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적 순결을 바쳐 쓴 여류 시인 시집 발문
--길 용숙시집 [술잔에 세상을 빠뜨리고] 명상 출판사 발행/ 1999년 12월
송현(시인.칼럼니스트)
1.
나는 길용숙 시인에게 질린 적이 있다. 그때 내 기분은 [질리다]란 표준말보다 [십겁했다]는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는 것이 훨씬 잘 표현하지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길용숙 선생의 전화 받는 태도에 나는 질렸다. 안할 말로 나는, 시인 길용숙 선생처럼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게 전화 받는 여자를 요 근년에는 본 적이 없다. 그녀의 불친절에 나는 [덧정없었다]
그녀에게 처음 전화를 건 날이 언젠지, 무슨 용무로 걸었는지 지금은 다 잊었지만 그 냉담함과 불친절은 내 가슴에 무슨 조개 화석처럼 남아 있다. 그녀의 불친절에 질린 나머지 다시는 전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사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실수한 것 없고, 털끝 하나 비늘 하나 건드린 적 없다. 그리고 아쉬운 부탁 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사람 질리게 불친절하게 전화를 받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전화를 해야할 경우가 더러 생기곤 했다. 그럴라치면 답답한 놈이 샘 판다고 내가 먼저 전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에게 전화를 꼭 해야할 경우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불친절 때문에 우선 내 기분이 엉망이 되고, 그날 하루 종일 기분 망칠까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갈등을 몇 번 겪고는 묘수(?)를 생각했다. 수화기를 들기 전에 단전에 힘을 잔뜩 주고 심호흡을 한 번 하거나, 주기도문이라도 한 번 외고 마음 다잡아먹는 것이다. 하기야 이런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에게 아예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나는 전화를 잘 안 한다. 그래도 용무가 있으면 나중에 인사동이나 대학로나 모임에서 만나면 그때 해결해야지 하고 미루고 만다.
언젠가 대학로 카페 [호질]에서 길 용숙 시인이 전화를 너무 불친절하게 받더라고 내가 운을 떼었더니, 그녀와 가장 친한 수필가 박 명옥 선생이 내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다른 이들도 동의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경상도 여자라고 해도 그렇지, 어쩌면 그렇게도 전화를 불친하게 받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한 것은 길 용숙 선생이 전화는 그렇게 불친절하게 받는데, 막상 만나보면 전화를 질리게 받았던 여자와는 딴판이란 점이다. 사람 차별하지 않고 친절하고, 잘 웃고, 다정다감하고, 전화 질리게 받는 그녀가 과연 이 사람 맞나 싶을 정도이다. 좌중의 화제를 잘 이끌어 나가고, 어떤 주제가 나와도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하고, 조금도 내숭 떨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필 전화를 받을 때는 그러는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날 [호질]에서 내가 그녀의 불친절을 거론하는 바람에 좌중이 잠시 그녀 불친절 성토장이 되다시피 했다. 그게 좀 먹혀 들어갔는지, 내가 보기에는 그 뒤부터 자기 딴에는 좀 친절하게 전화를 받으려고 노력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
2.
길용숙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지난 여름 어느 무덥던 날 도서출판 [명상]의 이영기 사장과 인사동 까페 [풍경소리]에 들렀는데, 마침 거기에 시인 조 해인 선생 일행이 있었다. 조해인 선생은 먼 눈으로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 해인 선생이 갖고 있는 카리스마와 순수함을 특히 좋아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그를 만나도 늘 반갑다.
나도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이사장과 나는 반대편 구석 자리에 앉아서 술을 시켰다. 그런데 인정 많은 조 해인 선생이 한사코 우리에게 합석을 권유하는 바람에 못 이긴척하고 자리를 옮겼다. 알고 보니 그 자리는 [열차시회] 사람들이 모임인가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열차시회란, 조 해인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차 여행도 하고, 시 낭송도 하고, 술도 마시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하는 모임이다. 내가 그 자리에 합석을 한 뒤에도 몇 사람의 멤버가 더 도착하기 시작했다.
내 고약한 버릇 중에 하나가 어디 모임이나 사람 여럿 있는데 가면 ,혹시 멋 있는 여자 없나 하고 두리번두리번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선뜻 내 눈에 들어오는 여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는데 마침 검은 투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얼핏보니, 키도 크고 목도 길고, 눈도 크고, 입도 큰 여자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원래 투피스는 아무나 입는 옷이 아니다! 투피스는 뭘 제대로 아는 여자가 입거나, 아니면 뭘 모르는 여자가 입는다. 투피스는 정장으로 최고일 뿐 아니라 섹시하기로도 최고의 옷이다. 몸매의 곡선이 중후하고 자연스레 노출되기 때문에 몸매에 여간 자신이 없으면 입고 싶어도 못 입는 옷이다. 투피스를 자신 있게 입은 여자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몸매에 자신이 있는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가 나쁘거나 눈치가 없거나 뻔뻔한 여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검은 투피스를 입고 늦게 나타난 그 여자가 바로 시인 길 용숙 선생이었다.
풍경소리에서 1차를 끝내고, 2차로 허리우드 극장 앞에 있는 [레츠고우 노래방]에 갔다. 그곳은 [농심마니] 사람들과 몇 번 가본 곳이다. 일행 중에 한 남자가 그 늦은 시각에 밖에 나가서 주인 몰래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구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문 현태씨였다.
