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調 槪論
강 재 일
目 次
Ⅰ. 時調의 槪要
1. 時調의 由來
1) 時調의 起源
2) 時調의 發展
2. 時調에 대한 槪念
1) 一般的 名稱
2) 名稱에 대한 槪念定立
3. 現代時調와 古時調의 差異
1) 現代時調의 특징
2) 古時調의 특징
3) 漢詩와 古時調의 차이
4. 時調의 定義
1) 分類別 定義
2) 時調의 갈래와 分類
3) 時調와 관련한 用語
4) 時調의 原理
Ⅱ. 時調 創作
1. 時調의 內容과 構成
1) 現代時調의 方向
2) 時調의 文章 構造
3) 時調의 基準律
4) 時調의 章. 句 構成法
5) 時調의 修辭法
2. 時調 創作의 實際
1) 發想, 熟想, 推考
2) 時調의 詩語, 素材, 表現
Ⅱ. 詩學講說
1. 詩的 交感
1) 바슐라르의 想像力과 現象學
2) 이미지의 獨自性
2. 詩의 美的 價値
1) 詩的 이미지
2) 앎(知)
3) 直觀과 槪念
Ⅰ. 時調의 槪要
1. 時調의 由來
1) 時調의 起源
時調의 起源에 대하여는 설들이 분분하다.
學說的 구분으로는 漢詩기원설, 別曲기원설, 民謠기원설, 鄕歌기원설 등이 있고, 발생시기별로는 고려 말인 14세기 발생설, 조선 초인 15세기 발생설, 조선 중기인 16세기 발생설 등 그 학설이 구구하나, 그 중에서도 고려 말인 14세기 경 고려가요의 樂曲과 詩 形을 母胎로 발생했으리라는 설이 通說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잘 정돈된 정형시가 완성되기까지는 고려가요외에도 여러 가지 詩歌형태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의견과 함께, 신라의 鄕歌에 뿌리를 두고 고려 중엽에 성행했던 高麗長歌가 分節되어 일단 그 형식을 갖춘 후, 다시 3章 12句體의 정형시로 발전했다는 說에도 무게가 있다.
2) 時調의 發展
이렇게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오던 時調가 일제강점기 때 민족전통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된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한글조차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사정이 오죽하였으리. 하지만 몇 몇 뜻있는 분들의 忠情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해방이후 새로운 형태의 時調詩가 탄생하면서 차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時調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의견 충돌이 일고 있으며, 더군다나 時調唱 분야의 실정은 더 황폐하다. 지방에 흩어져 있는 전국의 소리를 어렵사리 採譜하고 收斂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나 昨今의 현실은 더 열악해져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젊은이들의 외면 하에 老獪한 늙은이들의 遊戱場으로 변모해 버린 까닭에 뜻을 둔 사람들마저도 발길을 되돌리는 입장이다.
향후 국가적 뒷받침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先賢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어렵게 살려놓은 불씨마저도 꺼트릴 위기에 처해 있다.
2. 時調에 대한 槪念
1) 一般的 名稱
時調는 원래 樂曲의 명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음악과 문학이 한데 어우러져 시대적 취향에 맞게 개편된 流行歌調로 불리다가 다시, 後代에 이르러 詩 形을 가르는 개념으로 일반화 되었다.
평시조의 개념규정은 누가 뭐래도 음수율을 근거로 해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총 자수를 보면 37字에서 58字까지이나, 그 폭을 좀 더 줄여보면 41字에서 48字까지로 보겠다. 그리고 엇시조(旕時調)는 평시조와는 달리 음수율의 통계가 없으므로 종래의 개념들을 참고하여 시조의 3章 중에서 초. 종장은 대체로 평시조의 字數를 유지하고, 중장은 그 자수가 40字까지 길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사설시조의 개념은 시조 3章 중에서 초. 종장은 旕時調 中章의 자수와 일치하나, 중장의 자수율은 제한이 없이 길어진 형태의 것이다.
