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자신을 유지하게 하는 두 가지 내적인 힘이 있다. 그것은 정신 에너지인 리비도(Libido)와 타나토스(Thanatos)다. 이 둘은 상대적이면서도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선 리비도를 살펴보자!
우리는 리비도를 흔히 성욕으로 알고 있는데, 단순히 이 개념보다는 더 포괄적 개념으로 사랑, 즉 건설적인 힘이다. 영원할 것처럼 우리를 열심히 살게 하는 원천인 그 리비도는 이 세상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피워 올린다. 몸을 유지하게 하는 식욕, 종족을 유지하게 하는 성욕,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양심과 정의, 이 모든 것이 리비도의 힘이다.
프로이트는 이 리비도가 구축한 정신구조물들을 본능(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대별하였고, 또 의지와 인지 여부에 따라 의식과 비의식적인 것으로 나누었다.
리비도라는 에너지가 우리 몸과 어떤 대상에 부착(附着)되면 어떤 사건을 만들고 느낌을 만들며 생각을 만든다. 이는 한 사람, 한 그룹(적게는 가족, 국가, 지구)의 역사나 서사(敍事)가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울고 웃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인간사(人間事)다.
이 리비도 에너지 부착(Adhesion)은 집착을 수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신경세포가 긴장하여 지치게 된다. 우리는 가끔 그것이 끔찍해져 탄식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 시점이 타나토스가 발동될 시점이다.
타나토스(Thanatos)가 우리를 존재케 한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타나토스 하면 많은 이들이 ‘죽음의 본능’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비도만큼이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고, 흔히 알려진 것보다 개념이 더 포괄적이다.
타나토스를 죽음, 파괴의 본능이라 설명하기보다는 리비도를 철수(撤收: 부착의 반대 개념)시키는 작용으로 설명하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우리를 어떤 일에 몰입해 죽을 똥 살 똥 매달리게 하는 것이 리비도의 힘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나 물건이나 사건에 리비도가 부착 발동되게 되면 우리 신경은 긴장되는데 이것이 스트레스다. 우리 심신은 어느 정도 일하면 쉬어야 하고, 때로 그 일에서 벗어나 휴식, 여행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타나토스다.
리비도가 잔뜩 부착되어 집착이 심한 스트레스 상태를 느슨하게 이완시켜 여유를 갖게 한다. 어떤 때는 과도한 스트레스가 지속될 것 같으면 아주 리비도를 철수시키는 극단의 선택을 하고, 그것이 인간을 원래의 무(無)로 환원시키는 죽음의 상태다.
지금까지 현대문명은 리비도의 시대였다. 우리나라 노래나 연속극에서 정말 신물 나게 듣는 것이 사랑타령이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Very like’이고, 이는 집착의 다른 이름이다. 이는 신경을 잔뜩 긴장시키고(나쁜 일만 긴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일은 가장 나쁜 일만큼 신경을 긴장시키고 스트레스를 준다), 또 영원하지도 않으며,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도 없어 항상 노심초사한다. 현대인의 이런 생활 양태는 스트레스를 극에 달하게 하고 있고 지나치게 소비되었고 지쳐 있다.
리비도가 추구하는 것은 불꽃놀이와 흡사하다. 한 순간의 희열에 들떠 있다가 시간들은 허무하게도 과거 속으로 사라진다. 과연 그것이 삶의 전부란 말인가? 이런 근본적 물음에 현대 철학과 미학은 대답을 못하고 미궁에 봉착해 있다. 그래서 선지식(先知識)들은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그 구체적 실천 중 하나가 명상(瞑想) 일 것이다. 이 명상은 덕지덕지 붙은 리비도를 떼어내고 고요 상태로 자신을 회향(回向)시키는 작업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타나토스의 시대다. 아니 시대여야 한다. 불가(佛家)의 삼법인[諸行無常, 諸法無我,一切苦(혹은 涅槃寂靜)]은 기원전에 벌써 내걸은 타나토스의 슬로건이다.
사랑 노래는 그만하자. 이제 실연(失戀)을 하고 여행을 떠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