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3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Pushkin - Tatyana, Heroine of Novel "Evgenii Onegin" "첫 눈이 내린 것은 정월 사흗날 밤이 깊어서였다. 타치야나는 그 날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창 너머로 하얗게 된 지붕과 담장과 정원화단을 바라보았다."
- 푸시킨의 <에브게니 오네긴>에서
- ----------------------------------------------------------------------- 2012 - 어류인 류인 동시에 포유류 '실러캔스' 게놈 판독 결과 `눈길' 日교도통신에 따르면, 이른바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고대 어류 '실러캔스'의 게놈(유전자 정보)을 해독한 결과 어류인 동시에 포유류 인 것으로 밝혀져 화제다.
2010 - 일본 NHK 대하사극 료마덴(龍馬傳, RYOMADEN) 제1회 방송 료마전(龍馬傳) 원문제목 : 龍馬傳 분류 : NHK 대하드라마 장르 : 드라마/시대극 본방송국 : NHK 방송기간 : 2010.01.03~ 방송시간 : 일요일 20:00 국가 : 일본 http://www.downmania.co.kr/37451
일본(日本), 료마에게서 다시 희망을 찾다 메이지유신 이끈 영웅 NHK드라마 '료마傳'인기 "변하는 날이 온다!" 도쿄=선우정 특파원 su@chosun.com /조선닷컴 2010.01.05 02:45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05/2010010500036.html
2009 - 스티븐스 미국대사 백범기념관 방문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가 현직 미 대사로서는 처음으로 3일 오후 서울 백범기념관을 찾았다. 스티븐스 대사는 이날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백범기념관장의 안내로 1시간30여분 동안 전시실을 둘러봤다. 스티븐스 대사의 방문은 최근 뉴라이트 등이 백범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가운데 이뤄져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스티븐스 대사는 이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 역사에는 항상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지만 최근 일은 잘 모른다”며 직접적 언급을 피했다. 그는 “한국 역사를 배우는 것은 매일 해야 할 과제이지만 나는 아직 깊은 지식이 없다”며 “하지만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매우 즐겨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여기에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내가 방문한 이유”라며 “거의 2년을 기다려 왔고, 오늘 이뤄져 기쁘다”고 말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2년전 ‘김구포럼’에서 토론을 즐겼고, 그 경험은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도전적인 시대를 배우는 데 많은 통찰력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임 전 2007년 4월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가 개최한 ‘김구포럼’에서 한-미 관계를 주제로 강연하는 등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한겨레 2009-01-04 오후 08:09:42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1240.html
2009 - ‘독도 영토제외’ 일 법령 첫 발견 1951년 공포…분쟁 지역 대부분 '부속도서'에서 빼 일본이 패전 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독도를 자국 부속도서에서 제외한 법령을 공포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은 일본이 1951년 6월 6일 공포한 '총리부령 24호'와 같은 해 2월 13일 공포한 '대장성령(大藏省令) 4호'에서 이 같은 내용을 찾아내 지난해 12월 31일 청와대에 서면 보고했다고 3일 밝혔다. '총리부령 24호'는 조선총독부 교통국 공제조합 소유의 일본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제정한 상위법(정령ㆍ政令)을 시행하기 위해 세부 사항을 정한 것으로, 일본의 '부속도서'에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를 제외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치시마 열도(현 쿠릴열도)와 하보마이 군도, 시코탄 섬 등도 부속도서에서 함께 제외돼 있다. 1861년 일본 영토가 된 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관할하다 1968년 6월 일본에 귀속된 오가사와라 제도와 이오(硫黃) 열도도 빠져 있다. '대장성령 4호'는 '구령(舊令)에 의해 공제조합 등에서 연금을 받는 자를 위한 특별조치법 제4조 3항 규정에 기초한 부속 도서를 정하는 명령'으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 및 치시마 열도와 하보마이 군도, 시코탄 섬을 부속도서에서 제외했다. 연금 지급을 위한 이 특별조치법은 연금 지급과 관련해 호적법 규정의 적용을 받는 일본인을 본방(本邦ㆍ혼슈, 훗카이도, 시코쿠, 규슈)과 소관부처에서 정한 부속도서 등에 거주지가 있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ㆍ해양영토연구센터는 "일본이 독도가 부속도서가 아니라는 점을 공식 인정한 법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라며 "법령으로 볼 때 일본은 적어도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전까지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9-01-03 오전 11:03:5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331088.html
2003 - 독도에 우편번호 '799-805' 처음 부여 오늘의 역사 (1월 3일)[2003년] 한·일간 영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독도에 국내 우편번호가 부여됐다.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1월 3일부터 독도에 우편번호 ‘799-805’를 부여하고 2003년판 전국우편번호부에 등재했다고 밝혔다. 독도에 우편번호가 부여된 것은 ‘독도유인화 운동본부’(의장 황백현)가 2002년 독도경비대에 위문품을 보내려다 독도에 우편번호가 없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북체신청에 청원하면서 이뤄졌다. 지금까지는 울릉군 울릉읍 지역 우편번호인 ‘799-800’을 함께 사용했다. 독도에 별도의 우편번호가 부여된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사들은 우정본부에 경위를 취재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30610_0001
- 이황 탄신 500주년 기념 (2002.1.3 발행)
2002 - 이황 탄신 500주년 기념엽서 발행 이황 탄신 500주년 기념엽서 제목 : 이황탄신 500주년 발행량 : 200000 발행일 : 2002.01.03 인면디자인 : 이황 영정 이면 디자인 : 도산서원과 퇴계선생 연보 액면가격 : 140원 엽서번호 : 121 인쇄및섹수 : 평판 5도 엽서크기 : 60x35 디자이너 : 박은경 용지 : 연미색 백상지 인쇄처 : (재)체성회 /K-stamp
- '투각 주전자' - '대나무'
