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집권 시기의 교황 비오 11세도 공산주의의 혁명과 확산 뒤에는 이를 조종하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보았다. 교황은 유대인을 가리켜 “공산주의는 어떤 중앙 권력의 조종 아래 여러 민족의 문화와 특성에 따라 교묘하게 변형된 형태로 전파된다. 그들 극소수의 손에 엄청난 권력과 경제적 독재권이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세상이 돈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조작하며 여신을 통괄한다. 이처럼 경제와 사회 전체의 핏줄을 움켜쥐고 있어 그들 앞에서는 감히 아무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고 혹평했다.
히틀러에게 이론상 빌미는 레닌과 독일 내 유대계 공산주의자들이 제공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혁명의 많은 지도자들이 유대인이었다. 그 뒤 독일혁명도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점에 착안해 히틀러는 이를 아예 ‘유대인은 좌익’이라는 공식으로 만든 것이다. 실제 독일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유대인이 많았다. 유대인은 러시아 사회에서도 엄청난 반유대주의에 시달렸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이후 독일 등 유럽 내 자본가 계층 곧 부르주아 계급인 유대인들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린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유대인들이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성공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독일 내 유대인은 독일의 경제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독일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너무 나선다고 느꼈다. 더구나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 경제가 위축된 것과 달리 독일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 폭은 더 넓어지고 활발해졌다. 점차 독일인들 사이에서 강한 반유대 정서가 생기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대중의 반유대적인 공감대를 잘 이용해 정권의 기반으로 삼고 나아가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대의 재앙을 연출했다.
히틀러는 세계사를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인종들 사이의 끝없는 생물학적 투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아리안 족의 유럽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유럽의 주된 적은 국제적인 유대인 집단이었다. ‘국제적 금융자본주의’와 ‘국제적 사회주의’가 유럽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이 두 요소가 유럽 사회를 뒤집어엎으려는 유대인들의 두 핵심 무기라고 보았다. 유대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유대인들이 뒤에서 조종한다고 믿은 볼셰비즘을 아리안 인종에 대한 주된 위협 요인으로 본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는 그가 1933년 1월 30일 총리가 된 지 1개월 만에 시작되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다섯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전개되었다. 단계마다 그 강도는 강화되었다.
1단계는 나치가 정권을 획득한 1933년 2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유대 상점의 약탈, 유대인에 대한 산발적 폭행, 유대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그 뒤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좌익세력을 척결한 히틀러는 이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그는 1934년 제3공화국 총통에 오른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에게는 신성로마제국이 제1제국이고 1871년 통일제국이 제2제국이며 자신이 수립한 나치 체제가 제3제국으로써 앞으로 천 년은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대한 독일제국의 국민들이여, 본인은 지금 이 시간부로 베르사유조약을 전면 폐기할 것을 선언한다! 이제 독일제국 군은 무제한으로 무장할 것이며, 전쟁 배상금은 단 한 푼도 지불하지 않겠다!” 히틀러는 1935년 베르사유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재무장을 천명했다. 노골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1차 대전의 패배로 국민적 자존심이 바닥을 기고 있던 찰나에 점차적으로 자국의 위상을 드높임은 물론 자신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있었으니 자연히 히틀러와 나치스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제3제국이 재무장을 시작하자 종전 이후 10만 명 안팎으로 유지되던 독일 군은 순식간에 6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2단계는 1935년 뉘른베르크법의 제정에서 시작되었다. 이 법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인종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유대인 학살의 최초 법적근거가 된 이 법은 독일인과 유대인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법이었다. 이 법의 전문은 독일 혈통의 순수성을 독일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힌다.
1조 1항에서는 독일인과 유대인의 결혼을 금지했다. 독일 내 뿐 아니라 외국에서의 결혼도 무효화했다. 독일인과 성관계를 가진 유대인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성관계를 맺은 독일인도 3개월 동안 정신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법에 따라 유대인과 입을 맞추거나 손잡는 행위도 처벌을 받았다.
