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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문화재답사 스크랩 죽어서도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흥덕왕릉
청목/金永柱 추천 0 조회 56 13.10.14 22: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죽어서도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흥덕왕릉

 

 

흥덕왕릉

 

경주에 있는 수많은 고분 중에서 신라왕의 이름이 붙어있는 릉은 모두 38기다.

그러나 이 가운데 무덤 주인이 정확하게 밝혀 진 것은 단 2기뿐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릉과 흥덕왕릉이다.

서악동 무열왕릉은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씨가 비석의 이수에 적혀 있고, 흥덕왕릉은 1977년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시 상당수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었는데 비편 중에서 '흥덕'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왕릉의 주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편에는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했다(陵在安康北比火壤與妃昌花合葬)”라고 해서 왕릉의 현재 위치가 명확아게 적혀 있다.

따라서 흥덕왕릉은  당시의 능묘제도의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상을 보여 줄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신라의 왕릉 중에서 각종 문헌연구를 통해 주인이 '거의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 역시 5기 밖에 없다.

양북 봉길리 문무대왕릉(대왕암)과 낭산의 선덕여왕릉, 원성왕릉(괘릉), 조양동 성덕왕(33대), 동천동 헌덕왕(41대)등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구체적 장소가 명시돼 있어 확실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외 나머지 31기는 예부터 왕릉으로 구전되어온 곳, 또 조선시대 박씨문중과 김씨문중이 합의하여 왕릉으로 억지 지정한 곳으로,  결정적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거나 연구결과 사실과 다른 곳이 많다

 

왕릉은 아니지만 김유신장군의 묘역도 사실이다 아니다를 두고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석인상이 돋보이는 흥덕왕릉

 

흥덕왕릉은 경주 북쪽 안강읍 육통리에 있다. 신라왕릉은 주로 경주시내 주변이나 또는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모여 있는데 반해 흥덕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홀로 있다

 

42대 흥덕왕은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수종(秀宗)·경휘(景徽)로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제39대 소성왕, 제41대 헌덕왕의 친동생이다. 즉위 후 당나라 문종(文宗)으로부터 신라왕에 봉해졌으며,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金氏)이다. 장화부인은 자기의 형인 소성왕의 딸이니 조카가 되는 셈이다

(삼국사기에는 장화부인, 삼국유사에는 창화부인으로 기록이 다르다)

 

흥덕왕은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왕'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서해의 해적을 퇴치하고 방어를 하게 하였으며, 사신 대렴을 시켜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께 한 왕이다 그래서 흥덕왕릉을 차 문화의 또 다른 성지를 만들고자  2012년에는 지리산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차 시배지의 야생차밭에서 자란 수령 100년(추정) 된 차나무를 굴취해 흥덕왕릉에 옮겨 심기도 하였다.

 

 

완도의 장보고 동상                                            차나무와 꽃

 

또한 재위 중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삼국사기’ 권33에는 흥덕왕 9년에 입는 것, 타는 것, 그릇, 집 등의 사용에 대해 신분에 따라 차별을 둘 것이고, 이를 어길 시 구법(舊法)에 의해 다스릴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흥덕왕은 관제개혁도 실시했는데, 개혁의 근본취지와 방향은 8세기 중엽 경덕왕 때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했다고 한다.

 

흥덕왕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군주였다. 즉위 직후 고구려 유민 출신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에 갔다가 불경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여러 절의 승려들을 소집하여 그를 마중하였고, 병환으로 몸이 불편할 때는 기도를 하고 150명의 출가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당시 왕족들의 불교에 대한 귀의는 국가 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찰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흥덕왕의 사촌동생인 김균정은 흥덕왕 3년 경북 영일군 신광면의 법광사에 3층 석탑을 건립할 당시 단월로 참여하였다.

김균정은 흥덕왕의 동생 충공(忠恭)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법광사는 충공의 집안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이라고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흥덕왕릉은 합장릉이다. 예순살에 사망한 왕은 유언에 따라 먼저 사망한 장화부인(나중에 정목왕후로 추봉)의 능에 합장하였다. 경주에서 확인된 합장왕릉은 이곳이 유일하며 특히 한 개의 봉분에 두 인물이 함께 묻힌 것도 이 왕릉뿐이다.

 

 

경주의 왕릉 가운데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왕릉들이 더러 있다.