1989 - 북한 예술품 6백12점, 남북교역사상 처음으로 부산항 입항 북한의 동양화 등 예술품과 도자기, 각종 공예품 등 6백12점이 남북교역사상 처음으로 1989년 1월 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번에 반입된 북한 예술품들은 (주)대우가 북한의 금강산국제무역개발회사와 직접 교섭해 들여 온 것으로 이제까지 무연탄의 수입 등 중개상이나 제3국을 통한 남북간 간접교역은 몇차례 있었으나 이번처럼 남북의 회사들이 직교역에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한의 예술품들은 1988년 12월 20일 북한의 남포항에서 선적되어 홍콩을 경유, 이날 부산항에 입항해 통관절차를 밟았다. 부산에 도착한 북한 그림들은 산수화와 기러기, 곰, 용 등 동물화를 포함한 동양화로 모두 84점이며 법랑 등 도자기류가 357점으로 가장 많았다. 수입가격은 10만4천달러선(7천2백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1983 -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퍼스널 컴퓨터(1983년 1월 3일자) ■ 55년만에 기계가 올해의 인물에 오르다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하고 안드로포프 전 KGB 의장이 승계했다.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은 PLO 제압을 명분으로 레바논에 진격, 난민 대량살상으로 중동을 뒤흔들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포클랜드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을 벌였다가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레이건 미대통령은 10년 만에 인플레를 잡았지만 예산적자는 1800억달러였고 실업자는 대공황 이래 최악인 1200만명이었다. 전세계 24개국이 수십억달러의 빚잔치를 하며 금융위기를 맞고 있었다. http://www.zdnet.co.kr/ArticleSaveText.asp?artice_id=20091231012022 (1982년 12월 1일 선정되고 1983년 1월 3일자 타임지 표지에 실렸던 모양이네요.. *_@)
- Nile Hilton Hotel
1979 - 미국의 실업가, 호텔왕 힐턴(Hilton, Conrad) 사망 힐턴(힐튼) [Hilton, Conrad (Nicholson), 1887.12.25~1979.1.3] 세계 굴지의 호텔 체인을 설립한 미국의 실업가. 뉴멕시코 주 샌앤토니오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힐턴은 어린시절 아버지를 도와 가족 소유의 커다란 벽돌집을 여관으로 개조했다. 1915년 A.H. 힐턴 앤드 선 잡화점의 동업자이자 사장이 되었다. 주의회에서 활동한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위로 임관되어 프랑스로 떠났다. 1918년 아버지가 죽은 후 힐턴은 가족사업을 계속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은행매입 협상차 텍사스 주 시스코에 갔다가 모블리 호텔을 매입했다. 호텔 운영이 수지맞는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댈러스·포트워스·웨이코·텍사스의 다른 도시 호텔들도 매입했다.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타격은 받았지만 힐턴 호텔 체인은 사업운영을 계속해나갔다. 1939년경에는 캘리포니아·뉴욕·일리노이와 그밖의 지역에서 호텔을 건축·임대·매매했다. 1946년 힐턴호텔사가 설립되었다. 해외로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1948년에는 힐턴인터내셔널사가 설립되었다. 1954년에는 스태틀러 호텔 체인을 매입했고, 그후 경영다각화의 일환으로 신용 카드업과 자동차 임대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60년대 힐턴사는 외국회사 및 정부와 공동경영하는 형태로 해외사업부를 재조직했다. 많은 힐턴 호텔이 프랜차이즈화되거나 힐턴 체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소유되었다. 콘래드 힐턴은 1966년 아들 배런에게 사장직을 물려 주었다. 힐턴은 〈서슴지 말고 하세요 Be My Guest〉(1957)·〈호텔 경영자의 영감 Inspirations of an Innkeeper〉(1963)을 집필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969 -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 미하엘 슈마허(Schumacher, Michael) 출생 슈마허 [Schumacher, Michael, 1969.1.3~ ]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 1969년 1월 3일 ~ )는 포뮬러 원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을 경신하고,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이다. 그는 1984년 15세의 나이로 독일 카트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을 시작으로 포뮬러 원 대회에서 베네통 포뮬러 소속으로 1994년과 1995년 연속 우승, 다시 1996년 스쿠데리아 페라리로 팀을 옮긴 후 2000년~200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면서 명실상부한 F1 최고의 자동차 경주 선수가 되었다. 통산 일곱 번의 세계챔피언을 차지한 그는, 2006년을 끝으로 F1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은퇴 후 취미삼아 독일 국내 모터사이클 레이스인 IDM Superbike 시리즈에 출전하고 있었지만, 2009년 스쿠데리아 페라리 소속 펠리페 마사가 헝가리GP 에서 중상을 입자 잠시 복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슈마허 역시 2009년 초에 모터사이클 사고로 입은 목 부상으로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다. 이후 2010년 브론 GP를 인수하여 창단된 메르세데스 GP에 현역으로 복귀를 선언하으나 세 시즌동안 포디엄 1회로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2012년 10월 4일 일본 그랑프리 기자회견을 통해 두 번째 은퇴를 선언하였고 2012년 시즌을 13위로 마감하며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미하엘 슈마허는 슈미(Schumi)라는 닉네임으로 통하기도 하며, 동생은 F1 선수였던 랄프 슈마허(Ralf Schumacher)이다.슈마허는 현재 부인과 아들1, 딸1 과 함께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다. 포뮬러 원 기록 /위키백과
쿠바의 카스트로(Castro, Fidel, 1926/27~ )는 1959년 2월 바티스타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접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진행하였으며, 그 해 9월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히론해안을 침공한 반혁명군을 격퇴하였으며, 5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하고, 7월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결성,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1962년 10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 반입을 둘러싸고 핵전쟁위기로까지 발전하였으나 미국이 카스트로정부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결되었으며, 이듬해 제2차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65년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1962 - 바티칸 교황청,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파문 [오늘속으로(1월3일)] 카스트로 破門 1962년 1월3일 바티칸 교황청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탄압했다는 이유로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파문(破門)했다. 파문이란 신자의 자격을 박탈해 종교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을 말한다.
