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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자료실 스크랩 한국 가요사 개설 2 -이준희
유현지 추천 0 조회 15 14.05.05 12: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 가요사 개설 2
글 : 이준희

 

이 글은 지난 1967년에 성음사(省音社)에서 발매한 '가요 반세기'라는 전집물의 해설문을 발행인의 허락을 얻어 보완한 것입니다. 1920년대 초창기부터 1960년 무렵까지 우리나라 가요사를 정리한 내용 가운데 오류가 있는 대목을 고치고 부족한 대목을 채워 넣었으며, 일부 표현은 알기 쉽게 바꾸었습니다.

한국 가요사 개설 총 4부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연재 순서는 1. 요람기 2. 황금기 3.수난기 4. 재생기 입니다. <가요114>

2. 황금기

 

1928년부터 빅터레코드 경성지점과 콜롬비아레코드 경성지점이 들어와 다투어 각 지방에 특약점을 만들고 축음기를 월부로 판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요곡은 빠른 속도로 일반 생활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잇따라 일본에 본사를 둔 레코드회사들이 우리나라에 지점을 차렸다.

폴리돌레코드(1932년), 오케레코드(1933년), 태평레코드(1932년), 돔보레코드(1931년), 시에론레코드(1931년) 등이 들어섰다. 이 숱한 레코드사들이 새로운 가수의 발굴, 신곡 제작, 선전과 판매에 경쟁을 하던 1930년대 약 10년간은 그야말로 우리 가요계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망국민의 퇴폐와 애상이라고 할까. 노래에서 억압된 심리의 탈출구를 찾고 노래에 취하고 노래에 병들던 시대이기도 했다. 1927년 서울에 JODK 경성방송국이 서고 몇 개의 지방 방송국이 섰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이 대중화되지 않았고, 도시에 빈약한 몇 개의 극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때라 서민의 오락이라곤 이 레코드에 담긴 가요뿐이었던 것이다.

이 가요의 황금기는 별처럼 찬란한 가수들의 명멸, 고도화한 판매 방법에 의한 레코드회사의 성황, 가요계 주변에 떠돌던 무지개 같은 화제와 노래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던 가요팬의 격증 등으로 요약될 것이다.

 

[여가수의 선구자 기생들]

 

새로운 가수의 발굴, 이것이 맨 처음 레코드사들이 겪어야 했던 난제였다. 특히 여자가수의 발굴이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의 상식으로 봐서 가수는 광대패라고 봤고, 양가집 딸이 그 노릇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난치는 기생

 

최초의 신극단체 토월회가 맨 처음 여배우를 구하러 기생촌, 심지어 유곽까지 헤맸지만 기생들이 "비록 박복한 팔자를 타고나 이 짓을 하고 있지만 광대패에야 낄 수 있느냐"고 냉소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던 그때였다. 그래서 각 레코드사는 기존의 몇 명 막간가수로는 모자라서 새로운 여가수의 발굴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는 가히 기생의 전성시대. 서울 장안에만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 숱한 권번에 이천여 명의 기생들이 있어서 밤마다 다방골 기생촌은 파란 아세틸렌등을 단 인력거들이 끊임없이 기생 아씨를 싣고 왕래하고 있었다. 각 레코드사에서는 우선 손쉬운 기생들 가운데에서 가수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의 여가수들 가운데에는 기생 출신이 많았다.
선우일선, 왕수복, 이은파, 이화자, 김복희 등이 모두 그렇다.

 

 

선우일선

특히 평양 명기 선우일선은 '꽃을 잡고'와 '능수버들'을 불러 인기를 모았다. 그의 노래 '조선팔경가'는 아름다운 조국에 대한 찬가로 망국민의 슬픔을 구성진 가락 너머 담고 있었다.

 

에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조선팔경가 : 편월 작사, 형석기 작곡, 선우일선 노래(1936)>

 

선우일선의 다른 노래 '능수버들' 또한 애창되었고 박부용의 '노들강변' 역시 히트했다. 흔히 이 기생 출신 가수들이 곧잘 불렀던 노래를 가리켜 신민요라 했다. 순수한 민요적 선율의 이 노래들이 히트했음은 물론이다.

