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제 시기 : 식량 수탈과 식품 산업의 발달
▶일제 시기 서민의 식사모습
# 1-64) 평등한 상차림
:문익환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오른쪽의 까까머리 소년이 문목사이다. 문목사는 1920년 북간도에서 독립운동가이며 목사인 문재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사진은 가난하지만 개화된 식사 모습을 보여준다. 개화기 이전 우리의 식사법은 남․녀 또는 양반과 상민이 같은 상에 나란히 앉아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885년을 전후하여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형제 자매이며 만인이 동등하게 창조되었음이 교리로써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식생활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 교인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반서나 성병의 구별 없이 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는 식사법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일제의 식량 수탈
# 1-65) 미곡 수탈
:인천 창고에 쌀이 입하되는 광경이다.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쌀은 인천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특히 산미증식 계획 이후 1930년대에 일본이 가져간 쌀은 1910년대의 8배 이상이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12년~1916년 사이의 대일 수출량은 1,056,000석이었던 것이 1932년~1936년에는 8,577,000석이다. 이와 같은 무리한 미곡의 대일 수출은 자연히 조선 내의 쌀의 소비를 격감시켰다. 그리하여 산미증식계획 이전에는 한 사람당 연 소비량이 0.7188석이었던 것이, 1930년대를 들어서면서 0.4017석으로 무려 44%의 감소를 보였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식량난에 허덕이며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