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0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국립중앙박물관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 개막
<1600년 비밀의 문을 연 황남대총>
무덤방 크기만 동서 24m에 남북 20m
남북 길이 120m에 봉분 높이 23m에 이르는 현존 한반도 최대 규모 고분인 경주 황남대총(皇南大塚)이 1천600년 만에 마침내 문을 열었다.남편이자 신라왕이었을 남자는 남쪽 봉분에, 그의 부인은 북쪽 봉분에 자리한 쌍둥이 적석목곽분(績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인 황남대총 특별전이 6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6일 개막했다.일반 관람 개시에 하루 앞서 취재진에 먼저 공개된 이번 특별전은 황남대총 쌍분(雙墳) 중에서도 남분(南墳) 봉토 안에서 발견된 나무 기둥 구멍을 기초로 목조건축물을 실물의 95% 크기로 복원한 것이다.이 모형은 완벽한 복원품이 아니라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기둥 구멍 흔적을 기초로 나무 기둥을 박고 들보를 얹은 수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왜 이 무덤을 대총(大塚. 큰무덤)이라 하는지, 그리고 왜 현존 국내 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는지를 실감케 하기에 충분했다.이 목조구조물의 정확한 기능은 알 수가 없다. 무덤을 만들기 위한 구조물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최근에는 신라고고학 전공자인 차순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무덤을 조성하기 전에 시신을 임시로 안치해 둔 공간인 빈전(殯殿)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 목조구조물은 발굴조사 결과 규모가 동서 24m에 남북 20m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려대 사학과 교수이기도 한 최광식 박물관장은 "내가 명색이 신라사 전공자인데, 그동안 황남대총 발굴성과를 인용해 글도 쓰고 강연도 많이 했지만, 나부터가 막상 이런 규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이 목조구조물 복판에 무덤 주인공이 안치된 목곽(木槨)과 목관이 배치돼 있다. 그리고 목조구조물 한쪽(서쪽) 끝에는 토기를 비롯한 부장품을 집중적으로 묻은 공간인 부곽(副郭)이 있다.이번 특별전은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이런 무덤 배치를 기본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목조구조물 중앙에 관을 배치하는 한편, 부곽에는 실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서도 어린아이 키만한 대옹(大瓮) 몇 점을 전시했다.그리고 그 주변으로 남분과 북분에서 출토된 무수한 유물 중에서도 각 종류를 대표할 만한 것들을 내놓았다.신라가 왜 '황금의 나라'인지를 실감케 하는 각종 금그릇과 금귀걸이, 금관, 금제허리띠가 전시장에 그득했다. 비단 황금뿐만 아니라 은제, 동제 그릇도 풍부하고, 이 무덤이 만들어졌을 서기 400년대 신라사회에서는 어쩌면 황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을지 모르는 각종 로만글라스(로마제 유리제품)도 자태를 드러냈다.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를 통해 남분과 북분의 차이 또한 부각하고자 했다. 두 봉분이 맞닿은 곳을 조사한 결과 북쪽 봉토가 남쪽 봉토를 깎아먹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남분이 먼저 만들어지고 북분이 나중에 조성됐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두 봉분은 출토 유물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남분에서는 각종 무기류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데 비해, 북분에서는 이런 유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더불어 북분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를 적은 유물까지 확인됐다. 북쪽이 여성, 남쪽이 남성을 위한 무덤이라는 사실을 이로써 확실히 알 수 있다.5만8천441점에 달하는 황남대총 총 출토품 중 '겨우' 1천268점만을 내놓은 이번 특별전 전시품만으로도 남분과 북분은 차이가 비교적 확연히 드러난다.아무튼 1973년 이후 1975년까지 대대적으로 발굴된 황남대총이 이제야 그 비밀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연합뉴스 2010/09/06 15:03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0/09/06/0901000000AKR20100906134300005.HTML
2007 - 공룡 멸종 부른 운석은 ‘밥티스티나’ 소행성 파편
‘밥티스티나 소행성’ 충돌로 생긴 ‘지름10㎞ 파편’ 6500만년전 지구 추락…대화재·지진…산소·먹이 급감
1억6천만년 동안 지구를 지배한 공룡의 멸종 원인을 운석과 지구의 충돌에서 찾는 학설은 그동안 다수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렇지만 공룡의 떼죽음을 몰고온 운석이 언제,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등 이 학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제시된 적이 거의 없다.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연구를 거듭해온 미국과 체코의 공동 연구진은 공룡 멸종 과정을 추적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를 6일 발행되는 과학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1억6천만년 전 화성과 목성 사이(소행성대)를 돌던 두 개의 소행성이 충돌하면서 생긴 운석이 ‘주범’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진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1억6천만년 전 소행성대 가장 안쪽에 있던 밥티스티나 소행성의 모체(지름 170km)가 또 다른 소행성(60㎞)과 충돌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를 보면, 이 충돌로 지름 10㎞ 이상의 운석 300여개와 지름 1㎞ 이상의 파편 14만개 등 이른바 ‘밥티스티나 소행성 일족’이 형성됐다. 이들 가운데 지구로 향한 커다란 운석(지름 10㎞)이 6500만년 전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떨어져 칙술룹 분화구라는 지름 180㎞의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이 운석 충돌이 지구에 화재와 먼지구름 그리고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먹이와 산소가 부족해져 공룡 멸종의 원인이 됐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연구진은 칙술룹 분화구를 만든 운석의 구성 물질이 밥티스티나 소행성 구성 물질과 동일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칙술룹 분화구의 퇴적물 표본에서는 밥티스티나 일족을 비롯한 극소수 운석에서만 발견되는 탄소질 콘드라이트가 발견됐다.