國樂界에서는 아직도 時調曲 또는 時調唱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時調’란 말은 ‘時節歌調’의 줄임말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는 ‘時節歌’나 ‘時節短歌’ 등으로 불렸으며 18세기 초, 중엽에는 ‘短歌’란 명칭이 가장 많이 쓰였고, 때에 따라서는 ‘詩餘’, ‘新調’, ‘新聲’, ‘新飜’, ‘新曲’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밖에도 靑丘永言이나 海東歌謠에 기인하여 악곡을 일컫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특히, ‘시절 시절 부르는 노래’라는 唱의 이름으로 쓰이다가, 崔南善의 [時調類聚]이래 작품명으로 인식되어져 오늘에 와서는 문학작품을 ‘時調’라 하고, 唱은 ‘時調唱’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단 ‘時調’라 하면 우리 고유의 定型詩의 명칭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名稱에 대한 槪念定立
근자에 들어 ‘時調’라는 명칭 대신에 ‘定型詩’니, ‘三章詩’니, ‘民族詩’니, ‘三行詩’니 하는 등의 이름들을 사용하려고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억지에 불과하다. 東國通鑑에 나오는 ‘時調’는 분명 ‘글 詩’ 字가 아닌 ‘때 時’ 字였으니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時調’의 ‘時’ 字를 ‘詩’로 오해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時調’는 분명한 ‘時調’여야 한다.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詩이면서 時調의 특징을 두루 갖추어 時調본래의 韻律과 맛을 살려 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時調’라는 말을 당당하게 쓰고 그 ‘時調’를 사랑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 時調사랑이야말로 나라사랑이요, 민족의 얼과 겨레의 맥박을 되살리는 벼리가 되기 때문이다. 時調의 詩的기능을 현대화 시켜 현대적 정형시를 창작하되, 時調樣式의 본질적 구조와 형식을 維持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폭을 넓히고 민족 고유의 情緖를 이어 받아 한국문학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는 時調人들의 사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것이 있다. 時調를 일컫는 호칭의 發音.
대부분의 사람들이 ‘時調’를 ‘詩調’로 발음한다. 時調에서의 ‘시’는 시‘詩’가 아니라, 분명히 때‘時’다. 하여 그 발음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국문학 상 ‘詩調’라는 말은 없다. 만약, 누군가가 ‘時調’를 일러 ‘詩調’라 발음 한다면, 이는 튼튼한 다리를 일컫는 ‘건각(健脚)’을 말라비틀어진 말라깽이 다리란 뜻의 ‘건각(乾脚)’으로 만들어 버리는 형국이며, 아내의 남편(男便)을 북쪽의 반대편, 즉 ‘남편(南偏)으로 호칭하는 격이 되어 버린다.
3. 現代時調와 古時調의 差異
1) 現代時調의 특징
- 내용 : 현대인의 복잡하고 다양한 사상과 감정을 표출
- 형태 : 初章과 終章만으로 된 兩章時調가 있으며, 自由詩 형태로 하나의 句가 한 개의 行처럼 배치된 구별형식을 취하기도 함.
특히, 聯詩調의 형태가 많은 것이 특징임.
- 기타 : 대부분 제목과 作者의 이름을 붙임.
2) 古時調의 특징
- 내용 : 忠, 孝, 烈과 같은 儒敎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둠.
- 형태 : 初, 中, 終의 3章 구조(장별 배형)를 가지며, 聯詩調의 경우에도 各 聯이 독립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詩想이 독립된 時調로 취급 됨.
- 기타 : 대체로 제목이나 作家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음.
3) 漢詩와 古時調의 차이
時調는 고려 중엽부터 생겨 난 우리 고유의 定型詩 이름이며 漢詩는 중국인들이 漢字를 이용해 지은 중국의 詩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문이 유입 된 후, 識者層에서 漢詩를 쓰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최근엔 국문학의 한 장르로 취급하고 있다. 쉽게 말 해, 時調는 쉬운 우리말로 쓰여 진 것이고, 漢詩는 漢字로 쓰여 진 것이다.
4. 時調의 定義
1) 分類別 定義
時調를 간단하게 정의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길이의 長短이나 唱法 上의 분류로 나눌 수는 있겠다.
