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2 章 유일한 생존자
제소청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면 예전처럼 두
다리로 활보할 수 있을 것이고, 천생의 미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후후……, 제소옥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 궁금하군."
냉운은 자신을 연적으로 몰아붙이며 공세를 퍼부었던 제소옥을 떠올
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간.
"크아아아……!"
동굴 안쪽에서 광기에 찬 여인의 발작적인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냉운은 잠깐 운공해 흐트러진 진기를 다시 한데 모으며 몸을 일으켜
동굴 안쪽으로 걸어갔다.
동굴은 좁고 길었다.
스무 걸음 걸었을까.
냉운은 동굴의 좌측 벽에 나 있는 석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돌
로 만든 빗장이 하나 달려 있고 문이 닫힌 상태였다.
"크으으……!"
안에서 함성 소리 비슷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화궁의 여인 중 누구일까? 잔혼경을 지니고 있었다면 핵심 인물
중 하나일 텐데…….'
희대의 요녀 백화귀모가 세웠다 알려진 백화궁에 대한 모든 것은 아
직 비밀이다. 그녀가 어떻게 색혼경을 얻었는지, 여인의 몸으로 어떻
게 그리도 방대한 세력을 쌓았는지…….
냉운은 조심스러운 마음이 되어 돌로 된 빗장을 열고 문을 끌어당겼
다.
그 안은 넓적한 석실이었다.
제소청이 기거하는 장소로 군데군데 식량으로 삼을 만한 나무 열매와
짐승 고기 말린 것이 쌓여 있고, 한 구석에서는 밖으로 흐르지 않는
옹달샘 하나가 있었다.
석벽 맞은편 벽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괴녀 하나가 있었다.
나이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고 백발이 길게 자라 무
릎을 덮고 있었다.
여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우는 듯한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케에에……!"
폐부를 파고드는 괴로움에 찬 신음 소리였다.
여인의 옷은 낡고 찢어진 채였고, 발에는 신발이 신겨 있지 않았다.
군데군데 짓무른 자리가 있고, 무엇엔가 긁힌 듯한 외상이 나있었다.
"처참하군."
냉운은 청성은옹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 되었다.
여인은 냉운이 들어서자 신음 소리를 그치고 냉운을 올려다보았다.
눈가에 진물이 가득했다.
"히히히……, 사내놈이군. 죽일 놈!"
괴녀는 낄낄거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발작적인 광란이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혀 나오며 피가 분수처
럼 피어올랐다.
냉운은 보고 있을 수 없어 지력을 쳐내 여인의 양 손을 마비시켰다.
"윽!"
그녀는 몸이 굳자 신음 소리를 내며 뒤쪽 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멍하니 크게 뜨고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가에 눈물을 매달았다.
"큰 사연이 있는 여인이군. 색혼경을 지닌 것을 보면 백화궁에서도
대단한 지위에 있는 여인인데……."
냉운은 괴녀 곁으로 바짝 다가가 상세가 어떤가를 살펴보았다.
뇌호혈(腦戶穴) 부위에 붉은 손도장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냉운은 그 상처가 여인을 미치게 했다는 것을 알고 무슨 수법에 의한
것인가 유심히 살펴보았다.
냉운의 표정이 점점 기괴하게 변화했다.
"절정마수(絶情魔手)인가?"
냉운은 홍색 장인을 살피다가 흠칫 놀랬다.
'분명하다. 강호에는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절정마수에 의한 상처다.
'
냉운의 머릿속으로 섬전같이 스쳐 지나가는 일련의 기억이 있었다.
냉가장의 혈겁이 그것이었다.
냉가장은 사대마경 중 하나 때문에 피로 씻기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대마경 중 가장 뛰어나다는 구절마경(九絶魔經)인
것도 거의 사실화된 일이었다.
강호 삼대거파는 냉가장이 혈겁을 만나기 이전 세워졌었다.
그렇다면 냉가장을 피로 씻은 자는 구절마경을 얻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구절마경 안의 무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한데, 그것이 여인의 뇌호혈 부위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아, 아버님을 죽인 자가 이 여인을 해했단 말인가?"
구절마경의 임자가 자신의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냉운은 어
둠 속에서 등불을 본 기분을 맛봤다.
그의 눈은 한 치 어김도 없었다. 여인이 분명 구절마경 안의 절정고
수에 의해 광녀로 화했다는 데 의심이 있을 수 있었다.