1961 -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쿠바와 단교 선언
오늘의 역사 (1월 3일)[1959년] 1912년부터 미국의 준주였던 알래스카가 1959년 1월 3일, 정식 주로 편입돼 미국의 49번재 주가 됐다. 주 승격은 '알래스카 주법'이 한 해 전에 의회에서 통과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명과 알래스카 주민들의 찬반투표를 거쳐 이뤄졌다. 알래스카는 1741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 고용된 덴마크인 베링이 발견한 뒤, 러시아 모피상인이 서서히 이주해 왔으며, 18세기 말에는 러시아 - 아메리카회사가 모피무역을 독점하고 싯카를 건설하여 19세기 초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영국의 알래스카 강점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미국과 매각교섭을 하여 1867년 10월 18일 미국의 슈워드 국무장관이 720만 달러에 구입했다. 이 지역을 1에이커당 2센트로 환산해서 계산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알래스카의 주력 수출품 1호였던 모피도 거의 고갈된 상태였고 극한의 땅이라서 투자 메리트도 없다며 미국인들은 이 거래를 가장 어리석은 거래라고 하며, 이를 '슈워드의 어리석은 행위'(Seward Folly)라고 불렀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071
- Federation of the Ewst Indies, April 22, 1958.
1958 - 서인도연방 창설
The West Indies Federation, also known as the Federation of the West Indies, was a short-lived Caribbeanfederation that existed from January 3, 1958, to May 31, 1962. It consisted of several Caribbean colonies of the United Kingdom. The expressed intention of the Federation was to create a political unit that would become independent from Britain as a single state—possibly similar to the Canadian Confederation, Australian Federation, or Central African Federation; however, before that could happen, the Federation collapsed due to internal political conflicts. http://en.wikipedia.org/wiki/West_Indies_Federation
- Ascent of Mt. Everest, 50th Anniv.
1958 - 에드먼드 힐러리경, 남극 정복 [역사속의 오늘] 힐러리경, 남극 정복 1958년 1월 3일, 힐러리가 이끄는 뉴질랜드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달했다. 인간이 남극점에 발을 디디기는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콧에 이어 힐러리가 세 번째. 이어 힐러리는 며칠 뒤 비비안 훅스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영국의 탐험대와 극적으로 만났다. 훅스는 힐러리와 마주친 뒤 계속 행진해 인류 최초로 4천여km에 이르는 남극대륙 횡단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저는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해야 할 모험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거대한 강에 도전하고, 병원을 짓고. 평화로운 산골짜기에 이름 모를 재를 넘고, 아직 밟아보지 못한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하고, 남극의 빙하를 탐험하는 등 아직도 할 일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작가, 등산가, 탐험가인 어드먼드 힐러리경은 1919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출생, 양봉업을 생업으로 했으며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기도 했다. 힐러리 경은 이후 수차례에 걸쳐 히말라야 지역을 원정했고, 그곳에 병원, 진료소, 학교를 설립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인도주재 뉴질랜드 대사직을 담당하기도 했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8년 01월 0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05&yy=2008
1956 - 아동문화단체 '새싹회' 발족 "어린이에 민주사상과 행복을" 새싹회 발족과 함께 본격활동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6년 1월 3일, '새싹회'라는 이름의 단체가 발족하면서였다. 당시 새싹회는 어린이 문학가인 윤석중(尹石重), 조풍연(趙豊衍), 홍웅선(洪雄善), 어효선(魚孝善), 피천득(皮千得) 등 9명에 의해 조직되었다. 새싹회는 과거 일제 때의 어린이 운동과는 달리 해방된 조국에서 어린이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권리의 보호 및 행복과 권익을 더 하려는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은 해방된 민주주의 조국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지만 그러나 일제때의 어린이들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천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조철호(趙喆鎬) 선생은 조선소년군을 창설하고 "양심 있는 대한 남아는 그 의무에 충실?용감하라"고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보이스카웃 운동을 시작했다. 또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은 동경유학시절인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단체 '색동회'를 발족시키고 "씩씩하고 참된 어린이가 됩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발기인으로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 동요 '반달'의 작자 윤극영(尹克榮) 손진태(孫晋泰) 정순철(鄭順喆) 등이었다. [이치백의 一日一史] /전북일보 2006-01-02 오후 8:15:02 http://www.jjan.kr/local/others/default.asp?st=2&newsid=2006010220150201&dt=20060103
- 'Braveheart', by Mel Gibson
1956 - 미국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 배우 멜 깁슨(Gibson, Mel) 출생 멜 깁슨 [Gibson, Mel Columcille Gerard, 1956.1.3~ ] 멜 깁슨(Mel Columcille Gerard Gibson, 1956년 1월 3일)은 미국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의 감독 겸 영화배우이다. 작품활동 맬 깁슨은 그의 여동생이 오스트레일리아 배우학교에 입학지원서를 제출하여 연기를 배우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잘생기고 섹시함으로 헐리우드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출연작품의 성공을 보장하던 멜 깁슨은 종교영화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확실한 감독의 입지를 굳혔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인 그는 그 어느 미국 영화사도 투자하려 하지 않은 종교 작품을 자기 돈을 들여 만든 뒤, 전세계적인 흥행 성공으로 더더욱 화제가 됐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책임을 물었다는 즉, 유럽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이 들어 있다는 반유대주의 논란이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전승을 편집한 복음사가들의 신학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신약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 급급했다는 신학적인 비평도 있었다. 주연은 물론,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이미 보여주었던,영국과 스코틀랜드간의 독립전쟁을 다룬 브레이브하트로 오스카상을 휩쓸기도 했었다. 그의 작품은 항상 가족이 강조되는 경향을 보였다. /위키백과
1938 - 루스벨트 자선재단 설립 [책갈피 속의 오늘]1938년 루스벨트 자선재단 설립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어떤 동전에 그의 얼굴을 새겨 오래도록 기억할 것인지는 고민거리가 되지 못했다. 당연히 다임(10센트)이었으니까.
