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시즌을 앞두고 성준 한화 투수코치가 투수들을 면담했다. 성 코치는 면담에서 투수들에게 각자의 보직을 전달했다. 선발, 마무리, 필승조 불펜, 패전처리 등 보직은 다양했다. 성 코치는 팀의 최선참 투수 박정진(36)과도 면담 자리를 마련했다. 성 코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박정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우리 팀의 12번째 투수네.”
1999년 한화에 입단한 박정진은 프로 13년 차 베테랑 투수다. 입단 당시 ‘송진우-구대성’의 왼손 투수 계보를 이을 적임자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2009년까지 11년 동안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가능성’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30경기 이상 등판한 시즌이 4시즌에 불과했고, 11시즌 가운데 7시즌에선 채 15이닝도 던지지 못했다.
부상과 부진으로 30대 중반이 되도록 자기 자릴 찾지 못했던 박정진에겐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했다. 그러나 터닝 포인트는 영원히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소속팀 한화도 마찬가지였다.
2006년 한국시리즈 준우승팀 한화는 2009년부터 터닝 포인트가 없었다. 2년 연속 팀 승률 3할대로 포스트 시즌 진출은 고사하고, 꼴찌를 도맡았다. 이 팀이 2년간 보여준 건 허약한 타선과 그보다 허약한 수비진과 그보다 더 허약한 투수진이었다.
올 시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즌 개막 7경기 만에 한화는 2승5패로 8위로 내려앉았다. 그 뒤 5월 16일까지 꼴찌를 지켰다. 야구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한화의 3년 연속 꼴찌는 따 놓은 당상”이라 예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화에도 터닝 포인트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5월 16일 한화 단장과 사장이 전격 교체되며 터닝 포인트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화그룹은 구단 수뇌부 교체와 함께 지지부진했던 2군 훈련장을 2012년 7월까지 짓겠다고 공언했다. 빈약했던 구단 투자도 대폭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선수단이 그토록 기다렸던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17일 한화는 두산에 1대 8로 졌다. 그룹의 충격요법도 최약체 한화엔 통하지 않는 듯했다. 18일 잠실 두산전에서 한화 선수들은 “오늘은 꼭 이기자”고 다짐했다. 구단의 호의엔 승리로 화답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서도 한화는 5회까지 두산에 2대 6으로 뒤졌다. 6회 초 5점을 내며 7대 6으로 역전했지만, 6회 말 다시 두산에 1점을 내주며 7대 7 동점을 허용했다. 그러나 6회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2사 1, 2루의 긴박한 위기에 타석엔 김현수가 들어서고 있었다. 곧바로 한화 한대화 감독은 구심에게 다가가 구원투수를 호명했다. 박정진(36)이 주인공이었다.
7대 7 동점이던 6회 말 2사 1, 2루에 마운드에 올랐다. 두산 타자는 김현수였다.
김현수는 좋은 타자다. 왼손 투수에게도 강하고. 하지만, 그날은 자신감이 있었다. 다행히 (김)현수를 잘 막아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날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8회 말이었다. 당신이 두산 2번 이성열에게 안타, 3번 이종욱에게 볼넷을 허용하고서, 두 주자가 더블스틸에 성공하며 졸지에 1사 2, 3루가 됐다. 가뜩이나 당신이 상대해야할 타자는 김동주였다. 역대 통산 김동주의 왼손투수 상대 타율이 3할3푼9리임을 고려하면 결코 쉽지 않은 승부였다.
(김)동주 형이 타석에 섰을 때 ‘걸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이 복잡했다. 솔직히 평소 같으면 1루가 비었으니까 동주 형을 걸리고, 다음 타자 최준석과 상대했을 거다. 하지만, 이날은 좀 달랐다. 자신감이 있었다. 그때 한대화 감독님이 내쪽으로 걸어오셨다.
투수코치도 아니고, 감독이 마운드에 오르는 일은 흔치 않다. 특히나 한 감독은 투수코치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는 편이다. 감독이 마운드를 찾을 정도면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는 뜻인데. 한 감독이 뭐라고 하던가.
“(박)정진아, 너라면 여기서 걸리겠냐 아니면 정면승부하겠냐”하고 물으셨다.
