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새주인을 맞이할지 모르는 기묭호씨네 소가 김씨의 사위자랑을 알는지. |
소에게 관심을 주자 소꿉쟁이 녀석들이 와르르 달려들어 핥고 꼬리치고, 잡아당긴다.
정말 반가워서인지, 황보 진씨(60세)네 집 가는 길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황보
진씨는 연탄재를 텃밭에 부수고 있다.
아직도 부서지지 않은 연탄재가 웬만한 왕릉만큼 모아져있고 그 왕릉 뒤에서 윤순경씨(60세)가 죽을 힘을 다해 타지 못한 연탄을 집고 나오다가 눈인사를 한다.
이 동네에서 연탄 보일러 때는 집은 자기들뿐이란다.
황보진씨는 선산부나, 굴진부 일부터 해서 광산을 하청 운영(덕대탄광 )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경북 영주에서 열 식구나 탄광으로 들어 왔을 때 이미 큰 광업소들은 전국에서 몰려온
팔도 사내들로 가득차 있었고, 돈줄이나, 인맥이 없으면 큰 광업소(석탄공사)들어가는
하늘에 별 따기였다.
연탄 소비량 맞추느라 밤낮없던 시절
태백에서 장성으로 다시 태백, 사북, 고한으로 십칠년여를 덕대탄광으로 더돌다가 동고탄광서 채탄권을 불하 받아 직접 탄광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이 땅 아무 곳이나 몇 미터만 파고 보면 검은 노다지 투성이었다.
탄층이 넓은 데다 수평항을 이루고 있어 작탄하기가 쉬웠다. 탄은 잘 팔려 나갔다.
꼬박 만근이래 봤자 쌀 한 가마니도 안되었던 시절보다는 마차상회에 가서 고한탁주에 양미리 몇 마리쯤은 동료들에게 사 낼형편이 된것이다.
자식들(5남매) 출가시키고, 집에서 모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 해 걸러 돌아가시자
좁은 사택에서 빈소를 차려 놓고 상식하면서 삼년 탈상을 했다.
황보진씨 탄광도 마찬가지로 석탄산업합리화과정에서 폐광되었는데, 앞마당에 서서
여기는 1항, 저기는 2항이 있었지 더듬어보는 게 요즘의 즐거움이란다.
물론 그 시절이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황보 진씨네 항(갱)에서 물(수맥)이 터진 것은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던 일이었다.
수평갱도 탄차를 타고 백오십미터 내려간 뒤 다시 수직으로 백미터, 다시 막장가지 기어올라간 선산부 박길항씨(85년 탄광 매몰사고로 작고)는 그날 유난히 막장이 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지하의 고열과 사투를 벌여야 했는데 후산부 성낙진씨도 굴착기를 발동시키며 "그러게요"했다.
막장은 굴착기의 소음과 진동으로 금세 후덥지근해졌고 박씨의 얼굴에는 검은 땀이
범벅이 되었다. 랜턴으로 보이는 굴착기가 여러겹으로 흔들리는데 후산부 성씨가 무어라 소리지른다.
"형님 점심 먹고 합시다요."
굴착기 시동이 꺼지자 땅의 진동이 함께 멈췄다. 갑방반 근무를 나오는 박씨는 그날도
황보진씨의 아내 윤순경씨가 싸주는 알루미늄 도시락을 열었다. 홀홀단신 월남한 박길항씨는 철암탄광에서 황보 진씨와 함께 굴진일을 했었는데 두 사람은 전장의 전우처럼 돈독하게 지냈다.
황보 진씨가 고한에 덕대탄광을 불하 받자 제일 먼저 불러들인 사람이 박씨였다. 초혼에 실패한 박씨가 즐겨 쓰던 고사는 '부자식이 상팔자'고 유일하게 부르던 노래는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였다.
함경북도 원산이 고향인 박씨는 이산 가족 찾기 운동 할 때엔 한 달씩이나 방송국 언저리를 배회했었다고 했다.
