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2003년 월드시리즈에서는 저주시리즈가 열릴 수 있을지가 커다란 화두인 것 같습니다.
95년만의 우승을 노리는 컵스와 85년만의 우승을 노리는 레드삭스 모두 염소의 저주니 밤비노의 저주니 하면서 양 팀을 응원하는 팬들의
가슴을 참 오래도록 응어리지게 만들어왔죠.
하지만 솔직히 레드삭스는 자신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정말 밤비노의 저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떠올릴만한 사건이 몇 차례 있었지만, 컵스는 그저 오랫 동안 우승을 못해봤다는 것
말고는 딱히 팀이 무슨 저주를 받고 있다는 말을 사용하기가 남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컵스가 지난 1908년 이후 95년 동안 한번도 우승을 못해봤지만,
사실 그것은 저주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의 팀 전력 자체가 우승을 할만한 전력이 안되었기 때문이죠.
컵스 못지 않게 오랫 동안 우승을 못해본 시카고 화이트삭스나 팀 창단후 거의 90년이 지나서야 처음 우승을 해본 필라델피아 필리스, 그리고 팀 역사는 짧지만 어쨌든 여지껏 우승 한번 못해본 브르워스나
레인저스 같은 팀이 저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즉 저주 때문이 아니라 전력이 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흔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팬들이 컵스팬들이라고 합니다. 팀 성적이 부진해도 늘상 여유를 잃지 않는다고 하죠. 하지만 저는
이것이 특별히 시카고 사람들의 심성이 좋아서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보다는 너무 오랫동안 패배에 익숙해지다보니 팀이 죽을 쒀도
그런 상황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승부보다는 게임 자체를 즐기는 방식을 터득해버린 것이죠.
하지만 보스톤은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중간중간 침체기도 있었지만, 그들 팀은 언제나 최상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A급 선수들을 수혈해 왔고 늘상 아낌없는 투자를 계속해왔습니다. 그리고 실제 우승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도 여러 번 있었죠.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그것도 ‘저주’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묘한
상황에서 물러나야 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보스톤 사람들의 극성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금방 손에 잡힐 것 같던 월드챔피언의 자리를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서 놓쳐버린 적이 많았으니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1986년 메츠와의 월드시리즈는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이었죠.
시리즈 전적 3승2패로 앞서가는 상황에서 벌어진 6차전 경기, 그 경기만 잡으면 4승2패로 실로 68년만에 월드챔피언이 될 수 있는 기회였고, 실제 연장 10회초 2점을 뽑아 5-3으로 앞서나갈 때는 아무도
보스톤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겠죠.
언젠가 티브이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정말 연장
10회말 2아웃 이후 1루 쪽으로 힘없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땅볼을 가랑이 사이로 골인(?)시키는 버크너의 그 플레이를 보고 밤비노를 떠올리지 않을 보스톤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보스톤은 1918년 우승 이후 1946년, 1967년, 1975년, 1986년 이렇게
네 번 월드시리즈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네번 모두 4승3패로 무너지게 되죠. 두 번은 카디날스에게 나머지는 각각 메츠와 신시네티에게죠. 특히 마지막 7차전에선 꼭 8회나 9회에 점수를 주고 무너집니다.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지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론 밤비노의 저주라는 용어가 나타나게 된 근원이
결국은 양키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보스톤 팬들이 가장
극명하게 밤비노의 저주를 떠올릴만한 사건이 벌어진 것은 바로 1978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정규리그를 대략 5-60여 게임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보스톤은
최강의 전력으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양키스에게 10게임 차로 앞서며 1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와일드카드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보스톤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죠.
그런데 정말 구렁이 곶감 빼먹듯 양키즈가 한게임한게임 게임차를 줄여나가더니 드디어 20여 게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양 팀간 게임차는
4게임차로 확 줄어듭니다.
그리고 펜웨이파크에서 정규리그 마지막 4연전을 벌이게 되죠. 양키즈가 스윕을 하면 양 팀이 동률이 되지만 당시 전력상 그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고 2승2패만 해도 다행이라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흔히들 이 시리즈를 ‘보스톤 대학살’이라는 좀 살벌한 용어로 표현합니다. 당시 보스톤은 양키와의 게임차를 다시 벌여나가기 위해 원투쓰리포펀치를 죄다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지만 결과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양키의 스윕으로 끝나버리고 양팀은 동률을 이루게 됩니다. 보스톤이 어떤 분위기였을지는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죠. 그리고
여기서 얘기가 끝난다면 사실 이 얘기가 그렇게 재밌는 얘깃거리가
되지는 않았겠죠.
양팀은 결국 정규리그에서 똑같이 99승 63패로 동률을 이뤄 펜웨이파크에서 운명의 순위 결정전을 치룹니다. 그리고 보스톤은 8회까지 잘
이기고 있다가, 8회초 시즌 타율 2할4푼대에 홈런을 4개밖에 치지 못한 벅키 덴트라는 아주 평범한 선수에게 역전 쓰리런 홈런을 얻어맞고 결국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양키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물론 그후
양키는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하여 챔피언 반지를 차지하게 되죠.
양키와의 그 처절한 라이벌의식을 감안한다면, 사실 보스톤 팬들에게는 86년의 그 끔찍했던 참사 못지않게 1978년의 소위 ‘보스톤 대학살’ 역시 아주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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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련의 사태로 인해 보스톤 구단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품고 있는 국내팬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병현 선수가 그 극성스런 보스톤에서 맘고생을 심하게 당한다고 생각하는 팬들도 많을 것이구요.
하지만 전 생각이 다릅니다. 평소 풍기던 김병현 선수의 승부근성이나 깡다구를 감안한다면 전 김병현 선수 스스로 메이저리그 그 어느
팀보다도 보스톤에서 선수생활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며 즐거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스톤만큼 우승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지니고 있는 팀은 드물죠. 더구나 거의 100년을 괴롭혀온 밤비노의 저주가 풀리는 바로 그 순간에
보스톤 선수로 뛰었다는 것은 메이저리그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하나의 훈장이 될 것입니다. 여느 월드챔피언 반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무게를 지니게 되는 것이죠.
보스톤으로 이적하면서 분명히 김병현 선수는 그런 목표를 세웠을 것입니다. 밤비노의 저주를 푸는 전사가 되겠다구요.
올해가 될지 아니면 훗날을 기약해야 될지는 모르지만, 저 개인적으론 보스톤에 드리워진 밤비노의 저주를 물리친 자랑스런 전사의 명단에 김병현 선수의 이름이 당당하게 올라가있기를 기원합니다. 누구보다 김병현 스스로 그것을 원할 것이구요.
그래서 트레이드 얘기는 왠지 언론과 팬들의 지나친 오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thesports... oldhouse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