또한 유대인은 공공 의자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 외에도 국립학교의 유대인 자녀 입학금지, 의사나 검사 자격의 박탈, 유대인임을 표시하는 노란색 별 부착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유대인의 피를 받은 자는 모두 공민권이 박탈된다고 규정한 이 법으로 인해 유대인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업체를 박탈당했다. 조부모 중에 한 명이라도 유대인이면 손자까지 그 대상이 되었다. 이후 유대인임을 가리는 기준이 조부모 중에 유대인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로 자리 잡았다. 유대인 소유 기업은 배척받아 파산했으며 유대인은 지방정부와 법원, 대학에서 쫓겨났다.
이 법의 3조는 유대인은 45세 이하의 독일 여성을 가정부로 두는 것을 금했다. 실제로 60세 된 독일 노인이 과거에 자기 집의 하인으로 있던 30세의 유대인 여성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사형당한 경우도 있었고, 자기 집에 초대한 유대인에게 “외투를 벗고 편히 앉으라”고 말했다가 처벌당한 독일인도 생겨났다. 4조 1항은 점입가경이다. 이 조항은 유대인이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법을 어긴 자는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유대인은 더 이상 독일 국민이 아니었다. 1933년부터 1938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련의 법령, 몰수, 대학살로 히틀러는 독일 유대인의 정치적 ·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3단계는 조직적인 폭력이 이루어지고 대량으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냈던 시기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촉진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일부 시온주의 단체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유대인 국가 건국을 위해 아프리카 동남부의 마다가스카르 섬을 세계시온주의의회에 공식 제안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전쟁 발발 전 국가사회당 정부의 유대인 정책 주안점은 격리와 국외이민이었다. 반유대인주의에 대한 여러 선전 활동이 성공을 거두자, 나치는 반유대주의가 독일이 다른 유럽 국가에 진출하는 데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38년 9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종족법을 본보기로 반유대법을 공포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으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도 독일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모든 유대인 남자는 공식 문서의 이름과 성 사이에 ‘이스라엘’을, 여자는 ‘사라’를 써야 했다. 유대인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10월에는 모든 독일 유대인의 신분증이 회수됐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인접한 폴란드로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폴란드는 국경을 열어주지 않았다. 1만 5천여 명의 유대인들이 국경에서 노숙을 하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이때 엄청난 사고가 터진다. 1938년 11월 초 열일곱의 어린 유대인 망명자가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참사관을 살해한 것이다. 독일의 유대인 학대에 대한 한 젊은 유대인 청년의 항거였다.
히틀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동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을 펼쳐 나갔다. 그는 이 사건을 세계 유대주의의 음모로 돌렸다. 그리고 각 학교와 기업체에서 거대한 장례식, 베토벤 음악, 선동적 애도 등으로 이루어진 행사를 진행했다. 나치 돌격대가 마지막 역할을 맡았다.
1938년 11월 9일 저녁 나치 당원들과 돌격대원이 앞장서고 평범한 독일 시민들까지도 합세해 손에 횃불과 벽돌 조각과 몽둥이를 들고 유대인 사냥에 나섰다. 나치는 스스로 이 날을 ‘제국 수정의 밤(Reichs kristall nacht)’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산산이 부서져 거리에 널린 유대인 상점의 유리조각들이 수정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날 저녁 독일 전역에서 2백여 유대교 회당과 유대인 묘지, 수천의 유대인 주택과 상점이 파괴되고 불탔다. 이날 최소한 유대인 91명이 살해되었고 2만 명 이상이 부헨발트와 다하우의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대다수 독일 국민들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틀 사이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던 거의 모든 유대교 회당과 유대인 기관이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8천여 곳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했으며, 2만 5천여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사건은 아돌프 히틀러가 지시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의 서막이었다.