언젠가 길 용숙 시인을 일러 [재야시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참 그럴듯한 멋진 표현이었다. 재야시인이란 문단의 주역이 아니라 변방에서 조용히 시를 쓰는 시인, 제대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시인, 문학 잡지 등에 변변한 대접을 못 받는 시인, 그러나 시는 괜찮게 쓰는 시인 쯤으로 해석하면 되지 싶다. 하기야 나도 그 동안 길 용숙 시인의 이름도 한 번 들어본 적 없고, 작품 한 편 본 적이 없었으니, 굳이 그가 재야시인 아니라고 해도 내가 그렇게 부를 참이었다.
노래방에서 나는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불렀고, 길 용숙 시인은 [뷰리풀 썬데이]를 불렀다. 그녀가 [t] 발음을 묵음하지 않고 한사코 [뷰티풀!], [뷰티풀!]하는 것으로 보아, 영어 발음은 별로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노래는 열심히 불렀고, 춤도 열심히 추었다. 새벽 한시 가까이 노래방을 나왔으니, 그제사 2차가 겨우 끝이 난 셈이다. 조 해인 선생과 수필가 김 부희 선생 등 갈길 먼 사람들은 서둘러 갔는데도 몇 사람이 남았다.
남은 몇 사람이 3차를 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나와 길 용숙 선생은 집이 비슷한 방향이었다. 그래서 그녀 집까지 내가 바래다주는 조건으로, 길 용숙선생도 3차에 합류하였다. 새벽 4시 무렵에 가까스로 3차가 끝났다. 그날 이후로 길용숙 선생과 때로는 술친구로, 때로는 문학도로, 때로는 인생의 도반으로 만나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문학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도 하면서 신선놀음 하듯이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3.
언젠가 길용숙 선생 집 근처 실내포장마차에서 냉동 대구탕을 놓고 소주를 마신 적이 있다. 나는 그때 길 용숙 선생의 시가 궁금해서 [길선생님의 시집 제목이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한 지 십 여년이 됐는데, [아직 시집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제가 선생님의 시를 볼 수 있습니까?]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한 편 낭송하겠다]고 했다.
그 때가지만 해도 길 선생은, 내가 시 낭송 전문가인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그냥 전문가 혹은 자칭 전문가가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시 낭송 잘하는 법]이라는 책까지 쓴 이론 전문가이고, 거기다가 [대성음반]에서 [송현 시낭송 음반]을 만들기로 계약까지 한 진짜 시낭송 전문가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주: 대성음반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송현 시낭송 음반은 나오지 않았음) 드디어 길용숙 선생이 [김치 공화국]이란 시를 낭송했다.
김치공화국
슬픔을 절이듯
소금물 깊숙이 배춧잎을 담그고
아픔을 벗기듯
매운 눈물 흘리며 파 껍질을 벗겨내고
그래도 남아 있는 상심은
절구 소리 요란하게 찧어다오
핏물처럼 선명한 고춧가루에
믿음의 조미료를 뿌려주고
이웃의 눈물 같은 젓갈 몇 방울
잊지 않고 섞어 다오
흩어진 조각들도 끌어모아
골고루 붉은 옷을 입혀 가면
저마다의 이름을 버리고
하나의 이름으로 결정되는
너와
나
우리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완성되는
김치공화국
시낭송 진짜 전문가인 내가 볼 때, 길 선생은 목소리도 그다지 아름답지가 않았고, 발음도 그다지 정확하지 않는 곳이 있어 낭송 솜씨는 별로였다. 그런데, 그의 시가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그 동안 마셨던 술이 한 순간에 확 깨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지금 맑은 정신으로 분명히 말하지만, 그때 술기운에 그런 것도 아니고, 길 용숙 선생에게 무슨 꿍꿍이 속이나 흑심을 품어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작품이 좋았다. 주제가 선명하고, 시에 군더더기가 없고, 치열한 시정신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었다.
나는 인간성이 좋지 못해 그런지, 남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다. 특히 남의 작품을 평하는 데는 무척 냉정하고, 칭찬하는 데는 엄청 인색하다. 그런데 길용숙 선생이 비록 투박한 목소리로 낭송은 시원찮게 했지만 작품은 너무너무 좋았다. 그래서 혹시 외는 작품이 더 있으면 한 편 더 낭송해 달라고 주문을 하였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사양하는 법도 없이 또 시 한편을 낭송하였다.
밥과 술과 사랑으로
살기 위해 먹는 밥에 덜미를 잡혀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슬프지 않기 위해 마신 술에 중독되어
슬픔도 타성이 되었습니다
외롭지 않게 만난 사랑이 발목을 묶어
외로움은 몇 배 불어났구요
산다는 것은
밥과 술과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의 목발을 짚고
절룩이며 걸어가는 것일까요
이 작품을 듣고는 내 가슴에 잔잔한 슬픔의 파문이 일었다. 시가 담고 있는 슬픈 정서와 애잔함이 나를 갑자기 딴 세계로 몰아넣었다. 나는 슬픈 정조에 취해서 한동안 말을 못하고 창밖 멀리 저만치 비껴 서 있는 가로등의 수은등 불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나는 정색을 하여 길 용숙 선생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내 분명히 말하지만, 그때 그냥 말해도 되는데 굳이 손을 잡은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한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좋은 시를 쓴 시인과 시에 대한 존경의 표시기도 했다. 내딴에는 엄청 진지하게 말했다.
"선생님, 정말 작품이 조옿습니다! 저는 요 근년에 좋은 작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정말 좋은 작품을 보았습니다. 선생님 작품 정말 조옿습니다. 제가 그 동안 문단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떨거지 같은 시인들, 지면 하나 얻을까 하고 잡지사 주변에 얼쩡거리며, 주접 떠는 엉터리 시인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야말로 진짜 시인입니다!"
