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의무
황 정 산(문학평론가)
예술은 세상을 지배할 부나 권력을 창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억지로 부과하지 않는다. 세상에 어떤 독재자도, 예술을 못하게 가로막는 경우는 있지만 예술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경우는 없지 않는가? 예술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의무이다.
이 땅의 많은 시인들 역시 바로 이 자유롭고 아름다운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값싼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 문화 예술의 상품화와 권력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시인들은 흔들림 없이 예술의 마지막 방어선을 힘겹게 버티며 지키고 있다.
황폐한 세상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서, 지친 육신들에게 삶의 활기를 돌게 하는 노래 한 곡 들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강퍅한 억압에 사로잡힌 영혼들에게 자유의 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인들은 장인적 노력과 많은 시간을 바쳐온 것이다. 때문에 이런 시인들의 노력이 자유롭고 명예로운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의무의 수행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갈수록 이런 시인들의 노력이 평가절하되고 있다. 힘들어 쓴 시도 독자들이 외면하고 더더욱 시집을 사서 읽는 사람은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시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엉뚱한 짓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시가 외면받고 시인이 평가절하되는 이러한 사태를 가져온 것에 대해서는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시대와 문화적 환경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 이유이겠지만 시를 쓰고 시를 이야기하는 문학인들의 잘못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스스로 시를 독자로부터 유리시키고 시 분야에서마저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게 하는 부적절한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예술의 상품화, 시의 상품화이다. 시가 상품화되면서 좋은 시가 무엇인가라는 논의의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 무엇이 좋은 시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없을 때, 시에 대한 평가는 상업적 논리에 맡겨지게 되고 여기에서는 딱 두 가지의 기준만 있게 된다. 하나는 잘 팔리는 시가 좋은 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많이 알려진 시인의 시가 좋은 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삶과 언어에 대한 진지한 탐구보다는 무조건 튀고 보자는 자기과시적 언어유희가 좋은 시로 각광을 받으며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물론 그것을 이용하여 돈을 벌겠다는 출판자본이 한몫 거들고 나서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시잡지들은 이른바 유명 시인의 시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고 또 많은 젊은 시인들은 유명 시인들이 포진한 잡지에 시를 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이 좋은 시인지 생각해 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자신의 시를 팔고 잡지사나 출판사는 그들의 이름을 빌어 시를 팔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커져 갈수록 독자들은 시를 외면하고 만다. 여기저기 잡지마다 매번 시를 보내야하는 잘나가는 이름난 시인들은 시를 양산해야 하기에 완성도 떨어지는 시를 써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이름 없는 시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온갖 기기묘묘한 언어의 난행을 자행하는 것도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시를 읽고 좋은 시를 찾아내는 것은 기쁘고 보람찬 일이다. 상업성의 조류 속에 한낱 철지난 상품이 되어 누구의 눈에 띄지도 못하고 사라져 갔을 저 많은 각고의 산물들을 알아봐 준다는 것은 시를 쓰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또한 큰 선물이기도 하다. 이 선물을 독자들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다음 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시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푸른 광휘 내뿜는 물속나라 뿔이 있다
맥놀이가 싱싱한 풍경에 젖줄을 댄
거대종족의 신화 같은
잎맥 구부러진 해초와
하느작거리는 잔물고기 사이
예인선처럼 환히 길 여는 저 활강의 프로펠러!
희귀한 종족의 표식
다른 무리들이 해독할 수 없는 주파수
아름아름한 스펙트럼을 긴밀히 낚아채는
그들만의 지느러미
굴절과 반사 영롱한 색채로 빚어진
심해, 그 깊은 풍경을
한 호흡에 읽어내는
그들의 뿔은 초음파탐지기다
활수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흘리는 제왕의 冠이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어슬렁어슬렁
잔물고기 사이를 거닐며 굴곡 큰 생각에 잠길 때
단순한 귀를 가진 무리와
살기 띤 눈빛을 가진 무리들은
그들의 뿔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해한다
제 안에 얼비치는 흰빛을
적신호로 산란하는 물고기처럼
- 이인주, 「우니코르*」 (애지 2008년 가을호) * 일각고래
이 시는, 시인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불행한 존재로 묘사한,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라는 시를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보들레르의 시가 시인을 천상의 존재로 설정한 것에 반해 이 시는 시인을 깊은 바다에 잠겨 있는 고래로 상정한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사회에서 시인은 세상의 시선에서 비껴나 숨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타고난 자유로운 정신으로 거칠 것 없이 경계를 넘나들며 유영하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진실을 감지한다. 그래서 일상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하는 운명을 ‘제왕의 관’처럼 표식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지혜(‘단순한 귀를 가진 무리들’에게)나 권력을 위한 도구(‘살기 띤 눈빛을 가진 무리들’에게)쯤으로 오해한다.
