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식량(field/combat ration)의 역사와 의의
1 개요 Field ration, 혹은 combat ration. 전쟁 중인 군인들을 위한 식량. 전투 중인 경우를 위한 식량이기 때문에 평시나 주둔시에 먹는 군용 식량(garrison ration)과는 확실하게 구분된다. 비상식량과 꽤 유사하지만, 사실 군에서도 전투식량 이외에 비상식량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 전투식량은 보관과 조리가 편해야 하며, 동시에 되도록이면 평시 식단에 가까울 정도로 맛이 있고, 먹기 쉬워서 병사의 만족도를 채워주어야 한다. 전투식량에 왜 맛을 따지는냐 하겠지만 이는 전투식량의 맛이란게 전장에서 병사들의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거에 신경 안 쓰면 PTSD 등의 전투피로 때문에 사실상 전투력 유지가 어려워진다.[1] 여담으로 과거 군대에 담배가 대량으로 공급되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반면에 비상식량은 있을지 없을지 모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지급하는 것이며(대표적으로 추락한 전투기 조종사나, 적지에 고립된 특수부대원), 절대적으로 부피와 무게를 줄여야 하기에 음식이라기 보단 포만감 주는 영양제 같은 물건이며, 당연하지만 맛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아니 오히려 적당히 맛이 없어야 비상식량으로써 이용할 수 있다. 너무 맛있으면 아껴먹기보다는 미리 다 까먹게 될 공산이 크니까.[2] 유사한 케이스로는 우주 버전인 우주 식량이 있다. 전장에서 오래도록 상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보존식품과도 궤를 같이 한다. 특히 통조림, 병조림 등의 저장방법이 아직 등장하지 못했던 근세 이전부터 전투식량으로 주로 쓰이던 쉽비스킷이나 염장고기 같은 류는 더욱. 2 전투식량의 역사 2.1 고대와 중세 고대와 중세 군대에는 근대적인 의미의 전투식량 개념은 없었으나, 전투식량에 해당될만한 휴대가 편하고 보존성이 있는 식량은 운용했다. 육포나 염장고기(물고기 포함), 견과 말린 과일과 딱딱한 건빵(Hard Tack), 쉽비스킷 등이 이에 해당한다. 쉽비스킷은 정말로 유래가 깊은 보존식품 중 하나로, 고대 이집트 선원들이나로마 병사들도 비슷한 걸 먹었던 것 같고 3차 십자군 전쟁 시기에 "무슬림의 비스킷"이라고 부르던 것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쉽비스킷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가 19세기 중반 쯤 통조림이 해군용으로 채용되고 나서야 사라지게 된다. 당시 군대의 식량 보급방식과 조리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게다가 그땅이 본토와 인접한 지형일때는 그땅을 자기들 영토로 편입할시에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에다가 적대적인 사람이 살고있는 형태가 되버려서 장기적으로 보면 병신짓. 물론 가져간 식량이 다 떨어졌거나, 본격적인 재물약탈 때 함께 보충(…)하는 등 필요에 따른 약탈도 많았지만, 여튼 조금이라도 현명한 장수는 약탈은 기본적으로는 피해왔던 행위였다. 그래서 대규모 전투시에는 대개 군주가 군자금을 끌어다가 진격로 도중의 우호 지역에서 식량을 사기로 미리 계약을 맺거나, 병력을 지원하지 않는 대신에 군자금과 식량을 지원하는 대영주 등이 식량을 챙겨다주는 식이며 그러한 계약을 명시한 계약서가 왕실 서고 등에서 흔히 발견된다. 물론 이 방식은 무수한 장애가 있어서 여러가지 이유로 보급이 의도치않게 중단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일단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식량 보급의 품질은 당시 기준으로 퍽 풍족한 편이었다. 중세 시대의 군인은 다들 전문 군인이기 때문에 계약에서부터 식량의 질과 양을 깐깐하게 따지는 편이었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희멀건 꿀꿀이죽을 먹는 삶을 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은 전황이 최악의 사태로 다다를 때에 한정되며, 그쯤 되면 탈영이 일상다반사인 상태다. 중세 군대에는 항상 며칠에서 몇주의 식량을 쌓은 짐수레가 잔뜩 따라다녔다. 자기 등짐에 진 것에만 의존한다느니, 항상 약탈로 채운다느니 하는 것은 되려 근대적인 현상이었다. 