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평화 기념관에서
-임맹진-
기억의 말살을 강요당한 체 누구도 말하기를 주저했던 해방 직후 처절했던 제주도민의 슬픈 역사, 그 아픔을 느낌만 으로라도 함께하고자 평화 기념관을 찾았다.
2002년 제주 시 봉개 동에 39만5천 제곱미터 크기로 조성된 공원이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니 뭔가 먹구름이 밀려오는 것 같은 억누를 수 없는 죄스러운 마음이 먼저 앞선다. 무거운 침묵 속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에게 잠시 위령탑 앞에서 안식의 기도를 올렸다. 전시관 들어가기 전, 엄마가 아기를 감싸고 있는 조형물 앞에 섰다. 1949년1월6일 2연대의 토벌작전이 전개되어 군인들에게 쫓겨 달아나다 2 살 난 젖먹이 딸을 품에 앉은 체 (故 변 병생 당시25세) 희생되었다. 나중에 지나가는 행인에 의해 눈 더미 속에서 딸을 끌어 앉은 체 얼어 죽은 모녀가 발견되었다. 모녀 상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공포 속에 본능적으로 아이를 보호하려고 애쓴 위대한 엄마의모성애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삼킨다. 다랑 쉬 전시관에 들렀다. 비춰주는 영상 동굴 속에 여기저기 뼈와 빠진 이빨들이 널려있다. 녹슬 은 무쇠 솥과 진흙으로 덮인 물병, 항아리 등 생활용품들이 흩어져 있다. 죽음을 피해 동굴 속에서 살았던 흔적들이다. 제주도 초토화 작전 때 토벌대들이 굴속에 마지막 남은 주민들을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켰다한다. 10여구의 유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가족으로 추정된다. 이런 곳이 아주 많다고 한다. 전시관 통로 벽에 그때 모습들을 흑백사진으로 전시해놓았다. 곳곳마다 군인들의 총부리에 쓰러진 산처럼 쌓인 시체더미를 바라본다. 오랜 세월의 공간을 넘어 울부짖는 그때 도민들의 신음소리 가 들린다. 차마 두 눈으로 볼 수없는 가슴 아픈 70년 전 실제 그 현장사진들이다. 또 철장 안에 빽빽이 같인 사람들의 모형이 있다. 3.3 평 좁은 공간에 무려35명이 들어있다는 안내 글씨가 적혀있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스실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유태인학살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영화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인간으로서 도저 희 상상 할 수 없는 장면, 소름이 돋는다.
4.3사건의 시작: 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에서 제 28 주년 3.1절 행사가 열렸다. 3 만 명이라 는 탐라 개벽 이래 가장 많은 인파로 들떠 있었다. 기념대회가 끝난 뒤 일부청년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행렬 중에 관덕정 광장에서 오후 2시 45분 총성이 울렸다. (이 총성 울림이 나중에 제주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첫 신호탄이었다.) 기마경관이 탄말에 어린아이가 치였는데 그대로 가려하자 구경꾼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는 순간 총탄이 날아온 것이다. 도망가는 군중을 무차별 발포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6명이 숨지고 8명이 총상을 입었다. 피해자는 시위자가 아니고 관람군중 이였다. (1947.4.5.독립신보 도지사 박 경훈談)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과하기는커녕 항의주동자들을 잡아간 것이다. 잡혀간 사람들이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민은 더욱 분노 하였다. 세계적으로 그 유래가 없는 민, 관, 합동 제주도민 전체 95% 이상이 총파업으로 맞섰다. 파업에는 좌우익이 따로 없었다. 미군정은 파업에 주동자들을 잡아드리기 시작했다. 한편, 장관 도지사 경찰수뇌부들을 서북 청년회단체를 포함한 극우성향단체로 물갈이 하였다. 이중 파업에 동참한 경찰관 66명도 파면되었다. 탄압이 계속되자 젊은 사람들은 육지로 산으로 또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제주 남로당 무장투쟁: 1948년 2월말 조천 면 신촌 에서 남로당 제주도당 면당 책임자등 19명이 모여 대책 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도당 조직부장 김달삼이 무장투쟁을 재기했다. 신중파와 강경파 열띤 토론 끝에 12대 7로 무장투쟁이 결성되었다. 남로당 산하 유격대 350명이 제주도12개 경찰지서와 우익 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단독선거를 반대한다.” 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미군정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응원 경찰을 서북청년단원 500명과 함께 막으려 했지만 수습되기는커녕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래서 다시 군정장관 딘 소장은 4월17일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군인들을 진압작전에 투입하도록 명령한다. 제주주둔 9연대와 부산 제5연대가 파병되었다. 다시 딘 소장은 진압작전과 동시 게릴라 지도자와 협상하도록 지시한다. 협상 임무를 맡은 김익렬 중령은 전단을 뿌리고 유격대 총책임자 김달삼과 서로 만나 협상하였다. 유격대 무장해제 까지 진전이 있었다. 그런데 4월말 에 이르러 강공으로 전환하는 조짐이 나타났다. 때맞추어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진 것이다. 협상을 방해하기위한 극우청년들의 소행임이 나중에 들어났다. 미군정은 강공으로 돌변하면서 제주 총사령관도 브라운 대령으로 바뀌었다. 억압 때문에 민심이 폭발한 것이므로 그 원인을 치유해야한다는 각계의 성명이 있었지만 브라운 대령은 나는 원인에는 관심 없다. 나는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강경입장을 보였다. 입산자가 늘어난 것은 경찰의 실책 때문 이라고 협상에 진전이 있었던 온건한 김익열 연대장을 전격해임하고 후임에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강경진압작전을 위한 인사조치였다. 브라운대령은 제주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실제로 감행했다. 제주도 초토화 작전이다.