- 이육사 시 '광야' (공중전화 카드)
1930 - 이육사, 조선일보에 처음으로 시 발표 역사속의 오늘-시인 이육사 '말' 발표 ‘흣트러진 갈기/ 후주군한 눈/ 밤송이 가튼 털/ 오! 먼길에 지친 말/ 채죽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목통/ 축-처진 꼬리/ 서리에 번적이는 네굽/ 오! 구름을 헷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힌말이여!’(‘말’ 전문). 경북 안동 출신으로 독립운동에도 몸바쳤던 시인 이육사가 1930년 1월 3일 조선일보에 첫 시 ‘말’을 발표했다. 이때는 본명인 활(活)을 사용했다. ‘청포도’, ‘광야’, ‘절정’ 등의 시에서 볼 수 있듯 이육사는 시인이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행동한 독립운동가였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고, 1926년에는 베이징에 가서 사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끊임없는 저항의 생활에 1927년에는 첫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장진홍 의거(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3년간 대구형무소에서 형을 살았다.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는 바로 그의 호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도 독립에 대한 이육사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꾸준하게 시를 발표했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한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은 시인이 됐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01월 0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01&yy=2006
- Cantona 엽서
레오네 [Leone, Sergio, 1929.1.3~1989.4.30]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이탈리아 로마에서 무성 영화감독 빈센조 레오네의 아들로 태어났다. 배우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당시 유럽에서 작업하던 미국영화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마빈 르로이, 윌리엄 와일러 등의 할리우드 감독들 밑에서 영화의 기본을 익혔다. 1960년 《오드의 투기장 Dolossus of Rhodes》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하지만 이후 몇 년 간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1964년 《황야의 무법자 A Fistful of Dollars》로 이름을 알리면서 계속해서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The Ugly》(1966), 《옛날옛적 서부에서 Once Upon a Time in the West》(1968) 등의 서부극을 발표하였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의 휴식기를 거쳐 1984년 마지막 작품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본래 3시간 45분의 대작으로 만들어졌으나 흥행을 고려한 제작사에 의해 86분이 잘린 2시간 19분짜리 필름으로 개봉되어 실패한 영화로 낙인찍혔다가 10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마지막으로 러시아혁명에 관한 대작을 만들고 싶어했던 레오네는 그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1989년 숨을 거두었다. /naver 세르조 레오네 감독 작품 1984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C'Era una Volta in America ;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71 석양의 갱들 (C'Era una Volta la Rivoluzione ; A Fistful of Dynamite) 1969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C'Era una Volta il West ;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1966 석양의 무법자 (Il Buono, il Brutto, il Cattivo ;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5 (속) 황야의 무법자 (Per Qualche Dollaro in Più ; For a Few Dollars More) 1964 황야의 무법자 (Per un Pugno di Dollari ; A Fistful of Dollars) 1961 오드의 투기장 (Il Colosso di Rodi ; The Colossus of Rhodes) 1960 폼페이 최후의 날 (Gli Ultimi Giorni di Pompei ; Last Days Of Pompeii) /조감독
하셰크 [Hašek, Jaroslav, 1883.4.30~1923.1.3] 체크의 작가. 풍자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 Dobry voják Švejk〉로 유명하다. 이미 17세 때 체크의 신문에 풍자적 기사를 기고했으며, 프라하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문학활동을 위해 곧 직업을 포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발표한 그의 시집 〈5월의 외침 Májove vykřiky〉(1903)은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1904~07년에는 무정부주의 간행물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로 징집당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중 러시아 전선에서 체포당해 전쟁포로로 있었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 체크 해방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나중에는 볼셰비키에 합류해 공산주의 선전 책자를 썼다. 새로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수도가 된 프라하로 돌아온 뒤 〈세계대전중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의 운명 Osudy dobrého vojáka Švejka za světové války〉(1920~30)을 쓰는 데 전념했다. 이 작품은 6권으로 계획되었으나 4권까지만 완성하고 죽었다. /브리태니커
1917 - 북한의 원로 여배우 문예봉(文藝峰) 출생 문예봉 [文藝峰, 1917.1.3~1999.3.26] 남한 출신으로 월북한 북한 인민배우. 서울 출생. 1932년 16세의 나이로 이규환(李圭煥) 감독에게 발탁되어 《임자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였다. 그 뒤부터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과 《인생항로》 《수선화》 《나그네》 등에서 주연을 맡으며 한국적 미모와 연기력으로 해방 직전까지 ‘3천만의 연인’이라는 예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해방 후 극작가인 남편 임선규(林仙圭)와 좌익연극계에 가담하다 1948년 3월 남편과 함께 월북하였다. 1909 - 덴마크의 지휘자, 피아니스트, 코메디언 빅터 보가(Borge, Victor) 출생 보가(보르게) [Borge, Victor, 1909.1.3~2000.12.23] Victor Borge (/ˈbɔrɡə/ BOR-gə; 3 January 1909 – 23 December 2000), born Børge Rosenbaum, was a Danish comedian, conductor and pianist, affectionately known as The Clown Prince of Denmark, The Unmelancholy Dane, and The Great Dane.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Victor_Borge