수중릉인 문무대왕릉(대왕암)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의 결연한 호국의지가 서려있는 곳이며,

흥덕왕릉에는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이 묻어난다.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후 곧 장화부인은 세상을 떠난다. 이후 흥덕왕은 10여 년의 재위 기간 동안 늘 부인을 그리워했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왕비를 맞을 것을 청했지만 흥덕왕은 "홀로 된 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서 어찌 차마 무정하게 곧 재취하겠느냐"며 완강하게 이를 거부했다.

곁에는 시녀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환관만을 두었다고 한다.

흥덕왕과 원앙새에 얽힌 일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부인이 죽자 흥덕왕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원앙새 한 쌍을 길렀다. 그런데 어떤 일로 '아내' 원앙새가 죽자 '남편' 원앙새가 슬픔에 잠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흥덕왕은 외롭지 말라고 새장에 거울을 넣어 줬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을 '아내'로 알고 부리로 쪼다가 결국 부리가 깨져 '남편' 원앙새도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흥덕왕릉 주변의 소나무

 

사적 제30호로 지정된 흥덕왕릉은 운치있게 제멋대로 휘어진 소나무들이 한 낮에도 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 숲속에 있다.

사진작가들은 경주 남산 밑 삼릉 일대 소나무 숲보다 이곳에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왕릉 호석과 난간석

 

원형이 잘 보존된 신라의 대표적 왕릉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봉분의 크기는 직경 22.2m, 높이 6.4m의 원형봉토분으로, 규모가 비교적 큰편이다

 

봉분(封墳) 아래쪽으로 1.3m 높이로 판석(板石)을 세워 둘레돌[護石]을 삼고, 판석과 판석 사이에 탱주(伸?)를 세워 판석을 고정하였다. 탱석에는 각각 방향을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판석 위에는 갑석(甲石)을 얹었고, 둘레돌의 주변에 약 1m 정도에 박석을 방사형으로 깔고, 둘레에는 1.9m 높이의 석난간(石欄干)을 돌렸는데, 석난간의 석주(石柱)는 2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실 내지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난간 기둥에는 상·하 2개의 둥근 구멍을 뚫어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었는데, 관석은 모두 사라지고 난간기둥만 남아 있다.

 

둘레돌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40년 전에 조성된 괘릉(원성왕릉)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서쪽을 가리키는 유(닭)상

 

신라왕릉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그 배치형태에 있어서 입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초기에는 얼굴의 방향이 모두 정면을 향했지만(성덕왕릉), 점차 호석을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표현되면서 남쪽에 위치한 말(午)을 기준으로 다른 상들이 서로 바라보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구정리방형분, 괘릉, 진덕왕릉)

그리고 이후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기준이 되는 쥐(子), 토끼(卯), 말(午), 닭(酉)상을 사이에 두고 나머지 상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도상으로 배치되거나, 김유신묘와 헌덕왕릉 처럼 얼굴방향이 한 방향으로 일주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12지신상의 시선 방향

 

흥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은 동,서,남,북의 방향에는 정면을 바라보는 상을 배치하고 양 옆의 상들이 정면을 향한 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십이지신상은 무복(갑옷)을 착용하고 있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 이는 사천왕(四天王)의 권속인 팔부신중(八部神衆)에 속한 권속으로서 외부에서 오는 마귀를 물리치고 불법을 호위하면서, 동시에 방위(方位)를 가리키는 역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석 및 향로대

 

 

능을 지키고 있는 사자상

 

능의 바로 앞에는 상석(床石)과 후대에 설치한 향로대(香爐臺)가 있고, 능을 둘러싼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배치되어 있다.

 

 

동그라미 부분에 왕(王)이라는 글자가 있다

 

사자의 경우,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이지만, 왕릉에서는 능묘를 지키는 진묘수(鎭墓獸)로서, 불탑에서는 사리를 지키는 수호수(守護獸)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이하게도 흥덕왕릉에 있는 사자에서 가슴 앞 목걸이에는 임금 ‘王’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왕릉을 지키는 사자의 위엄성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석인상-무인상                                                        석인상-서역인상

 

능의 앞 남쪽에는 4기의 석인상이 있다. 신라의 왕릉에서 석인상을 좌우로 배치된 곳은  성덕왕릉, 괘릉(원성왕릉) 그리고 경주 흥덕왕릉 등 모두 3기이다. 하지만 현재 경주고등학교 교내에 있는 석인상이 헌덕왕릉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전해지는 것을 고려한다면 4기의 왕릉에 석인상이 배치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분황사의 사자상도 헌덕왕릉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

 

이들 석인상을 살펴보면 모두 무복(갑옷)을 착용한 무인상으로, 머리에는 관을 씌고 있는 공통점이 있어, 

하나의 모범을 보고, 이에 따라서 제작된 인물상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서역인상의 경우는 괘릉(원성왕릉)과 흥덕왕릉에서만 확인될 뿐 다른 무덤에서는 발견이 되지 않고 있다.