"이, 이 여인을 해친 자가 결국 냉가장의 원수일까?"
냉운은 부르르 떨며 다시 한 번 여인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구절마제 이후 절전된 절정마수에 의한 상세였다.
냉운은 사대마경 안의 수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불사검제의 서재 안 사대마경에 대해 상세히 구술한 책이 있었고, 그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불사검제는 이렇게 적었었다.
<구절마제는 신마(神魔)라는 자의 후계자이다. 그 자는 아홉 가지 결
기에 정통했고, 그 외 수백 가지 마공에 달통했다. 그의 마공은 너무
나 광범위해 적는다면 열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무수한
절기 중 가장 뛰어난 아홉 가지가 구절마공(九絶魔功)이다. 그 중
절정마수는 매우 독랄해 혈화천지참(血化天指斬)이라는 실전된 절세
마공의 위력에 버금갈 정도이다. 그뿐이 아니라 단정마검(斷情魔劍)
흡혈수(吸血手) 백골음풍기공(白骨陰風氣功)……. >
불사검제가 상대했던 무수한 고수 중 뛰어났던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
한 사람은 무림기인전 안에서 죽은 요지천마였고, 한 사람은 당시 일
마제라고 여겨졌던 구절마제였다.
구절마제의 마공은 구절마제가 잡힌 후 실전되었다.
그의 무공이 나타나 있다는 말은 곧 그의 무공을 수록한 한 개 마패
가 세상에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마패는 모두 네 개였다.
그 중 세 개는 이미 주인이 밝혀져 있고, 단 하나만이 비밀 속에 가
리어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냉가장에 혈겁을 일으킨 물건이라는 것을 냉운은 한순간
도 잊지 못하는 것이었다.
"드, 드디어 단서를 잡았다."
냉운은 실마리를 잡았다는 데 의심하지 않으며 여인의 상세를 아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마 후, 냉운은 무릎을 탁 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사연단보(不死練丹譜) 안에 회혼신단(廻魂神丹)이라는 영단의 연
단술이 적혀 있지 않는가! 스물일곱 가지 귀한 약을 사용해 만드는
회혼신단을 쓴다면 이 여인의 정신을 되찾게 할 수 있다."
냉운은 득의해하며 여인의 혈도 열여덟 군데를 순간적으로 봉했다.
"음……."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푹 고꾸라졌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인이 누구였건, 어이해 색혼경을 지녔는지 문제가 될 수 없다. 그
녀는 비밀에 감춰진 흉수를 본 유일한 목격자. 여인이 제정신을 되찾
는다면 흉수의 정체는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영단을 만들 때까지 편히 주무시오. 내가 영단을 만들어 줄 것이니,
내게 원수가 누구인지를 밝혀 주시기 바라오."
냉운은 중얼거리며 다시 한 차례 원한의 불길을 일으켰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냉가장의 육백여 명을 몰살시킨 악독한 자가 드디어 마각(馬脚)을 드
러낸 셈이었다.
여인이 살아 있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구절마제의 마공은 생존자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인은 의당 죽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나, 원래 지닌
무공이 심오해 미치고 무공을 잃는 데 그쳤던 것이다.
결국 냉가장을 피로 씻은 자는 냉가장을 멸망시킨 대가로 얻은 마패
안의 무공에 통달해 있는 셈이었다.
그 자가 소문나지 않은 이유는, 그 자와 싸운 사람이 다 죽어 그 자
의 정체에 대해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구절마경의 주인공.
그 자는 곧 수라신궁 안에 나타나 수라천마를 죽이고 수라신부와 수
라마경을 훔쳐간 장본인기도 했다.
신비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마공을 익혔고, 지금 어떤 신분으로 강호에 나타
나 있을는지?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다."
냉운은 씹어뱉듯 말하다가 인기척을 듣게 되었다.
석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있었다.
바로 제소청이었다.
호피(虎皮) 치마 아래로 보이는 두 다리는 백옥(白玉)같이 희고 은어
같이 싱싱해 보였다.
제소청은 두 눈에 맑은 눈물을 담고 있었다.
"제가 다시 걷게 되다니…… 모두 냉 소협 덕분입니다."
제소청은 흐느끼듯 말하며 냉운을 향해 다소곳이 절을 했다.
"낭자!"
냉운은 무안하다는 표정이 되어 소매를 흔들었다.
