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거사(簫謙居士)와 만교(晩交)하다
내가 선화(禪畵)로 이름 높은 소공거사(簫謙居士 :李明雨)를 만나 교유하며 돈독한 정의를 나누면서 만년을 보람 있게 지내기 시작한 것은 한참 늦은 1999년의 가을부터였으니 만교(晩交)다. 그날이 선친의 유고 <역주 척재문집(譯註 拓齋文集)>이 출간되어 그 출판기념회를 열었던 10월 9일인데 이날 한복에 염주를 길게 늘어뜨리고 백색의 배레모를 쓴 소공께서 일찌감치 오시어 식장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약간 당황하였었다. 평소에 서로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초청장도 보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분의 명성이야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노불(老佛)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만나서 인사드리고 이야기 나눌 기회도 없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내가 알고 있는 이 분의 명성이라는 것이 달마도를 잘 그리고 두주를 사양하지 않는 호걸스러운 재가스님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출판기념회를 마친 얼마 후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겸하여 성황산 뒤 옥여동(玉汝洞)에 있는 전향원(篆香園 :소공이 살고 있는 집의 당호)으로 소공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더니 그렇게 반갑게 맞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선친의 문집을 잘 읽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다향이 그윽한 선방에서 차 대접을 받으며 금방 십년지기인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불교야 말할 것도 없지만 고서화나 골동 등에 대한 식견이 해박한 데 놀랐으며 피차에 금방 의기가 투합하였다.
이후 나는 자주 소공집을 방문하였고 소공 또한 나를 자주 찾았었다. 이 분은 나보다 8년이 연상으로 1923년 정읍군 감곡면 화봉리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6세인 1939년에 출가하여 금산사에서 수계(受戒)하고 불교전문강원을 거쳐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백양사 등에서 12하안거(夏安居)를 성만(宬滿)한 분이다. 한국전쟁 이후 월명암과 내소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6·25이후 소실된 월명암을 복원하고 퇴락한 내소사를 중수하는 등 각고의 노고를 다한 분인데 책상물림인 선승(禪僧)이요 학승(學僧)인 소공이 승방의 살림을 꾸리다가 불량한 사기꾼들과 소인배들의 모함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산사에서 물러나 재가승이 된 것이다. 1960년 이후 유천리 뒤 야산에서 척박한 뙤밭을 일구어 농사도 짓고 화목을 가꾸며 선화를 그리면서 30여년을 사시다가 1990년 이후에 부안읍 성황산 북록 옥여동에 은거하고 2005년 여름에 입적하였다.
이 분은 강한 색감의 탱화보다는 묵향이 그윽한 먹그림이 선(禪)의 경지와 맥이 같아서 선화를 그렸고 달마대사에 몰입하였다고 한다. 16세까지는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이후 출가하여 금산사에서 수계하였으며 불교전문강원에서 경전을 공부하였는데 당시 금산사에는 불교경전의 대강백인 김포강(김영수)이 경전을 강의하고 있던 때였다. 타고난 그림재주가 있었던 터라 당시 우리나라 금어(金魚 :불상 등을 그리는 화공)의 1인자인 김일섭(金日燮)이 김제 부용사에 주석하고 있어 그 분으로부터 선화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전향원에 들어서면 100여 평 되는 정원에 온통 진귀한 수목들이 무성하고 온갖 화초들이 사철 다투어 피는데 돌탑과 석불상들까지 가득하여 정신이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툇마루에 올라서면서부터 서화와 수석이며 각종 골동품들이 벽면이며 빈 공간을 채우고 넘쳐 주인의 인품과 취미의 격조를 말하여 주고 있다. 그 대부분이 그림과 바꾸어 모은 것들이라고 한다. 26세에 이웃마을의 이두순(李斗順 :般若心)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선혜(禪慧)스님은 서울 노원구에 있는 법륜왕사의 주지요, 큰따님은 비구니 동명(東明)이며, 둘째아들 석당(石塘) 이송헌(李松軒)군은 촉망받는 중견화가로 1996년에는 조계사 불교회관에서 부자가 <父子禪畵展>을 열어 그 그림 솜씨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막내딸 석연당(石蓮塘) 이미자(李美子)도 서화에 능하다.