15세기 말 독일 기록에는 보병 1만2천명을 위해 650대의 짐수레가, 3천의 기병을 위해 300대의 짐수레가 따라붙었다고 한다. 독일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국가들 역시 이러한 보급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600명으로 구성된 주둔부대의 6개월치 식량 보급 기록을 예로 들어보자. 60톤의 밀이 들어가서 1/3이 비스킷으로 굽고 나머지는 갈아서 밀가루로 사용했다. 콩과 완두콩은 42톤, 와인은 105갤런짜리 큰통으로 두 통, 식초는 두 통, 기름 1통, 버터 1통, 소금 1톤, 각종 양념과 향신료 50파운드, 아몬드와 사프롱 같은 것도 몇 파운드 넣어주기로 돼 있고, 황소 100마리, 양 160마리, 가금류는 원하는 만큼, 장어 1천마리, 청어 25통. 이 기준과 여러 기록을 통틀어서 볼때, 중세 시대의 군인들의 하루 식단은 빵 1.5kg 가량, 신선한 고기 1파운드 가량에 달걀이나 염장 고기, 치즈와 버터 약간과 채소를 포함해 하루 4천2백~5백 킬로칼로리 가량으로 계산된다. 이는 현대 성인의 평균 식단의 칼로리 2배에 가까운 양이고, 현대 군인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다. MRE로 3끼를 먹으면 3600킬로칼로리 가량 된다. 재밌게도, 전투중인 현대 군인들은 하루에 최대 4200킬로칼로리를 소모한다고 하니 의외로 딱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런 보급 계획이 항상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중세 군인들이 잘 먹었고 보급에도 상당히 신경썼다는 것을 알수 있다. 식량을 몰고 가는 것은 말 그대로 식량이 될 가축들을 말하는 것으로 돼지, 소, 양, 닭, 염소, 기타 등등의 살아있는 짐승을 부대가 몰고 가는 것이다. 신선한 고기를 냉장 보관할 수도 없었으니 살아있는 상태로 몰고 다니다가 필요할때 도살하는 것은 동서양 공히 이루어진 형태로, 중세 군대의 진격 속도가 미친듯이 느린 이유 중 하나였다. 중세 군대에 요리사가 항상 붙어있거나 단위 병력 수준에서 조리가 이루어진 것 역시 식량이 조리된 상태로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은 그를 따라다니는 요리사가 조리를 했고, 일반 병사들도 밀가루, 고깃점, 물고기, 야채, 과일 등의 원재료를 일정량 보급을 받아 5~10여명 수준의 배식조 단위로 직접 조리해 먹었다. 조리를 전담하는 취사병이 생긴 것은 상당히 근대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만약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비상 사태가 나거나, 취사할 여건이 전혀 안 되거나, 급히 부대를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밥도 못 먹고 급하게 이동하거나 뜻하지 않게 건너뛰는 상황이 일상이 되어버린다. 당연히 병사들은 불만 폭발. 2.2 중세 이후 중세까지도 급하면 밥도 못먹고 전선으로 내몰리는 병사들의 실정은 똑같았다...그나마 병사들이 각각 알아서 자기가 비상시 먹을 식량을 챙겨다니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다. 중세시대의 전투식량중 유명한 것은 비스킷인데, 과자로서 발전된 지금의 비스킷이 아니라 그냥 밀가루을 돌덩이가 될 때까지 구워서 바싹하게 말린 후에 몇달 지나서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여러모로 사람이 먹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덕분에 너무 단단해서 그냥 먹으려고 하면 이빨이 안들어가는 것은 기본이고, 쪼개먹으려고 돌에 내려치니 돌이 쪼개지는 등 거의 벽돌 취급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하드택이나 비스킷 덩어리로 적병사의 머리를 후려쳐서 죽인 적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기지를 급습한 한 독일 게슈타포가 깜짝 놀란 레지스탕스가 본능적으로 방어를 위해 던진 바게트에 맞아 사망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그냥은 못 먹고 술이나 음료수에 푹 적셔셔 부드럽게 만들어서 먹거나 다른 요리를 할 때 부숴 넣어 먹었다. 사실 갓 만들었을 때는 단단하긴 해도 그럭저럭 씹을 수 있을 정도이지만, 이렇게 만든 비스킷을 실제로 꺼내 먹을 때는 최소 수개월에서 몇 년이 지난 후이기 때문에 건조 끝에 엄청나게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한가지 재밌는 점은, 그렇게 딱딱하게 만들어도 바구미 따위의 벌레는 이를 파먹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벌레가 먹은걸 좋아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내부를 벌레가 이리저리 파먹으면서 구멍을 내고 다녀 단단한 정도가 줄어들기 때문...