그 뒤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대인의 재산 대부분은 가혹한 벌금과 기타 강제징수로 몰수되었다. 그리고 독일은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해 이들 나라의 유대인을 구속시켰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헝가리도 1938년 히틀러의 법을 모델로 반유대 법령을 제정했다. 루마니아에서도 1939년 11월 유대인의 삼분의 일 이상이 공민권을 박탈당했다.
히틀러는 전쟁의 배후에는 유대인의 음모와 이를 지원하는 유대 금융자본가들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재앙을 예고했다. “유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유럽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는 원만한 합의에 이를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선민이라면서 다른 민족들의 몸체에 기생하면서 그들의 생산적인 노동을 착취하는 행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처럼 유대인도 정직하고 생산적인 노동으로 그들의 삶을 꾸려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만약 유대 국제금융자본이 다시 한번 유럽의 국가들을 세계대전으로 내모는 데 성공한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 유대인의 전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때 이미 유대인을 전멸시킬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히틀러는 왜 유대인을 몰살하려 했는가. 그 배경은 1차 세계대전에서 찾을 수 있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러시아에서 피난 온 독일인들로부터 과격한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태도가 돌변했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에게 가장 강력한 위협적 존재였다. 독일인은 유대인을 볼셰비키 혁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공산주의의 배후는 유대인들이라는 것이 유럽인들의 보편적 시각이었다. 히틀러는 어떻게든 독일의 공산화는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볼셰비키 유대인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훗날 러시아 침공의 가장 주된 이유였다.
4단계는 1939년 9월 2차 대전 발발 이후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포성이 폴란드를 뒤흔들었다. 이제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전쟁이 일어나자 유대인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실제로 사업을 하거나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다. 또 토지를 가질 수도 없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과는 사귈 수 없었다. 공원이나 도서관, 박물관에조차 갈 수 없었다. 그래도 1939년까지는 정부에 돈만 내면 독일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그해까지 독일에 거주하는 50만 유대인 중에서 30만 명이 독일을 떠났다.
1939년 9월 2차 대전 발발 후부터 모든 독일계 유대인과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을 폴란드에 마련한 게토에 보내졌다. 그들은 유대인 거주 구역 ‘게토’ 안에서만 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병들거나 굶어서 죽어 갔다. 문제는 당시 폴란드에 살고 있던 3백여만 명의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의 삶은 비참했다. 저녁 8시 이후 외출이 금지됐다.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없었다. 모든 가정집의 전화기가 압수됐으며, 공중전화에는 ‘유대인 사용금지’라는 경고 문구가 붙었다. 유대인은 식량 배급에서도 제외됐다. 가지고 있던 것을 서로 나눠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차별’이었다. 여섯 살 이상 모든 유대인들은 가슴에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유대인(Jude)’이라는 글씨가 적힌 다윗의 별을 착용해야 했다.
당시 독일 점령 지역에는 1,634개의 집단 수용소와 9백 개의 강제 노동수용소가 있었는데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으로 죽어 갔다. 노동의 강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강제 노동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수용 이후 평균 수명이 3개월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있다. 1941년에는 이주 금지령도 내려졌다. 다행히 그전에 독일과 폴란드를 빠져나가 목숨을 구한 행운아들도 있었다. 도망치지 못한 유대인들은 꼼짝없이 앉은 자리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5단계는 1941년 러시아 침략 이후 강제수용소의 목적이 구금에서 살인으로 변한 시기다. 전쟁에 돌입한 천 년 제국은 국민적 지지를 더욱 확고히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 위해서는 민족적 단합을 주도할 새로운 희생거리가 필요했다. 민족의 우수성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일 내 비독일인을 소탕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것은 곧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1940~1941년, 폴란드에서 다수의 유대인이 계속해서 죽어 나간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대량 살육이 시작된 것은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개시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이 작전의 목적은 유대 적색혁명의 총본산을 섬멸해서, 당시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던 5백만 명의 유대인을 수중에 넣는 일이었다. 1941년 3월 3일, 요들 장군은 군사 일지에, 대소련 작전이 개시되는 날에는 ‘유대-볼셰비키 지식 계층’ 박멸을 위해 친위대 헌병 조직을 육군 최전선 지역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한 ‘히틀러의 결정’을 기록하고 있다.
