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장이란 애시 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 병이나 받고 고기 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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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춥스럽게(지저분하다) 날라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 선달을
나꾸어 보았다. "그만 거둘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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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자전거를 몰고 왕 숙천을 건너, 다운타운으로 들어왔어요. 때마침
장현 장날입니다. 담양 5일 장도 2일 7일이었는데 오늘이 7일이니 운수 좋은
날입니다. 이어 폰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귀가 아플 만큼 단단히 끼워야
합니다. 김치 찌게(11.000)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어요. 봉평 장이나 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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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나 장날풍경은 1세기가 지났는데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싱싱한 산
낙지가 3마리에 만원이래서 2만원으로 돈 바꿨고 구운 김 2팩을 4.000원에
사면서 3팩에 5.000원으로 할까 말까 잠깐 망설이다 '눅눅해진 김'이 떠
올라 4.000원을 입금 했어요. 나이스 쵸이스. '메밀꽃 필 무렵'을 장터에서
읽으니까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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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같아 생각 없이 오랜 시간 Muse 자리에 이 효석이 있었습니다.
작가는 1907년 생 이고 35살에 요절했어요. 그의 작품도 '메밀꽃 필 무렵'을
빼고는 읽어보지 못했는데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는 받지 못하는 걸로 압니다.
전형적인 원히트 원더. 특히 장편들은 평이 나빠요. 장편 소설가 이 효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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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표현하면 무 재능. 그나마 '화분'(1939) 정도가 언급되는 정도에요.
장편소설은 글이 다소 거칠더라도 서사가 먼저 있고 문장이 다음인데 이
효석은 아주 전형적인 문장만 예쁜 작가였다고 해요. 서사를 묵직하게 끌어
가며 메시지를 주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의 작품들은 항상 기승전결의 '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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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힘이 빠져 흐지부지되어버려요. 당연히 글이 길어질수록 이 단점이
커지니 장편들에 대한 평이 특히 박하고, 단편 몇 개만 기억에 남은 것
같아요. 그런 이 효석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이상', '김 동인', '김 유정' 같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들과 같이 자기 이름을 딴 문학상을 갖게 되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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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 사이에선 거장이라는 과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친구 잘 둔 덕
입니다. 절친한 친구 유진오가 소설가이자 학계, 정계의 거물이라 정치권력을
뒤에 두고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어요. 그는 먼저 간 친구를 기리고
부각시키는 데 성심을 다했어요. 반민족 행위 경력이 있음에도 오래 회자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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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서 정주'나 '김 동인'처럼 차마 지워 없앨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성과가 뚜렷한 작가들이 대부분인데 이 효석은 유진오의 판 깔기로 예외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김동리는 그의 작풍에 대해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을 내렸어요. 비판이 아니라 거의 시인이 소설을 쓰듯, 소설의 분위기를
잡는 데 능하다는 반어에요. 오늘 ‘메밀꽃’은 에로틱한 부분의 재발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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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재산을 탕진한 뒤 첫사랑을 못 잊은 채 수십 년을 떠돌며 사는 장돌뱅이
허 생원이 어느 날 아들로 생각되는 동이를 만납니다. 봉평 장날 허생원과
조선달은 일찍 장사를 접었습니다.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충주집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심하게 나무라지만, 동이는 허생원의 나귀가 날뛰자 바로 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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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원은 암샘을 내는 나귀 때문에 낯이 뜨거워집니다. 허생원과 동이와
조선달은 대화까지 동행을 해요. 그 달 밝은 밤, 허생원은 또 옛이야기를 꺼냅니다.
허생원은 젊은 시절, 봉평 장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낸 성서방네 처녀를 지금도
잊지 못해요. 처녀는 다음 날 제천으로 달아나 소식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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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는 어머니 고향이 봉평이고, 제천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서 쫓겨났다고
말해요. 이 말에 허생원은 실족하여 물에 빠지고, 동이가 업어 물을 건너다.
허생원은 대화 장을 거쳐 제천으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왼손잡이 허생원은
대화장을 거쳐 제천으로 가자고 제안해요. 왼손잡이인 허생원은 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동이가 왼손잡이인 것이 눈에 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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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러는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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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
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집으로 돌아와 낙지 두 마리를 훑어 참기름만 발라 식인종처럼 먹는데
'달빛이 젖는' 상상이 되었어요. 그래 자자. 잠이 보약이라지 않은가.
2023.4.8.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