때문에 먹기 전에 테이블이나 기타 단단한 물건에 두들겨서 벌레를 기어나오게 하고 먹는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그런데 상황이 극단적으로 처절하다면 그 벌레도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그나마 해군 함선같이 배 안에 동물을 키울수 있는 공간적 여유가 있을 경우 그 벌레들을 모아뒀다가 이후 닭에게 먹여 키워서 나중에 닭을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어쨌든 보존성이 너무 좋은 탓에, 영국의 포츠머스 박물관에 가면 넬슨 시대의 전열함 빅토리 호에 보급되었던 비스킷이 아직도 멀쩡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짐을 줄이고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물은 끌고 가지만 조리기구는 챙겨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짐승을 잡아서 그 생가죽을 솥 삼아서 걸고 그 안에 물과 고기를 집어넣어 삶아 먹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알다시피 물이 끓는 동안은 그릇은 태워먹지 않으므로 종이곽으로도 물을 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방식은 금속기를 사용하지 않은 문명의 경우, 가죽 냄비에 달군 돌을 넣는 방식으로 국물 요리를 끓여먹는 조리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잘만 활용하면 어느 정도 사람이 먹을 음식이 나온다. 단, 이런 식으로 조리하면 그야말로 생가죽의 누린내가 몽땅 음식에 옮겨붙는데, 험악한 전장에서 제대로 된 조미료 따위를 보유할 확률이 적기 때문에 특이한 취향이 없는 한 맛은 안드로메다로 간다. 몽골 제국군은 겨울이 가까워지면 기르던 가축을 잡아서 말려 "보르챠"라고 부르는 육포를 만들었다. 몽골인은 전통적으로 유목을 하는데, 겨울이 되면 풀이 나지 않으니 많은 가축을 건사할 수 없으므로 겨울을 나기 어려워보이는 약해보이는 가축을 도축해서 겨울 식량으로 만들어두는 것을 일상적으로 행했다. 그렇게 만든 보르챠는 보통 빻아서 가루를 낸 다음 신축성이 뛰어난 가축의 방광에 넣어서 보관했다고 한다. 몽골군은 이를 비상식량으로 활용해서 더운 물에 조금씩 풀어서 식사를 해결했다. 다만 이건 몽골군의 입장에서도 비상식량으로 쓸 정도로 맛이 없기 때문에 편리성만 생각하고 이걸 도입하려던 다수의 군대들이 병사들의 항의에 직면하게 된다. 심지어 보르챠를 지급받은 부대는 보르챠는 그냥 방치하고 다른 곳에서 음식을 조달해 먹을 정도로 정말 맛이 없었다고. 바이킹들은 대구 말린것을 배안에 널판지처럼 켜켜이 재어놓고 그것을 전투식량으로 삼아 멀리 항해를 다녔다. 물론 대구 말린 것도 요즘의 어포처럼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곤봉으로 쓰면 딱 좋을 정도로 딱딱하고 짜다. 그래서 이건 비상식량으로 쓰고 약탈지에서 약탈을 해서 식량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슷한 육포 계열로 예를 들자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만드는 페미컨 역시 이에 해당한다. 육포와 견과와 과일 말린 것을 빻아서 기름과 딸기와 꿀 등으로 뭉쳐 굳혀 말려 만드는 장기보존 가능한 식량이다. 역시 현지인이 아니라면 누린내 나는 기름덩어리를 그냥 먹는 맛이 나는 것에 가깝게 맛이 없다. 하지만 극지탐험등에도 쓸만하기 때문에 개량을 거쳐서 이것은 지금도 에너지 바 등으로 만들어져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전통적인 전투식량을 들자면 찐쌀과 인절미, 미숫가루등이 있다. 보통 군량미를 짊어지고 다니기 버거운 전투 직전에 쌀로 인절미를 해서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나마 맛도 좋고 배도 차고 부피도 작으니까. 다만 밥보다 떡이 품이 많이 들어가는데다가 완성품도 요즘 먹는 부드러운 인절미를 생각하면 안되고, 그야말로 딱딱하게 굳은 떡이라 물 없이 먹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의외로 저장기간이 엄청나게 짧아서 앞서 이야기했듯이 전투 직전에나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북어가 전투식량으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 간장을 보존하는 특이한 방법이 있었는데 베를 이용한 것이었다. 