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주제는 인식(認識)이다
인식은 설명이 아니라 해석이다
사람보다 나무가 먼저 나왔다는 자연사적 사실을 은행나무를 통해 해설을 하고 나면, 그 다음 종로구 선정 아름다운 나무인 소나무까지는 밋밋하게 걸어가야 한다. 그 길에 새로운 시선을 또 던져야 한다. 묵직한 주제가 아니라 발걸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내용이면 더욱 좋다. 참가자들의 적극 반응을 이끌어내면 더할 나위 없이 흥에 가득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KT 옆 보도 오른쪽 조경 화단에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쥐똥나무가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열매가 쥐똥을 닮았다고 해서 쥐똥나무라고 하는데, 너무 궁금해 쥐똥을 검색해보았어요. 저는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약간 다른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참가자들이 적극 참여한다.
“나는 쥐똥 봤는데, 닮은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전혀 안 닮았어요. 하얀 꽃이 피는 이 예쁜 나무에 쥐똥나무가 뭐예요. 이름을 바꿔야 해요.”
그러면 내가 개입한다.
“북한에서는 열매 색깔과 모양 그대로 해서 ‘검정알나무’라고 부른답니다.”
수긍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 중요하지 않다. 한바탕 즐거우면 된다. 이어서 종로소방서 앞에 심어 놓은 사과나무를 본다. 경북 영주에서 기증한 진짜 사과나무를 보며 신기해한다.
나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역사 이야기 차례다. 교보빌딩 사이에 있는 종로를 보며 피맛골 이야기를 준비해보았다. 양반들의 행차를 피하기 위해서 만든 피맛길이라기보다 고급 관료가 더 많은 일을 하니 교통정리 차원에서 만든 길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를 시작으로 지하철 공사로 피맛길이 사라진 과정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사라진 것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오래된 맛집의 맛 아닐까요?”
이때부터 해설은 해설이라기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장이 된다. 해설가는 그저 이 시간을 이끄는 앞서가는 사람일 뿐이다. 길을 알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아는 것뿐이다.
<역사 이야기 스토리텔링>에 나오는 글을 보자.
[스토리텔링의 본질은 이야기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담화자 사이의 행위에 있다. 다시 말해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된 작품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이야기되는 과정,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과 담화는 어떤 관계인가?
김기국은 “스토리(story, 이야기)가 담론(discourse)을 거치면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이야기하기)이 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연속된 시간 순으로 되어 있는 이야기가 작가의 담론에 의해 변형되고 조직되어 원래의 시간을 초월해 만들어지면서 플롯(plot)을 지닌 이야기가 되는 것이 곧 스토리텔링이다. 플롯에 의한 스토리의 담론화 과정이 곧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이다. 결국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의 차이는 ‘이야기’와 ‘이야기하기’의 차이로, 스토리가 서사행위에 사용되는 서사 정보나 소재라면 스토리텔링은 스토리를 사용해 화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숲해설과 문화해설의 공통점은 야외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서서 들어야 하고, 1시간 이상은 걸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위 글에서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된 작품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이야기되는 과정,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와 “플롯에 의한 스토리의 담론화 과정이 곧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이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준비한 이야기는 언제든지 변주될 수 있는데, 그 담론화 과정은 바로 참가자들의 반응과 맞물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야외 활동이 지루하지 않게 된다.
피맛길에서 맛집과 맛을 꺼낸 이유는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도도 있었다. 조경 화단에 있는 우리의 토종나무인 미선나무를 보면서 식물주권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즉 소중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미리 환기시켰다는 것이다.
이후 4월 코스에서 내가 해설한 내용들은 이렇다. 미선나무 옆 층층나무, 종로구청 앞 정도전 집터, 백목련과 별목련, 코리안리재보험 앞 소나무, 수송공원 주변의 이태리포플러와 계수나무, 조계사와 그 안에 있는 회화나무, 백송, 수수꽃다리, 인도보리수, 서머셋팰리스 앞 향나무 등이다. 여기에 해설 내용을 다 적을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공들여 말한 것 하나만 소개한다.
수령이 오래된 이태리포플러 앞에서다. 공동(空洞)이 있어 심재가 썩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주변에 맹아지가 돋아나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이태리포플러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이롭다. 거기서 나는 이렇게 해설했다.
“숲해설가가 되기 전까지 저는 모든 나무는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모든 나뭇잎은 같은 초록색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햇살이 나무에 스며드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위아래가 다 달랐습니다. 이를 잘 표현한 마네와 모네 등 인상파 그림을 다시 보며 그들을 공부했습니다. 역시 예술은 위대했습니다. 편견과 관념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는 시선에 대해 배웠습니다. 성균관대 오종우 교수는 <예술수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의 반대말은 무감각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앞으로 나무를 통해 저의 무감각을 깨려고 합니다. 저의 무지를 탈피하려고 합니다. 선생님들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우리보다 먼저 나온 나무에게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나무는 햇빛과 물로만 살아가는 독립영양체이고, 우리는 그 나무가 만든 탄수화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종속영양체라는 것도 말했다. 두 이야기는 내가 나무 공부를 하면서 받은 가장 큰 감동이었기 때문에 힘주어 말했고, 더러는 박수를 받기도 했다.
니체의 <권력 의지>에 나오는 글을 보자.
[인식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가? 사물들에 어떤 의미를 주입하는 것, 즉 ‘해석’이 인식이며, ‘설명’은 인식이 아니다.(대다수의 경우를 보면, 거의 이해 불가능하게 되어 단순한 신호에 지나지 않는 옛날의 해석을 새롭게 다시 해석하는 것이다.) 확립된 사실 같은 것은 절대로 없다. 모든 것이 동요하고,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유연하다. 어쨌든, 만물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것은 인간의 의견이다.]
위 글에서 인식은 설명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해석에는 해석자의 가치관이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객관적 설명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해설을 들을 때 표지판을 읽는 듯한 것보다 해설가의 감정이 얼굴에 확확 드러나는 해설에 전율이 일어나곤 한다. 그런 해설을 어떻게 가능할까? 각자의 삶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나는 말할 수 없다.
이제 1강 ‘주제는 인식(認識)이다’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인식은 무엇인가를 자각화된 언어로 사물과 연결한다는 것이다. 그 언어가 말이든 글이든 문장 형태로 이어지는 게 이야기이다. 즉 언어에 한계가 있으면 해설이 풍부하지 못하고 건조하다. 언어 인식을 확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공간 개념을 넓히고, 그 안에서 나의 삶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면서 부족한 것들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주제는 잡히게 되어 있다. 그 주제가 늘 변할 수 있다는 것 명심해야 한다. 그 주제를 말하는 해설 현장에서의 이야기 전개는 강약이 있어야 한다. 묵직한 것과 가벼운 것들이 맞물려 가야 한다. 그 이야기를 이끄는 리더는 해설가이지만, 그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자들은 참가자 모두일 것이다. 즉 소통하는 해설을 해야 하고, 그 해설의 그림은 거대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기만의 독특한 울림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