당신의 대답은?
“스트라이크 존 꽉 차게 승부하겠습니다. 그러다 볼넷이 되면 어쩔 수 없지만, 어쨌거나 승부를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실제로 6구까지 스트라이크 존 꽉 찬 공을 던졌다. 결국, 김동주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1스트라이크 3볼에서 포수 신경현이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사실상 거르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5구째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면서 ‘삼진으로 잡자’고 생각했다. 6구째 몸쪽으로 던졌는데 운 좋게 삼진이 됐다.
최준석마저 삼진으로 처리하며 8회를 깔끔히 정리했다. 그리고 9회를 잘 막아 팀에 승리를 안겼다. 이날 승리가 한화에겐 3년 만에 찾아온 터닝 포인트였다는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게 이 경기 전까지 한화는 12승 1무 24패 승률 3할3푼3리로 부동의 꼴찌였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이긴 후, 6월 6일까지 11승 6패 승률 6할4푼7리의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6월 7일 현재 한화가 23승 1무 30패를 기록하며 4위 삼성을 5.5경기 차로 추격하는 것도 이 경기가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최준석은 지난해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았던 기억을 되살렸다. 역시 슬라이더가 통했다. 그날 두산전 승리가 팀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면 다행이다. 내가 팀을 위해 뭔가를 기여한 셈이니까.
그날 승리 후,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서 ‘박정진’이라는 이름이 상위권에 올랐다.
야구팬분들이 같은 왼손 투수인 두산 이혜천과 연봉을 비교하신 모양이다. 검색어 순위에 내가 언제 상위권에 올라 보겠나(웃음).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다.
- 박정진은 대학 시절 최고의 왼손 투수였다. 공도 빠르고, 제구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부상에 시달렸다. - SK 허정욱 스카우트
당신을 인터뷰한다고 했더니 누가 그러더라. “박정진은 야구 신동이었다”고. ‘신동’ 소릴 들을 정도면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무척 잘한 모양이다.
(손을 흔들며) 초교 때는 야구를 안 했다. 중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고개를 끄덕이며) 초교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야구를 했다. 왜 그때는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지 않았나. 나도 그랬다. 하루는 청주고 코치님이 우리가 노는 걸 보시다가 나한테 다가와 “야구 한번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한마디로 “없다”고 했다(웃음). 그 정도로 야구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 ‘공 던지기부’라는 특별활동부에 가입하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야구도 조기교육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초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서부터 야구를 시작하면 다소 늦었다고 볼 수 있다.
부모님은 처음엔 “공부나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고집을 부리니까 그 이후부터는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셨다. 특히나 아버지가 열성적이셨다. 원래는 학군상 초교 졸업 후 세광중으로 입학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청주중 출신이라, “나도 청주중에 가고 싶다”고 졸라 결국 청주중에 입학했다.
다른 동기들보다 실력이 꽤 뒤졌을지 싶다.
시쳇말로 ‘생짜’라고 하지 않나. 내가 완전 그랬다(웃음). 야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다 한 달 좀 지나서 감독님이 “투수를 해보라”고 하셨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감독님이 하라니까 투수를 시작했다. 그때 누가 알았겠나. 내가 20년 동안 투수로 뛸지(웃음).
중학교 졸업 후, 야구명문 세광고로 진학했다. 세광고는 ‘200승 투수’ 송진우의 모교이기도 하다.
원래는 청주고 진학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청주고 선배들이 큰 사고를 친 바람에 야구부가 해체됐다. 갑자기 오갈 데가 없어졌지 뭔가. 청주중 동기들 절반은 천안북일고로, 나머지 절반은 세광고로 진학했다. 하지만, 난 오라는 학교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광고 야구부장님이 허락해주셔서 세광고에 진학할 수 있다.
당시로선 귀한 ‘왼손 투수’였다. 왜 오라는 학교가 없었을까.
키가 작았다.
얼마나 작았나.
중 3때 162cm였다.
아….
키가 작은데다 비쩍 마른 체형이었다. 내가 봐도 너무 작아 계속 야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다 고교생이 되면서 10cm가 훌쩍 컸다. 일종의 기적이 일어난 셈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