맑은 장에 베를 담갔다가 볕에 말리기를 수십 차례 반복한 무명베를 식사할 때 물에 풀어 우려 마시도록 하라는 기록이 존재한다.[3] 또 여기에는 거위알 만하게 뭉쳐 만든 소금을 불에 태워 단단하게 만든 뒤 두세 개씩 휴대하도록 하면 급할 때 유용하다는 기록도 있다. 근세까지 일본군은 간반이라고 불리는 쪄서 말린 밥을 전투식량으로 가지고 다녔다. 그대로 오도독 씹어먹거나, 여유가 있을 때는 물에 불려 밥이나 죽을 만들어 먹었다. 주먹밥은 생각보다는 전투식량으로 활용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쌀로만 만들어져 소금으로 간을 한 형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3 근대 전투 식량 전쟁이 이전시대보다 좀더 기동력 있고 광범위 하게 이뤄지기 시작하자, 이제는 병사들에게 먹을 전투식량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점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전투식량의 등장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로, 프랑스 정부가 대량의 음식을 값싸게 보존하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1만 2천 프랑의 상금을 걸고 공모한 것에 1809년 니콜라스 아페르가 병조림을 응모하면서 시작되었다. 병 안에 넣고 조리한 음식물은 병의 봉인이 새지 않는 한 썩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유리병 안에 음식을 봉하는 법을 개발한 것이다.[4] 어쨌든 병조림은 효과적인 수단이긴 했으나 유리병이 잘 깨지는 문제가 있었고, 이 문제는 영국인 피터 듀란트가 1810년에 원통형 주석 캔[5]으로 통조림을 만드는 법을 특허내면서 해결되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캔따개는 30년 후에나 개발됐다! 그 때까지 병사들은 총검으로 쑤시거나 돌멩이로 후려쳐서 터트려서 먹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통조림 기술이 덜 발전해서 제조 과정이 노동집약적이었고 하나 만드는데 여섯시간 정도 걸릴 정도로 느린데다 대량 생산과 처리가 용이치 않았기 때문에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막상 거의 빛을 보지 못했고, 민수용으로도 상당히 비싼 식량으로 여겨져 19세기 초에는 중류층 급의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초기에 봉인용으로 사용하던 납 때문에 납 중독 문제도 심각했다. 본격적으로 통조림이 발전하게 된것은 기계식 캔 생산 시스템이 등장한 19세기 중반부터였는데 마침 크림 전쟁이나 미국 남북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같은 19세기의 굵직굵직한 전쟁 덕분에 통조림의 수효가 커졌고, 전쟁이 끝나고 나자 도시 노동계층을 위해 매일 시장을 보러 가지 않고 집에 쌓아둘 수 있는 값싸고 보존성이 있는 식료품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군용 통조림 생산에서 민수용 통조림 생산으로 전환하면서 값싸고 흔한 통조림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통조림의 최전성기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였다. 수백만명의 병사를 먹이고, 참호전 환경에서도 보관이 용이하고, 머나먼 후방에서 운송해 오는데도 썩지 않는 이상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다보니 저질의 싸구려 식품으로 만든 통조림을 대량 생산한데다 식단의 가짓수도 적었던지라 통조림에 질린 병사들이 사제의 일반식을 구해다 먹는 일이 많았다. 특히 매커너키사의 통조림 스튜가 유명했는데, 따뜻하게 먹으면 먹을만 했지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따뜻하게 먹기 힘들때가 많았고 그럴땐 진심으로 사람잡는 맛이었다고 한다. [6] 여튼 이 시기부터 그 때문에 모든 식단을 통조림하자는 취지로 가능한 모든 식품을 통조림에 넣는 짓을 하기 시작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투식량이 이러한 형태의 전투 식량이었다. 