우선 그 길이에 따른 分類를 보자. 여기에는 短時調, 中時調, 長時調가 있다. 그리고 唱法上으로는 平 또는 平擧, 頭擧(지름), 中擧(중허리), 辭說時調 등으로 나눈다. 때에 따라서는 지역별 唱法에 따른 분류도 있다. 이를테면 京制, 完制, 嶺制, 內浦制, 原制 등과 같은 것이다.
그 중에서 일반적으로 불리는 時調는 短時調를 일컫는다. 이것은 고려 중, 말기에 형성되어 朝鮮朝를 대표하는 定型詩로써, 別曲型에서 分立된 것이다. 이는 初, 中, 終 같은 3章의 文으로 各 章이 2句씩 된 三章六句形으로 字數의 基準律은 77, 77, 97調인데, 各 句는 4律拍 또는 4音步씩의 等時律을 갖춘 것으로 오늘에 까지도 창작되어지고 있다.
그 初, 中章의 各 句와 中章의 제 2句는 각각 7字, 즉 3.4組를 기준으로 하고 있고, 終章의 제 1句는 9字, 즉 3.6組를 기준으로 한다. 특히 終章 제 1句의 3.6組 中, 앞의 3字는 고정이며 뒤의 6字는 5~7字를 오르내릴 수 있다. 또 終章의 제 2句는 初, 中章의 各 章과 같이 7字를 기준으로 하여 6~7字를 드나든다. 그리고 初, 中章의 7字는 3.4組의 順進律이 보편적이나, 때에 따라서는 그 반대인 逆進律도 사용한다. 하지만 律拍律이나 音步律을 보면 一定不變의 定律을 갖추고 있다.
短時調의 基準 字數律에서 그 어느 한 句의 字數가 벗어 난 것을 中時調라 하는데, 벗어나는 곳은 대개 初章의 각 句다. 그리고 短時調의 字數律에서 어느 두 句 이상의 字數가 벗어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일러 長時調라 한다.
2) 時調의 갈래와 分類
간혹 우리의 時調의 갈래를 平時調나 엇시조, 辭說時調로 分類하기도 하나 이는 조속히 시정되어야 할 일이다. 唱法上의 分類와 文學作品上의 분류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唱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린 현대에 와서야 더욱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말 해, 작품상으로는 어디까지나 時調 또는 短時調, 中時調, 長時調로 부르고 완전한 時調詩로써 창작함이 옳다. 단, 短時調를 短型時調, 中時調를 中型時調, 長時調를 長型시조로 구분함도 무방하겠다.
- 形態에 의한 분류 : 平時調(短時調), 聯詩調, 長型時調(辭說時調), 兩章時調, 옴니버스(混作, 시조의 각종형식을 취한 연시조) 時調, 童時調
- 內容에 따른 분류 : 抒情時調(작자의 감정이나 정서를 주관적으로 표현), 敍事時調(국가나 민족 또는 인류의 운명과 관계된 사건 등을 장중한 문체로서 객관적으로 다룬 장편), 敎訓時調(啓導를 목적으로 쓰여 진 時調).
여기에서 기억해야할 대목은 平時調는 대개 學識이 높은 양반 사대부의 문학이었던 것에 비해, 辭說時調는 일반 庶民들이 享有하던 문학으로서 사대부의 관념과는 약간 대립되는 사실적 요소가 짙은 現實認識의 詩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兩章時調는 개화기에 이르러 출현 한 詩 形態로서 短時調의 3章 가운데 中章을 省略한 測量的 變形으로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 時調와 관련한 用語
- 音節과 音步 : 음절은 한 낱말의 글자 하나 하나를 말한다.
예를 들면, ‘태극기’는 ‘태’ 한 음절, ‘극’ 한 음절, ‘기’ 한 음절로 모두 3음절이다.
그리고 음보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고 했을 때, 3 음보가 되는데, 이때는 악보의 ’譜‘가 아니라 걸음을 나타내는 [步]를 쓴다.
- 首 : 흔히 듣는 말 중에, ‘시조 한 首...’하는 게 있다.