제소청은 아주 부드러운 힘이 상반신을 떠받든다는 데 놀라워하며 절
을 다 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절정무공이다. 이분야야말로 재능과 인품, 그리고 덕망을 한데 겸비
한 인중룡이시다.'
제소청은 냉운의 단단한 앞가슴 속으로 와락 파고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냉운의 외유내강하고 대범한 기질에 흠모의 정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념(情念)을 억제해야 했다.
'이분은 염 사저(師姐)의 정혼자이지. 내가 그것을 잘 알면서도 모르
는 체하고 이분께 사랑을 표시한다면 부끄러운 짓이 되리라.'
제소청은 그윽한 한숨을 내쉬며 앵두 입술을 벌렸다.
"삼 년 전 아무에게도 거처를 가르쳐 주시지 않고 훌쩍 떠나가시어
냉 대장주(大莊主)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협맹의 어르신네들을 근심케
하셨는데, 이제 보니 과연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가는 분이시군요?"
"예?"
"과거 냉 소장주께서 무작정 가출하셨을 때 소녀는 내심 냉 소장주가
철부지라 여겼습니다."
제소청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달콤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모습은 아주 매혹적이었다
"지금 대공(大功)을 이루신 모습을 보니 과거 냉 소장주께서 강호에
나서셨다가 객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여러 사람들이 새삼 어리
석게 여겨집니다."
"그때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다들 냉 소장주가 일순간의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가 죽고 말리라 믿었지요. 그렇게 믿지 않은 사람은 단둘뿐입니다."
"둘?"
냉운은 흠칫 놀라워했다.
누가 자신을 철석같이 믿었을까?
제소청의 말이 급히 뒤따랐다.
"바로 염방채 언니와 염 장주님이시지요."
"아!"
냉운은 염광천과 염방채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고 일순 아득한 감을
맛보았다. 둘 중 한 사람은 실종되어 생사가 불분명하고, 한 사람과
는 깊은 오해가 생겨 보고도 멀리하게 되었으니…….
제소청이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해 나갔다.
"지금 냉 소장주가 무림고수가 된 것은 냉 소장주 혼자만의 힘에 의
한 결실은 아닙니다."
"아!"
"호호……, 염방채 언니께서 냉 소장주가 사라진 다음 날부터 불공(
佛供)을 드리며 냉 소장주의 앞날에 대해 기원을 했기에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을 겁니다."
"염, 염방채가 나를 위해 불공을 드렸소?"
"어찌 불공뿐이겠습니까? 연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지요. 지난해 염가
장이 수라신공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요."
"아……."
냉운은 염방채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고 부끄러워했다.
제소청의 입에서 들은 말이니 틀림없으리라.
그녀의 안위가 몹시 걱정되었다.
과거 항상 냉정하게 대하던 자신 때문에 혼자 상심의 눈물을 짓고 틈
만 나면 냉가장으로 찾아와 손수 만든 다과(茶菓)와 의복(衣服)을 선
물했던 염방채의 다정한 자태가 눈에 아른거렸다.
냉운은 이제껏 염방채에게 다정히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염방채는 냉운의 매정함에 많은 나날을 보냈고, 냉운이 자신을 사랑
해 주기를 간청했었다.
그녀의 눈빛이 얼마나 다정했던가?
냉운은 지금에야 염방채의 그 모든 행동이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냉운은 항상 강한 사람이었고 염방채는 항상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울어야 할 때 절치부심하여 복수를 다짐한 사람이 냉가장의 소장주
냉운이었다. 하나, 염방채는 달랐다. 그녀는 요조숙녀가 되기를 희구
했던 여인이었다. 한 사람의 배필이 되는 데 부끄러움이 없도록 몸과
마음의 수양을 쌓았던 여인이 염방채였다.
사실 그녀가 무림에 든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아름다운 꿈을 깨뜨리고 사랑하는 정인(情人)과 아버지를 앗
아간 무림마두를 징계하겠다는…….
염방채에 대한 모든 의구심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제 소저! 고맙소!"
냉운은 염방채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 가운데 제소청의 손을 꼬옥
잡고 눈에 물기를 떠올렸다.
'부러운 사이다.'
제소청은 힘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려다.
'소옥 오라버니는 염 소저를 못 잊어하는 사랑의 노예가 되어 항상
나의 비웃음을 사지 않았던가! 한데, 이제는 내가 염방채 언니의 정
혼자에게 끌리었구나.'
제소청은 냉운이 자신을 사랑하며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는 데 크게
상심했다.