빅터 보가(Victor Borge 1909-2000) 유태계 덴마크생 유모리스트, 엔터테이너, 피아니스트인 빅터 보가는 가전충효 /뮤직러브 2011.10.14 16:41 http://blog.daum.net/ac1104ac/1101
1901 - 베트남의 정치가, 대통령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출생 응오딘지엠(고딘디엠) [吳廷琰(오정염), Ngo Dinh Diem, 1901.1.3~1963.11.2] [오늘속으로(1월3일)] 고딘디엠 1901년 1월3일 베트남의 정치가 고딘디엠(吳廷琰)이 쿠앙빈에서 태어났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118230
1897 - 미국의 배우 매리언 데이비스(Davies, Marion) 출생 데이비스 [Davies, Marion, 1897.1.3~1961.9.22] Marion Davies-Mini Biography Marion Davies, born Marion Cecilea Douras on January 3, 1897, was one of the great comedic actresses of the silent era and into the 30's. She began as a chorus girl in New York, first in the pony follies and later in the Ziegfield Follies. Her stage name came when she and her family passed the Davies Insurance Building. One of her sisters called out "Davies!!! That shall be my stage name," and the whole family took on that name. When Marion moved to California, she was already involved with William Randolph Hearst. They lived together at Hearst's San Simeon castle, a very elaborate mansion, which stands as a California landmark to this day. At San Simeon, they threw very elaborate parties, many of them costume parties. Frequent guests included Carole Lombard, Mary Pickford, Sonja Henie, Dolores del Rio - basically all of top names in Hollywood and other celebrities including the mayor of New York City, President Calvin Coolidge and Charles Lindbergh. When Hearst died, Marion did not really know what was going on. The night before, there had been a lot of people in the house. Marion was very upset by the large crowd of family and friends. She said it was too noisy and were disturbing Hearst by talking so loud. She was upset and had to be sedated. When she woke, her niece, Patricia Van Cleve Lake, and her husband, Arthur Lake, told her that Hearst was dead. Upon Patricia's death, it was revealed she had been the love child of Davies and Hearst. Marion was banned from Hearst's funeral.
1894 - 미국의 영화배우 자수 피츠(Pitts, ZaSu) 출생 피츠 [Pitts, ZaSu, 1894.1.3~1963.6.7] ZaSu Pitts (January 3, 1894 – June 7, 1963) (pronounced /ˈzeɪsuː ˈpɪts/) was an American film actress who starred in many silentdramas, although later, her career digressed to comedysound films. She overcame her unglamorous looks and wallflower tendencies by using them to craft her stage and screen persona in scores of comedies. http://en.wikipedia.org/wiki/ZaSu_Pitts
FILMOGRAPHY 배우 1. 아버지의 인생 (1947) … 코라 역 http://hanimovie.cine21.com/Movie/person_view.php?person_id=46845
- Filming in New Zealand of The Lord of the Rings Trilogy
1892 - 영국의 소설가, 학자 톨킨(Tolkien, J. R. R.) 출생 톨킨 [Tolkien, J(ohn) R(onald) R(euel), 1892.1.3~1973.9.2] [오늘의 경제소사/1월3일] <1285> 톨킨 카펫에 뚫린 작은 구멍을 바라보던 40대 중반의 영문학 교수가 이렇게 썼다. '땅 속 어느 굴에 한 호비트가 살고 있었다.' 20세기의 새로운 소설 장르이자 21세기 초반 영화계를 휩쓴 판타지(fantasy)가 시작된 순간이다. 시기는 1930년대 중반. 옥스퍼드대학에서 고대영문학을 가르치던 톨킨(J R R Tolkien)은 뒷문장을 이어나갔다. 1년 뒤 원고는 '호비트(Hobbit)'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어졌다. 엘프와 드워프ㆍ오크 등 이종족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 호비트가 장안의 지가를 올리자 출판사로부터 속편 발간을 재촉 받은 톨킨은 12년 동안 새로운 작품에 매달렸다. 필명을 날리던 톨킨이 1949년 3부작 소설 '반지의 제왕'을 발표했을 때 독자들은 판타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화감독 피터 잭슨은 10대에 탐독했던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들어 역대 흥행수입 2위에 올렸다. 촬영지인 뉴질랜드는 관광 등을 통해 약 4조원에 이르는 부가가치를 벌어들였다. 요즘도 톨킨의 저작은 해마다 100만부 이상씩 팔려나간다. 톨킨의 성공요인은 크게 두 가지. 가족 사랑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다. 1892년 1월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조실부모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 옥스퍼드대 영문과를 수석 졸업하고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식들에게 전하고자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얘깃거리의 원전은 북유럽 설화와 신화. 영문학자로서 영국문화와 종족의 뿌리인 북유럽을 연구하며 얻은 학문적 성과와 자식 사랑, 1ㆍ2차 대전이라는 참상을 혼합한 결과물이 반지의 제왕이다. 톨킨은 1973년 81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자식들은 2003년 한해에만 2,200만달러의 저작료를 벌어들였다. 사람은 죽어도 이름을 남기고 이름은 돈을 만든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01/02 17:35:03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01/e2009010217345897490.htm
"환상은 여전히 인간의 권리로 남아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 나름의 잣대 그리고 거기에 말미암은 모양새대로 창조한다. 우리는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모습의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 - J. R. R. 톨킨
- 'Girls under Trees' - 'Fashion Shop'