기생 출신 가수 가운데에서도 특기할 것은 이화자의 등장이다. 이화자는 경기도 부평 태생의 기생으로 1936년에 부평 어느 술집에서 작곡자이자 가수였던 김용환에 의해 발견되어 뉴코리아레코드에서 첫 취입한 것이 '새봄맞이'였다. 이후 폴리돌레코드를 거쳐 오케레코드로 옮겨 가 발표한 것이 유명한 어머님전상백'('어머님전상서')이다.

 

가냘픈 목소리였지만 색정이 넘쳐 흐르는 그의 노래가 레코드로 나오자 신나게 팔려 나갔고 이화자는 하루 아침에 가요계의

여왕이 되었다. 흔히 기생 출신 가수들이 권번의 기적을 버리지 않았듯이 이화자 또한 앞에 놓인 술잔을 치우지 않았다. 은쟁반에 그때 돈으로는 큰 돈인 백 원, 이백 원을 풍류아의 명함과 함께 바쳐야 며칠 후 알현을 허락하는 통지가 올 정도였다고 한다.

 

'가거라 초립동', '꼴망태 목동', '화류춘몽'등 주로 김용환의 곡을 부르던 그는 색정 넘치는 용모, 몸매도 아울러 갖춰 인기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술에 젖고 사랑의 실의 끝에 아편에 병들어 1950년 무렵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훗날 황금심에 의해 그의 노래가 리바이벌됐던 것을 생각하면 청춘은 짧고 노래는 긴 것일까.

 

                                                                       

                                                                 

     [은하에 흐르는 별들]

 

 

강석연

 

한편 막간가수들 또한 이 레코드의 황금기에 찬란한 톱가수로 군림했다.
이애리수는 '고요한 장안'을 불렀고, 강석연은 '남대문타령'을 불러 장안의 레코드상 점원들의 손을 바쁘게 했다.

길일흔 꾀꼬리(강석연)

 

채규엽은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희망의 고개로', '순풍에 돛 달고'를 역시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취입해 가요계의 개척자임을 확인했다.

이때 강홍식이 부른 '처녀총각'은 십만 매가 팔렸다고 할 정도로 공전의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웠다. 잔뜩 찌푸린 어느날 서울 국일관 뒤 어느 여관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강홍식이 콧노래로 '흥타령'을 부르자 김준영이 그것을 변조해서 취입해 보자 해서 가지고 있던 오선지에 그린 것이 곧 이 곡으로, 이 노래의 대히트는 레코드 사업의 기업적 성공의 청신호였다.

 

가수겸 작곡가 김용환은 특이한 하이톤과 다이나믹한 목소리로 '부령청진', '안개 낀 섬'으로 거장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악극 '아리랑'의 영진 역도 곧잘 하는 명배우이기도 했다. 그의 황금시절에 공연이 끝나고 나면, 인력거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였다. 어느 겨울에는 어느 인력거의 신세를 질까 망설이다 못해 눈을 맞으며 명치좌(명동 국립극장 자리)에서 사직골 자기 집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여복도 이쯤 되면 고생일까.

최남용의 '버들잎 신세'와 '비오는 선창' 또한 태평레코드에서 나와 각광을 받았다.

 

 

고복수

1933년에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선 1등에 당선되면 일본 송죽영화사의 전속가수까지 함께 시켜 준다는 공약을 내걸고 전국 가요콩쿨을 열었던 바, 여기에 1등이 정일경, 2등이 조금자, 3등이 고복수였다.

 

부산 예선에서 1등을 하고 청운을 뜻을 품고 상경, 검은 두루마기에 흰 무명 장갑을 끼고 무대에 올랐던 고복수는 구수한 목소리로 입상을 했지만, 콜롬비아레코드에서는 노래를 취입하지 않고 오케레코드에서 '타향'(일명 '타향살이')을 불러 크게 히트했다.

오케레코드사의 사운을 결정했던 이 '타향'은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으로 '방랑가' 이후 면면히 흘러온 망명가, 실향가이리라.