이때의 한 首란 일반적으로 평시조, 즉 短時調 한편을 지칭한다.
- 章 : 初章, 中章, 終章 등 시조를 구성하는 줄, 즉 章을 말한다.
시조 한 首는 보통 3章으로 되어 있다.
- 句 : 글귀, 즉 글의 句節을 말한다.
‘한산섬’을 예로 들면 아래와 같이 된다.
초장... (첫구절)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둘째구절) = 수루에 혼자 앉아
중장... (첫구절) = 큰칼 옆에 차고, (둘째구절) =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종장... (첫구절) = 어디서 일성호가는, (둘째구절) = 남의 애를 끊나니
참고로 李秉岐 선생이 주장한 독특한 개념을 소개하겠다.
“漢字의 ‘句’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마루]라 하여 한 句를 한마루, 두 句를 두 마루라 하는데 곧 글을 읽어 나가다 말과 뜻이 그치는데 까지를 이름이다. 그리고 한 句를 또 몇 토막으로 내어 읽는 경우도 있으니 그 한 토막을 한 ‘句讀’이라 한다.”(이병기, <율격과 시조>, 동아일보. 1928, 11, 29)
이와 같이 가람은 의미와 연결된 리듬의 최소단위를 ‘句’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같은 해, 역시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던 이은상 선생의 [時調短型芻議]에 소개된 ‘기준 음수의 진폭과 여유’등으로 치열하게 논의가 진행 되다가 동년 11월에 소개된 이광수의 ‘시조의 자연율’에서 基準 型과 변칙으로 음수율적 기준을 세우게 되면서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광수 선생이 제기한 句 단위의 음수율적 기준점이 우리말의 자연스러움 보다 더 卓見이었다는 평가다. 이에 대한 자세한 資料는 조창환 교수가 짓고 國學資料院이 펴낸 [韓國 詩의 넓이와 깊이]를 참고하면 되겠다.
4) 時調의 原理
時調는 3章 6句 12音節로 꾸며진 정형시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時調가 단순한 詩文이 아니라, 自然의 변화를 골자로 하는 天, 地, 人의 3才와 周易의 6爻, 그리고 1년을 상징하는 12音步와 함께 각 장마다 전개되는 4音步 역시 4계절을 뜻하는, 철저하게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문학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周易의 原理에 의해 時調의 형식도 循環한다.
이를테면 起(初章에서 想을 일으키고), 承(中章에서 이어받아), 轉(終章의 첫 句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가 한 바퀴 구른 뒤), 結(자연스럽게 둘째 句에서 결론을 지음)이 그것이다.
대개, 初, 中章에서 구슬러 놓은 것을 마지막 終章에서 마무리 짓기 때문에 아무래도 제일 많은 변화와 緊張을 느끼게 된다. 그런 이유로 終章이야말로 時調의 눈이요, 心腸이라 하는 것이다.
*終章의 重要性
-형식 논리상의 결론
-初, 中章의 外形과 內在사이의 최종적 調應
-이미지의 갈등해소와 궁극적 균형
Ⅱ. 時調 創作
1. 時調의 內容과 構成
1) 現代時調의 方向
현대시조는 현대시의 下位槪念이다. 그런 점에서는 어차피 현대성을 지녀야 함이 숙명이 되어 버렸다. 詩語의 선택이나 언어를 다루는 기법에서 현대적 감각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동시에 현대시조는 그것이 時調인 점에서 時調樣式의 본질적 심층구조를 거느려야 함은 물론 표층적 율격구조마저도 갖추어야 한다. 그렇듯 時調 본래의 형식을 固守 維持하면서 현대시의 문학적 기법을 수용할 때 비로소 현대시조의 올바른 방향정립이 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시조를 쓰고자 하는 작가들은 이 둘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나갈지에 대해 끊임없는 성찰을 거듭해야 한다.
