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68) 고영민, 〈오늘 한 일이라곤 그저 빗속에 군자란 화분을 내놓은 것이 전부〉
봄비가 오신다고 중얼거려보았다
비가 좋이 온다
13층 베란다에 놓여 있던 군자란 화분 두 개를 끙끙 옮겨
1층 화단 앞에 내놓는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았다
거실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몸이 나른하고 쑤셨다
비가 오신다고,
봄이 오신다고 중얼거려보았다
저녁까지 비가 그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1층까지 일부러 한 발 한 발 내려가보았다
아침녘 내놓은 군자란 두 분(盆)이 빗속에 젖어 있었다
뿌리까지 젖어 있었다
더 무거워진 화분을 옮겨
다시 1층에서 13층을 오르면서
이곳은 물관이라고,
물이 오른다고 또 중얼거려보았다
아파트 생활자가 집안에서 하는 노동이란 수평적인 게 대부분이다. 무엇을 치우거나 옮기는 것 따위가 다 평면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드물게 13층에서 1층으로, 다시 1층에서 13층으로 몸을 수직으로 이동하면서 행한 노동에 대해 적고 있다. 즉 13층 아파트 베란다에 있던 군자란 화분 두 개를 옮겨 아파트 1층 화단에 내놓았다가, 다시 이것을 13층 베란다로 옮겨놓는 것이다. 무거움을 무거움으로 온전히 감당한 이 노동은 의연하다. 우리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이 무거운 것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일부러 계단으로 한 층 한 층 내려갔다가 올라온다. 그 이동 경로가 곧 “물관”으로 바뀌면서 아파트라는 무생명의 콘크리트 공간은 수액이 흐르는 말랑말랑한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비의 주요 성분은 물이고, 물은 생명의 주요 성분이다. 인류의 조상은 물에서 살다가 뭍으로 기어 나왔다. 물속에서 숨을 쉬던 아가미가 퇴화되고 그 자리에 턱이 단단해졌다. 물에서 뭍으로 나와서도 사람의 몸을 이루는 살과 피의 70퍼센트가 물이다. 사람은 저마다 작은 바다다. 지금 지구에 70억의 인류가 산다면 지구라는 행성에는 70억의 작은 바다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셈이다. 물은 저의 인력으로 물을 끌어당긴다. 몸이 물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은 〈민물〉이라는 시에도 암시되어 있다. “어탕이 끓는 동안/깜박 잠이 든 세 살 딸애가/자면서 웃는다/오후의 볕이 기우는 사이,/어디를 갔다 오느냐/이제 막 민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아이야”에 따르면, 사람은 자라면서 민물의 마음을 갖고, 민물의 웃음을 웃는다. 어린 딸애 역시 물로 이루어진 생명이다. 생명을 이루는 본질이 물이고, 제 안에 있는 물의 생리를 사람이 따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린 딸애는 이미 민물의 마음을 품고 있기에 자면서까지 민물의 미소를 머금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물이 구비칠 때 우리는 다른 몸의 물을 그리워하고, 다른 물을 사랑하는 일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아파트 생활자가 봄비에 반응한 것은 당연하다.