아무도 없는 자리였다면 흐느껴 울었으리라.
"고맙소, 낭자!"
냉운이 다시 격동해 말할 때였다.
"우……!"
동굴을 찌렁찌렁 울리는 마후(魔吼)가 있었다.
어찌나 강한 소리인지 동굴 천장에서 흙 조각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
고 바닥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우……!"
마치 악마의 부르짖음같이 잔혹하고 흉흉한 장소성(長嘯聲)이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냉운과 제소청은 마후의 여운이 끝나기 전 동굴 어귀로 달려나가 아
래쪽을 살펴보았다.
십이 구 시체로 뒤덮였던 골짜기 안이 백 수십 명 절정고수들의 그림
자로 인해 까맣게 뒤덮이고 있었다.
곡구를 휘감으며 다가서는 자들, 그들은 하나의 진열을 갖추며 동부
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둥둥 허공을 떠서 다가오는 모습이 한 떼
의 마귀들이 다가서는 듯했다.
앞장선 자는 은빛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거구의 노승.
구 척의 키에 근육질로 다듬어진 육체는 하나의 청동상처럼 여겨진다
. 가히 산처럼 느껴지는 자였다.
"우……!"
마후는 금의노승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소청의 얼굴이 샛노랗게 물들었다.
"잔, 잔혼악승(殘魂惡僧)입니다. 살, 살아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제소청은 냉운의 소맷자락을 움켜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강호사존의 일원으로 무림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잔혼악승. 그를 만
나 이제껏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
"우……!"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음마신후(淫魔神吼).
음파만으로 심령을 제압할 수 있는 천외천의 절정마공이다. 사물을
가려 음공을 전개할 수도 있고, 마도고수라면 음마신후를 들으면 폭
발하는 마성을 느끼게 된다. 백도의 정종신공을 익힌 무사라면 심맥
이 으스러지는 고통 가운데 죽게 된다.
제소청의 얼굴이 점점 노랗게 물들었다.
음마신후의 사악함에 진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이었다.
'잔혼악승! 이런 곳에 오다니…….'
냉운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우……!"
음마신후성이 점점 고조될 때, 냉운의 두 손바닥이 한데 합쳐지며 아
주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와 음마신후를 뒤덮었다.
"윽!"
음마신후를 부르짖던 잔혼악승이 상반신을 휘청거렸다.
"하하하……!"
냉운은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제소청은 냉운이 손벽을 쳐 잔혹악승의 음마신후를 물리지자 못 믿겠
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이분이 대체 어떤 신분이기에 잔혼악승과 필적한단 말인가?'
제소청은 냉운 바로 뒤에 서서 한 쌍 원앙인 양 요염한 자태를 뽐냈
다.
이제 모든 것은 냉운에게 맡긴다는 듯 안심하는 태도였다.
그가 웃는 사이 잔혼사의 정예고수 백팔십여 명이 잔혼악승 주위로
몰려들어 거대한 진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냉운이 한 번 본 잔혼구장로(殘魂九長老)의 모습도 있었다
. 한 팔을 잘라내며 꼬리를 빼던 자들, 텅 빈 한 소매가 바람에 흔들
리는 모습이 너무도 음사해 보인다.
잔혼구장로는 대열의 중간쯤에 나와 있다.
구 장로 앞에 있는 다섯 노승들은 구 장로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
들이었다. 잔혼오존자라 불리는 자들, 단 한 번도 강호상에 나서지
않았던 자들이다.
잔혼사의 일급 고수들이 전부 나섰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례적인 일이
었다.
잔혼악승은 냉운이 맑은 눈을 하고 자신을 응시한다는 데 치를 떨며
승포 자락을 크게 휘둘렀다.
"어린 놈! 네놈이 육살승을 죽였느냐?"
"육살승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이 안에 죽어 있는 자가 모두 내 손에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으으…… 네, 네놈도 강남미연자와 같이 협맹(俠盟)이냐?"
"물론 그렇다."
냉운이 주저 없이 대답하자.
"잘 됐다. 본좌는 강남미연자를 잡으려 했는데, 더 뛰어난 놈이 나섰
으니 오히려 잘 됐다."
잔혼악승의 눈에서 벽록색 안광이 폭사되었다.
그는 유난히 큰 키를 자랑하는 듯 허리를 쭈욱 펴며 동굴 쪽에 대고
진기를 모아 외쳤다.