위의 표현이 지금 보면 참으로 치촐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다. 나는 주로 말로 밥 빌어먹는 사람이라, 한 말 하는 편인데, [정말]이라는 표현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한 것만 봐도, 그때 내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또 얼마나 진한 감동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한 편 더 듣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자 길 선생은 또 한편을 낭송했다.
참깨
뜨거운 냄비 속에서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주걱에 휘저어지며
튀어 오를 용기도 없이 볶여지거나
적당한 저항 끝에
모양 좋은 양념이 되길 원했다 우리는
냄비 밖으로 튀어나간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
잘게 부서져
멜라민 양념통 속에 안주한 채
보다 고급 요리에 뿌려지기 위해
서로를 밀쳐 내기 바쁜 우리는
금세 그들을 잊어버렸고
때때로 피어오르는 예감
그 중 더러는
돌아올수 없는 시간이 되고
더러는 어둠을 뚫고
정직한 소금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 하는 탄성을 비명처럼 질렀다. 지금까지 낭송한 세 작품이 우선 다들 수준이 골랐다. 이는 시인이 어쩌다 한편 잘 쓴 것이 아니라 작품 수준과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작품이 정말 좋다고 침을 튀기면서 찬사를 보내자, 그녀는 내 말을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안해도 될 이야기를 했다.
"길선생님, 저는 지난 작년 연말, 농심마니 송년회에서 노래 잘하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노래에 반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지상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른 노래에 취해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끝나고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노래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운 노래를 다시 한번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내가 주문하는 태도가 진지해 보여 그랬는지, 다음 달에 [우이동 시낭송회] 때 특별출연으로 변규백 선생이 작곡한 창작곡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날 장미꽃을 사들고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날 장미꽃 다발을 들고 갔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난 뒤에, 뒤풀이 하는 데까지 따라 갔습니다. 뒤풀이할 때 사회를 맡은 시인 홍해리 선생이 저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 낭송회에 뜻밖에 귀한 손님이 한 분 오셨습니다. 시인 송현 선생님이 왔습니다. 송선생님, 일어나서 한 말씀 하시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사실 시 낭송회에 온 것이 아닙니다!"
좌중에는 잠시 긴장이 흘렀다. 시 낭송회 잔치에 가서 시낭송회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오직 하선생님의 노래 한 곡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저는 이십년 전에 한 여자의 노래를 듣고 그만 넋을 잃고 만 적이 있습니다. 박화목 작사 채동선 작곡의 망향이란 노래였습니다. 저는 그 노래에 반해서 그녀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결혼에 한번 실패하여, 네 살 짜리 애가 딸려 있는 몸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결혼하자고 졸라서 그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이십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생음악을 들을 기회가 더러 있었지만, 오늘 노래한 하선생님처럼 맑은 목소리로 가슴에 와 닿고, 영혼에 파문을 일게하는 목소리는 처음이었습니다. 특히 산업자본주의에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선생님의 노래 한 곡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자 좌중이 또 한 번 크게 술렁거렸습니다. 아마, 그들은 하 선생의 노래 실력을 [가정 주부가 제법 잘한다]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가서 극찬을 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지 싶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꽃다발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하선생님, 장미꽃 열 송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백 송이를 사려고 하였는데,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 순진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엉뚱한 생각과 상상을 하겠습니까. 그런 저런 일들이 염려되어 열 송이만 사왔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백송이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그리고 선생님의 팬 클럽 회원 명단 끄터머리에 제 이름도 꼭 올려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제 이름을 제일 위에 올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노래와 꽃다발 이야기를 끝내고 이렇게 덧붙였다.
"길선생님, 저도 오늘부터 선생님의 팬이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제 이름도 선생님 팬 명단에 꼭 올려주십시오! 오늘 길선생님의 팬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시 한 편만 더 들려주십시오!"
길용숙 선생은 내 간청에 못 이겨 시를 또 한 편 낭송했다.
아무도 그리움을 결빙할 수 없다 1
사계절 전천후
냉동실 문을 열면
얼음 기둥으로 서 있는 것들
그 틈새로
눈물 한 점 남지 않게
온 몸을 은폐한 평화가 보인다
구원없는 시대와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밀봉해
냉동실에 밀어넣고
시들해진 배춧잎 같은 사랑도
단단하게 결빙한다
문명의 냉각수가 흐르는 동안
안정한 나라의 평화도 흘렀지만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정전
냉동실 문을 열면
무수히 번진 그리움과
더욱 지루해진 사랑이
짓물러 터지고 있었다
나는 와아! 하고 또 탄성을 지르면서 거의 미친놈처럼 말했다.
"선생님, 작품이 정말 조옿습니다. 한 편만 더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더 외는 게 있으면 한편만 더 들려주십시오!"
그러자 길용숙 선생은 담담하게 또 시 한편을 낭송했다.
오리털 이불
내 안락한 잠을 위하여
너의 죽음이 필요했다
하지만 밤마다
삐죽히 고개를 내밀고
쿡쿡 나의 잠을 찔러보는
깃털 몇 개
그들도 한 때는
자유로운 날개짓 했으리라
그들도 예전에는
살아 있는 목숨이었으리라
나는 밤마다
그들의 포로가 된다
길용숙 선생처럼 멋진 여자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신나는 일인데,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시 낭송을 하고 있다니! 요즘 애들 말로 기분이 캡이었다. 내 귓전 가까이 낮은 목소리로 들려오는 길 용숙 선생의 시는 정말 멋지고 아름다웠다. 아마 우리가 살아 생전에 아니면 죽고 난 뒤에라도 길 용숙 선생이 유명해지거나, 내가 유명해지면, 그 집은 그날의 사건 때문에 문화적 명소가 될 것이고, 송파구청에서 알면, 중요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지 모르고, 그 집 주인은 우리가 앉았던 그 자리에, 길선생이 유명해지면, <시인 길용숙 선생이 송 아무개 들어라고 시를 낭송했던 자리>라고, 내가 유명해지면 <송 아무개 들어라고 길 용숙 시인이 시 낭송했던 자리>라고 팻말이라도 붙여야 할 것이다.