아무리 운률적 구성이 시조와 닮았다 하더라도 그 내면의 구조 원리가 3단구성의 2분단적 통합원리에 의거하지 않는 한, 그것은 時調가 아니라 짧은 現代詩에 지나지 않는다. 詩語의 선택이나 활용, 이미지와 메타포의 驅使, 시적 퍼스나의 객관화 등에서 자유시의 현대적 기법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현대시 안에서 時調만의 독립된 양식적 독자성을 재확인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자유시의 한 형태에 귀속시킴이 옳다’고 주장하는 學說이 擴張되면서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2) 時調의 文章 構造
時調는 音步律에 의한 정형시라고 정의 내렸다.
이는 古時調의 3.4, 혹은 4.4조도 예외 일 수 없다. 우리말의 語形은 대개 3음절과 4음절을 기준으로 이뤄지며 이런 傾向은 韻文이나 散文에서도 주로 나타난다.
특히 時調에 있어서의 終章의 중요성은 간과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初章과 中章의 律格에 隨伴되어 전해지는 탄력적이고 역학적인 관계를 終章은 含蓄적으로 마무리하여 律動的 緊張感을 해소시키는 한편, 정서적 균형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終章의 첫 句, 3字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꿔서는 안 된다. 다른 章과는 달리 이 終章에서 압축과 전환이 다 이뤄지는데 이것의 頂点이 바로 終章의 첫 句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終章 첫 句 3字의 압축을 한층 효과적으로 높이기 위해 두 번째 音步는 5字 이상으로 규정짓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자칫 지루하게 느껴 질 初, 中章의 음률을 적절한 방법으로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3) 時調의 基準律
단시조의 율격구조는 음보율(율박율)로 측정하는데, 율박율은 한 구가 4율박으로 되어 있으므로 24율박이 된다. 그러나 이 율박 역시 2字가 기준이 되니 결국은 자수에 의거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자수만 기준율에 맞으면 율박은 자연스레 맞아 떨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 할 것은 우리 말에는 명사에 조사가 붙거나 어간에 어미가 붙어 활용하는 사례가 많으므로 이때는 자연 자수가 증감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표의문자인 한자로 쓰여진 漢詩처럼 자수를 고정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같은 첨가어를 가진 일본의 ‘하이꾸’나 ‘와까’는 한시의 자수 맞춤을 쫒아 정형시의 자수를 고정시켜 놓고 있다.
4) 時調의 章. 句 構成法
시조엔 3장 6구의 장구법이 있다는 것을 앞에서 소개했다.
물론 이때의 3장이란 3행을 일컫는 말로 시조창을 할 때 쓰이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런 章句法은 三段論法에 맞게 전개 되는데 이것은 漢詩에서의 起承轉結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므로 초장에서 일으킨 詩想을 중장이 이어받아 확대 시켰다가 그것을 마지막 종장에서 대 전환을 일으키면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이것을 기승전결에 대입시키면 초장이 起句가 되고 중장이 承句, 종장의 제 1句가 轉句가 되며 제 2句가 結句가 된다.
흔히 이르기를 時調의 생명은 종장에 있다고들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종장 구성의 好惡가 그 작품의 시적인 가치성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전결구의 구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시조작품의 성패를 가름하는 주요한 열쇠라 할 수 있다.
다음은 句法에 대하여 알아보자.
구법에서는 12구냐, 8구냐, 6구냐 등 의견이 분분하나 각 구가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연관관계를 가짐으로써 상호 유기적 결구를 가지게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몸과 같아 기승전결이라는 매체가 서로 상조하면서 혈연체를 꾸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시조는 완전한 정형시의 골격을 끝까지 유지해 왔으며 거기에 따른 율박율 역시 자수의 증감변화에 적절히 적응하면서 음의 장단과 완급을 얻어 다양한 율조를 띄게 된 것이다.
5) 時調의 修辭法
수사법은 한마디로 장구 구성법의 연장이라 해도 별 이견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일찌거니 [安自山]이 쓴 ‘時調詩學’이란 책에 33종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시조의 구성법이 多岐多樣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示唆 하는 것이다. 그 후, 가람이 15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하였으나 최근 들어 이것을 다시 9가지로 정리하여 창작에 활용하고 있다.
順進法, 漸層法, 換序法, 比喩法, 對比法, 問答法, 反覆法, 實寫法, 象徵法 등이 그것이다.