초토화 작전: 신생 이승만 정부는 자신의 걸림돌 이 되는 제주도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3 대량학살극은 10월17일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정부최고지령’을 받들어 해안선으로부터 5키로 이상 들어간 중 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면서 예고됐다. 중 간산 지대에는 1백여 마을이 있었고
수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제주도 전채면적의 80%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국제법에서 금지된 이른바 ‘초토화 작전’ 이 감행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비무장 민간인 에 대한 대규모 총살이 자행됐다. 소, 말, 돼지, 가축들도 폭도들의 양식 이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몰살됐다. 중간마을 가옥4만 여 채도 토벌대의 방화로 불탔다. 이때 400명에 가까운 마을주민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북 촌리 학살사건’도 일어났다. 그야말로 제주도 전체가 불바다가 됐다. 미군 보고서는 이에 대해 ‘제9연대가 주민들이 게릴라 부대에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아래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초토화 작전은 한국군이 집행했지만 미군 수뇌부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1949년 1월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태를 가혹하게 탄압하라” 고 명령하면서 그전제로 “미국의 원조를 적극화하기위해서” 라고 말을 했다. 1948년 5월5일 제주도군정장관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은 4.3사태는 ‘계획된 국제적인 공산폭동’으로 단정하며 강경작전을 주장했다.
피해규모와 진실찾기 : 2003년 제주4.3특별법에 따라 확정된 정부보고서는 인명피해를 2만5천~3만 명으로 추정했다. 4.3의 고통은 남겨진 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와 국가 보안법에 묶여 시련을 당했다.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후유장애 시달렸으며 해체돼버린 가족의 고통은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또한 4.3은 반세기 가까이 이념적 누명을 쓰고 지하에 갇혔다. 1980년대까지 고등학교 교과서에 4.3은 ‘북한공산당이 사주아래 일어난 폭동사건’ 으로 기록되어있었다. 1960년 4.19 혁명직후 반짝 일어났던 진상구명운동은 이듬해 5.16 쿠데다 이후 된서리를 맞았다. 군사정권은 4.3을 소재로 시를 쓰거나 소설을 발표해도 작가들은 국가보안법의 굴레를 쓰고 잡혀갔다. 4.3희생자들은 추모제를 지내려 해도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참석자들을 연행했다. 4.3은 오래 동안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금기였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을 영원히 가둘 수는 없었다. 1987년 6월 항쟁 민주화 열기는 강요된 침묵을 깨고 4.3의 진실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결국 4.3은 특정지역의 전통, 주민정서를 무시한 채 오로지 물리력을 앞세워 좌우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몰고 갔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 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엄청난 물리력을 동원해도 쉽게 제압되지 않음을 4.3 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쟁지역 에서도 뼈아픈 교훈이 되고 있다. 나라를 잃고 고통의 신음 속에서 해방의 그날만을 애타게기다리며 살아온 제주도민들, 해방의 봄을 맞이했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혹독한 봄의 겨울이었습니다. 일장기는 내려갔지만 다시 성조기가 나부끼는 또 우리의 주인은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이데올로기 고래싸움에 자신의 주인을 찾고자 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채도민의 10%를 잃어야 했습니다.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역사가 없는 곳에는 인간의 존재가 없습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당한 제주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공포에 질린 섬 주민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 인 것입니다. 4.3 평화 기념관은 역사적<기억의 장소>로 ‘기억의 자살’을 막는 방주와 같은 곳입니다. 4.3의 온전한 기억을 전승해나가는 것이야 말로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4.3 대하소설《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의 말로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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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 맹진 선생님, 눈물겨운 감출수 없는 슬픈 역사, 자세하게 잘 정리해 주셔서 찬찬히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정성영 드림.
정,선배 작가님..감사합니다.. 그동안 평소
알고 있는것은 빙산의 일각이었어요..
모든 국민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