시인은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불온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말을 통해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다음의 시는 그런 불온성을 잘 보여준다.
베란다에서 바퀴가 돈다. 한 가족을 끌어안고 돈다. 구구절절 물소리로 돈다. 한겨울 햇살을 한 웅큼 쉬쉬 말아쥐고 돈다. 잠시 반대편으로 풀다가 다시 숨가쁘게 돈다. 전력을 다해 피히잉 핑핑 돌고 돈다. 스스로 시계 방향으로 힘차게 돈다 그들은 자력을 중심에 둔 관계로 항용 시계 방향으로만 돈다
고 믿으며 베란다 문을 연다. 핑그르르 현기증이 돈다. 인라인 스케이트가 돈다. 뭉개뭉개 짝을 지어 돈다. 공원 분수대를 휘휘 감으며 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돈다. 공원 분수대를 휘휘 감으며 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돈다. 저마다 헐떡대며 죽을똥 쌀똥 돌고 돈다. 저절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그들은 왼쪽에 심장을 둔 관계로 줄곧 반시계 방향으로만 돈다
고 믿고 또 믿었지만, 그들의 몸이 얹힌 바뀌는 줄기차게 시계방향으로만 돌고 돌았다
- 강희안, 「바퀴의 향방은」(현대시 8월호)
돌아가는 바퀴는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이고 힘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쫓기듯이 거기에 휩싸여 돌아갈 뿐이다. 강요된 힘에 의해 상투적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의미와 방향을 상실하며 사는 게 대부분 우리들의 삶의 모습일 게다. 그리고 우리를 그런 일상 속에 몰아넣으면서 그게 자력 때문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들기도 하고 때로 왼쪽 심장을 말하는 정서적 이유를 들이대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가를 지적한다. 바로 특별한 연의 구성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돈다’와 ‘고’ 사이를 연 구분함으로써 그러한 논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거짓말로 판명되고 마는가를 아주 선명하게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로 세상의 모든 권력과 힘들은 인간을 질서와 타성 속에 옭아매어 누군가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상투화된 권력의 언어들에 저항하며 세상의 억압을 거부한다.
다음 시도 역시 은밀하게 불온함을 획책한다.
우리는 서로의 가슴에 물을 쏟아 부었다
두 눈을 감은 채 팔을 내저으며
목만 내밀어 수조에 떠 있기도 했고
깨어진 유리병 바닥에 잠겨 잠들기도 했다
어떤 날은 파도에 휘말려
팔이 뽑힌 채로 접시에 놓여 있기도 했다
그런 다음 날엔
남은 다리만으로 길게 줄을 선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구름 위로 힘차게 날아올라
다시 온전해진 몸으로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 박강우, 「물새를 키우면 사람이 될 수 있을까」(현대시학 7월호)
이 시에서 물새는 곧 사람이다. 제목의 ‘물새를 키우면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고 묻는 시인의 말은 사실은 사람이 물새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새가 사람이라면 바로 그것은 이 시의 상황처럼 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수평선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물새가 될 수 없듯이 물새 역시 키워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자유롭고자 해도 그것은 수조 같은 집이나 직장에 갇혀 있거나 술에 취해 세상을 잊고 잠들어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의 희생양이 되어 사회에서 내몰리거나 이 모든 것을 넘어서 초월을 시도해보지만 그것 역시 줄을 서야 하는 질서의 원환을 넘어서지 못하는 소외된 행위일 뿐이다. 결국 이 시를 읽으면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평온한 일상이 사실은 우리를 접시에 올려놓은 통닭으로 만들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평온한 일상을 거부하며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돌아보도록 은밀히 선동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질서에 대항하고 딴죽을 거는 이러한 불온성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에서 기인한다. 그러한 질서 속에서 끝없이 자신을 소모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이 바로 이러한 불온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우리시 월평>
첫댓글 시집 코너가 사라진 책방엘 가고 싶지 않아서 저도 인터넷으로만 시집을 구입하고 있긴 하지만 돈 안 되는 시 시인의 처지가 참으로 서글픕니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요? ㅎ
시인이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시점과 현실의 괴리 같은 것이겠죠. 그러나 하심으로 놓아 두면 자연스레 흘러갈 것입니다. 그래도 시를 쓸 자 쓰고 제 길에서 즐거운 자 즐거울 것이니까요. 회장님도 그걸 알면서 걸어가시는 분, 하루 이틀 걸어갈 길도 아닌데... 인간이 있고 시가 있다는 것이 제 근본적 소신입니다. 우리 동인의 미덕 또한 그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