順進法은 문자 그대로 순조로운 진행을 말하며 점층법은 첫 구 보다는 둘째구가, 초장보다는 중장이 더 강하게 표현되는 방법으로 종장에서는 초. 중장을 묶어서 더 강한 사상이나 감정으로 결론짓는다. 그리고 환서법은 순진법이나 점층법과는 달리 첫 구와 둘째 구, 초장과 중장의 순서가 바뀌는 서술방법을 말한다. 이것을 일칭 倒置法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작품에서는 종장을 초장에 끌어 놓고 중. 종장에서 풀어가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비유법은 꽤 폭이 넓게 쓰이는 것으로 直喩法이나 活喩法, 隱喩法, 代喩法, 諷喩法, 側喩法 등을 포함하고 있다. 대비법도 흔히 쓰이는 것으로 몇 가지 사실을 들어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는 방법이다. 문답법은 말 그대로 묻고 답하는 식으로써 주로 고시조에 많이 쓰이며 반복법 역시 같은 말을 되풀이 하여 그 뜻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대개 대비법이나 점층법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실사법은 사물을 사진으로 찍거나 그림으로 그리듯이 묘사해 내는 표현법으로 서양문학에서 말하는 사실주의적 표현법과는 다르다. 특히 이 구사법은 언어의 색감이나 繪畵성이 짙은 것을 특색으로 한다. 마지막 상징법은 주관적 정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인데 현대시조에서는 실사적 방법과 함께 많이 이용하는 방법이다.
2. 時調 創作의 實際
1) 發想, 熟想, 推考
詩를 짓고자 함은 어떤 사물을 대하여 詩想을 떠 올리는 것이 우선이다. 이렇게 시상을 떠 올리는 것을 ‘發想’이라 하는데, 이는 대개 敍景이나 審美的 抒情의 드러남이라 하겠다. 때로는 사회생활로 경험하는 여러 가지 哀歡이나 사회적 背理에 悲憤하는 苦惱도 시의 발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생겨난 시상 즉, 발상을 그대로 옮겨 적는 卽興詩가 있다. 하지만 보통은 발상된 생각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생각을 충분히 삭혀내는 숙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숙성시킨 생각이야말로 제대로 된 맛과 멋을 풍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지 않고서도 훌륭한 시를 쓰는 천재시인이 없진 않다. 하지만 대개는 숙상과 추고의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작품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추고는 한번 써 놓았던 글의 자구를 고치는 작업을 일컬으며 흔히 퇴고라 하기도 한다.
2) 時調의 詩語, 素材, 表現
시를 짓는데 있어 詩語의 선택은 대단히 중요하다. 산문과는 달리 그 많은 단어 가운데 자기가 의도하는 가장 적합한 말을 가려 써야 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밑절미가 되므로 평소 국어사전을 활용하여 충분한 어휘력을 길러 두는 것이 좋다.
소재 역시 다를 바 없다. 사물을 대하되 그냥 봐 넘겨서는 안 된다. 탐구적 안목으로 세밀히 관찰하고 觀照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혼자만의 造語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근거만 명확하면 되는 것이다. 말이란 어디까지나 생성진화를 생명으로 하는 유기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생뚱맞은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문제다. 주제의 강약과 濃薄에 맞춰 시어의 구사와 소재의 취사선택에 유의 해야 함은 당연지사다.
아무튼 좋은 시를 짓기 위해서는 깊은 감성과 지성이 배경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깊은 성찰과 관조.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 자세요, 기초를 다지는 소양의 바탕이다.
