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굴목이재
금둔사(金芚寺) 주지 지허 스님이 손수 덖은 녹차를 길손에게 권한다.
찻물이 끓는 동안 스님은 작은 수첩을 펼치더니 시 한 수를 읊는다.
'姑射氷膚雪作衣(고사빙부설작의)
香唇曉露吸珠璣(향진효로흡주기)
應嫌俗蘂春紅染(응혐속예춘홍염)
欲向瑤臺駕鶴飛(욕향요대가학비)-
고야산 신선 고운 살결에 눈으로 옷 지어 입고
향기로운 입술로 새벽 이슬에 구슬을 마시는구나
속된 꽃술이 봄철 붉은 꽃에 물드는 것 싫어서
신선 사는 요대 향해 학 타고 날아가려 하는구나' <이인로(李仁老)의 매화(梅花)>
굴목이재 편백숲
겨울을 앓고 난 마른가지에 꽃을 피우는 매화가 한 줌 바람에 몸을 떤다. 가지사이로 고개를 내민 연분홍빛 자태가
단아하다. 기껏해야 손톱만한 크기의 서너 송이에 불과하지만 새봄을 기다리는 만물에겐 여간 반갑지 않다.
금둔사
굴목이재를 넘기 위해 조계산(曹溪山·해발 884m)으로 향하던 중 잠시 들른 금둔사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지허 스님
지허 스님은 "12월에 이미 꽃망울이 터져 설중매(雪中梅)를 봤고,
봄바람이 나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제대로 피겠다"고 말했다.
금둔사 매화는 음력 12월에 꽃망울을 틔워 납월매(臘月梅)라 불리는 홍매화다.
해마다 이맘때면 붉은 자태로 절집을 화사하게 물들인다. 스님의 '엷은 미소'를 가슴에 담고 조계산으로 향한다.
광주 무등산·영암 월출산과 함께 '호남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조계산은 소백산맥 끝자락에 오롯이 솟아 있다.
굴목이재는 조계산 8부 능선을 가로질러 한국불교의 양대가람인 송광사(松廣寺)와 선암사(仙巖寺)를 잇는 고갯길이다. 전남 순천의 남도삼백리길 중 하나로, '천년불심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 옛날 스님들이 두 절집을 오가며 수행에 매진했고, 승주의 처녀가 꽃가마를 타고 낙안읍성으로 시집가던 길이다.
선암매
선암사를 들머리로 삼아 길을 나선다. 절집으로 드는 진입로는 측백나무, 전나무, 참나무, 고로쇠나무가
울창한 숲길이다. 부도밭과 전통야생차체험관을 지나자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가 날아갈 듯 계곡에 걸려 있다.
다리 아래 엽전 두 냥을 입에 물고 있는 용머리조각이 눈길을 끈다. 그 뒤로 강선루(降仙樓)가 의젓하게 앉아 있다.
선암사 와송
선암사는 875년(헌강왕 1) 도선(道詵)이 창건한 태고종의 본산이다. '늙음'이 잘 스민 절집은 단아하고 정갈하다.
순천시 문화관광해설사 김재희씨는 "선암사에는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600살 넘은 선암매(仙巖梅)와 와송,
달마전 석정, 뒷간 등이 명물"이라며 "다른 사찰과 달리 사천왕문과 어간문, 주련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T'자형 목조건물에 맞배지붕을 얹은 뒷간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해우소다.
시인 정호승이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고 한 바로 그 해우소다.
'대소변을 미련 없이 버리듯 번뇌 망상을 미련 없이 버리자'는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송광사 대숲
연못을 지나 갈림길에서 왼쪽 숲길이 송광사 가는 길이다. 조계산에 굴목이재는 두 개다. 선암사에 가까운 고갯마루는
선암굴목이재, 송광사 쪽 고갯마루는 송광굴목이재로 부른다. 굴목이재는 6.8㎞ 거리의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간다.
송광굴목이재에서 천자암(天子庵)을 거쳐 송광사로 내려서면 2.5㎞를 더 걸어 5시간쯤 걸린다.
고행의 자취를 간직한 소박한 서부도밭을 지나면 임선교(臨仙橋)다. '신선에 이르는 다리'라니 어깨가 들썩인다.
생태체험야외학습장을 지나면 편백숲을 마주한다.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는 조계산에 이색적인 풍광이다.
60~70년생 편백나무가 하늘로 솟구친 모습이 참빗 같다. 숲에 마련해 놓은 벤치에 앉아 피톤치드를 들이킨다.
편백숲을 지나자 제법 산길다워진다. 계곡 물소리가 청아하고 바람소리·새소리가 요란스럽다.
산세가 부드러운 육산. 두터운 살집이 나무를 키워 잎을 떨군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울창하다.
호랑이턱걸이바위
오르막 중턱에서 호랑이턱걸이바위를 만난다. 옛날 호랑이가 이 바위에 턱을 괴고 있다가
선하고 악한 사람을 구분해 해코지를 했다는 기암이다. 숯가마 터와 빨치산 은신처도 간간이 눈에 띈다.
산중엔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등 참나무가 대세다.
털조장나무, 이나무, 고로쇠나무, 층층나무, 비목나무, 산벚나무, 서어나무, 들메나무, 쪽동백나무,
노각나무, 생강나무도 참나무 틈새에 듬성듬성 뿌리박고 있다. 노각나무는 수피가 예뻐 손길이 자주 간다.