 

타향살이 몇 해 던가
손 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타향 :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1934)>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 살아야 했던 유랑민의 맺히고 맺힌 설움이 구성진 선율에 흐르고 있었다.
청중들은 울면서 따라 불렀고 가수 또한 울면서 불렀다.
재창, 삼창의 목메인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고, 고복수의 뺨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특히 이 노래는 일본, 만주 등지의 순회공연 때 낯설은 이역의 하늘 아래 입술을 깨물려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 주는 통곡의 뇌관이었다.

심지어 어떤 여인은 이 노래를 듣고 향수가 북받혀 자살했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노래에 울고 노래에 죽을 수도 있었던 시대였다.
고복수는 이어 '사막의 한', '짝사랑' 등을 연달아 불러 히트시켰다.

그 무렵 새로 서울 장안에 들어서기 시작한 카페의 색유리창마다 밤이면 취한 젊은이들이 부르는 이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당시 잡지 '삼천리'에서 주최한 인기가수 투표에서는 남자가수가 1위 채규엽, 2위 김용환, 3위 고복수, 4위 강홍식, 5위 최남용 등의 순서였고, 여자가수는 1위 왕수복, 2위 선우일선, 3위 이난영, 4위 전옥, 5위 김복희 등의 순서였다.

 

 

인기가수 투표 결과 - 잡지 '삼천리'

 

 

 

이난영

1933년에는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이 등장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목포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 무대 뒤를 찾아온 열여섯 살 다박머리 소녀가 있었다. 노래를 들어 보니 놀라운 목소리라 당일로 막간에 등장시켰는데, 바로 이난영의 첫 무대였다.

 

이난영은 극단 태양극장을 따라 일본 오오사까까지 가서 노래를 불렀다. 마침 사무로 오오사까에 와 있던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은 이난영의 노래를 듣고 꾀어서 그대로 현대탄을 건넜다. 우연히 주옥을 주은 것 같아 기뻐하던 박승희는 대경실색하여 서울로 장문의 전보를 쳐서 이철에게 항의했으나 이난영 본인의 요청으로 오케레코드에 전속하게 되었다.

1935년에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잔잔한 설움을 밑바닥에 깐 선율로 우리의 가슴을 치는 순수한 정서가 있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 :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1935)>

 

 

김해송

 

 이난영은 오케레코드 무대, 광복 이후에는 KPK악극단 무대에서 이런 눈물이 듬뿍 묻은 엘레지를 많이 불렀다. '불사조', '알아달라우요', '다방의 푸른 꿈', '진달래시첩' 등 그의 노래들은 지금도 우리들의 귓전에 그리운 옛날, 슬픈 옛날을 불러 준다. 그는 평생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음악하는 사람과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할 만큼 어린 나이답지 않게 철이 들어 작곡가 김해송과 사랑을 불태웠다.

 

6.25 전쟁으로 김해송이 납북되자 병고로 빈사에 이른 이난영은 남인수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꿈꾸었지만, 이제 남인수도 가고 그도 가고 그의 숱한 엘레지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 피아노까지 전쟁의 불길 속에 타 버리자, 손뼉을 치고 발장단을 치며 어린 자식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오늘의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를 만들었다.

이난영, 그는 이제 우리 가요사의 고전 '목포의 눈물'과 함께 불망의 여인이 되었다.

 

그에게서 목소리 테스트를 받고 소위 쯔메에리(つめえり. 학생복으로 사용된 목을 두르는 옷깃이 있는 양복 상의) 차림의 이 떠꺼머리 총각이 부른 노래가 시에론레코드에서 처음으로 발매되었으니, 그것이 '눈물의 해협이었다. 하지만, 기분을 내어 불렀음에도 반응이 신통치 않아, 나중에 가사만 개작하여 오케레코드에서 다시 취입한 것이 바로 '애수의 소야곡'이다. 달콤한 그의 목소리는 대중의 환호를 받았고 그는 일약 톱가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박시춘, 남인수는 확실한 콤비가 되었으니, 오케레코드와 태평레코드가 각축전을 벌이던 그 가요의 황금시대 이래 근 30년 동안 우리 가요계에 솟구쳐 달렸던 커다란 산맥이었다. '꼬집한 풋사랑','감격시대','낙화유수'등 해방 전에 150곡 정도를 불렀고, 해방 후에 '가거라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등 200여 곡을 부른 남인수는 때마다 시대 감각에 맞는 노래를 불러 늘 가요계의 정상에 군림했다.