Ⅱ. 詩學講說
1. 詩的 交感
1) 바슐라르의 想像力과 現象學
바슐라르의 觀念論的 상상력 理論은 세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즉, 상상력의 독자적인 작용이 外界의 대상의 이미지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달리 말하면 상상력의 독자적인 작용이 어떻게 외계의 대상이 이미지를 변화 시키는가를 밝히는 4元素說이 그 첫째이고, 둘째는 상상력의 그 독자적인 작용 자체를 밝히는 이미지의 현상학이며, 셋째는 상상력의 窮極性을 밝히는 原型論이다. 그런데 이 세 부분은 서로 독립하여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서 想像現像의 세 측면을 각각 조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현상의 세 측면을 한데 묶어 설명하자면, 상상력은 외계의 대상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그것을 스스로 궁극적인 것, 즉 이상적인 것으로 삼고 있는 상태로 변화 시켜 가는데 그 작용이 우리들의 외적인 삶이나 실용적 목적이나 생리적인 욕망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기에 독자적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의 궁극성을 ‘요나 콤플렉스’라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어머니 태반 속에 있을 때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들이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이 들어 있을 때에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걸 말한다.
이와 같이 시적 교감이란 말의 참 뜻은, 어디까지나 독자적이고 보편적인 상상력의 창조적 작용을 함축하고 있다. 달리 말해, 시적 이미지가 느껴지게 하는 아름다움이나 감동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이미지를 나타내게 한 원인, 즉 그것의 과거를 조사할 게 아니라 상상 가운데서 그것이 目下 창조적으로 변화 해 가는 모습 그 자체를 묘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바슐라르가 말하는 이미지의 현상학이다.
2) 이미지의 獨自性
우리들이 느끼는 감동의 체험 중에는 독서를 통한 것도 있다. 이런 독서를 통한 감동의 체험을 바슐라르는 ‘혼의 울림’이라 했다. 反響이 우리들의 삶을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게 한다면 울림은 반대로 우리들 자신의 존재에 심화되게 만든다. 만약 반향 속에서 시를 듣게 된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 자신이 시를 말하게 된다. 이때의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 된다. 울림은 이렇게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울림을 한껏 평범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의식의 각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달라진다’는 표현을 종종 쓴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울림’, 즉 시에서 얻은 감동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의 주된 기능이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게 그의 한갓된 주장이다.
상상력의 독자성은 우리들 각자의 특이한 경험적인 삶이 나타내는 個我性에 대립되는 보편적인 것이면서도 그 보편적인 상상력이 개아적인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서 더욱 깊고 본원적인 자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르치는 교수보다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더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도 이런 이치다.
바슐라르는 그의 책 [공간의 시학] 이곳저곳에서, 세계에 내 던져진 실존주의자들의 불안과 반대로 세계에 감싸 안긴 시인들의 이상적인 상태의 행복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참된 자유. 그것은 인간존재의 생성으로만 나타나는 유일한 것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쟁취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인간은 그런 자유를 통해 심상을 키워 나간다.
이미지는 그것을 표시하는 단어의 記意(signifie)가 우리들의 상상력에 喚起하는 것이고 그렇게 환기된 이미지를 표시하는 단어는 언어의 표면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記標에 의해 드러난다.
어떤 사물을 ‘象徵’한다 함은, 心象으로서의 이미지가 사물화 된 언어로서의 이미지로 내재적인 이미지관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사르트르]적으로 표현한다면 意識 없는 自我 인 ‘卽自’와 자유로운 선택의 岐路에서 惹起되는 책임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對自’가 동시에 보편적 가치를 띄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작품이란, 이렇게 내재적 가치와 보편적 가치를 동시에 지닌 작품을 말한다. 주로 고전주의에서는 진리의 보편성을, 낭만주의 이후의 思潮는 진리의 상대성을 모토로 했으나 보편적이든 상대적이든 간에 문학관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은 ‘진리’다. 뿐만 아니라, 문학의 미적 가치 역시 진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2. 詩의 美的 價値
1) 詩的 이미지
인간의 궁극적 가치는 미적 가치다. 이것은 소위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우주의 소외의 관점에서 그 소외가 해소되고 인간과 세계가 합일된 상태, 그것이 미적 상태다. 그것은 대상과 의식이, 인간과 자연이, 주체와 객체가, 즉자와 대자가, 너와 내가 모든 대립을 초월하여 용해 또는 융해 된 세계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시적 이미지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가 말한 ‘시적 영상들’이란 ‘思惟’도 아니고 사물도 아닌 의식과 그 대상 사이의, 세계와 그것의 개념화 이전의 최초의 표상 사이의 가장 원초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시는 단순히 무엇을 의미하거나 표현하거나 표상하기를 그친다. 오르지 의식과 대상 사이, 인간과 세계 사이를 원초적으로 맺어줄 뿐이다. 우리가 시인이 되는 것은 세계의 사물들을 사랑함으로써 세계를 예찬하는 것,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낭만주의 美學에서는 事物의 ‘模寫’나 ‘模倣’을 ‘mimesis'는 ‘닮기(變)’로, ‘imitateo’는 ‘되기(化)’로 해석하여 엄격히 구분한다.
