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23년 제가 정년퇴직을 하고 첫해 나름 부지런히 여행도 다니고, 사진도 찍고하여 열심히 살고 있다는 흔적이라고 할까, 자취를 남기기 위해 내 블로그에서 작성한 글을 복사한 것을 게시 하였는데, 지금 부터는 2024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그렇지만 '24년에는 2월 부터 다시 직장인으로 조그만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보니 작년과 같이 활발하게 블로그 작성을 못하고 있지만, 나름 부족한 시간을 쪼개어 작성한 글입니다.
'23년에 작성한 것보다는 양과 질에 있어서 미흡 할 수 있으니, 감안하고 봐 주시기 바랍니다.
여행공감에서 장충단비 - 수표교 - 한양도성 - 남산공원을 다녀왔습니다.
장충단비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에 의해 시해 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이경직, 홍계훈 등 많은 장병들이 일본인을 물리치다가 죽음을 당했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종황제가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짓는다. 일제 강점기,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당은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장충단비는 전해지고 있다.
장춘단비
장충단비 안내
수표교
원래는 청계천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계공사에 의해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5년 지금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처음 수표교가 세워질 무렵에는 근처에 말과 소를 매매하는 마전이 있다하여 마전교라 불렸으나, 세종대왕이 다리 위에 강수량을 재는 양수표를 세운 후부터 수표고라 불리고 있다.
수표교 안내
수표교
한양도선 내부 순설길
한양도성
꽃눈과 잎눈을 설명해 주셨는데.
남산공원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의 상징으로서 높이는 해발 270m로서 본래 이름은 인경산이었으나 조선조 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 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고 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리고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으로 불렸다.
1940년 3월 12일 공원으로 지정하여 1968년 9월 10일에 개원하였으며 1991년부터 8년간 “남산제모습가꾸기” 사업으로 공원 내 부정적 시설 89동을 이전하고 야외식물원을 조성하는 등 중구 예장동, 회현동, 용산구 한남동 일대를 대대적으로 복원, 정비하여 시민들에게 휴식과 맑은 공기를 제공하며 여가생활의 중심지로 거듭난 공원이다.
남산공원내 한양도성
한양도성
1395년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이성계는 도성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를 위해 도성건축 담당기구인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 심덕부의 감독하에 건설했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1](肅淸門: 북대문)·흥인문(興仁門: 동대문)·돈의문(敦義門: 서대문)·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4대문과 혜화문(惠化門: 동소문)·광희문(光熙門: 시구문)·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2]
초축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태종, 세종, 숙종 연간 등의 여러 시기에 걸쳐 유지보수된 흔적이 남아있으며 그에 따라서 성석을 쌓은 모습이 차이가 있다. 그 양상의 변화는 태조 시절에는 일정한 패턴 없이 자연석을 쌓는 모습에서, 점차 정방형(정사각형)의 석재로 가공해서 쌓는 방법으로 변화하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정교한 정방형의 형태가 완성된다. 북악산 안내소의 팜플렛에 이러한 시대별 축조 차이가 설명되어 있으며, 성벽을 조금만 살펴보면 쉽게 볼 수 있으니 알아두면 투어의 소소한 재미가 될 것이다.한양도성 성벽의 시대별 쌓기 변화 성벽 바위에는 그 구역 축성을 담당한 고을과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놓아 결과에 대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성벽의 높이는 현재 소실된 높은 구간은 10 m가 넘었지만 낮은 구간은 5m 남짓이었고 해자조차 없었기 때문에 전시에 방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적이 한양까지 쳐들어오면 한양을 버리고 도주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모두 그러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에도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도성은 전쟁이나 내란 방어용 성곽이라기보다는 왕권의 상징이란 의미가 더 컸고, 실용적 시설이라는 측면보다 인의와 예를 강조하여 평온을 기원하고자 했던 관념적으로 운영된 성격이 컸다고 설명한다.[3]
여러 전란을 겪는 동안 한양 방위체제는 계속해서 개편되었다. 또한 한양도성이 토성이 아닌 석성이 된 이유는 조선 전기 동아시아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 석성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했을 때 사대문을 제외한 대부분 성곽 축성기간이 49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군사적으로도 한양도성은 처음부터 지키기 힘든 곳이다. 규모가 너무 커서 방어하려면 병력이 많이 필요하고(모든 성벽을 완벽히 방어하려면 5만명 이상의 정예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5만명의 정예병력이 있다면 애초에 더 나은 선택지가 많다.), 숭례문, 흥인지문 일대는 완전한 평지라서 지형상 불리하다. 게다가 성 바깥에 잇는 안산, 인왕산, 남산, 북한산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성 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감제고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 자체의 방위력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서 성벽을 요새화하고 대규모 상비군을 주둔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조선도 한양도성 자체의 방위력은 최소화하고 대신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같이 인근의 요새화한 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사용하는 방위전략을 세운 것이다
왼쪽은 초기, 오름쪽은 숙종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각자성석
한양도성을 따라 걷다 보면 눈길을 끄는 성돌이 있다. 성을 축조할 당시 공사 담당자의 이름, 직책, 담당 지역 등을 새긴 것이다. 이를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돌)’이라 한다. 지금까지 297개가 발견됐다. ‘태조실록’에 “경상·전라·강원도와 서북면 안주 이남과 동북면 함주 이남의 민정(民丁·백성) 11만8070여명을 징발해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성터를 측량해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했는데, 백악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백악 서쪽으로 조자(弔字)에서 그치게 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한다. 축성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97개로 나눠 책임을 지게 한 것이다. ‘조선판 공사실명제’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성 개축 공사에 착수한 뒤 왕이 “도성을 수축한 후에 돌 하나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 감독관에게 보수하게 하고, 모두 논죄할 것”이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작자성석
얼어붙은 남산공원길
올해 첫 여행공감 투어
그동안 여행공감을 이끄시는 회장님이 자견에 갑자기 그만 두시는 바람에 나인섭 회원님이 받아서 평소에 숲해설사로 활동 하신 것이 있어, 오늘 첫 문화해설이라 지난주 금요일 혼자 사전 답사까지 하면서 준비를 하였다 합니다.
총 6명의 화원이 참가한 이번 투어. 월요일이라 문화해설사가 없어 자체적으로 해설을 해 주신 나인섭회원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