4.
나는 이 시집의 발문 쓰기를 자청했다. 그 까닭은 이렇다. 내 딸 [하예진]이 수원 장안문 앞에서 애완견을 살 때 일이다. 강아지들이 여러 마리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놈 한 마리 고르려고 이리 저리 살피자, 개장사 아저씨가 말했다.
"아가씨, 나는 개장사만 이 십 년 했습니다. 아가씨가 아무리 골라봐야 나한테는 안됩니다. 내가 좋은 놈 하나 골라 줄 테니 두말하지 말고, 가져가요!"
그러면서 개장사는 그 중에서 가장 똘똘하고 예쁜 놈을 골라서 덥석 덜미를 잡아 올려서 하예진 앞에 내밀었다.
"여기 있는 놈 중에서 제일 좋은 놈이 이놈입니다. 사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얘를 쏙 뽑아가고 나면 나는 오늘 장사 망치는 겁니다. 이런 좋은 놈이 있어야 손님들이 모여드는데, 이런 애가 빠져나가고 없으면 손님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아요."
하예진이 개값을 치르면서 개 장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이 강아지 족보 없어요?"
개장사가 대답했다.
"아가씨, 얘는 족보가 필요 없어요!"
"왜요?"
"얘 자체가 바로 족보입니다!"
그렇다! 길용숙 시인의 시는, 그 개장사 말마따나 [시 자체가 바로 족보]이다. 그러니 무슨 놈의 해설이 따로 필요하단 말인가! 길용숙 선생 시집에 작품 해설을 단다는 것은 그야 말로 사족이다. 사족은 수다와 같은 꽈다.
노자(老子)는 제자들과 함께 아침 산책을 즐겼다. 어떤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노자 일행이 하는 산책에 끼이고 싶었다. 마침 자기 친구 중에 하나가 노자의 제자가 있어 그를 통해서 아침 산책에 끼이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동참하게 되었다. 산책하는 분위기가 참 이상했다. 노자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별 말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참석한 이도 아무 말 않고 한참 걸었다. 얼마 안 있어 아침 해가 떠 올랐다. 일출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처음 참가한 이가 이렇게 말했다.
"참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아침 산책이 끝나고 나서 노자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처음 나온 이는 다시는 못 나오게 하라! 왜냐면 나도 일출을 보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참 아름다운아침이다]라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가. 그런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안 해도 될 말이 아닌가! 한마디로 그 자는 너무 수다스럽다! 그러니 다시는 오지 말도록 하라!"
그렇다. 내가 길 용숙 선생의 시를 놓고 해설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수다스러운 일에 속한다. 작품이 시원찮으면 술병 들고 문단 원로 찾아가 서문 받고, 잘 나가는 문학평론가 찾아가 발문도 받아내야 하겠지만, 작품이 좋으면 굳이 그런 허례허식은 필요 없다! 혹시 길 용숙 시인의 시를 보고도 감동할 줄 모르고, 좋은 줄을 모르면 그런 둔감한 이에게는 아무 대책도 없고 약도 없다. 수원 장안문 앞 개장사 아저씨 말처럼 길용숙 선생의 시는 그 자체가 바로 [족보]이고 보증서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발문을 쓰마고 자청한 첫 번째 이유이다.
나는 시를 잘 쓸 줄은 몰라도 볼 줄은 안다. 어떤 시가 알맹이고 어떤 시가 쭉정이인지는 척 보면 금세 안다. 어느 시인이 치열한 시정신으로 시를 쓰고 어느 시인이 문학을 사치로 알고, 어느 시인이 문단 주변에 얼쩡거리며 종이값만 올리는 불량 식품같은 엉터리 시를 써대는지 안다.
1986년 정초에 나는 현대문학, 한국문학, 문학사상, 세계의 문학, 현대시학, 심상, 외국문학, 문예중앙, 오늘의 문학, 동서문학, 정통문학, 신동아, 월간조선, 소설문학, 시문학, 월간문학 등에 발표된 시들을 모두 모아서 꼼꼼하게 분석해본 적이 있다. 거기에 발표된 400여편의 시들을 보니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나도 시인 면허증이 있다. 그런데 어찌나 엉터리 시 쓰는 떨거지 같은 시인들이 많은지, 그치들 때문에 나도 도매금으로 욕먹을까 겁이 나서 시인 면허증을 차라리 반납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우리나라 시 중에서 엉터리 시들이 그렇게 많은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 내가 엉터리 시들의 유형을 편의상 열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그 종류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선놀음형, 망령출현형, 모국어천시형, 낙엽낙화형, 막무가내형, 시이전형, 올챙이꼬리형, 말장난형,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형, 미몽혼미형 등이다. 그때 이 글을 내가 존경하는 차 준영 선생이 편집장으로 있던 월간 [광장]에 발표하여, 독자들한테는 적지 않은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문사들 한테는 욕 바가지로 얻어먹고, 본의 아니게 문단에 적도 많이 만들고 말았다.(내글: '우리를 괴롭히는 도깨비 시들'/ 월간 [광장] 3월호/ 내 책: [우리시대 시민정신]/ 1986년 지식산업사 발행)
수많은 엉터리 시인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을 줄 뻔히 알고도 이런 글을 쓴 내가 길용숙 선생의 좋은 작품을 보고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한국 문단의 원로 시인 중에 누구라고 굳이 이름을 꼭 찍어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짐작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이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식으로 양적으로 시를 써댄다. 이는 흥부가 무책임하게 애새끼 수도 없이 싸질러 놓는 것하고 조금도 다름없다. 이는 일종의 죄악이다.