"본좌가 나선 까닭을 알고 있겠지?"
"모르겠는데?"
"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협맹이 되살아나 부아를 건드렸기 때문이
다."
"흥미 있군. 계속 해 봐라!"
"흐흐……, 다시 일어난 협맹은 아주 강하다. 하나, 극소수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다. 단 두 사람이 협맹을 지키고 있다는 말
이다. 알겠느냐?"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협맹 안에 삼두육비의 괴물이라도 있다는 말
이냐?"
"흐흐……, 협맹에는 두 명의 절세고수가 있다. 한 사람은 태상맹주
이고, 한 사람은 그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옥면살성자란 애송이다.
"
잔혼악승이 신중히 말하는 것이 냉운에게 고소를 떠올리게 했다.
협맹 태상맹주는 곧 냉운이 아닌가!
냉운과 태상맹주가 두 사람으로 불린다는 것이 어찌 우습지 않은가!
'분명 냉면환불이란 놈의 입김이 작용했군.'
냉운의 추측은 어김없는 것이었다.
잔혼사의 주지승 잔혼악승은 잔혼사 밖으로 나서지 않는 것으로 유명
했다.
그가 친히 나온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되살아난 협맹이 잔혼사의 안위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 잔혼악승의
출현으로 명백해진 것이다.
잔혼악승은 아들과 아들 부하들이 어떤 실력자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들 이하 전 고수가 외팔이가 되어 돌아왔으니.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 아침, 잔혼악승은 북방 분사에 있는 부하가 급히 보낸 전갈을
받게 되었다.
<방장(方丈)! 수라신궁이 한 사람 옥면살성자에 의해 함몰되었습니다
.>
급전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잔혼악승은 그 글을 읽는 순간 너무 놀라 입에 물고 있던 향차를 다
시 토해내기까지 했다.
협맹이 잔혼사를 능가한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었다.
어찌 수수방관하고 있겠는가?
잔혼악승은 궁리하다가 제소청을 인질을 잡아 옥면살성자를 위협하기
로 생각하고 육살승을 보냈고, 그들이 돌아오지 않자 놀라 몸소 나오
게 되었던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잔혼악승은 육살승이 다른 여섯 절정고수와 함께 시체로 누워 있다는
데 노해 음마신후를 토해냈던 것이다.
'육살승은 흑마독화(黑魔毒火)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당하
다니…….'
잔혼악승은 점점 냉정을 되찾게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썩은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독침이 번득번득 눈에 뜨이기도 했다.
흑마독화가 터졌던 흔적이 아닌가!
"흐흐……."
잔혼악승은 입가를 씰룩이며 냉운을 향해 말했다.
"엄히 말하면 세 명의 절세고수라고 해야겠군. 잔혼사의 비밀 화기인
흑마독화를 물리친 자가 나타났으니……."
"나를 말하는 게냐, 노마(老魔)?"
"그렇다."
"나를 굳이 달리 말할 것은 없다."
"무, 무슨 말이냐?"
"내가 냉가장주 본인이기 때문이다."
냉운이 담담히 말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옥, 옥면살성자다!"
"수라신궁을 멸망시킨 옥면살성자다."
군승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옥면살승자는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가 약관 미청년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네, 네가…… 옥면살성자가 냉운이란 말이냐?"
잔혼악승이 발을 디딘 자리가 두 자 정도 푹 꺼져 들어갔다.
너무도 놀라 발에 힘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강호 친구들이 나를 옥면살성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잔혼사를 찾아가려 했는데, 친히 나타나다니……."
냉운의 입가에 비정(非情)한 웃음이 나타났다.
잔혼악승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여기 온 것이 잘못한 일일까?'
그는 수년 간 제왕같이 군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촌노(村老)같이 무
력해져 가는 것이었다.
"으음……."
잔혼악승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삼백 리를 달려 대별산 안으로 들어선
것을 적이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가 벌레 씹는 표정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진중(陣中)에서 몸을 뽑아내 잔혼악승 앞으로 떨어져 내리며 오체투
지하는 세 명의 자의승인(紫衣僧人)이 있었다.
모두 외팔이였다.
"장문인! 닭 한 마리를 잡는 데 어찌 근심하십니까? 속하들이 은혜를
입은 지 오래 되었으나 충성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 걱정했는데, 오
늘 기회를 만난 것 같습니다."
자의승들은 모두 중년 나이였다.