 

남인수는 6.25 전쟁 직후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불러 만년가수로서 성가를 높혔고, 작고 석 달 전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무대에 섰다. 그는 순회공연 때 여관에서 머리카락이 흐트러질까 봐 목침을 베고 잘 만큼 깔끔한 성미에 야구, 배구 등 스포츠에도 능하고 당구도 500을 치는 멋쟁이였다.

그런 남인수에게 스캔들이 없을 리 없었다. 화려한 스캔들의 파노라마 속에 노래하며 달려간 정열아.
그가 45세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고 1962년 6월 30일 최초의 연예협회장이 엄수되었을 때, 악단은 장송곡 대신 그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을 연주했다. 상객들은 귓전에 흐르는 그 선율에 따라 울먹이며 고인의 그 간드러지도록 달콤한 목소리를 되살렸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만은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달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 주나 휘파람 소리

 

 <애수의 소야곡 : 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1938)>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그야말로 가수적인 한 생애였다.

 

[백화난만 -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그 옛날 악극단이 이른바 마찌마와리(まちまわり)라던 가두선전을 할 때엔, 맨 앞에 악극단의 이름과 가수의 이름이 쓰여진 깃발과 악대가 가고, 그 뒤로 인력거 행렬이 따라갔다. 인력거마다 그 가수의 이름 석 자가 적힌 깃발이 걸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 행렬에선 인기 있는 가수일수록 뒤쪽에 섰다. 그 이유는 음악 소리를 듣고 뒤늦게 뛰어나온 사람들에게 인기 가수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가두선전의 행진대는 간도 용정이나 목단강 등 만주에선 인력거 대신 마차의 행렬이 되곤 했다. 가요계가 풍성해지고 악극단이 흥청거릴수록 마찌마와리의 인력거나 마차가 늘어 갔다. 인기와 대중의 꿈을 한 몸에 모은 가수들도 그만큼 늘어 갔다.

그러나 시국은 그렇지 않았다.

 

 

박향림

1937년에 중일전쟁의 포성은 압록강을 넘어서 울려 왔고, 소위 대동아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아니하고, 한 잔 마시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다.

이 무렵 만요 붐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 무거운 시대 속에서 잠시나마 즐겨 보자는 안타까운 심리의 표현이었으리라.
박향림이 부른'찻집 아가씨'는 폴카조의 노래로 당시 인기를 끌었다.

1937년에 김용환은 뉴코리아레코드에서 활동하도 있던 그의 동생 김정구를 오케레코드의 손목인에게 소개해 오케에서 재데뷔하도록 했다.

 

부어라 마시어라 탄식의 술잔
잔 위에 찰랑찰랑 깨어진 하소

 

 

 <항구의 선술집 : 박영호 작사, 박시춘 작곡, 김정구 노래(1937)>

 

그의 재데뷔곡 '항구의 선술집'은 그 시절 젊은이의 어두운 우수를 표현한 노래였다.
그러나 박력있는 그의 목소리는 만요에 더 적합했다.

'앵화폭풍'을 부른 것은 우가끼(宇垣) 총독이 최초로 밤벗꽃놀이를 위해 창경원에 3만 개의 색 등을 달면서 돈화문 앞이며 종로4가 네거리가 인파로 메워지던 무렵의 일이었다.