엉터리 시집 만드는데도 종이 수입해야 하고, 그 종이는 다 아까운 나무 잘라서 만든 것이다. 누가 말릴 수만 있다면, 인해전술하듯이 그런 맹물 같은 시를 양산하는 짓은 좀 그만하라고 말려야 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법으로라도 금지시켜야 한다. 사실 그 따위 맹물 같은 시는 한 트럭 싣고 와도 양 인자씨 유행가 가사 한 줄 하고 안 바꾸겠다는 것이 시에 대한 내 소신이다. 나는 좋은 시는 좋다고, 아름다운 시는 아름답다고 용기 있게 말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발문을 쓰마고 자청한 두 번째 이유이다.
언젠가 길용숙 선생과 문학평론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엉터리 평론들에 대해서 비평을 했다. 그러던 중에 길 용숙 선생이 말하는 것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
"....수직이니, 수평, 혹은 하강 운운하는 평론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왜 평론이 그런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들을 마구 써가며, 시인이 의도하는 바와는 엉뚱하게, 또 의도하지도 않은 것을 자기 이론에 끌어대어서 말도 안되는 글을 쓰는지 알 수 없어요. 제가 만약 시집을 내면, 절대로 그런 식의 발문은 싣지 않을 겁니다...."
특히 이 대목은 나와 죽이 너무 잘 맞았다. 나도 평소에 문학 비평에 잔뜩 불신을 하고 있던 터에 모처럼 의기 투합되는 문학의 동지를 하나 만났구나 생각했다. 그러니 길용숙 선생이야말로 뭘 제대로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믿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엉터리 평론가들이 이놈 작품도 좋다, 저놈 작품도 좋다고 창녀처럼 써대는 평문 혹은 시인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제 혼자서 하이덱거 끌어대고, 바슐라르 끌어대고, 아른하힘 끌어대면서 영어 술어와 무슨 적(的)이니 무슨 성(性)이니, 잔뜩 섞어 썰을 푸는 한심한 짓거리를 그녀도 싫어하는 눈치였다. 이것이 내가 발문을 쓰마고 자청한 세 번째 이유이다.
[명상]의 이 영기 사장도 처음에는 길용숙 선생의 시는 보지 못했다. 그는, 내가 시에 대해서 칭찬하기 인색한 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내가 어느 날부턴가 틈 있을 때마다 "길 용숙 선생의 시가 정말 좋다. 그런 좋은 시를 그 동안 본 적이 없다."고 칭찬을 하자, 그이는 내 말만 액면 그대로 믿고 [길용숙 시집] 출판을 결정했다. 그의 이런 순수한 믿음과 나에 대한 신뢰에 보답해야 했다. 이것이 내가 발문을 쓰마고 자청한 네 번째 이유이다.
5.
길용숙 선생이 자기 작품을 줄줄이 다 외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력이 대단했다. 나는 내 시를 한편도 못 외는데, 자기 시를 저렇게 줄줄이 다 외고 있다니! 저렇게 잘 외는 걸 보면 학교도 좋은 학교 다녔겠고, 또 공부도 잘했지 싶어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고 물었더니, 부산 경남여고를 나왔다고 했다. 경남여고라! 독일에서 사는 내 여동생과 분당 사는 작은 누나가 부산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나는 경남여고가 얼마나 대단한 명문인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대학은 어디를 졸업했냐고 물었더니 이화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앞서 인용한 길용숙 선생의 작품만 봐도 쉬 알 수 있듯이 길 용숙 시인의 시에는 사소한 일상이나 예사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쉬운 것들이 시의 소재가 되어 근사한 작품으로 그려지는 수가 많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김치공화국]은 말할 것도 없고, 앞서 인용한 [밥과 술과 사랑으로]나 [참깨]나 [아무도 그리움을 결빙할 수 없다]나 [오리털 이불] 등도 길용숙 시인의 시안으로 보고, 시심으로 녹이고, 심안으로 다듬고, 시정신으로 짜면 한편의 멋진 작품이 되어 탄생하는 것이다. 누구나 일상적으로 보고 부딪치는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도 길용숙 시인에게는 소중한 시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가령, 누구나 매일 김치를 먹으면서도 [김치공화국]이란 멋진 시를 쓰지는 못한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고, 냉장고 안 냉동실에는 음식물들이 얼려 있지만 [아무로 그리움을 결빙할 수 없다]라는 훌륭한 시는 쓰지는 못한다. 그 동안 조선 천지에서 참깨를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수없이 볶았지만 [참깨]라는 똑 소리나는 시는 쓰지는 못했다. 요즘은 오리털 이불 값이 싸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리털 이불을 덮지만 [오리털 이불]이란 의미 있는 시를 쓰지는 못했다!
나는 길용숙 선생이 경남여고나 이화대학 같은 명문을 다녔기 때문에 실력 있는 훌륭한 선생들에게 재대로 문학 공부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길용숙 선생이 말하는 것을 이렇게 나는 들었다.