소련 영토 안의 유대인 가운데 4백만 명은 독일 육군이 1941년부터 1942년에 걸쳐 제압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250만 명은 다행히 독일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탈출했다. 나머지 주민의 90퍼센트는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나치 특별 행동대에 의해 9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거의 모든 유대인은 시 교외에 있는 웅덩이 곁에서 사살되었고, 웅덩이는 그대로 무덤구덩이가 되었다. 1942년부터는 유대인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하루 1만 2천 명까지 처리할 수 있었다. 그 가스실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시체로 변해갔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순전히 학살을 위해 매일 6천 명 씩 유대인을 선발해 이동시키는 수용소행 열차가 운행됐다. 가스실은 ‘샤워실’로 불렸다. 유대인들이 샤워를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가스실로 향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는 다섯 개의 가스실이 있었다. 하루에 6만 명을 살해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만 그렇게 2백만 명 이상 살해됐다.
유럽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나치의 통제 아래 있던 유대인은 약 9백만 명이었다. 나치는 이들 가운데 6백여 만 명을 학살했다. 나치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던 유대인의 67퍼센트를 죽였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희생당한 유대인은 당시 유럽과 러시아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 1천 1백만 명의 절반이 넘는 숫자다. 나라별로 대략 폴란드에서 3백만, 러시아 120만, 루마니아 35만, 헝가리 30만, 체코 27만, 독일 18만, 리투아니아 13만, 네덜란드 10만, 프랑스 9만, 그리스 6만, 유고 6만, 오스트리아 6만 명 등이었다.
이때 유대인만 희생당한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3대 적을 전멸시킬 인종청소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공산주의자요 두 번째가 소련 공산체제를 주도적으로 세운 유대인이었으며 그리고 세 번째가 슬라브 족이었다. 이들을 함께 없애려 작정했다.
유럽 각국에서 잡아온 유대인, 집시, 공산주의자 및 비유대인 노약자 등 인종청소를 위한 대량학살이 시작되었다. 중세부터 시작된 유대인 박해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지만 홀로코스트(대학살)만큼 그 규모나 잔혹성이 두드러진 적은 없었다. 히틀러는 집권 이듬해에 ‘유전 위생법’이란 것을 공포했는데 나치는 이를 바탕으로 유대인 이외에도 집시, 러시아인 등 천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극을 뻔히 보면서도 유럽 사회는 침묵했다. 교회도 침묵했다. 당시 바티칸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았다. 1943년 9월부터 1944년 6월까지 독일이 로마를 점령하는 기간 동안, 독일은 교황이 보는 앞에서 약 2천 명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으로 실어 갔다. 이들 중 십여 명만 제외하고 모두 살해됐다. 물론 교황이 바티칸에 477명의 유대인을 대피시키긴 했지만, 이는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였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폴란드 유대인의 90퍼센트 이상이 살해됐다. 이때 폴란드의 랍비 바이스만델은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무고한 유대인 특히 어린아이들만이라도 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치 치하에서 학살된 6백만 유대인 가운데 백오십만 명이 어린이였다. 때문에 그의 간구는 절규에 가까운 호소였다. 그러나 그가 교황청으로부터 답변은 매몰차다 못해 소름 끼쳤다. “이 세상에 무고한 유대인 피란 없다. 모든 유대인의 피는 죄악이다. 당신들은 죽어야 한다. 죄(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 때문에 당신들은 이러한 형벌을 받는 것이다.”