마케 [Macke, August, 1887.1.3~1914.9.26]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메셰데(베스트팔렌) 출생. 상파뉴에서 사망. 뒤셀도르프의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에는 A.뵈클린과 F.호들러의 영향을 받고, E.마네에게 심취하였다. 1907년 파리를 찾았을 때는 르누아르에게서 감명받았으며, 그 후 4회에 걸친 파리여행에서 인상주의, 포비슴, 큐비즘과 접촉하였다. F.마르크와 W.칸딘스키를 만나 ‘청기사운동(靑騎士運動)’에 참가하고, 그 그룹전(1911∼1912)에 출품하였다. 1912년 파리여행에서 알게 된 R.들로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입체파나 미래파에서 섭취한 자신의 회화언어(繪畵言語)로 오르피슴적인 ‘동시적 대조(同時的對照)’에 의한 색광(色光:색과 빛의 自己同一)을 사용하여 독자적인 포름을 찾아내었다. 이리하여 호반의 산책자, 나무그늘의 어린이나 소녀 등을 순수하고 강한 색채로서 정착시켰다. 그의 스타일은 기하학성(幾何學性)과 가장 세련된 포에지(poesie)를 결합시킨 것이며, 작품은 독일적인 표현주의보다는 프랑스적인 색채에 의한 큐비즘에 가까워 다른 표현주의자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다. /naver
1883 - 영국의 정치가,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Attlee, Clement) 출생 애틀리 [Attlee, Clement Richard, 1883.1.3~1967.10.8] 클레멘트 애틀리 제1대 애틀리 백작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1st Earl Attlee, KG, OM, CH, 1883년 1월 3일~1967년 10월 8일)은 영국의 정치가이다. 1905년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 개업을 하였고, 런던 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변호사 생활 중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소령으로 복무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1922년 노동당 의원이 되고, 1924년 제1차 노동당 내각의 육군차관, 제2차 노동당 내각의 체신장관 등을 지내고, 1935년 당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5년 선거에서 대승하고 노동당 내각을 성립시켜 총리가 되었다. 애틀리 노동당 정부는 국민에게 내핍을 호소하고 영국은행·철도·석탄·가스·전신전화 등 중요한 기간산업(基幹産業)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1951년의 선거에서 패배하고 1955년에 은퇴, 당수직을 휴 게이츠켈에게 이양했다. 서훈 /위키백과
1876 - 동독의 정치가, 초대 대통령 빌헬름 피크(Pieck, Wilhelm) 출생 피크 [Pieck, Friedrich Wilhelm Reinhold, 1876.1.3~1960.9.7] 빌헬름 피크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인홀트 피크(독일어: Friedrich Wilhelm Reinhold Pieck, 1876년 1월 3일 ~ 1960년 9월 7일)는 독일의 정치인이며, 공산주의자이다. 194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독일 민주 공화국의 1대 대통령을 지냈다. 생애 동부 독일의 구벤(현재 폴란드의 구빈)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목수가 되려고 학교에 다닐 동안에 세계 정세, 결연한 관념과 정치적 야망의 결합이 그를 정치 활동의 생활로 이끌었다. 1894년 목수로서 목세공인 연방에 가입하였으며, 이듬해에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 1899년 당의 준 자치 도시 의장이 되었다가, 1906년 사회민주당의 전임 서기장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의 다수가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정부를 후원하였으나, 피크는 전쟁에 반대하는 당의 좌익 당원이었다. 그 이유로 군사 교도소에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암스테르담에 망명하여 살았다. 1918년 베를린으로 귀국한 후, 새로 창립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국제 공산주의 원조 기구의 창립 단원이 되어 전문 위원회에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독일 공산주의 원조 기구의 의장이 되었다. 1933년 나치스가 권력을 잡자, 피크는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 프랑스에 갔다가 1935년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여러 자격들에서 공산당을 섬겼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코민테른의 서기장 직위를 채웠다. 1943년 그는 자유 독일 국리 위원회의 창립인들 중의 하나였고, 그 기구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의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45년 전쟁의 종말에 피크는 승리한 붉은 군대와 함께 귀국하였다. 1949년 새로 설립된 독일 민주 공화국의 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그 직에 있으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신임과 함께 자신의 정치 직위를 유지하였다. 1960년 9월 7일 동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리처드슨 [Richardson, Henry Handel, 1870.1.3~1946.3.20] 오스트레일리아 태생 영국의 소설가. 본명 로버트슨(Ethel Florence Lindesay Robertson).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생. 멜버른의 장로회 여학교를 거쳐 1888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라이프치히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J.G.로버트슨을 만나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결혼했다(1895). 남편이 1904년 런던대학교 독문과 교수로 임명되자 남편과 함께 영국에 정착, 피아니스트의 꿈을 버리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처녀작 《모리스 게스트 Maurice Guest》(1908)에 이어 《지혜의 획득》(1910)을 썼다. 그리고 더블린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가서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3부작 《리처드 마호니의 운명》을 20여 년에 걸쳐 완성했다(1930). 그 외 《젊은 코지마 The Young Cosima》(1939)와 여러 편의 단편소설이 있다. /naver
1848 - 조셉 로버츠가 초대 라이베리아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다 조셉 젠킨스 로버츠(영어:Joseph Jenkins Roberts,1809년3월 15일~1876년 2월 24일)은 라이베리아의 초대 대통령(1848년-1856년)과 7대 대통령(1872년-1876년)을 지낸 인물이다. 미국버지니아 주노퍽에서 제임스 로버츠와 아밀리아 로버츠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아밀리아 로버츠는 흑인 노예였는데 노예에서 해방되고 나서 제임스 로버츠와 결혼을 했다. 1829년라이베리아로 이민을 왔다. 1대 대통령 시절 1847년라이베리아가 독립을 하고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총리는 스티븐 벤슨이었다. 그는 이주한 흑인 노예와 라이베리아원주민들을 통합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라이베리아 대학교를 설립했다. 평가 그는 외교술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그의 리더십은 라이베리아가 독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후 라이베리아의 대표 공항인 로버츠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 주의 주도인 로버트스포트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의 생일인 3월 15일은 라이베리아의 국경일이다. /위키백과
