대화상님의 보살도와 구체적인 방법
21세기에 금타대화상님 금바위의 금타만다라 설계도를 만듬을 하늘에서 보시고
2006년 금바위의 어머님 원삼 이화순 어머님 자택에 천상계에서
나타나시고 전하신 말슴 몇개의 만다라 완성하였는가?
금바위는 세어본적 없음으로 모릅니다 답드리니
57개다 수고 하였다
말씀하시고 앞으로 더 완성하도록 도와주시겠다
약속 말씀에 언제일까?
2008-2012년 사이에 이곳ROCHESTER CORNER STORE에서
금바위를 방문한 백인 남녀 4명의 GRAPHIC DESIGNER에 의하여
컴푸터로 완성되어 60X12=720만다라 완성 되엇으니
지금부타는 중생들이라도 만다라 한장으로
전세계에서 인연따라
일대인의 자재경 만덕 묘각 입전수수할수 있다
한국에 전하였읍니다
금바위 항상 미국인들에게
금바위의 제안 BLESSING에 응하는 사람들은 즉석에서
삼취정계 일어남을 목격도존함을
졸필로 18년동안 전하고있읍니다
선불교와 화엄경 보현행원 52단계 실천
법화경 십여시 오도를 증명하는 선불교 되옵길!
만다라시대
화광동진함
입전수수함
증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