 

 

김정구

'왕서방 연서','총각 진정서' 등이 그의 대표적 초기 만요다.
그는 광복 이후에도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뒤져 본 사진첩', 수박행상', '코리안 맘보' 등 만요나 '바다의 교향시' 등 시원스런 노래 외에 이시우 작곡의 '눈물 젖은 두만강' 같은 것은 일제 36년을 통한 국경 애화와 함께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눈물젖은 두만강 :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1938)>

 

레코드 취입보다 무대가수로서 명성을 가졌던 가수들도 있었다. 송달협은 그 중성에 가까운 특이한 음성으로 무대를 휩쓸었으며, 그의 취입곡 '야루강 천리', '처녀일기'는 제법 애창되었다.

눈물의 여왕 전옥도 노래를 불렀고, 배우 석금성도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적인 가수라기보다는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신카나리아

 

한편, 그 당시 표현으로 넌센스라 했던 코메디를 주로 했던 신카나리아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6살에 무대에 선 이후 남편 임생원과 같이 무대에서 넌센스도 했고 막간물에서 노래도 불렀다.

 

조선예술좌, 신무대 등을 전전하는 그는 1931년부터 레코드 취입도 했다. 시에론, 콜롬비아 등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그의 노래 가운데 '뻐꾹이' 등이 히트했다. '강남제비'는 원래 이애리수의 곡이었지만, 신카나리아의 노래로 알려질 만큼 그 인기가 뚜렷했다.

김응선은 가수로서는 화려한 각광을 못 받았지만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가요계에 알려졌고, 남일연, 박향림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36년에 동양극장에서 아흐레나 롱런을 하고 기생이란 기생은 모두 다 그 구경을 가 버려서 요리집이 텅 비었다는 신파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1939년에 영화화되었을 때 그 주제곡으로 취입되었던 '홍도야 울지 마라'는 가요콩쿨 출신의 김해 사람 김영춘이 취입한 것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영화는 동양극장의 그 스?으로 그 때 돈 4천 원이나 들여 만든 것이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 주제가는 남아 요즘도 선술집의 젓가락 장단과 함께 흘러나와 아련한 옛날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준다.

우리 가요사상 작곡가와 가수의 콤비라면 초기의 전수린, 이애리수가 있고 오케레코드의 매상을 올렸던 박시춘, 남인수 그리고 오케레코드와 맞겨루던 태평레코드의 이재호, 백년설 콤비가 있었다.

 

 

백년설

 

백년설(본명 이창민)은 경북 성주 출신으로 레코드계 주변을 방황하던 중 전기현 작곡의 '유랑극단'을 취입해서 당장 스타덤에 올라섰다. 그의 노래 '나그네 설움'은 십여만 장이나 팔려 태평레코드 특약점으로 하여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했다.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 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나그네 설움 :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1940)>

 

나그네라는 것은 대중가요의 영원한 테마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노래 속에 나그네는 망명가와 실향가 속에 엿보이던 그런 슬픔, 그런 한이 맺힌 애상을 지니고 있다.

애절한 노래가 잘 팔리던 시절이었다. 방황과 센티멘탈과 푸념이 대중의 가슴에 공명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노래'복지만리', '두견화 사랑', '고향설', '번지 없는 주막'도 그의 주가를 높였다.

1940년 전후는 가요콩쿨의 전성시대였다. 가요콩쿨은 신인 발굴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각 레코드사의 신곡 선전 방안이기도 했다. 자사 전속가수들의 노래와 막간가수들의 극을 가요콩쿨과 함께 얼버무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읍내 가두에 나붙은 가요콩쿨 광고는 젊은이들의 피를 뜨겁게 했고 규모가 큰 가요콩쿨은 연일연야 밤 하늘을 노래로 채웠다.

특히 북한지방에서 열린 가요 콩쿨에선 숫기 없는 아가씨들이 청중들을 떠밀고 나와 저고리가 뜯어지고 옷고름이 찢어진 줄고 모르고 열창하다가 낙선하면 낙루하기도 했다.

작곡가 김교성은 콩쿨대왕이라고 별명이 붙을 만큼 신인 발굴에 재능을 보였는데, 흔히 심사석에 항의가 들어오면 "그럼 당신들이 심사하시오"하고 뒷짐을 지고 돌아서는 바람에 항의하던 사람들이 도리어 풀이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1939년 조선일보사 김천지국이 주최한 가요콩쿨에는 전국에서 무려 17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북으로 길주, 명천에서 남으로 제주 등지에서까지 이 김천을 향해 모여들어 사흘 밤낮이나 성황을 이루었다.