시적 이미지란 갑작스런 정신의 隆起, 부수적인 심리적 인과 관계로는 잘 밝혀지지 않는 정신(psychisme)의 융기이다. 시적 이미지는 충동적인 힘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위 과거의 메아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의 일들이 메아리로 울리는 것이며, 그리고 그 메아리들이 얼마만큼의 깊이까지 反響하면서 사라져 가는지 우리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의 새로움과 약동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는 이렇게 울림 속에서 존재의 소리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나이나 학벌, 사회적 지위 이런 따위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이다.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메아리로 들려오는 ‘울림’, 이것이야말로 바슐라르가 말하고자 하는 시적 영상의 핵이 아니겠는가. 시의 예술성, 이것이야말로 상상력의 가장 큰 매력이며 ‘울림’과 ‘반향’을 향해 열어젖힌 다이내믹한 역동적 몸부림의 본질일지니.
2) 앎(知)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앎’에는 두 갈래가 있다.
이론적 앎과 실천적 앎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다시 두 갈래로 재분류 된다.
이론적 앎은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논리적인 'episteme'와 근거는 중시하지 않되 직관력을 필요로 하는 ‘sopia'로, 그리고 실천적 앎은 판단력을 기초로 하는 ’pronesis'와 수단을 목적으로 하는 ‘techne'가 그것들이다.
논어의 篤行편에는 ‘知’를 好學이라 풀었다. 이는 中庸에 나오는 博學審問에 근거한 ‘博學’과 ‘審問’, 그리고 ‘愼思’와 ‘明辯’을 두루 일컬음이다.
‘博學’과 ‘審問’이 外在的 지식이라면 ‘愼思’와 ‘明辯’은 內省的 지식이다.
불교의 修行法에도 明心見性이 있고 道家의 修養法에도 浩然之氣를 기르는 두 가지 방법으로 明明德과 集義를 든다. 明明德은 말할 것도 없이 道에 대한 自覺이고, 集義란 사람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大學에서는 이를 함께 묶어 ‘明道集義’라 한다.
이는 공자의 중심사상인 仁을 배경으로 中庸이 骨格으로 삼은 ‘中’과 ‘誠’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의 ‘中’이란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침이 없음을 말하며 ‘誠’의 참 뜻은 거짓됨이 없고 순수한 상태, 즉 眞實無妄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 심성의 저 깊은 곳에 자리한 것으로 ‘知’와 ‘行’의 源泉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神秘를 보게 된다.
세기 전 그리스의 철학가들은 신비를 보는 4人으로 ‘詩人’과 ‘어린이’, ‘狂人’과 哲學家를 꼽았다. 여기서의 시인이란 예술인을 통 털어 일컫는 말이며 곧 순수의 눈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진리란 知가 닿고자 하는 절대적인 이름이요, ‘知’란 곧 ‘好學’함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行’이란 ‘篤行’을 이른다.
3) 直觀과 槪念
直觀이나 槪念이라는 말의 뜻은 쓰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특히 문학이나 철학에서의 쓰임은 그 폭이 대단히 넓다.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한 보편성이나 타당성을 확보하기에는 그만큼 어려움이 따르기도 한다.
대개 초월론적 분석론에서는 ‘물자체’를 감성을 촉발하는 대상으로 본다. 이것이 자연과학적 인식능력을 바탕으로 한 보편타당성을 확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직관이나 개념이란 용어는 칸트가 주장한 것으로 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著書에서 “감성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悟性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思惟될 수 없다”라고 단정 지었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란 말이 곧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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