숯가마터
숯가마 터를 지나면 숲은 더욱 짙어진다. 계곡 물소리도 저만치 물러난다. 선암굴목이재가 코앞이다.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져 장딴지가 뻐근하다. 고갯길 정상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다.
계단길을 급하게 내려선 후 굴목다리를 건너자 된장국 냄새가 구수하다.
30년 전부터 터를 잡은 조계산보리밥집의 향기다.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비닐하우스 안 평상에 앉아 보리밥에 각종 나물을 비벼먹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지만 꿀맛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동동주 한 잔을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조계산보리밥집
김 해설사는 "조계산 등반객 중 보리밥을 먹기 위해 오는 이들도 제법 많다"며
"밥상에 나오는 나물은 직접 재배하거나 조계산에서 채취한 웰빙 음식"이라고 말했다.
평상에서의 낮잠 유혹을 뒤로 하고 송광굴목이재로 향한다. 산허리를 이리저리 굽이치는 숲길은 경사가 완만해
편안하다. 낙엽수를 뚫고 송광굴목이재에 오르자 서산으로 해가 기운다. 여기서 길은 송광사와 천자암으로 갈린다.
쌍향수(곱향나무)를 보기 위해 천자암을 거쳐 운구재를 넘어간다.
운구재 철쭉군락
양지바른 길은 봄물이 올라와 끈적거리고 미끄럽다. 여린 봄볕에 물 오른 나무마다 새순이 튀어 나올 기세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오솔길. 철쭉군락과 신우대숲을 차례로 헤치고 간다.
산바람에 서걱거리는 댓잎 소리가 상큼하다.
김 해설사는 "조계산 등반로를 다 다녀봤지만 운치 있고 아름답기로 이곳만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천자암
목탁소리가 귓전에 가깝다. 너른 길이 터지자 암자 머리끝이 보인다. 천자암은 송광사의 산내암자다.
금나라 왕자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했다. 암자 우측 800년생 쌍향수(천연기념물 제88호)가 당당하다.
2그루의 향나무가 애인처럼 붙어 있다. 중국에서 수도를 끝내고 돌아온 보조국사와 담당국사가
지팡이를 나란히 꽂은 것이 나무가 됐다고 전해진다. 나무줄기가 실타래처럼 꼬여 신비롭다.
송광사
서둘러 송광사로 향한다. 줄곧 내리막이다. 발가락 끝에 통증이 느껴질 무렵, 계곡물소리가 우렁차다.
평지로 내려서 편백숲과 대숲을 거쳐 송광사 앞마당으로 든다. 신라 말 혜린(慧璘)이 창건한 송광사는 해인사·통도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僧寶寺刹)이다. 180년 동안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절집에는
국보와 보물 등 6000여점의 불교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그만큼 눈과 귀에 담을 거리가 많다.
대웅보전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늙은 배롱나무에 스며든다. 봄색이 내려앉은 절집 마당에 저녁 예불소리가 가득하다.
■찾아가는 길:호남고속도로 승주IC로 나와 857번 지방도로 순천방면으로 가다 죽학삼거리에서 선암사로 향하면 된다.
■주변 볼거리:선암사 못 미처에 자리한 전통야생차체험관(061-749-4202)은 아이를 동반한 여행객이라면 필수코스. 자연 속에서 전통차를 체험(매주 월요일 휴관)할 수 있는 이곳은 전시관, 강당, 시음 및 판매실, 제다체험실, 다식체험실 등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다. 다례와 차만들기, 차음식만들기, 다도강좌 등 차 관련 체험과 함께 한옥명상, 화전놀이, 음악회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안채와 별채에서 민박이 가능해 한옥체험을 겸할 수 있다. 주암호와 상사호는 드라이브 코스로, 화포해변과 와온해변은 일출과 일몰 명소로 유명하다. 이외에 순천만, 낙안읍성, 검단산성, 고인돌공원, 드라마촬영장, 공룡박물관 등이 있다.
낙안읍성
■맛집:낙안읍성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낙안읍성을 방문했을 때 백성들이 대접했다는 팔진미(八珍味)를 맛볼 수 있다. 선암사 들머리인 승주읍 죽학리에 자리한 장원식당(061-754-6362)은 닭백숙이 맛있고, 대원식당(061-744-3582)은 한정식이 유명하다. 선암사 입구 식당에서는 염소떡갈비를 맛볼 수 있다.
■시티투어&에코투어:시티투어는 평일 1개 노선, 주말 2개 노선의 씨티투어버스를 운행(061-742-5200)하고, 에코투어는 연중 1박2일 일정으로 매 주말 운영(061-749-3107)한다.
■숙박:낙안읍성에는 잔디민박(061-754-6644), 동문고향집(061-754-2550), 처가집(061-754-2968) 등의 민박집을 이용할 수 있다. 이외에 낙안민속자연휴양림(061-754-4400), 순천자연휴양림(061-749-4070), 유심천스포츠관광호텔(061-755-5001), 에코르라그관광호텔(061-811-0000), 다시가(061-754-5235), 사랑채(061-754-5320) 등
■문의:순천시청 관광진흥과 (061)749-3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