이후 소공과 나는 한 주일이 멀다하고 자주 만났다. 만나면 나는 주로 소공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입장이다. 하안거, 동안거며 화두, 게송, 용맹정진, 죽비경책의 생소한 용어들이며 만해, 만공, 효봉, 일타, 해안, 서옹스님 등을 모신 일화나 승방의 풍속들이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 같아 신기로웠었다. 어느 날 소공께서 내게 그림 한 점을 선사하고 싶다며 무슨 그림을 좋아하느냐기에 엉겁결에 포대화상(布袋和尙)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러고 얼마 후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고급 족자로 표구된 대작 한 점을 펼쳐 보인다. <皆大歡喜明州布袋和尙圖>다. 135cm에 70cm 크기로 보통의 가정집 벽에는 걸 수가 없을 정도의 대작이다. 78세의 노선사가 수전기로 떨리는 손길에 붓끝을 모아 그려주신 그 정의에 감격하였는데 나는 고작 표구대 15만원만 드리고는 해창의 어느 가든에 가서 바지락죽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고작이었으니 염치없는 처신은 예나 이제나 다르지 않다.
한 번은 전향원에 들렸더니 묵향 그윽한 선화 한점을 놓고 이리저리 상량하고 계시다가 나더러 “이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 알겠느냐.”고 하였다. 동양화나 불화 등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를 읽는다 하리만치 고사와 뜻이 깊어 주눅이 들었으나 자세히 들려다보니 호계에서 세 도인이 웃고 있는 <虎溪三笑>의 그림 같았다.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하고 있는 혜원법사(慧遠法師)를 찾아간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 등 유불선의 세 도우가 헤어질 때 정담의 무아경에 빠진 나머지 혜원법사의 안거금족(安居禁足)의 맹세를 어기고 호계를 건너서야 호랑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이를 깨닫고는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는 고사의 그 그림이다. 내가 이를 이야기하며 그런 그림 아닙니까. 하니 “내 김교장은 아실 줄 알았지!” 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보였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며 나더러 학문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호계삼소의 고사는 유가에서도 익히 전해오는 고사로 내가 어렸을 때 도연명을 좋아하셨던 선친으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여서 때마침 잘 써먹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림은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가져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하시며 그 그림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이 분은 이렇게 마음이 맞으면 아무리 귀한 것도 쉽게 주어버리는 성품이어서 부인 반야심(般若心)이 늘 불만인 것 같았다.
소공은 다도인(茶道人)이다. 차를 마시는데 무슨 격식을 차리기보다 항시 다향과 묵향이 가득하고 의재(毅齋)와 지운(遲耘)선생의 유묵이 그 격조에 잘 어울리게 보벽(補壁) 되어 있는 방에서 다담을 나누며 사셨다. 특히 지운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셨는데 정원의 화목들 중에는 지운 선생이 심어놓은 것들도 꽤 될 것이다. 소공은 내가 녹차의 향과 맛에 익숙하지 않음을 알고는 녹차 마시기를 권하였으며 다구(茶具) 일체를 준비하여 손수 들고 내외분이 누옥을 내방하였고, 전남의 보성에 약간의 차밭을 가지고 있어서 열반하실 때까지 내게 차를 대어주곤 하였다. 그러면서 속세 와는 거의 인연을 끊고 살기 때문에 외로워 하였다. 주변에 학문이고 노불선담(老佛禪談) 등을 주고 받을 분도, 들어 줄 분도 없음을 허전해 하였지만 나 또한 들어 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처지였다.
소공은 열반하기 두어 달 전까지도 선화의 붓을 놓지 않으셨다. 새벽에 일어나 예불을 마치면 참선하고 아침 산책을 하시고는 한 두 시간씩 화실에서 작업을 하였는데 한 해 전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병원 출입을 자주 하였다. 2005년 여름 서울의 병원에서 퇴원하셨다는 기별을 받고 전향원으로 찾아뵈니 초췌한 몰골로 누워 있다가 한사코 일어나시어 잠시 더듬더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무렵에는 귀까지 잘 안들려 보청기의 도움을 받았었다. “내가 이제 간들 무슨 여한이 있겄어. 모두가 뜬구름인 것을. 공연한 욕심이지. 많이 살고 가는 고만!” 하시며 웃으셨다. 이것이 소공이 내게 들려 준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 다음 날 새벽에 열반하시었으니 만교로 만나 7년 여 동안 임천(林泉)의 샘물 소리처럼 맑고 심오한 말씀 많이 들려주시고는 뜬구름 가뭇없이 사라지듯 가신 것이다. 그립고 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