연구진은 소행성대에서 이탈한 운석들이 지구뿐 아니라 달과 화성, 금성과도 충돌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1억800만년 전 달에 형성된 타이코 분화구(지름 85㎞)도 이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한겨레 2007-09-07 오전 08:39:22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234527.html
2007 - 이탈리아의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Pavarotti, Luciano) 사망
파바로티 [Pavarotti, Luciano, 1935.10.12~2007.9.6]
‘최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타계
별은 져도 천상의 목소리 영원하리!
우리 시대 최고의 테너를 잃었다.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6일 오전 5시(현지 시간) 고향인 이탈리아 모데나의 자택에서 71살을 일기로 타계했다고 그의 매니저 테리 롭슨이 밝혔다. 롭슨은 에이피통신에 보낸 이메일 성명서에서 “파바로티가 췌장암과 길고 힘든 전투를 치러왔으나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며 “파바로티는 평소 그의 삶과 작품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낙관적이었지만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무너졌다”고 말했다.
2004년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공연을 끝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를 했던 그는 지난해 7월 뉴욕에서 췌장암 수술을 받은 뒤 공식 활동을 중단한 채 자택에서 투병생활을 해왔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의 한 일간지와 인터뷰하면서 “지금으로서는 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지금은 암과 싸워 이겨나가야만 한다”고 밝혀 세계 음악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지난달 고열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고 그뒤 급성 신장병으로 수시로 의식을 잃는 등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다양한 레퍼토리와 함께 높은 음역에서 멀리 뻗어나가는 맑고 깨끗한 음색으로 ‘천상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던 파바로티는 플라시도 도밍고(66), 호세 카레라스(61)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꼽힌다. 193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파바로티는 1961년 26살에 레지오 에밀리아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남자 주인공 로돌포 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공식 데뷔했다. 같은해 이탈리아 레조 에밀리아 국제콩쿠르에 입상했고, 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도니체티의 오페라 〈연대의 딸〉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성악가로 올라섰다. 그는 이 공연에서 여러 번의 ‘하이C’(3옥타브 도)를 불러 ‘하이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1988년 독일 오페라하우스에서 가진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러 박수가 무려 1시간7분 동안 이어지면서 모두 165번의 앵콜을 받아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이자 오페라계의 라이벌이었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쓰리 테너 콘서트’로 오페라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머라이어 캐리 등 여러 팝가수들과 활발하게 공연했고, 세계적인 행사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해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과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클래식 음악가로 폭넓게 사랑받았다.
한국에는 지난 1977년 이화여대 음악당에서 독창회를 가진 것을 시작으로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는 ‘한반도 평화 콘서트’ 등 몇차례 방문해 공연했고, 한국인 성악가들과 함께 오페라 무대에 서기도 했다.
파바로티가 마지막으로 세계 음악팬들 앞에 섰던 것은 지난해 2월 고국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개막식 전야제였다. 이 무대에서 그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3만5천명 관중들을 감동시켰으나 결국 마지막 무대가 되고 말았다.
지난 1988년 파바로티 국제 성악콩쿠르에서 우승했고, 89년 파바로티와 함께 무대에 섰던 바리톤 최현수(49)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는 “목소리의 기술이 가장 완벽한 테너일 뿐만 아니라 굉장히 소탈하고 서민적인 훌륭한 분이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파바로티는 지난 2003년 35살 연하인 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 1961년 결혼한 아두아 베로니와의 사이에 세 딸을 뒀고, 현 부인 만토바니와의 사이에 딸 앨리스를 뒀다.
정상영 기자 /한겨레 2007-09-06 오후 06:52:35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4405.html
2005 - 김대중컨벤션센터 개관
‘김대중컨벤션센터’ 6일 개장
올해 전시 12개등 1724억원 경제효과 예상
호남권의 국제적인 전시·회의 공간인 김대중컨벤션센터가 6일 문을 연다.
이 센터는 2003년 11월부터 21개월 동안 1021억원을 들여 건립한 대규모 전시·회의 장소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여러 파급효과가 기대된다.
500부스 전시장, 2000명 회의장 만들었다=김대중컨벤션센터는 광주시 서구 치평동 터 1만6123평에 지상 4층 지하 1층 연면적 1만1966평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30.9m인 지붕과 건물의 외관은 무등산의 능선을 형상화했다.