"...저는 넓게는 문학 좁게는 시에 대한 공부를 우리 아버지한테 배웠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가령 하다못해 과자 하나를 먹을 때도 아버지는 [아무 생각없이 과자를 먹지 말고, 그 과자의 독특한 맛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먹어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벌써 아버지는 제게 사물이나 일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비록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예사로 보아 넘기지 말고, 또 볼 경우에는 반드시 남과 다르게 보고, 남과 다르게 느끼고 남과 다르게 생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문학의 스승은 바로 우리 아버지입니다...."
6.
언젠가 이 영기 사장과 대학로 카페 [호질]에 갔다. 양 지은 사장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사장이 반갑게 맞아주는 그 재미에 대학로에 술 마실 일이 있으면 [호질]을 고집한다. 홀 안으로 몇 발자국 들어서다가 안쪽 자리에 길용숙 선생이 어떤 남자와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래서 나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춤한 채 눈 인사를 했다. 얼마 후에 길 용숙 선생이 우리 자리로 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제 친구와 같이 술 마시러 왔습니다. 요 앞 일식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서로 인사들 하세요."
길 용숙 선생은 자기 자리로 가서 친구를 우리 좌석으로 안내해 왔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했다. 나는 아무 적의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이에게 술을 권했다. 이 사장과 그이가 주로 불교쪽 이야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유지되었다. 그때 산발을 한 듯한 웬 사내가 들어왔다. 그러자 길용숙 선생은 [저이가 사람이야, 귀신이야?]하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기어이 일어나서 그 남자가 귀신인지 사람인지 확인을 해야겠다며, 그 남자의 좌석으로 갔다. 그때 이미 길용숙 선생은 취해 있었다. 아마 취하지 않았으면 그러지 않았지 싶다.
우리 좌석에는 이 사장과 길 선생 남자 친구와 셋이 남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별로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런데 하마 오나 하마 오나하고 기다려도 길용숙 선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는 몇 번이나 시계를 들여보면서 길용숙 선생을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자,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멋적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쓸쓸하게 갔다.
남자 친구가 떠나고 얼마 안 있어 길용숙 선생이 산발한 이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자기 남차 친구가 떠난 것을 뒤늦게 알고는 매우 슬프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길용숙 선생이 말하는 것을 이렇게 나는 들었다.
"...그 친구와 마로니에 공원에 나가서 커피도 마시고 팔짱 끼고 걷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가버렸으니, 너무 마음이 아파요. 전에도 한 번 여기서 그 친구를 그냥 가게 했는데, 오늘 또 그 이를 그냥 보내게 했으니, 정말 마음이 아파요."
그러자, 금세 길 용숙 선생의 그 큰 눈에 눈물이 고였다. 슬픔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친구 마음을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전에도 그 친구를 마음 아프게 했는데, 오늘 또 본의 아니게 혼자 가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훌쩍 훌쩍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길 용숙 선생이 소리내어 훌쩍훌쩍 울자 이사장과 양지은 사장과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계속해서 길용숙 선생이 소리내어 울자,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자 양지은 사장이 말했다.
"용숙이 언니! 그만 울어요. 계속 울면 떠난 그 사람 마음만 아픈게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 세 사람 마음도 아프게 한단 말이야.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요, 언니!"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한참동안 어색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 내가 길 용숙 선생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처럼 멋있는 여자가 우는 것을 요 근년에 처음 봅니다. 그리고 그 남자 친구가 참 부럽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선생님 같이 멋진 여자가 울어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나를 위해서 어느 멋진 여자가 울어줄 여자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나는 그 남자 친구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래도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길용숙 선생 귓전 가까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눈물을 보니, 제 마음이 참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니 선생님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기 때문인가 봅니다..."
7.
그렇다.눈물이다!
나는 길용숙 선생의 눈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오늘날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텔리비젼 연속극 속에나 보지 그 밖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눈물이 메말라 있다. 메말라 있을 뿐 아니라 아예 눈물을 두려워한다. 산업사회에서는 누구나 눈물을 두려워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시도 때도 없이 찔찔 짜고 해서는 안 된다. 이기려면 남보다 빨라야 하고, 남보다 앞서야 하고, 남보다 강해야 한다. 이런 시대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은 마치 어리석거나 철이 덜 든 사람으로 취급받기 딱 알맞다.
[그런데, 길용숙 시인은 그날 눈물을 쏟으며 울고 있었다!]
시인 길용숙의 눈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다 눈물이라도 날라치면 감추려고 한다. 그러면서 누가 눈치라도 채면 어쩌나 하고 당황한다. 심지어 어른이 눈물을 흘리면 창피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다들 가능하면 울지 않으려고 하고, 울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소중한 것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속에 있는 자연적인 소중한 질서와 법칙을 무너뜨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은 100도가 되면 끓어야 하고, 끓으면 김이 나야 한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네 삶도 순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어야 한다. 울면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런데 길용숙 시인은 그날 눈물을 쏟으며 울고 있었다!]
눈물은 아름다운 것이다. 특히 길용숙 시인처럼 아름답고 멋진 여류시인의 눈물은 더 아름답다. 눈물은 보석 같은 것이다. 아니 보석 같은 것이 아니라 보석 그 자체이다. 특히 보석도 못난 여자가 걸치고 있는 것보다 예쁘고 멋있는 여자가 걸치고 있는 것이 더 아름답듯이, 길용숙 선생 같은 멋있는 여류 시인이 보석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정말 멋있고 아름다운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눈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귀한 것이다. 그리고 값진 것이다. 알 고 보면 눈물이란 존재가 충만해서 흘러 넘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물이 모두 슬픔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물론 눈물이 슬픔으로 흘러 넘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눈물은 넘치는 기쁨으로부터도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커다란 평화로부터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와 사랑으로부터도 온다. 그래서 실제로 눈물은 슬픔이나 행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수가 많다. 어떤 것이 우리의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때, 어떤 것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을 때, 어떤 것이 너무 많아 다 담을 수 없어 우리 가슴에서 넘칠 때, 그때 눈물이 흐른다.