다미앵 [Damien, Father, 1840.1.3~1889.4.15] [오늘속으로(1월3일)] 다미앵 1840년 1월3일 하와이 구라(救癩) 운동으로 유명한 벨기에 선교사 다미앵이 루뱅 근교에서 태어났다. 1889년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몰(沒). 알바니아계 유고 사람이었던 마더 테레사가 인도를 자신의 두 번째 조국으로삼았듯, 그보다 한 세기 전에 벨기에 사람 파더 다미앵은 하와이를 자신의두 번째 조국으로 삼았다. 다미앵이 사제 서품을 받은 것도 호놀룰루에서였다. 그 시절 하와이는 아직 미국에 병합되기 전으로, 카메하메하5세가다스리고 있었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4-01-02 17:1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38&aid=0000214390
1840 - 노르웨이 간호사 카틴카 굴드베르그(Guldberg, Cathinka) 출생 굴드베르그 [Guldberg, Cathinka Augusta, 1840.1.3~1919.10.22] Cathinka Guldberg Cathinka Augusta Guldberg (3 January 1840–1919) was a Norwegian nurse, the first in that country. Guldberg was born in the city of Christiania, now Oslo, Norway. Her father was a priest and her mothers’ cousin was the famous Marcus Thrane, leader of the first Norwegian labour union. When her mother died in 1854, Cathinka took on responsibility for her brothers and sister. She became interested in helping people, especially the sick and poor ones in her surroundings. In 1866 Cathinka and a friend went to Kaiserswerth in Germany to educate themselves into Deaconesses. Two years later she returned to Norway and became the country’s first nurse. At the age of 28 she established “Diakonissehuset Christiania” and started educating deaconesses. She was honoured with St. Olav at the age of 75. She died in 1919. http://en.wikipedia.org/wiki/Cathinka_Guldberg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1836.1.3(음력 1835.11.15)~1867.12.10(음력 11.15)] [역사속의 인물] 사카모토 료마 오늘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가 태어났다. 일본 언론사들이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면 선호도에서 그를 따를 자는 아무도 없다. 일본판 '제임스 딘'이다. 젊은 나이에 암살된데다 혁명가와 자유인의 양면성까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궁벽한 도사번(현 고치현)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본 근대화를 연 메이지(明治)유신의 설계자였다. 그렇지만 공적면에서 아무래도 막부 체제를 종식시킨 '사이고 다카모리'같은 維新三傑(유신삼걸)에는 뒤진다는게 객관적인 평가다. 군대를 지휘하지도, 칼로 종횡무진 적을 무찌른 것도 아니었다. 대립하던 초슈번(현 야마구치현)과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을 중재해 힘을 모으게 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아이디어를 낸 것이 전부다. 그는 다소 미지근해 보이는 중재·조정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데도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이유는 뭘까? 인간적인 풍모 때문이다. 그는 근엄하고 포악한 무사가 아니라 서민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쑥대머리에 옷차림도 단정하지 않았고 어리버리한 행동을 곧잘 했다. 베스트셀러 '료마는 간다'를 쓴 시바 료타로는 "일본이 전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했다. 인간이 제대로 돼야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한국이라고 다를까.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1월 0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49&yy=2009
1829 - 독일의 언어학자 콘라트 두덴(Duden, Konrad) 출생 두덴 [Duden, Konrad Alexander Friedrich,1829.1.3~1911.8.1] [오늘<1306>] 1월3일 두덴 이런 명예의 조짐은 두덴의 만년에 시작됐다. 두덴이 72세가 되던 1901년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학자들이 베를린에 모여 독일어 정서법 통일안을 마련했다. 이듬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스위스 의회는 이 통일안을 법적으로 뒷받침했다. 마침내 유럽 여러 지역의 독일어가 법적 구속력을 지닌 통일 철자법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정서법의 밑바탕이 된 것이 두덴이 1880년에 처음 펴낸 ‘완결독일어정서법사전’이었다. 편찬자의 이름을 따 그 뒤 그저 ‘두덴’이라고 불리게 된 이 사전은 두덴이 죽은 뒤에도 판을 거듭하며 현대독일어의 ‘지킴이’ 노릇을 해 왔다. 두덴이 살던 19세기까지만 해도 독일어 정서법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고, 소리와 철자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두덴은 ‘소리 나는 대로 쓴다’는 음성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삼되 어원을 고려하는 역사주의를 부차적으로 곁들여 제 나름의 독일어 정서법안을 마련했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1876년 두덴이 처음 주도한 독일어 정서법 통일 회의를 무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평범해보이는 고등학교 교사가 그 뒤 현대독일어 철자법의 아버지가 되는 것까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96년에 약간의 독일어 철자법 개정이 있었지만, 그 뒤로도 많은 독일어권 출판사들과 저자들은 전통적인 두덴 철자법을 고수하고 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5/01/02 19:03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501/h2005010219015025340.htm&ver=v002