고기부터 야채, 크래커, 스프레드 등등 다양한 종류의 식품을 다양한 조리법으로 메뉴를 나누어 제공하면서 통조림 식량의 종류가 다양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2.4 현대 2차 세계대전 즈음부터 각국은 군인들이 따로 힘들게 조리할 필요가 없는, 시간과 공간과 기타 제약이 거의 없이 병사들이 언제든 먹을수 있는 식량개발에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사실상 현대적인 전투식량의 개념은 이때 바로잡혔다. 2차 대전 때에 사용된 미군의 C-Ration(씨 레이션)이 가장 유명하기도 하다. 식단의 다양화는 현재진행형으로, 21세기에 들어서도 병사들이 맛없다고 악평하는 식단은 개선해주려 애쓰고 있으며 종교적·문화적 이유로 특정 고기를 못먹는 병사를 위한 식단도 제공할 정도. 아무래 그래봤자 짬밥 맛은 싸제밥보다 못한 건 사실인듯.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서는 금속 캔도 여전히 사용되지만, 우유를 넣기 위한 진공 살균 포장법이나 레토르트 포장법, 동결건조법 등이 등장하면서 MRE 같은 비닐팩에 든 식량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이쪽이 값이 싸고, 부피도 작고, 녹슬지도 않고, 날카로운 것에는 조금 약하지만 던지는 정도의 취급 중에 일어나기 쉬운 충격에는 훨씬 강한 편이고, 끓는 물에 넣어서 데우기도 좋고, 뜯어서 먹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금속 캔을 고집하던 국가들도 슬슬 진공 포장 팩으로 전환중이지만, 금속 통조림은 식량의 원형이 보존되기 좋고, 모닥불이나 고체연료에 그대로 올려놓고 곧장 데울수 있다는 나름의 장점이 있어서 유럽쪽 전투식량에서는 계속 애용하는 것 같다. 사실 금속 통조림의 경우 보관만 잘 하면 굉장히 오래 가는데, 한 미군 대령이 베트남 전쟁 당시 퇴역할 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껴놓은 1969년산 파운드 케이크를 2009년에 퇴역식 하면서 따서 먹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유튜브 동영상 3 전투식량의 의의 역사적으로도 전투식량은 전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행군 속도. 위에서도 몇번씩 언급은 됐겠지만 한번 더 설명하자면 몇 시간, 며칠, 몇 달을 행군하는 군대에 식사는 이동을 지체시키는 큰 요소 중 하나였다. 물자 이송이나 보급도 문제지만 조리 및 식사에 할애되는 시간, 그리고 수많은 군인이 멈춰서 식사할 공간 등등 배고픈 군인들의 행복한 식사시간을 방해하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다. 중세의 전투에서 군대의 이동이 느려터졌던 이유도 식사이며 몽골이 전세계를 몰아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도 간편한 전투식량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물건보다는 일반적인 식사가 엄청나게 나았으면 나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기에 웬만한 나라의 군대는 장병들에게 최대한 일반적인 식사를 주려고 노력하지만, 치열한 전장이나, 헬리콥터나 수송기 안이라면 이런 식사를 제대로 제공하기 힘들며, 이런 식사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재료의 보관에도 애를 먹는다. 따라서 급한 상황이라면 휴대가 간편하면서도 오랫동안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먹거리에 대한 필요가 있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전투상황 아래에 있는 병사들에게는 유일무이한 위락의 한 종류로서 취급되기도 한다. 따라서 전투식량의 양과 함께 질 역시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이다. 사기와도 직결되기도 한다. 당장 총알이 날아오고 포탄이 터지는 거친 야외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생고생하는 와중에 따뜻한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지기 마련인데 식사가 매일 질리도록 먹은 맛없는 밀가루덩어리라면? 매일매일 고생해서 공부하는데 학교급식에 고기가 올라오지 않는다면?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량생산/장기보존 등의 요소를 갖춰야 하기에 질은 아무래도 무시되기 쉬운 요소. 