벨기에에서는 6만 5천 유대인 가운데 4만 명이 죽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총파업까지 있었지만 70퍼센트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우크라이나,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노르웨이에서는 거주 유대인의 50퍼센트 이상이 죽었다. 그리스에서는 6만 유대인 중 5만 4천 명이 살해되어 고대부터 이어온 유대인 사회가 붕괴됐다.
종전 후 독일(서독)은 당연히 자국의 역사로서 나치스의 민족말살 계획을 중대한 범죄로 인지하고 전범들을 철저히 찾아내 법정에 세웠다. 독일은 패전 후 일찌감치, 나치를 전승국이 심판하기보다는 독일인 스스로가 나치의 행위를 범죄로 다루어 독일의 법원에서 심판하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주주의의 재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며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여겼다. 그리고 후대에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치 않도록 교육에서도 철저히 다루고 있다. 독일-폴란드-프랑스 세 나라는 공동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다. 독일의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통해 나치 독일의 만행을 그대로 배우고 있다. 또한 전쟁 이후 독일의 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과오를 사죄했다.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 게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스의 범죄에 대해 깊은 사죄의 자세를 표했다. 그리고 지금도 독일의 과거사 청산은 계속된다.
유대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민족은 형극의 역사를 반드시 영광의 역사로 돌려놓는 힘을 갖고 있다. 유대인들은 쇼아(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결코 잊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독립기념일 전날을 쇼아의 날로 지킨다. 독립을 자축하기 이전에 민족의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예루살렘에 있는 쇼아 추모관인 야드 바셈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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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1978년 KOTRA에 입사.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무역관을 거쳤다. 배재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서비스산업에 대해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는 《21세기....펼쳐보기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1978년 KOTRA에 입사.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무역관을 거쳤다. 배재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서비스산업에 대해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는 《21세기 초 금융위기의 진실》 (2010), 《유대인, 그들은 우리에게 누구인가》(2010), 《유대인 이야기》(2013), 《유대인 창의성의 비밀》 (2013) 등이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1978년 KOTRA에 입사.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무역관을 거쳤다. 배재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서비스산업에 대해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는 《21세기....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세 종교의 이야기를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소개한다. 한 뿌리에서 갈라진 세 종교를 통해 인류 문명과 세계 역사의 흐름을 통찰한다.....펼쳐보기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세 종교의 이야기를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소개한다. 한 뿌리에서 갈라진 세 종교를 통해 인류 문명과 세계 역사의 흐름을 통찰한다. 종교 간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살펴보고 종교가 가진 본질인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알아본다.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세 종교의 이야기를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소개한다. 한 뿌리에서 갈라진 세 종교를 통해 인류 문명과 세계 역사의 흐름을 통찰한다.....-----------------------------------------------------------------------------------------------------
유월절(Passover)
가장 의미 있는 유대인의 명절 중 하나이다. 유월절 축제 음식으로는 파슬리(parseley)나 셀러리(celery) 혹은 양상추 등의 야채, 무교병(matzo), 양고추냉이(horseradish), 과일과 땅콩을 섞은 반죽인 하로셋(Harosheth), 삶은 계란이 있다.
만약 누군가에게 “왜 오늘밤은 다른 날과는 다른 걸까?”라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유월절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유월절 밤 축제의 만찬이 벌어지는 유월절 첫날 밤은 전 세계 유대인들이 매우 신성하게 여기는 시간이다. 부활절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명절 가운데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유월절은 유대교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명절이다.
유월절은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에 나오듯이 이집트로부터 유대인 민족 대탈출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유월절에 대한 완벽한 이야기는 나일 강 삼각주 유역 동부 지역인, 이집트 동쪽 고센지방에 히브리 인이 정착하게 된 오랜 역사, 잔인한 파라오에 의한 노예생활, 모세의 출생과 이집트에서의 득세, 지도자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대탈출한 유대인의 이야기 전부를 다루어야 한다.
