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꿰뚫고 있는 단순한 통일 원리에서 창조주 신의 의사를 본다는 '신앙' 은
갈릴레오에서 뉴턴에 이르러 '확신'이 되었다.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해 '아는 것이 힘' 이라고 하는 생각을 현실로 만들었다.
신의 의지를 아는, '신의 형상' 인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위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과학은 '아는 것이 힘' 이라고 하면서 자연에 관여하는 많은 가치를 산출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출산의 고통을 크게 더한다", "이마에 땀을 흘려 밥을 먹어야 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는 말에서 보듯
원죄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얻었다는 착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원자력의 꿈을 갖고 비순환의 초독물을 발생시켰다.
'과학 기술교' 라고 하는 사교는 이를 '제3의 불' 이라고 하면서 손에 가지고 노는 데까지 이르렀다.
20세기 후반에는 컴퓨터와 로봇에 의해 '얼굴의 땀' 으로부터 해방되고, 장기이식과 유전자 조작에 의해
흙으로 돌아가는 일, 죽음조차도 면하는 가능성을 바라는 '환상' 속에 놓이게 되었다.
스스로 신으로 착각하게 되면서 농경문명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소박하게 살 때 가지고 있었던 신에 대한 외경심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피조물의 좋은 청지기로서의 조심스럽고 아름다운 모양도 사라지게 되었다.
'과학 기술교' 의 '신기' 에 점차 경도되면서 자연에 대한 착취는 강화되고 자연파괴는 확산되었다.
인간중심주의가 포악함으로 바뀌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생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며 공생해왔다.
다양한 생물들이 공생하는 야생의 세계에서 생물들은 제각기 사는 방식을 가지고,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에 의해 냉엄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
먹고 먹히고, 도와주고 도움받는, 길항과 억제가 따른다.
물질순환에 의한 공생의 네트워크이다. 균형이 유지되면서 안정된 환경이 형성된다.
그 안정은 생존을 보장해주는 조건임과 동시에 삶과 죽음의 팽팽한 긴장에 의한 공생공빈이기도 하다.
생존에 대한 욕망은 야생에 있어서는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이지만,
인간에 있어서는 의식적이고 인위적인 욕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광포함의 원인이다.
과학기술 문명이 그 거대한 기술력을 갖고 억지로 자연계를 쓰러뜨리고 자랑해온 것에 대한 반성으로써
그 대극적인 사상에 주목하는 것은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자연의 천리를 거스르지 않고 무욕허심하여 낭비를 줄이는 곳에 유위자연이 있다고 하는 사상에서
21세기의 위기를 탈피할 수 있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 고 한 것은 '불교의 경제학' 을 주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을 연결하는 키워드는 간소화와 비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병에 걸리지 않는 노력과 자가 치유, 그리고 자립적인 삶의 방식이 중요하다.
생명의 자연의 예정조화를 신뢰하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을 일상생활화 하는 것이다.
병에 걸려도 바로 의료기관과 의사, 약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이다.
병자는 의사가 고친다는 의사중심의 발상에서 병자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고대 희랍의 의성 히포크라테스가 건강의 회복과 관련하여
"자연의 힘을 돕는 것이 의사의 임무" 라고 한 것도 '병을 치료하는 것은 자연' 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생물에게 부여해 준 살아가는 힘을 거스르는 것 보다는 자연의 본성에 따라 순종하며 무리없이
사는 방법이 쾌적하다.
자연치유력과 건강의 균형이 스트레스가 적은 상태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예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공환경이 제공한 즉석의 쾌적함은 생물로서의 인간 내면에 상처를 준다.
체온조절 등 생명유지의 균형을 관장하는 자율신경을 교란시키기도 하고,
보행을 통해 골격계의 비뚤어진 것을 제거하고 균형을 유지해온 기능을 상실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스턴트적 쾌락에 젖어 인공환경에 빠짐으로써 기계적 환경에 몸을 맡기는 생활의 위험성은,
유구한 생명의 역사 속에서 단련되어온 신묘한 생명력에 반역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하시모토 게이조는 이 원시감각을 믿고 "기분이 좋은 것이면 무엇을 해도 좋다" 고 하면서
신체의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는 원리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
숨을 내쉬면서 기분 좋은 움직임을 천천히 행한다.
기분이 가장 좋은 곳에서 정지하고, 순간적으로 힘을 뺀다는 간단한 정복법을 조체법으로 처음 제시하였다.
유도정복이나 척추교정과 같이 외부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각적이고 자율적인 쾌감각을 지침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립성과 주체성을 존중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의 본성과 정합하여 생명의 힘과 조화를 이룬다.
생명은 쾌, 불쾌의 감각에 의해 생존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즐거움을 느낌으로써 자손을 남기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원시감각이 곧 생존에 대한 하늘의 소리라 확신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의 본성에 합치되기 때문이다.
경제논리에 따른 수량위주의 농업은 농장의 생태계를 파괴, 혼란시킴은 물론 토지로부터 양분을 빼앗아
지력을 저하시켰다. 병충해의 증가와 연작장애 등이 골머리를 아프게 하고,
농약 등 화학자재에 의존하는 경향이 한층 두드러지고 있다.
토지생산력의 쇠퇴를 공업력으로 지탱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기상이변 등에 적응하는 힘도 약해진다.
자연농법에는 불기경, 무비료, 무농약, 무제초의 네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불필요한 인위를 가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바라보고 있다는 측면에서 노장적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후꾸오까마사노부는 말한다.
"작물과 가축은 이미 자연의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진짜 대승적 자연농법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적어도 자연에 가장 가까운 자연농법을 탐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먹을거리는 '기르는' 것이 아니며 수확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자연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유기농업에도 자연의 뜻을 따르는 생각이 흐르고 있으며 자연과 조화되는 인위를 탐구하는 것이다.
과학적 근대농업은 환경 파괴적이며 석유에너지 의존형인 이상 영속성을 갖지 못한다.
21세기의 생존은 자율적인 의(醫)와 식(食)에 의한 생활의 전제 위에, 유기농산물을 제공하는 구조일 때
그 가능성이 보인다. 자연을 신뢰하고 순응하는 토대 위에 개척되는 것이다.
대자연에 대한 외경과 공생공존하는 생명에 대한 신뢰는 자연착취의 혼미로부터 탈출구를 제공하고 있다.
대지에 발을 딛고 서두르지 않고 사는 행복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