따라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전투식량이 아닌 일반 취사를 거친 식사를 병사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투식량은 어디까지나 전투 중에나 제공되는 수준이 적절하다는 얘기. 전투식량은 야전에서 빨리 먹을 수 있다는 점과 양에 비하면 효율적인 열량 섭취에 치중했기 때문에 맛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당연히 오랫동안 이것만 계속 먹으면 몸에도 별로 안 좋다. 원래 요리가 그럭저럭 제대로 맛을 내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조리시간이 요구되는데 총폭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는 그런 시간 자체가 나지 않는다. 극단적인 상황[7]을 들자면, 몇 시간 동안 전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참호 속에서 먹을 수 있어야 할 정도. 따라서 아예 차가운 상태로도 먹을 수 있게 만들며, 가열이 필요한 경우는 전투식량을 넣은 팩 자체가 자체 발열이 가능하게 만들거나 고체연료를 첨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덤으로 폭발적인 칼로리 소모가 일상적인 전투 중인 병사를 위한 식단이기 때문에 평범한 활동을 하는 사회인이 먹기에는 칼로리가 너무 높다. 반대로 전투를 지속적으로 겪는 병사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소화능력까지 저하해서 전투식량으로도 소모되는 에너지를 감당 못해서 살이 쭉쭉 빠지는 일이 자주 있다. 때문에 후아바 같은 에너지바나 간식으로 열량을 보충해준다. 일반 군인 이상으로 활동하는 특수부대원이나 PMC들은 몸이 축나는게 너무 심하고 일상적이라서, 보충제와 스테로이드 등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한국 육군의 경우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제공하는 칼로리가 3000 Kcal 정도로 일반 성인 남성이 하루에 2400 Kcal를 정도를 섭취하는 것에 비교하면 어느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한지 감이 잡힐 것이다. 이런 걸 맨날 먹고도 살이 빠져서 나온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한국 전투식량 한 끼의 경우 기본적으로 1000Kcal 정도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걸 일반인이 3끼씩 꼬박꼬박 먹는다면 육체 노동직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체중이 늘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건조되거나 염분 비율이 높거나 등등 소화에 그리 도움되는 형태도 아니라 변비에 시달리는 일도 흔하다. 이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비를 유발시키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화장실에 갈 때만큼 기습에 취약한 상황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화장실에 갈 필요성을 없애버리기 위한 취지라는 음모. 이 때문에 MRE의 별명 중 하나가 뒤로 나오지 않는 식사(Meal Refusing to Exit/Excrete).(...) 심지어 MRE에는 이것만 몇 주 이상 먹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을 정도. 물론 여러 나라의 군대도 바보는 아니고 병사들을 배려하기 위해 전투식량을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만들어 보려고 최대한 노력하지만 이게 그리 쉽지가 않아서, 매우 잘해봐야 그저 그런 맛이 나오는게 고작이라 보통은 '이딴 걸 누가 먹어' 따위의 평가나 나오고 만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투식량에는 열량증가를 겸해서 맛의 개선을 위해 감미료를 넣거나, 사탕이나 초콜릿 등의 맛있는 물건을 같이 넣는다. 몇몇 전투식량 상자에는 담배도 들어가 있다. 대개 차게 먹을 수 있도록 기본조리된 상태로 나오지만, 아무래도 음식은 따뜻해야 제맛이니 데워먹을수 있게 발열히터나 에스빗 고체연료가 동봉된다. 타바스코 소스, 소금 같은 조미료도 포함되고, 전장의 열악하기 십상인 환경을 고려해서 수질 정화용 알약까지 포함되는게 보통이다. 맛이 없다고 악평받는 메뉴는 주기적으로 퇴출하고 신 메뉴를 넣기도 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전투식량은 미군이 개발한 MRE. 