유월절이 오기 전 유대인 가정에서는 전통적으로 효모와 관련된 것을 모두 없앤다.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오랜 기간 내내 유일하게 먹었던 음식인 딱딱하고 효모가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며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것이다. 무교병은 유월절 기간에 빵 대신에 먹는, 크래커 같이 생긴 효모가 없는 빵이다. 하지만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이 무교병을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이 1년 중 다른 기간에도 가끔씩 무교병을 먹는다.
조상들이 노예생활을 하면서 당한 고난을 기리기 위해 유월절의 첫째 날과 둘째 날 밤에는 유월절 밤 축제(seder)를 연다. ‘세데르(seder)’는 ‘순서’라는 뜻으로서 유월절에 일어난 사건의 순서를 의미한다. 각각의 단계를 위한 음식이 따로 정해져 있는데, 사과, 꿀, 견과류로 만든 과일절임 반죽인 하로셋은 이집트 정착 초기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먹는 것이며, 쓴 나물 양고추냉이는 노예시절을 상징한다. 이 의식은 종종 유대인 가정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소유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하가다(Haggada)’라고 하는 책에 잘 나와 있다.
이집트로부터 유대인들이 대탈출을 감행한 시기가 봄이기 때문에 유월절 축제도 항상 봄에 진행된다. 이 축제는 8일 동안 지내는 게 보통이지만, 간혹 개혁파 유대교도들은 7일 동안 지내기도 한다. 유월절의 시작은 기간이 언제인지에 상관없이 항상 유대 달력으로 니산(Nisan) 달 제 15일이다.
[유사사례]
야드 바셈
성스러운 축제인 유월절은 수천 년 전 유대인의 생존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기념행사인 야드 바셈(Yad Vashem)은 불과 수십 년 전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기억의 산 위 45에이커, 즉 약 18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넓은 터에 기념관, 박물관, 국제 홀로코스트연구학회 건물, 희생자 정보를 모아둔 데이터베이스 건물 등이 지어져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국회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설립한 ‘야드 바셈:육백만 학살 추모관’이다. 야드 바셈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지위를 버린 전 세계의 의인을 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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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나 센들러(Irena Sendler)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샤바 게토에서 2,500여 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구해낸 폴란드의 사회운동가.
사업복지사였던 센들러는 1942년 유대인 구조대인 제고타(Zegota)의 일원이 되었다.
이 단체는 나치 점령자들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창설된 폴란드의 지하조직이다. 그녀는 안전한 곳으로 아이들을 옮기기 위해 관이나 구급차 같은 수단들을 사용했다. 아이들에게 아리아계 이름으로 된 가짜 출생증명서를 만들어주었고, 온정적인 그리스도교계 고아원과 수녀원에 아이들을 맡겼다. 그리고 나중에 아이들이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아이들의 진짜 이름을 적은 명부를 병이나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어두었다. 1943년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센들러는 함께 일한 동료들의 이름과 그녀가 구한 아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센들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다른 제고타 회원들이 그녀의 석방을 위해 게슈타포 장교들을 매수함으로써 탈출할 수 있었다. 1965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및 영웅 기념관인 야드 바셈은 전쟁 중에 행한 센들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그녀를 '의로운 시민'(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인정했다. 그녀는 2003년 폴란드 최고 훈장인 화이트이글을 수상했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항아리 안의 인생 Life in a Jar〉(1999)이라는 1막짜리 연극이 있다.
이 작품은 미국 켄자스시티의 여학생들 4명이 쓴 것이다. 또한 전기로 〈홀로코스트 어린이들의 어머니: 이레나 센들러 이야기 Mother of the Children of the Holocaust: The Story of Irena Sendler〉(2004)가 있다. 센들러는 2007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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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43. 세 종교 이야기|작성자 매니져K
● 현대인의 정신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서아시아의 종교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움직이는 곳이 어디인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미국, 중국, 유럽 등을 많이들 거론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혀 다른 곳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답이 서아시아일지도 모른다.