비가 오신다고,
봄이 오신다고 중얼거려보았다
비가 오신다고, 봄이 오신다고 중얼거린 것은 몸 밖의 물에 대해 몸 안의 물이 반응한 것이다. 봄비는 우리 몸의 뼛속과 혈관에 있는 물들을 깨운다. 비가 오면 뭔가가 일어난다. 비는 곧 생명의 순환이기 때문이다. “빗속에 군자란 화분을 내놓는” 노동으로 이끈 것은 봄비다. 비는 우리 내면에서 사라진 계절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게 비의 숨겨진 재능이다. “비가 내리면 우리는 발아한다. 비옥함은 정신의 한 자질이다. 새싹, 떡잎, 생각들이 자라난다.”(마르탱 파주) 봄비는 입춘과 우수 사이에 내린다. 봄비는 마른 땅만 적시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혈관과 머릿속을 두드리고, 메마른 마음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아파트 생활자의 몸이 나른하고 쑤신 것은 제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나는 징후였던 셈이다. 비는 아파트 생활자의 내면에서 새싹, 떡잎, 생각들이 자라게 한다. 오늘 봄비는 종일 내린다. 그 봄비가 아파트 거실 가죽소파에 몸을 눕히고 꾸벅꾸벅 졸던 가장을 벌떡 일으켜 세워 베란다에 있던 군자란 화분 두 개를 아파트 화단에 내놓는 노동으로 이끌었다. 봄비가 수평적 습관에 길든 이 아파트 생활자를 수직 노동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이것은 〈반음계〉라는 시의 일부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꾸다 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문득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을 생각하면서 덧없이 흘려보낸 오후가 아득하다. 저녁이 왔을 때, 나는 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울면서 흘리는 눈물도 물이다. 오후 내내 물인 당신을 생각했으니, 내 몸을 이루는 물을 조금 흘려보내는 일도 물의 일이다. 우리는 물로써 물의 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애초에 인류는 물의 종자다. 몸은 음식을 담은 푸대자루이고, 동시에 물을 담은 푸대자루이기도 하다. 작고 어여쁜 물종지 같은 당신. 내가 마음에 품어 오래 생각한 당신은 몸 안에 물을 가득 안고 있는 물종지다. 그랬으니 “수국은 비어 있지/해 질 무렵, 나는 텅 빈 당신을 생각해보고/물종지 같은 당신을/오래오래 생각해보고”(〈수국〉) 같은 구절은 자연스럽다.
아침녘 내놓은 군자란 두 분(盆)이 빗속에 젖어 있었다
뿌리까지 젖어 있었다
봄비는 우리 안에 있는 부조리한 정열을 넘어서서 낙관주의를 키우고,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이타주의적 선량함을 일깨운다. 우리가 오늘 한 일이란 그저 빗속에 군자란 화분을 내놓은 것이 전부라고 할지라도, 아주 잘한 일이다. 베란다에서 화단으로 옮겨진 군자란은 뿌리까지 흠씬 젖을 정도로 봄비를 맞았다. 그것은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회귀한 존재-사건이고,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한 식물이 처한 곤란을 해결한 자비와 연민의 일이기 때문이다. 종일 봄비가 내린다. 봄비는 우리와 물로 이어진 물의 자매들이다. 봄비 속에서 생각하느니, 너도 나도 물에 뿌리를 적시고 있다. 그게 사는 일인 것을.
고영민(1968~)은 충남 서산 출신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나오고, 2002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다. 대학시절에는 시와 소설을 썼다는데, 얄궂게도 시가 먼저 문학지 공모에 당선하는 바람에 시인이 되었다. 등단한 첫해에 습작으로 시를 300여 편을 썼다니, 그런 과정을 거쳐 단단해진 내공이 느껴진다. 그와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시인의 말을 빌리면, 고영민은 “서산 출생, 안성에서 공부, 장호원에서 군 생활, 서울에서 직장, 다시 포항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마흔다섯 먹은” 시인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40대 남자의 이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영민이 새로 낸 시집을 읽다가 “인중이 긴 하늘/선반에 들기름 한 병”(〈망종(芒種)〉)이라는 구절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나는 이 시구에서 아득해졌다. 간결한 두 구절인데, 구절과 구절 사이에 여백은 넓다. 비약과 도약을 몇 차례 해도 그 여백은 채워지지 않는다. 하늘은 사람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천명 같은 것이다. 사람은 그 천명을 이고 산다. “선반에 들기름 한 병”은 우리가 마음먹으면 어찌 해볼 수도 있는 생활의 기물이다. 어찌 할 수 없는 것과 어찌 해볼 수 있는 것을 군더더기 하나 없이 견줘내며, 천명 아래에 있는 생명 가진 것의 불가피함을 이끌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