이 콩쿨에서 진방남(본명 박창오)가 1등으로 당선되었다. 여기서 노래 솜씨를 인정받은 진방남은 즉시 '불효자는 웁니다', '하물선 사랑' 등 여덟 곡을 태평레코드에서 취입했다.

 

'불효자는 웁니다' 진방남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 김영일 작사, 이재호 작곡, 진방남 노래(1940)>

 

진방남은 이 '불효자는 웁니다' 등의 히트에 이어 1942년에는 '꽃마차'를 불러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 '세세년년', '잘있거라 항구야', '고향만리 사랑만리' 등으로 톱가수가 된 진방남은 이후 반야월이란 이름으로 작사에도 손을 뻗쳤다. 반야월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고 김교성에게 가사를 줘서 각광을 받았다는 처녀작 '넋두리 이십년' 이후 '뽕 따러 가세',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무려 삼천여 곡의 많은 가사를 지었다.

황금심

1937년 서울 청진동의 어느 여염집에선 소녀의 앳된 노래 소리가 흘러나와 행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어느날 이 노래에 매혹된 한 청년이 이 집 문을 두드렸다. 이 사람은 바로 빅터레코드의 문예부 직원.

그 이튿날로 레코드사로 와 주십사고 부탁을 받은 목소리의 주인공인 17세 앳된 소녀가 바로 황금심이었다. 이화자풍인 그의 노래는 구성진 콧소리와 함께 가슴을 흔들 만했다. 데뷔곡은 '알뜰한 당신'이었다.

 

이밖에도 숱한 신인가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JODK 경성방송국 함창단 출신으로 가요콩쿨에 입상한 계수남, '국경의 부두', '아들의 하소'를 불렀던 고운봉 등이 등장했다.

가수를 천대하는 것은 이제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이 무렵 가수가 되는 것은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멋진 것이었다.

 

 

 

장세정

평양 화신상회 점원이었던 장세정은 오케레코드의 이철에게 발탁되어 일약 인기 가수가 되었다. '연락선은 떠난다', '역마차', '잘있거라 단발령', 항구의 무명초' 등 그의 히트송은 노래의 은하수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연락선은 떠난다'는 관부연락선에 맺힌 민족의 한을 노래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쳤다.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연락선은 떠난다 : 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 노래(1937)>

 

밤배에 님을 보내고 손수건에 뜨거운 눈물을 적시며 가만히 읊조려 보던 노래였다.
부산항 바닷물에 슬픈 눈물을 뿌리며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이런 슬픔, 고통에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던 것일까.

 

백난아

1940년 태평레코드의 전국 콩쿨에서 2등 당선을 한 백난아는 본명이 오금숙. 그는 미모를 자랑하면서 일본, 만주, 남중국 등 각처를 순회하는 공연에서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망향초 사랑', '갈매기 쌍쌍', '아리랑 낭낭', '직녀성', '찔레꽃' 등은 태평의 마지막 전성시대의 노래였다.

채규엽이 건재했고 태평레코드의 최남용도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낙화삼천'의 노벽화, '절연편지'의 나성려, '바다의 젊은 날'이 히트한 박광욱, 최병호, 김선영 등이 활약했다.

 

 

 

 

 

 

청진 가요콩쿨에서 1등을 한 이인권은 빅터레코드의 중겸 멤버로 활동하여, 그의 노래 '얄궂은 운명'은 침체했던 빅터레코드의 매상고를 올렸다.

박단마

 

황금심과 같이 출발했던 박단마는 넌센스를 곧잘 취입하는 코메디언이기도 했지만, 그의 노래 '나는 열일곱 살'은 젊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려요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 살이예요
가만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노랑새 꿈꾸는 버드나무 아래로 가만히 오세요

 

 

 <나는 열일곱 살 :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박단마 노래(1938)>

 

유혹적인 제스쳐, 발랄한 그의 몸매는 노래하는 박단마를 더욱 화려하게 했고 순회공연 때엔 무대 뒤 분장실에 꽃다발이 쌓여 갔다.