개발되면 고랭지 채소재배 가능할까
황보진씨네 집 앞 개울 건너 성황당 있었던 곳까지 가는 길에는 서른세대쯤이 살았다고는 믿기 어렵게 흉가만 세 채 남았다. 태백권 개발이 임박하여 광산 사택 철거가 본격화되자 지레 다른 터전을 찾아 나선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 주변에는 수령이 삼백 년 훨씬 넘을 거라는 전나무가 여섯 그루
버티고 서 있고, 그 가운데 마을 보호수로 지정되어 해마다 액막이제를 지내는 수령
백육십년 된 도토리 나무가 있다. 매년 마을 사람이 줄어들어 제가 사라질 처지에 있다고 백준겸씨(65세)가 일러준다.
광산의 흥망성쇠를 함께 했던 거낭. 은명을 예감했는지 고사중이다. |
백준겸씨도 젊을 때는 광산현장 감독을 지냈지만, 지금은 형님, 아우하는 아랫집 이해문씨(62세)와 고랭지배추 농사를 짓고 있다.
"고려 말엽 충신들이 박해를 받아 정선에서 이 골짜기로 숨어들어 커다란 나무문을 만들고 외부 출입을 전혀 하지 않으며 살았다. 굴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물로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먹였다."
두문동(杜門洞)의 유래는 이렇게 간단하다. 백준겸씨에게 부탁을 해서 물이 나오는 굴까지 안내를 받았는데 성황당자리에서 고랭지 밭을 우회하여 이십 분즘 비탈을 올라가니 블럭 벽돌로 쌓아 막은 굴 입구가 있다.
삼년 전에 상수원 보호를 위해 마을에서 설치했는데 실제로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소두문둥에서는 생명수 그대로였다.
마을을 되돌아 나오다 비어있던 맨 첫 집에 인기척이 있어 들어갔더니 고한읍에서 상추씨, 토마토시, 해바라기 씨를 사온 장승복(24세),민규(12세)형제가 아버지와 씨를
심을 밭을 고르고 있다.
탄광에서 낙석으로 경추를 심하게 다친 뒤 오년째 쉬고 있다는 민규아버지는 퇴직금
오백만원으로 이 집을 마련했다.
군에서 제대한 지 두 달째. 자동차 정비소에 취업을 희망하는 승복이는, 상추나 토마토는 먹을 수 있는 것들인데, 해바라기는 왜 심으려 하냐고 묻자. "보기 좋잖아요"라며
민규에게 웃어보인다.
진폐 3기 맞는 폐를 위로하며
세 부자에게 해바라기를 다시 보러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소두문동'이라고 뭉툭하게
써 있는 콘크리트 표지석 앞에 차를 세우고 등을 기댄다. 그러자 이상하게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 땅 속을 뒤흔드는 착암기 소리같은. 어디선가 땅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눈앞이 온통 검어지며 더운 바람이 탄가루를 아무것에나 뿌려놓는다. 탄 속에 장화를
푹푹 빠뜨리며 광부들이 모여든다.
마차상회에선 알전구가 흔들거린다. 양미리 굽는 냄새. 막걸리 사발 부딪히며 진폐 3기를 맞는 폐를 위로한다.
비료값이 올라서 큰일이라는 이해문시(오른쪽)의 표정이 자못 의심스럽다. |
누런 수건을 목에 건 젊은 황보 진시가 장단을 맞추고 젊은 백준겸씨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리랑을 부른다.
광부아리랑을 따라 부르는 발길향씨의 턱이 천정에서 크게 흔들리다가 사라진다.
마차상회주모가 오라고 손짓한다. 한 번도 본적 없는 광부들이 괜찮으니 빨리 오란다.
주모가 달려와 손을 마구 잡아당긴다. 번쩍 눈을 뜨니 고추 팔러 갔던 주옥선씨가 차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문동 갔다 오셨어요? 뭘 볼게 있다구" 하며 말꼬릴 흐린다.
단몽에서 깨어난 나는 서둘러서, 비탈을 힘겹게 올라가는 조옥선씨에게 소리쳤다."그런데, 소 값은 얼마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