근현대를 지배한 것이 서구문명, 조금 더 구체적으로 유럽문명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서아시아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양 문명의 원류인 그리스, 로마, 기독교 문화는 오리엔트 지역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 당장 그들의 문자, 알파벳부터 레반트 지역에 있던 페니키아 문자가 조상이지 않는가.
또 하나, 서아시아 문화는 유럽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쪽 뿐 아니라 동방의 나라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였다. 종. 이란-파키스탄-인도, 그리고 동남아지역까지 때로는 군사력을 통해, 때로는 교역을 통해 그들과 교류를 하였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이슬람교.
서쪽으로는 기독교가 동쪽으로는 이슬람교가 전해지며, (아울러 남쪽으로는 동아프리카 지역까지) 그들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 세계에서 서아시아에서 시작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절반이 넘는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최고위 신이 같다는 점. 하느님, 하나님, 여호와, 야훼, 알라(물론 알라는 신의 이름이 아니라, 신 자체를 뜻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알라를 신의 이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막신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 신을 전 대륙에 걸쳐 세계 35억 인구가 숭배하고 있다.
무신론자 입장에서 보면 인류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복자는 이 하느님이 될 것이다. 오대양 육대주에 널리 퍼져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으니... 끽 해야 한 두 대륙에서 땅따먹기 좀 한 징기스칸이니 알렉산더니 하는 인간들 따위가 나댈 상대가 아니다. 그 분은
그렇다면 이 종교들은 어떻게 생겨났고, 발전해 나갔을까?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이들의 원류인 유대교까지 하여, 서아시아의 세 종교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세 종교의 근원, 아브라함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의외로 많다. 같은 신을 모시고, 있으며, ‘토라’ 라는 공통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 (물론 토라의 내용과 해석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다. 일단 이슬람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모세오경은 곡해된 것이라 주장한다.) 예루살렘은 세 종교 공통의 성지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조상이 같다.
그 이름 찬란하도다, 외쳐~!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의미는 ‘만 백성의 아버지’.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으나, 하느님이 계시에 따라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꾼 것이다. 사실 아브람도 ‘존귀한 아버지’ 라는 뜻이니,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운명적 필연이었으려나
아브라함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이지만 정실 부인이 낳은 아들이 아니었기에 결국에는 상속권을 인정 받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 이스마엘과, 정실에게서 태어난 늦둥이로서, 부모의 귀여움을 한 몸에 다 받았음이 분명한 이삭. 이 시점에서 아랍인과 유대인이 갈리게 된다. 이스마엘은 아랍의 조상.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조상.
한편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로 한다. 그래서 말한다. ‘아들을 바쳐라’ 독실한 아브라함은 그러겠노라 하고, 정말 아브라함을 바치려는데... 이에 지극 정성에 감동 받은 하느님, 아브라함을 만류하고는 그에게 축복을 내린다. 너의 자손이 대대손손 번창할 것이라고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유대교-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갈린다. 아브라함이 바치려던 아들이 누구이냐에 따라 종파의 주장이 다른 것. 유대와 기독교에서는 이삭이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이스마엘이라고 한다. 서로 자기네 주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 우기는 것. 이렇게 후계자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기는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서로간에 큰 반목은 없는 듯 하다. 유대와 기독교에서도 이스마엘을 인정하고, 이슬람교에서도 이삭을 존중하니까.
유대교와 기독교가 크게 갈리는 부분은 단연 예수.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당시 유대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예언자이자, 열심당원이라는 해석도 있던 인물. 그에 반해 기독교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 자체. 즉,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서로 해석이 다르다. (그리고 신성과 인성과의 관계에 따라, 기독교들끼리 종파가 또 갈라진다.)
이슬람에서도 예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예수는 당대에 많은 기적을 보인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 오히려 유대교보다 이슬람에서 존재감도 크고, 지위도 더 높다. 물론 그들은 마지막 적통 예언자는 마호메트라고 하는 점에서 다른 두 종교와 다르지만.