 

은하에 흐르는 별들

1940년말 무렵 가수들의 레코드회사별 분포는 이렇다.

빅터레코드 - 황금심, 박단마, 이규남, 송달협
콜롬비아레코드 - 김영춘, 강남주, 남일연, 계수남
오케레코드 - 남인수, 김정구, 이화자, 이난영, 장세정, 이인권, 고운봉, 박향림
태평레코드 - 백년설, 진방남, 백난아, 미스코리아
폴리돌레코드 - 채규엽, 현정남

이 무렵에 활동한 작곡가는 전수린, 박시춘, 이재호, 손목인, 김교성, 이시우, 김준영, 전기현, 이봉룡, 문호월, 김용환, 남지춘 등이었고, 작사가로는 이서구, 이하윤, 박영호, 조명암, 김운하, 천아토, 이부풍, 김영일, 강사랑, 고려성, 유도순 등이었다.

 

[레코드의 신화]

레코드사들의 기업적인 성공과 함께 레코드 판매에는 대규모적이고 고도로 발달된 광고 방식이 난무했다. 레코드를 시계점이나 모자점에 위탁판매하던 것은 아련한 옛날의 얘기다. 레코드 상점엔 아치가 서고 수천 장의 가사지가 가게 앞에 쌓이고 행인들은 그 가사지를 받아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것이 이른바 가두합창인데, 때로는 수백 명이 모여 순사가 출동하곤 했다. 매달 각 회사마다 신보를 발간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선전광고가 실리고 가수들의 브로마이드가 한 사람당 수 종씩 찍혀 나돌았다.

축음기 레이블


하늘에 광고풍선을 올렸고 백화점 진열장은 신보 광고로 천연색이었다. 광고지를 비행기로 뿌린 일도 있었고, 창경원의 봄벚꽃놀이 때면 야외무대 공연과 함꼐 광고지와 신곡의 가사지가 낙화처럼 휘날렸다. 포스터도 대, 중, 소 세 종류였고, 심지어는 등불놀이까지 등장했다.

 

그 무렵 레코드가게에 들렀다고 하자. 미소녀의 안내로 시청실에 들어가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그 미소녀는 섬섬옥수로 찻잔을 들고 들어오리라. 향긋한 차를 맛보며 노래를 듣고 간신히 "내일 사러 오죠."하고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미소녀가 결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개런티를 보면, 물론 회사에 따라 다르고 가수에 따라 달랐겠지만 작사료 10원, 작곡료 10원에 중견가수의 전속료가 월 8, 90원이었고, 재계약을 할 때마다 전속료와 계약금이 증가되었다. 이난영이 다박머리 소녀로 오케에 입사할 때 전속료가 150원이었던가. 일본에 가서 레코드를 취입할 때마다 출장비에 한 곡당 40원(한 회 취입 7, 8곡)의 수당이 나왔다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레코드 한 장당 5전씩의 인세를 받는 가수도 수두룩했다.

각 레코드사의 가수 스카웃전도 미상불 대단해서 자기 회사의 가수를 다른 회사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계약만료기일 서너 달 전에 재계약을 서두르기도 하는가 하면, 인기가수의 경우 이성관계까지 내사할 정도였다.

 

채규엽의 경우 1936년에 콜롬비아레코드와 오케레코드 두 회사와 이중계약을 맺어 소송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게도 막대한 수입이 있으면서도 호화를 다한 생활 끝에 돈이 궁해진 풍류아가 저지른 실수라고나 할까.

백년설이 태평레코드에서 오케레코드로 옮겨 올 때 입사축하금이 3천 원, 전속료 2천 원, 월급이 350원이었다. 당시 가장 비싼 축이었던 양복류 최고급 홈스팡 주문복이 40원 남짓이고 보면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짐작할 것이다.