[그런데, 길용숙 시인은 그날 눈물을 쏟으며 울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길용숙 시인의 눈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오히려 즐겨야 한다. 그녀의 눈물을 마음껏 환영해야 한다. 눈물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다. 눈물 가득한 눈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눈을 통해서 아름다운 진실을 볼 수 있다. 눈물이 가득한 눈을 통해서 삶의 아름다움과 축복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길용숙 시인의 눈물이야 말로 그녀의 시의 원천이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보석이 아닐 수 없다.
8.
알고 보니 놀랍게도 길용숙 선생은 [대단한 술꾼]이었다. 마치 우리 아버지처럼 술을 많이 마셔도 잘 취하지 않고, 또 안주도 잘 먹지 않고 깡술을 마셔대는 그런 술꾼이었다. 처음에는 멀쩡한 여자가 왜 그렇게 술을 많이 자주 마시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녀의 시를 보고는 그 의문이 금세 풀렸다.
술잔에 세상을 빠뜨리고
1
추억이 세상을 흔들면
추억을 마셔버린다
세상이 추억을 흔들면
그때도 추억을 마셔버린다
아니면 세상이 나를 마셔 버릴 것이므로
2
그리움 때문에 저녁 술을 마시고
외로움 때문에 해장술을 마신다
3
기쁠 때는 낮게
슬플 때는 높게 술잔을 듭시다
소리 큰 기쁨은
깨어질 때도 소리가 큰 법이니까요
그러나 슬픔은
깊을수록 조용하답니다
4
시간의 전선을 끊어버린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아니 더욱 흔들리기 위해
지난 것 다 떨어지도록 흔들리고 나면
무척이나 가벼워지지 않을까
나는 이 시를 보는 순간 길 용숙 선생이 술을 마신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움 때문에 술을 마시고, 외로움 때문에 술을 마셨던]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아!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작은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이 그녀를 술 마시게 하고, 섬 처럼 떠 있는 외로움이 또 술을 마시게 한 것이다. 그녀 주위에 나쁜 술친구들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놈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주범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리움]과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대답을 길용숙 시인은 위의 시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금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추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사용하지 않은 예금통장에 몇 푼 안되는 잔고처럼 남아있는 [추억]이다. 그런데 그놈의 추억이 갈 길이 먼 시인의 [세상을 흔들면] 할 수 없이 추억 자체를 술로 마셔버리고, [세상이 추억을 흔들면] 그 추억 자체를 마셔버린다고 했다. 그러니 길용숙 시인이 그 동안 마셨던 술은 단순히 주정으로 빚은 알콜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로는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감싸 안아야 하고, 때로는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양 어깨로 걺어져야 할 삶의 무게였던 것이다.
이 지상의 어느 누구도 도와 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위무해 줄 수 없었던 [추억]을 그 가는 팔로 감싸 안고, 그 좁은 양 어깨로 짊어지고, 그 가는 두 다리로 버티고 일어서야했던 것이다. 언제 떨어질지, 언제 무너질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두려움을 시인은 "세상이 나를 마셔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라고 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그녀가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술잔에 세상을 빠트려서] 마셔버리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를 [시간의 전선을 끊어버린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시간의 전선을 끊는다는 것은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좁게는 지난 [추억]과의 단절이고, 넓게는 지난 [세월]과 단절을 의미한다. 굳이 그것들과 단절하려는 것은 자기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아니 더욱 흔들리기 위해]라고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추억] 혹은 지난 [세월]의 인(因)과 연(緣)을 단절하기 위해서 그토록 눈물겹게 술을 마시면서 [지난 것 다 떨어지도록 흔들리고 나면/무척이나 가벼워지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길용숙 시인이 그 동안 세상에 휩쓸려가거나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부상당한 맹수들이 자기 혓바닥으로 상처를 핥는 것 같은 처절한 몸짓이었고, 일종의 의식(儀式)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살아남으려는 방편이었고, 일종의 비상 수단이었고 극약처방이었다. 그 처연한 몸부림에 나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길용숙 시인이 그 동안 그토록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정당방위이다. 그래서 술꾼 길용숙 선생은 무죄다!
특히 길용숙 시인의 위의 싯귀에서 엿보는 그녀의 눈물겹고 가슴 벅찬 시적 진술을 우리는 귓전으로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한 줄 싯귀로 혹은 가을날 떨어지는 한 잎 낙엽 쯤으로 간주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래서 길용숙 시인의 위와 같은 시는 한마디로 접동새 피울음같은 시요, 접동새 피눈물 같은 시다! 남 다 자는 야삼경에 이 산 저 산 옮겨가며 피울음 울 때마다 떨어진 그 피눈물 위에 핀 진달래꽃 같은 시다.
길용숙 시인은 [기쁠 때는 낮게] 술잔을 들고, [슬플 때는 높게 ]술잔을 든다고 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동안 길용숙 시인과 술을 마실 때 아무따나 하거나 반대로 했는데 앞으로는 정신 똑 바로 차려서 [기쁠 때는 잔을 낮게], [슬플 때는 잔을 높게] 들 생각이다. 왜냐면 [소리 큰 기쁨은 깨어질 때도 소리가 큰 법이고] [슬픔은 깊을수록 조용하기] 때문이다.