미군은 전투 식량이나 그에 준하는 군용 식량의 구분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미국, 한국 등 각국에서는 패치 형태로 붙이는 전투식량을 최종목표로 연구중이다. 연구가 그렇다는 것이지 그런 형태가 실제 식사를 대체할만한 효과가 있을까는 아직 의문. 몇십년 전만 해도 21세기에는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자동차를 대신해서 도로가 고속으로 이동할 거라든지, 가정용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든지 제트팩을 타고 출퇴근한다든지 가정용 메이드 로봇이 보급된다든지 하는 희망적인 SF적 예상이 있었지만 그에 따른 기술적인 발전이 인간의 상상을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은 시궁창이듯이, 패치 형태의 전투식량도 주식으로 삼을만한 것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병사에게 식사의 즐거움과 포만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나온다면 전투식량이 아닌 비상식량의 위치를 차지할것이다. 4 민간에서의 전투식량 유통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에서 어린이들이 미군을 쫓아가며 'Give me, give me. C-ration please.' 하는 것은 일종의 클리셰.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해방 직후와 6.25전쟁 시기에 우리의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들 또한 이런 힘든 시기를 겪으셨다. 이렇게 미군에게 받은 C레이션을 가족과 나눠먹기도 했지만, 암시장에서 널리 유통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C레이션의 가격은 쌀 한 되 였다고 한다. 용산쪽에선 슈퍼마켓 등지에서 미군의 전투식량을 팔기도 한다. 각종 물건들의 보고인 남대문 시장에도 찾아보면 박스째로 파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들 대부분이 불법이지만, 유통기한은 지나지 않은것들이다. 일단은 미군 PX에서 내보내는것들이 주류.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될 것이 미군 PX에서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미군에서 그냥 방출되는 MRE들은 전부 다 인스펙션 데이트, 즉 기본 유통기한이 지나서 내보내는 것들이다. 국군은 기본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시점에서 다 먹어치워 없애라고 소대에 던져주지만, 돈많은 미군은 상큼하게 내다버리기 때문이다. 즉 MRE를 입수하면 유통기간 임박이나 약간 유통기간이 지난 물건을 손에 넣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MRE를 저온에서 보관하면 보존기간이 엄청나게 길긴 하며, 심지어 10년 넘은 MRE도 먹을만한 상태인 것이 있긴 하다. 그러나 생산한지 2~3년, 심지어 5년 넘은 것을 제돈주고 사먹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민간의 일반식량이라면 장기보존 가능한 통조림도 제조된지 얼마 안된 것을 찾는 것이 상식이며 유통기한이 다돼가는 것은 찝찝해서라도 안먹는데, 희한하게도 전투식량이라는 딱지만 붙여놓으면 상식이 마비되는지 5년이 넘은 것을 제돈주고 사서 냠냠 맛있게 먹어댄다. 괴식리뷰? 국내법상 군수품의 민간유통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남대문이나 군부대 근처에서 민간에 유통되는 MRE는 엄밀히 말해 불법이다. 한국 전투식량은 민수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만 바뀐 전투식량을 팔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처음부터 민수용으로 포장을 바꿔 생산하는 경우는 합법이다. MRE 역시 군수품으로 만든 것의 민간 유통은 불법이기 때문에, 미군에 MRE 군납하는 회사에서 포장을 바꿔 민수품으로 판매하는 것이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민간에 유통되고 있다. 다만 한국에 돌아다니는 MRE들은 전부 미군부대에서 유통기한이 넘은 것을 방출시킨 것을 잡상인들이 땡겨와서 판매하는 것이 대부분이라서 불법인 것이다. 