● 종교 갈등은 사실 정치-경제적 갈등의 이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일단 같은 신을 모시고 있는 만큼 (예수의 신성가지고만 논쟁을 벌이겠지) 세 종교는 서로를 포용할 수 있어 심하게 싸울 일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전쟁에서 당사자 중 최소 한 쪽은 이들 종교에 속한 세력이었다. (그리고 실은 이들 종교간의 싸움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 대 이슬람, 혹은 기독교끼리, 이슬람끼리의 싸움 같이)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들이 그렇게 싸우는 이유는? 바로 정치 경제적 이유이다. 같은 동네에 살다보니 정치적인 세력 다툼, 경제적 이권 다툼이 필연적으로 벌어지고, 종교는 명분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종교가 장식이나 핑계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라 할 수 있다.
“와, 저런 피도 눈물도 없이 돈만 밝히는 파렴치한 같으니라고, 대체 사람의 탈을 쓰고, 어쩜 그럴 수 있지? (그러다 불현 듯 무언가 떠오른다) 아 맞다, 저 자식 유대인이지?”
(불공정 재판으로 인하여 전 재산을 빼앗간 유대인 : 베네치아 상인 샤일록)
한편 종교는 신념 체계이기 때문에 한 번 자리 잡으면 바꾸기도 어렵다. 한번 믿기 시작하면, 세상 만사를 그에 맞춰 해석하기 마련이며, 주변에서 그것이 아니라 하는 것은 그저 거짓된 장난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는데, 어찌 악마가 설치느뇨 하며 말이다.
종교가 개입된 행위들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
저자가 직접 책에서 이런 내용을 밝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역사를 쭈욱 서술하면서 그들에 대한 탄압 뒤에 있는 정치적 경제적 배경을 극렬히 밝히면서, 종교간 갈등은 결국 이해관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홀로코스트도 결국 정치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재미있는 것은 극단으로 흐르는 종교 치고 결말이 좋은 적이 없다는 점. 이슬람도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찬란한 번영의 시절이 끝을 맺었고, 스페인도 이슬람과 유대인들을 제거하면서, 영광의 빛을 잃었다. 이스라엘이 이슬람을 핍박하면서도, 아직은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사실 그들도 일촉즉발의 위기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만큼, 언제 어떻게 될지 미래를 장담하지 못한다.
● 책에 관하여
책의 최고 장점은 그 구성,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각각 한 파트씩 배부했고, 마지막 한 파트는 종교 갈등을 다룸으로서 어디에 편중되지 않고 균형 있게 각 종교들을 다루고 있다. 유대인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편견 없이, 각 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불편함 없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다만, 세 종교의 근원을 이야기 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 위주로 풀어 나간 것은 많이 아쉽다. 사실 최근에 개신교에서 나오는 구약 성경 이야기에서도 고대사 연구 자료들을 많이 반영하며, 현실감을 높이고 있다. 그런면에서 종교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책이, 너무 성경에 의존한 것은 많은 아쉬움을 준다.
또한 박해에 관해서도 지나치게 유대인 위주로만 이야기 한것도 마찬가지. 물론 저자가 유대인에 조예가 깊은 사람인만큼 어쩔 수 없이 그들 중심으로 썰을 푼 것은 어쩔 수 없겠으나, 그래도 이슬람 제국 치하에서 차별 받은 옛 동로마 지역 그리스도교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많이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버릴 수 없다.
(예를 들면 예니체리만 하더라도, 기독교 집안의 아이들을 강제로 뺏어 온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아쉬움이 있지만, 세 종교를 이렇게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가 전문 학자가 아니어선지, 우리들 눈높이에 맞춰 쉽게 쉽게 이야기를 하는 것 역시 큰 장점이다.
[출처] 세 종교 이야기 _ 플러스 유대인 이야기이기도 하지?|작성자 전직 ASKY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