말하는 투가 너무나도 자신에 차 있었다.
"삼절승(三絶僧), 옥면살성자를 막아 보겠는가?"
잔혼악승이 약간 의아해 묻자.
"다른 사람들은 옥면살성자를 두려워할지 모르나 속하들에게는 병약
한 강아지 정도로 보일 뿐입니다."
삼절승이라 불린 자들이 고개를 들고 간악하게 웃었다.
'이들의 마공은 사내(寺內)에서 손꼽히는 정도이니, 선봉으로 세워
볼 만하지.'
잔혼악승은 내심 잘됐다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게!"
"예."
"안심하십시오."
"장문인께 충성하겠습니다."
삼절승이 다시 한 차례 오체투지한 후 몸을 일으켜 절벽 밑으로 걸어
갔다.
냉운은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렇군."
냉운의 머릿속으로 문득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
"흐흐……."
"우리들을 기억하느냐?"
"애송이! 네놈 때문에 병신이 되었다. 오늘 다시 만나게 되다니…."
삼절승은 냉운과 구면이었다.
냉운이 오음절맥인 채 집을 나서 고행하던 시절, 냉운의 병약함을 기
화로 핍박했던 자들이 있었다.
파계삼악승(破戒三惡僧)이 그들이었다.
마심(魔心), 마불(魔佛), 마법(魔法)이라고 불리는 자들로 천하가 알
아주는 방탕승들이었다.
그들은 냉운을 괴롭히다가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백화궁주에게 걸려
팔 하나를 내려놓고 도망쳐야 했었다.
그 후, 파계삼악승은 잔혼사를 찾아 마공을 익히게 되었다.
삼절승이라 불리는 이유는 잔혼사 안에서 검(劍), 장(掌), 권(拳)에
통달한 절정고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흐흐…… 옥면살성자, 옥면살성자 하며 천하가 겁낸 게 어떤 귀신인
가 했더니 네놈이었군."
마심승이 득의해 웃어제쳤다.
"꼬마야! 어서 내려와 목을 바쳐라!"
"수라신궁이 네놈 하나에 의해 멸망했다고 해서 은근히 겁을 먹었더
니, 이제 보니 무엇인가 잘못된 소문이구나."
파계삼악승이 득의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삼 년은 무림고수를 키우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냉운이 절세고수라 믿지 않았다.
냉운이 옥면살성자라는 것도 회의할 정도였다.
"네놈은 항상 계집 궁둥이만 쫓는구나. 그때는 백화궁 계집으로 인해
숨을 건졌으나, 이제는 강남미연자가 네놈을 구하지 못할 게다."
마심승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자색 승포가 흘러내리며 팔을 대신하고 있는 철수(鐵手)가 드러나 검
은빛을 번뜩번뜩 나타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고 찾아내 삼 년 전 빛을 갚아 주려 했는데…."
냉운은 낭랑히 말하며 제소청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여지며 전음입밀이 새어나왔다.
"낭자는 여기서 꼼짝하지 마시오."
"예."
"나는 놈들을 이길 자신이 있으니 어떤 경우라도 밑으로 내려오지 마
시오. 자칫하다가는 일을 망치는 격이 되니……."
"저는 냉 소장주를 믿습니다."
제소청이 눈을 깜박했다.
냉운은 안심해하며 등을 돌려 허공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엇?"
제소청이 깜짝 놀라 손을 내밀었다.
냉운이 발을 헛디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냉운은 허공을 디디고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허공을 밟고 다섯 걸음 정도 갔다가 사닥다리를 밟고 내러서는 듯
천천히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천, 천상제(天上梯)다!"
"불가절학(佛家絶學)이거늘……."
아래쪽에 있는 잔혼사 악승들이 혀를 내두르며 사색으로 화해 갔다.
가장 놀라는 사람은 잔혼악승이었다.
그는 잔혼비급을 익힌 절정의 마도고수였으되 지금 냉운이 시전하듯
답허능공의 경신술을 시전하지 못한다.
'이미 천외천의 고수란 말인가? 천상제를 저렇게 유려히 시전하다니
…… 신비마제도 저 정도는 되지 못한다.'
잔혼악승의 구릿빛 신체는 땀으로 흥건해졌다.
분노를 참지 못해 대별산으로 들어온 게 어느덧 평생의 유감으로 느
껴졌다.
'결국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할 운명이란 말인가?'
잔혼악승은 한순간 십 년은 늙어 보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