 

[악극단의 시대]

막간물은 원래 간단한 버라이어티쇼였다. 그러나 각 레코드사가 자사의 선전을 위해 전속악단과 전속가수를 실연무대에 내세우는 일이 잦아졌다. '오케레코드 7인의 밤' 이런 행사가 흥행적으로도 성공하자 유사한 흥행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세칭 무대가수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이 무대가수들은 인기가 높아지면서 취입을 하기도 했는데, 박옥초, 심연옥, 황정자, 황순덕, 김백희, 왕숙랑, 유정희, 태성호, 박혜옥, 김용대, 현인 등이 있었다.

 

한편 각 레코드사마다 경쟁적으로 무대공연을 지속해 가면서 쇼의 양식도 다채로워졌다. 노래의 나열만으론 먹히지 않자 가요극이라는 것이 생겼다. 극적 스토리에 가요를 삽입하고 거기에 무희를 등장시키는 입체적인 진행이었다. 그러자니 자연히 각 악극단마다 개성이 생겼고, 전문적인 극작가, 작곡가, 연출가들이 잇달아 각 단체에 들어갔다. 빅터레코드 연주단은 나중에 반도가극단이란 이름으로 주로 오페레타적인 것을 상연했고 콜롬비아레코드는 라미라가극단이란 이름으로 오리지널 가극을 상연해서 자웅을 겨루었다.

 

오케레코드의 이철은 이 두 단체를 제압할 목적으로 오케연주단을 혁신, 발전시켰다. 최초에는 오케그랜드쇼 한 팀뿐이었지만, 흥행이 순조롭고 수요가 증대하자 오케그랜드쇼와 오케싱잉팀으로 나누어 각각 남북한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다양한 공연물, 화려한 무대로 흥행계를 뒤흔든 이 일행에는 아리랑보이즈와 저고리시스터즈란 보컬그룹의 시조들도 있었다.

아리랑보이즈는 악기도 다루고 노래와 대사를 뒤범벅해서 지금 비틀즈의 선조였고, 저고리시스터즈는 이난영, 장세정 등이 색동저고리를 입고 나와 환호를 받았다.
아리랑보이즈 중에 샹송을 부르던 보드빌리언 이복본은 모리스 슈발리에를 닮아서 인기가 있었다.

이들 일행이 일본에 가서 영왕 이은의 궁을 찾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김정구가 '낙화삼천'을 불렀을 때 영왕은 망국한의 설움이 북받혔던지 얼굴을 손에 파묻고 흐느꼈고, 가수 김정구마저 격앙해서 뺨에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좌중이 모두 눈시울을 적셧다. 나라 잃은 황태자와 그 백성들의 눈물 젖은 대화. 비록 오고가는 말은 없어도 부르는 노래 속에 한이 맺혀, 듣다 못해 부르다 못해 통곡했던 것이다.

 

악극단 시대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 오케레코드의 사장이었고 조선악극단의 지휘자였던 이철에 대해 기술해 보자.

이철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 영화관에서 악사를 하다가 오케레코드를 창설했다.
1936년에 경영난으로 오케레코드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자 오케레코드 문예부장을 역임하면서 악극단을 창설하여 일본, 만주 등의 순회공연을 했다. 그는 가요를 듣는 귀가 밝아 히트 여부를 귀신처럼 알아맞춰 오케레코드가 그 많은 히트곡을 내놓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그는 일본 경찰의 간섭도 시원스레 해결했다. 공연 금지가 나면 곧 현지로 가서 배짱과 능란한 일본어로 당장 공연 금지를 해제시키곤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상해 공연계약 중에 발병하여 귀국한 후 미진한 꿈을 안은 채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 외 규모가 큰 단체로는 성보가극단과 약초가극단이 있었다. 성보가극단은 요시모도(吉本)흥업이란 일본 흥행단체의 뒷받침으로 활동했고, 약초가극단 역시 일본 재벌의 자본으로 한 동안 흥청거렸다. 태평레코드 연주단 또한 순회공연을 했지만 악극단으로서는 활발한 활약을 하지 못했다.


글 : 이준희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사학과 수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사의 찬미(외)](2006),
[일제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군국가요’다시보기](200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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