1825 - 로버트 오언(Owen, Robert), 뉴하모니(New Harmony) 매입 [오늘의 경제소사/1월3일] 뉴하모니(New Harmony) 1825년 1월3일, 미국 인디애나주 하모니 지역. 121㎢(여의도의 약 41배)의 땅이 15만달러에 팔렸다. 땅을 판 독일 출신의 종교단체는 보다 먼 변경으로 떠나갔다. 매수자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 영국 뉴래너크 방직공장을 운영하며 노동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유명세를 탄 사람이다.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던 오언은 왜 미국으로 왔을까. 오언의 개혁을 ‘파괴적인 이상주의’로 여긴 정부와 자본가들의 견제와 질시 탓이다. 이상향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땅으로 ‘병든 유럽’ 대신 미국을 택한 오언은 매입한 땅에 뉴 하모니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언은 새 땅을 농업과 공업이 골고루 발전하고 차별도 없는 공동체로 만들려고 애썼다. 곡물과 과일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장은 물론 증기기관으로 돌아가는 각종 공장도 세웠다. 공동체는 잘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얻은 오언은 ‘인류를 억압해온 사유재산과 불합리한 종교, 결혼으로부터 해방됐다는 ‘정신독립선언’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결과는 기대와 딴판. 누구나 받아들였기에 부랑자와 악당은 물론 사기꾼까지 몰려들었다. 뉴 하모니의 농기구와 가축을 훔쳐내 바로 옆에서 버젓이 다른 공동체를 차리는 사람도 있었다. 오언은 결국 손을 들었다. 1828년 뉴 하모니를 분할 매각했을 때 전재산의 70% 이상을 날린 오언은 영국으로 돌아가 재기를 노렸지만 끝내 성공하지도, 사회개혁을 확산시키지도 못하고 재산만 잃은 채 눈을 감았다. 뉴 하모니는 과연 실패로 끝났을까. 그렇지 않다. 오언의 아들들에 의해 20세기 후반까지 오언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며 절망에 빠진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 이스라엘 공동농장 키부츠의 원형도 뉴 하모니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8/01/02 17:44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801/e2008010217445863820.htm
- E. Stanton, C. Catt, L. Mott 모트 [Mott, Lucretia, 1793.1.10~1880.11.11] 미국의 사회개혁운동가. 매사추세츠주(州) 출생. 1806년 뉴욕주에 있는 퀘이커교(敎)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며, 졸업 후 이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811년 같은 학교의 교사였던 J.모트와 결혼하고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부부가 함께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하였다. 1833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노예제 반대협회의 회합에 출석한 이래, 동 협회의 필라델피아 여성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840년 런던의 세계노예제 반대회의에 미국대표로 출석하였으나, 여자이기 때문에 대표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를 계기로 여성의 권리주장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E.스탠턴과 함께 1848년 7월 세니카폴스에서 여성의 사회적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토의하기 위한 대회를 열고 여성해방의 강령으로서 ‘여성의 소신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미국에 있어서 조직적인 여성운동의 효시로, 그 영향은 전세계에 파급되었다. 생애를 통해서 사회개혁, 특히 노예제 반대 및 흑인생활의 개선과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힘썼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운동에서도 활약하였다. /naver
파울루스 [Paulus, 1694.1.3~1775.10.18] (영)Saint Paul of the Cross (이)San Paolo della Croce. 본명은 Paolo Francesco Danei. 1867년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10월 19일. 1720년 일생을 하느님에게 바치기로 한 뒤 환상을 보기 시작했으며, 마지막 환상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 이 환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당한 고난에 헌신하는 수도회를 세웠고, 이 수도회를 위해 회칙을 작성하여 1741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에게 승인을 받았으며, 1769년 클레멘스 14세에게 확증을 받았다. 그뒤 코르네토(지금의 타르키니아)에 '예수고난 수녀회'를 세운 다음 1770년 클레멘스 14세에게 승인을 받았다. 죽을 무렵 이탈리아에는 그가 세운 수도원이 12개가 있었으며, 그 수도회는 그가 죽은 이래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브리태니커
[책갈피 속의 오늘]1562년 임꺽정 처형 도적들은 이미 들끓고 있었다. 임꺽정이 살았던 조선 명종 때는 ‘민란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농민들의 봉기도 많았다. 정치 기강의 문란으로 마을 수령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성을 부렸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를 살해하고 옥에 갇힌 죄인을 풀어준 것은 지배층의 시각에서는 체제를 위협하는 신호였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20080103/8529439/1
[오늘의 경제소사/1월3일] 루터 파문 1521년 1월3일, 교황 레오 10세가 마틴 루터를 파문한다. 종교가 유럽을 지배하고 국왕까지 폐위하던 시절, 파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10&oid=011&aid=0000065127
- 'Sketch of Man' - 'Design for a Flying Machine'
- De la Rue Giori, Le Mont 2000 (No Value Specimen, Banknote) 1496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행 실험 [책갈피 속의 오늘]1496년 다빈치 비행 실험 “새는 수학 법칙을 통해 작동하는 기구(器具)이다. 새가 하는 일을 인간이 하지 못하리라는 법이 있는가!”
- 부석사 무량수전
- 영주 부석사 (공중전화 카드) 671 - 의상(義湘) 대사 귀국 (661년 당 나라로 유학) 고려 숙종으로부터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등이 있다. /naver
BC 106 - 고대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Cicero) 출생 키케로 [Cicero, Marcus Tullius, BC 106.1.3 ~ BC 43.12.7] 고대로마의 문인, 철학자, 변론가, 정치가. 라티움의 아르피눔 출생. 로마와 아테네에서 공부하였다. 처음에 그는 보수파 정치가로서 활약하였으며, 집정관이 되어 카틸리나의 음모를 타도하여 ‘국부’의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와 반목하여 정계에서 쫓겨나 문필에 종사하게 되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 안토니우스를 탄핵하였기 때문에 원한을 사게 되어 안토니우스의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수사학의 대가이자 고전 라틴 산문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완성자라고 불리며, 그리스의 웅변술과 수사학 소양(素養)에서 우러나온 문체는 도도하게 흐르는 대하에 비유된다. 그의 철학은 절충적인 처세 도덕론에 불과하지만 그리스 사상을 로마로 도입하고 그리스어를 번역하여 새로운 라틴어를 만들어 그가 최초로 라틴어를 사상전달의 필수적인 무기로 삼은 공적은 참으로 큰 것이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카틸리나 탄핵 In Catilinam》 외 58편의 연설과, 《국가론 De Republica》 《법에 관하여》 《투스쿨라나룸 담론(談論)》 《신에 관하여 De natura deorum》 《의무론 De officiis》 등의 철학서와 《노년론》 《우정에 관하여》 같은 소품, 그리고 친구인 아티쿠스 등에게 보낸 서한이 있다. /naver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