만약 어느 용자 유통업체가 미국에서 소파코, 아메리퀄 에이팩, 엠알이스타 같은 민수품 MRE를 정식 수입해서 판다면 미군전투식량과 똑같은 것을, 유통기한도 지나지 않은 것을 합법적으로 팔 수 있다. 군용 전투식량의 추억을 찾는 사람, 그리고 조리가 간편한 장점으로 등산용 등으로 찾는 사람을 위해 군용 전투식량의 민수용 버전이 시중에 합법 유통되고 있다. 주로 2형 동결건조식 김치볶음밥, 쇠고기 비빔밥, 잡채밥 정도지만, 가끔 1형이나 3형도 보이고 전투식량의 이름을 달았을 뿐인 뭔가 묘한 간편식이나 도시락도 판다. 2형 동결건조식의 단가는 불로(군용 납품 회사) 정품이 개당 3.5천~4천원 정도, 경쟁사의 제품은 3천원 정도. 다만 이렇게 가격이 비싼 주제에 초코볼이 없다. 사실상 민수용이 아닌 한국군의 전투식량을 구매한다는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아주 길이 없는것은 아니다. 매년 계룡시에서 실시하고 있는 군 축제를 관람하게 되면 거기서 합법적으로 군용 전투식량을 구매할 수 있다. 그 외에 미군의 MRE는 위에 설명한 남대문이나 그 외 풍물시장과 의정부 혹은 동두천 등에서 오프라인으로 즉석에서 구매할수 있지만 MRE가 지겹고 뭔가 독특한 다른나라의 전투식량이 먹고싶다면 진리의 eBay를 이용하면 된다. 물론 대다수의 국가들은 군수품인 전투식량의 해외반출이 금지지만, 어쩐일인지 별의별국가들의 전투식량들이 버젓이 판매되고있다.(....) 5 각국의 전투식량 서양의 전투식량은 브렉패스트, 런치, 서퍼의 하루 세 끼니가 한박스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메뉴 수가 10여가지 안쪽으로 적어보여도, 아침 점심 저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실제 식단의 가짓수는 생각보다 꽤 많다. 다만 한 박스 무게가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주둔시에나 적합하다. 미군의 MRE는 한 팩이 한끼니지만 부피가 장난이 아니라 국군처럼 군장에 전투식량 집어넣으면 사흘치도 못집어넣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그도 그럴것이 차량화, 기계화가 잘 된 군대다보니 식량을 싸짊어지고 다닐 이유가 없기 때문. 때문에 식량을 많이 휴대할 필요가 있을 때엔 포장지를 뜯고 필요없는 부식들을 빼서 최대한도로 부피를 줄여서 갖고 다닌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전투식량은 프랑스제와 이탈리아제, 그리고 스페인제라고 한다. 캐나다 IMP도 사제 식량에 가까운 맛 덕분에 MRE보다 맛있는 식량으로 평가된다. 레이션에서도 국가적인 특징을 엿볼수 있다. 전투식량/각 나라 군대의 전투식량 참고. [1] 물론 아무리 맛있는 전투식량이라고 해도 바리에이션이 고작 두세 종류에 불과하기 때문에 딱 5일만 삼세세끼 로테이션으로 먹어보게 되면 참 밥먹기 싫어진다(...) [2] 예를 들어 2차세계대전 중 D-레이션으로 지급된 허쉬 초콜렛은, '감자보다 좀 나은 맛'을 내게 만들어 달라는 수뇌부의 주문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연 텁텁하고 맛없다는 악평들이 자자했으며, 먹을것이 없을 때를 대비한 비상식 또는 음식을 삼키기 힘든 부상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 되었다. 사족으로 6 25 전쟁을 겪은 세대는 이 초콜렛을 접했기 때문에, '최근에 나온 초콜렛'은 당시 먹었던 '그 추억의 맛'이 안 난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3] 조선 영조 대 정상기(1678~1752, 지리학자)의『농포문답』 [4] 하지만 왜 썩지 않느냐의 이유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50년 후 파스퇴르가 음식물 부패에 세균이 작용하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밝혀진다. [5] 사실 처음 개발되었을 당시에는 '캐니스터'라고 불렀는데, 그 명칭보다 약자인 '캔'이 더 널리 쓰이면서 캔이 대표적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6] 이에 관해선 존 엘리스가 쓴 참호에서 보낸 1460일을 참고하길 바란다. 아주 자세하고도 실감나게 써있다 [7] 타라와 전투가 좋은 예가 된다. 이 때 상륙한 미군 병력들은 3일치의 전투식량을 군장에 잘 넣어 갔지만, 전투개시 48시간이 지나도록 전투식량은 입에도 댈 수 없었다고(…). 타라와 전투, 특히 초반부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8] 혹은 트레이 레이션, T-레이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