홍대 금속공예과에 강의하는 김 선득 선생이 언젠가 술자리에서 별로 취하지도 않았는데, 길용숙 시인의 팔을 잡아끌어 나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송선생님, 용숙이 언니 살결 한 번 만져봐요. 완전히 비단결이예요!"
나는 쑥스럽고, 용기가 없어 만져보지 못하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렇다! 김 선득 선생의 표현대로 길용숙 선생의 살결만 [비단결]이 아니라 마음과 눈물, 그리움과 외로움이 온통 비단결이겠구나 싶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무슨 그리움과 외로움이 그리 많아서 무모하게도 "술잔에 세상을 빠뜨리려고" 그리도 깡술을 마셨을까?
그런데, 또 알고 보니, 길용숙 선생은 술꾼은 술꾼인데, [멋진 술꾼]이었다. 지난 10월 말 경엔가 단풍이 한창 문경 새제를 넘어가고 있을 때, [문화전략 21]의 이 두엽 사장 일행과 길용숙 선생과 함께 거기 무슨 행사에 갔다. 그날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던 중에 누군가가 길 용숙 선생에게 시 낭송을 부탁하였다. 길 용숙 선생은, 자작시 한편을 낭송했다. 문경 새제의 깊은 골짜기 밤하늘에는 온통 별들이 축제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술에 취한 이 두엽 사장이 밤 하늘을 쳐다보며 [전갈좌] 어쩌고 하길래 나는 그이가 별 자리를 좀 아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전갈좌] 운운 하기에 그의 별 자리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다 아다시피 전갈좌는 여름철의 대표적인 별자리이다. 여름 날 밤에 남쪽 하늘 아래에 동서로 길게 나타나는 별자리로, 그 중에서 가장 큰 별은 [베텔규우스]인데, 이놈은 태양보다 약 260밴가 280밴가 큰 별이다. 여름철 대표적인 별 자리를 문경의 새제 골짜기 늦가을 밤하늘에서 찾는다고 두리번두리번 하고 있었으니! 하기야 그때 그이가 술만 취하지 않았어도 나보다 더 별자리를 많이 찾을 수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좌우간, 별이 빛나는 그 아름다운 밤에 모닥불 앞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정말 운치가 대단했다. 그런 밤에는 어지간히 못 생기지만 않은 여자와 술을 마셔도 술맛이 날 터인데, 멋진 여류 시인이 시 낭송까지 했으니, 그 자리에 있던 문학 지망생들, 아줌마들, 총각들 다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다. 그때 나는 길용숙 시인은 참으로 [멋진 술꾼]이라고 생각했다.
9.
길용숙 선생의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 마치 내 시집이 나오는 것 같이 기쁘다. 지난 11월 열차 시회 모임 때 [풍경소리]에서 회원들이 길 용숙 선생 시집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다들 기뻐하였다. 자기 시집 내는 것 이상으로 기뻐하였다. 서로 앞다투어 시집을 사겠다고 하고, 어떤 이는 출판 기념회 장소를 구해주겠다고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집에서 축하 파티를 따로 열여주겠다고 하면서 반기는 것으로 보아, 길 용숙 선생과 그의 시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길용숙 시인을 좋아한다. 그녀의 큰 눈을 좋아하고, 그 눈에 고이는 눈물을 좋아한다. 그녀의 긴 목을 좋아하고, 그녀의 투피스 입은 모습을 좋아한다. [t]를 묵음하지 않고 한사코 [뷰티풀],[뷰티풀]하면서 꺼끌꺼끌하게 부르는 [뷰리풀 썬데이]와 듣는 이를 애잔한 그리움에 젖게 하는 [작은 연인들]을 좋아한다. 취기가 돌고 신명 나면 두 손 들고 춤을 추는 그녀 모습을 좋아한다.
한평생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서 성대 수술까지 한 그집 강아지 [아롱이]도 좋아하고, 요즘 시집 출간을 전후해서 인사동 전투, 대학로 전투 때문에 자주 술판에 어울리다보니 [엄마가 요즘 우리한테 소홀하다]면서 엄마의 소매를 부여잡고 울었다는 한번도 본적 없는 그녀의 딸도 좋아한다. 그리고 경남여고적 소녀티가 남아 있는 그 팽팽한 긴장을 좋아하고, 그녀의 멋진 시를 좋아한다.
내 이런 애정을 담보로 해서 길 용숙 선생에게 한마디 충고하자 한다. 밝아오는 2000년에는 제발 깡술 좀 덜 마시기 바란다. 길 용숙 선생이 좋은 시를 발표했다거나 멋진 시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은 언제 들어도 기쁘겠지만, 간이 나빠서 입원했다는 소식은 제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이런 충고는 나 혼자만의 충고가 아니라 길 용숙 선생과 그녀의 시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의 충고를 대변하지 싶다. 그리고, [마음 좋은 년은 서방이 열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앞으로는 제발 별 영양가 없는 자리에는 좀 빠지고, 경남여고 다닐 때처럼 공부 좀 열심히 하면 좋겠다. 특히 영양가 없는 자리에서 술 마시고 놀 때일수록 금쪽 같은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 글을 끝맺으려는데, [사직동팀]이 아닌 [인사동팀]으로부터 긴급 전문이 들어왔다.
12월 11일 18시 현재
길용숙, 박X옥, 김X희씨 닮은 여자 셋이 일산 모처에서 술 마시고 있음.
대학로로 이동할 기미가 보임. 계속 감시하겠음.
1999년 12월 11일
서울. 장안평 작업실에서
송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