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9- (한.이 석유현장의 추억)

현장사무소는 2층 목조건물로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아래층은 하청업체의 사무실과 창고 등으로 쓰였고 2층에는 토목, 건축, 기계/배관 등 각 공구의 사무실이 있었다. 1979년 그 해에는 큰 태풍이 남해안을 강타했고 우리 현장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현장사무소 바로 앞에는 저장 탱크단지(Tank Farm) 가 있었는데 여름 끝 무렵의 무서운 태풍은 설치 중이던 탱크철판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갔다. 우리는 사무실2층에서 한창 설치 중이던 크고 작은 탱크의 철판들이 태풍에 의해 정확히 좌로 한 바퀴 돌고 다시 우로 한 바퀴 돌면 쓰러진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하며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사원월급은 물론 하청업체에 줄 공사 기성대금도 몇 달째 밀리고 있었고 태풍으로 공사는 여러 날 중단되던 그쯤 드디어 똥 바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청업체에 지불할 공사대금이 제때 나가지 않으면 하청업체 역시 작업자들의 임금을 체불하게 된다. 그리고 항의하는 작업자들에게 임금 체불원인이 원청 업체임을 알리게 되니 작업자는 당연히 원청업체를 원망하게 된다. 이에 한술 더 떠서 하청업체는 작업자들을 은근히 부추겨서 원청을 상대로 강력한 실력행사를 주문 하기도 한다. 이런 배경아래 똥 바가지 사건은 일어난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니 대략 사 오십 명은 돼 보이는 작업자들이 현장사무소 앞 공터에 앉아서 원청사 현장소장면담을 요구하며 임금 지불하라는 스트라이크를 벌이고 있었다. 현장분위기를 탐색하던 우리 직원들은 공무과장의 지휘아래 중요서류를 챙겨서 밖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마치 예전에도 많이 해본 솜씨처럼 직원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했고 서류를 박스에 담는 모습은 엄숙하고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다음 직원들은 모두 밖으로 대피하면서 나보고도 빨리 피하라고 재촉을 했지만 난 피신하지 않기로 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를 일이고 피신하면 사무실은 어떻게하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순진했었다기보다는 고문관 같았고 무모하게 보이는 처신이었다.   간혹 해외현장에서 일어나는 작업자들의 스트라이크를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직원들이 도망을 가다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 들었다. 그런 내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작업자들의 단체행동은 점차 과격해지고 얼굴모습들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며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이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바다를 등지고 서서 현장사무소를 바라보면 좌우양편 끝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철제사다리가 있고 이층 왼쪽 끝 방이 현장소장 방이었다. 왁자지껄이며 철제사다리를 오르는 우당탕 소리에 이어 우장창, 쨍그렁, 소장실 유리창이 깨지는 파열음과 함께 작업자들의 고함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2층 중간에 있는 우리사무실에서 요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사무실은 왼쪽부터 차례로 점령당하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분뇨냄새가 진동하며 우리사무실 안까지 진하게 스며들어오고 있다고 느끼는데 우리사무실 문유리가 쨍그렁 깨져나가며 난폭하게 열렸다.   이건 뭐야? 작업자들 중에서 나와 얼굴이 덜 익은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억센 경상도억양으로 위협해왔다. 이번 스트라이크의 주동세력은 배관작업자들이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나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고 그렇지 않더라고 나와 안면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작업자들은 마치 인민재판 하듯이 나를 가운데 두고 자기들끼리 말싸움을 벌였다. 다들 도망갔는데 나만 도망가지 않은 것은 자기들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며 혼 줄을 내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따지고 보면 이 사람도 우리와 같은 노가다니 그냥 두자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 보다 나를 안심시킨 것은 내가 기계쟁이였고 그들 중 과격 주동세력 역시 기계쟁이 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언젠가는 나와 그들은 다시 만날 수도 있는 부류라는 것이다. 우리사무실만 분뇨투척사건이 없었다. 유리창 몇 개 깨진 외에는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않았고 전화선도 말짱했다. 나도 자기들과 같은 불쌍한 노가다이니  내버려 두자는 나와 친분이 그럭저럭 있어왔던 배관반장의 설득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온 현장소장과 여타 직원들은 나를 화제의 중심에 올려놓고 생긴 것 과는 딴 판으로 강단과 깡다귀를 겸비한 진정한 노가다라고 추켜세웠다. 나는 그들 곁에서 마치 영화25시에서 안소니퀸이 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부인(비르나 리지)이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안고 함께 사진을 찍을 때 짓던 묘한 표정을 한 채 어색하게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물냄새가 없어지기까지는 거의 일주일이상이 걸렸다. 그 동안 모든 직원들은 우리사무실에 임시 회의용 긴 테이블을 갖다 놓고 업무를 보았다.   인사고과를 메기는 시절, 현장소장 앞에는 직원들 인사카드가 놓여있고 나이든 자재주임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카드를 넘긴다. 누구? 지주임? 무조건 A야, 전 항목A. 이 얘기는 나중에 자재주임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왜 자재주임하고 소장이 직원들 인사고과를 같이 메겼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으나 나는 정확히 입사한지 5개월10일만인 1980년 1월1일 대리로 특진했다.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웃음이 나오는 내 젊은 날 울산에서의 추억거리들이 제법 있다. 낮에 배관라인에 보온재를 입혀놓는걸 보았는데 새벽2시에 비가 쏟아졌다. 보온재는 하얀 석고보드 같은 칼시움 실리케이트란 재질로 물에 젖으면 못쓴다. 야음동에서 현장까지는 차로 2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나가서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밤새 철철 비를 맞으며 배관라인들을 일일이 비닐로 감쌌다. 책상을 뒤집어엎고 뛰쳐나가 몇 일을 제쳤던 쓰라린 기억도 있다. 어느 날 상사가 특정업체의 기성금을 과다하게 지불하라는 압력을 가해왔다. 지금 같으면 당연히 상사의 지시를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게 반발하며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거듭되는 그의 지시에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나는 내 책상을 뒤엎고 나가며 사표를 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집에서 별에 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현장소장이 경리주임을 우리 집에 보내와서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라는 지시와 함께 상당액의 금일봉을 전해줬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룸살롱 이라는 델 가보기도 했다. 내가갔던 룸살롱은 요즘처럼 빌딩 안에 있지 않았고 여염집 안채에 있었다. 현장소장이 준 돈이니 부정한 것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구석이 있지만 아무튼 내 노가다 생활에서 처음으로 월급 외의 돈봉투를 받은 날이었다. 그리고 또 경리주임이 접대 아닌 접대를 하며 나를 위로했지만 역시 처음으로 룸살롱 접대를 받은 날도 됐다. 새삼 그 시절의 이상무님과 김주임이 생각난다. 32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그분들의 이름과 얼굴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어디서 무얼 하고 들 계실까? 2011-07-23   주) 아침부터 천둥번개가 요란을 떨더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몰아친다. 동서양 어디를 막론하고 비 오는 날은 노가다 공치는 날이다. 앞서 게오르규원작의 25시(The 25th Hour)란 영화에서 안쏘니퀸이 짓던 묘한 표정얘길 하다 보니 갑자기 그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쏘피아로렌이 열연한 해바라기(The Sunflower)란 영화도 생각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