 

 

 동쪽의 석인상

 

 서쪽의 석인상

(오른쪽 서역인상이 잡고 있는 것은 칼이 아니고 몽둥이이다)

 

왕릉에 석인을 세우는 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빈번히 인적 교류를 하고 있었던 만큼 신라왕릉에도 자연히 석인이 등장했을 터이고 원성왕 때부터 흥덕왕 때 까지 그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역인상의 반낭 주머니                                              무인상의 갑옷(뒷면)

 

흔히 이 석인상을 문인상과 무인상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으나 문인, 무인의 구별은 조선시대에 와서 확립된 것이고 신라에서는 이런 구별이 없었다. 

무인상이라고 부르는 석인상은 실제로 무기를 들고 있지 않고 엄숙하게 다문 입 위의 팔자형 수염과 턱 전체를 덮고 있는 구레나룻의 모습이 모두 이국적 용모를 가지고 있어 차라리 서역인상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문인상이라고 부르는 석인상도 자세히 보면 앞에는 도포형태의 옷을 입고 있으나 손에는 칼을 잡고 있으며 뒷쪽에는 양당개라는 중국식 갑옷을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한다면 무인상과 서역인상으로 불러야 한다. 흔히 부르던 무인상은 서역인상으로, 문인상은 무인상으로 불러야 옳은 표헌이 되리라본다.

 

 

 

왜 서역인을 수호자로 세웠을까? 하는 물음에 정확한 답을 제시하기는 힘드나. 당시에 이미 신라 도성에는 서역인(위그르인 또는 소그드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고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얼굴 인상, 처용설화의 벽사적 의미, 통일시대 후반기 귀족계급의 반항에 대한 왕권강화 측면 등 여러가지 요인이 어울려진 결과가 아닌가 한다

 

흥덕왕릉의 석인상은 원성왕릉의 석인상에 비해 어깨가 왜소해지고 힘도 빠진 듯 보이며 당당한 질감과 양감이 사라지고 조각 솜씨도 퇴보되어 있다.  탱석과 십이지신상도 도식화와 경직성이 엿보인다.

이러한 조각의 양식은 9세기 중엽 조각의 양식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석인상이 있는 왕릉

 

 석인상이 처음 나타나는 33대 성덕왕의 재위기간이 702년∼737년이고,  마지막 42대 흥덕왕이 826년∼836년이니 약 100년 사이에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릉의 전방의 왼쪽에는 능비를 세웠던 귀부(龜趺)가 있으나 손상이 매우 심하다.  비신(碑身)과 이수는(?首)는 사라지고 없으며, 귀두 역시 잘려나갔고 귀갑과 발 부분도 파손이 심하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이 귀부는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나 조각의 섬세함은 떨어지는 편이다

 

 

 

왕릉의 앞에는 왕릉의 구역을 표시하기 위하여 새워놓은 화표석이 동,서 양쪽에 1기씩 있다

화표석의 윗부분에는 또 다른 장식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사라지고 없다.

 

흥덕왕릉의 구성형식을 보면 봉분 밑의 둘레돌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괘릉(원성왕릉)의 형식을 따랐고, 돌사자의 배치는 성덕왕릉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석인상의 배치는 성덕왕릉, 원성왕릉의 형식과 같다.

 

흥덕왕릉의 배치도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흥덕왕릉 비편
 

 

흥덕왕릉의 12지 탁본

4방향을 가리키는 쥐(북), 토끼(동), 말(남), 닭(서)은 정면을 바라보고

양 옆의 동물은 정면을 한 동물을 향하여 보고 있는 형태이다

 

 흥무왕릉의 옛모습(일제강점기)

 

 

 

 

 

 

 

 

찾아가는 길

 

 

안강에서 기계쪽으로 가다가 약 3km지점 안강북부초등학교 못미쳐에서 좌회전하여 직진한다

마을 초입에서 안내판을 따라 우회전하면 50m지점에 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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