건물은 실내 전시장 3267평, 야외 전시장 500평, 회의장 696평 등으로 짜여졌다. 실내 전시장에는 가로 세로 3m씩인 부스를 500개까지 설치할 수 있다. 대회의장은 한꺼번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중·소 회의장은 10곳이 마련됐다. 8개 국어를 동시통역할 수 있어 각종 국제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
또 야외에 전시장 뿐만 아니라 무대 80평과 객석 1천석이 있는 공연장이 설치됐다. 무대 옆에는 곡의 분위기에 따라 물줄기가 달라지는 음악 분수도 만들었다. 주차공간은 540대분 5300여평이다. 이 곳의 이름은 애초 광주컨벤션센터(GEXCO)였으나 지난 5월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개명했다.
개막식은 6일 오전 10시 야외광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이해찬 국무총리, 이희범 산자부 장관, 박광태 광주시장 등 4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올해 12개 전시, 22개 회의 열린다=김대중컨벤션센터는 6~9일 2005 국제광산업전시회를 첫 행사로 연다. 한국광산업진흥회는 국내외 130개 업체가 부스 240개를 설치해 광산업 관련 제품 정보와 기술 동향을 소개한다. 전시회 동안에 국제광기술컨퍼런스와 광관련 신기술·신제품발표회 등을 곁들인다. 통신 분야의 광통신홈네트워크(FTTH) 체험관과 조명 분야의 발광다이오드(LED) 체험관이 눈길을 끈다.
이 센터는 이어 △광주정보통신전(9월23~25일) △국제식품산업전(10월7~10일) △광주디자인비엔날레(10월18일~11월3일) △국제상하수도전시회(11월8~11일) 등을 잇달아 연다.
이밖에 올해 예정된 전시는 국제공장자동화기기전(11월16~19일), 광주국제실버박람회(11월18~21일), 모터스포츠아트쇼(11월24~27일), 국제한방산업박람회(11월24~27일), 신재생에너지엑스포(12월6~12일), 입시정보박람회(12월15~17일) 등 모두 12건에 이른다.
이 센터는 올해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직·간접적인 생산유발 1724억원 고용유발 4788명으로 추산했다. 연간 운영비 80억~90억원은 임대료 수입 40억원과 전시 개최비 30억원 등으로 충당해 적자폭을 20억~30억원으로 줄인다는 방침이다.
조영복 김대중컨벤션센터 사장은은 “전시컨벤션센터는 지역경제의 발전과 산업정보의 교류를 다지는 사회기반시설”이라며 “광주와 호남의 발전전략에 맞춘 기획전시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한겨레 2005-09-05 오후 05:47:32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2063.html
1998 -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사망
구로사와 아키라 [黑澤明, 1910.3.23~1998.9.6]
일본 영화사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가 1998년 9월 6일 오후 0시 45분 향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10년 3월 23일 일본 도쿄 오모리에서 태어난 그는 문학과 미술에 관심을 보이며 자라났다.
일본 최대 메이저 영화사인 도호(현 PCL영화제작소)가 1936년 일본영화계에서는 처음으로 조감독을 공채로 모집했는데, 구로사와는 이를 계기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도호에서 그의 생애 최대의 스승인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영화의 관한 모든 것을 터득하게 된다.
구로사와는 1943년 33살의 나이에 '스카타 산시로'란 작품으로 일본영화계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스가타 산시로'(1943)로 데뷔한 뒤 1951년 연출한 '라쇼몽'(羅生門)이 베니스 영화제 대상을 받으면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대한 영화 인생이 시작했다. 연이은 '7인의 사무라이'(1954)에서는 가부키의 연기 양식을 도입하는가 하면 통일성 있는 원구도를 통해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담아 냄과 동시에 존포드의 서부극을 일본식으로 절묘하게 녹여냈다. 서구적인 화술에 동양적인 색채나 일본의 전통극을 절묘하게 섞은 '거미의 성'(1957)은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일본식으로 옮긴 작품으로 당시 헐리우드 영화를 능가하는 스펙타클, 뛰어난 색채와 예술성으로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해주었다. 미국과 일본 합작품 '가게무샤'(影武者)(1980)는 구로사와를 추종했던 스필버그, 루카스, 코폴라 등의 대 감독들이 보증을 서고 20세기 폭스로부터 자본을 얻어내 제작한 걸작으로 1980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동양에서는 좀처럼 시도하지 못했던 스펙타클과 일본식 단아함을 조합해 자신만의 영화 미학을 창출한 일본 영화사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1995 - 립켄, 2131경기 연속 출장 기록
[책갈피 속의 오늘]1995년 립켄, 2131경기 연속 출장 기록
1995년 9월 6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시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메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용구장인 캠던 야즈를 가득 메운 5만여 명의 관중과 600여 명의 기자들은 숨죽인 채 영웅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기다렸다.임시 좌석은 수천 달러를 호가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도 관중석에 모습을 드러냈다.4회말 ‘철인’ 칼 립켄 주니어가 타석에 들어서자 그 열기는 한껏 고조됐다. 립켄이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고 타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직선으로 날아가 가뿐히 왼쪽 펜스를 넘어갔다. 5회가 끝나 이 경기가 공식경기로 인정되자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열렬히 환호했다. 담장 밖 건물 위에는 ‘2131’이라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서서히 내려왔다.2131경기 연속 출장. ‘철마’ 루 게릭(뉴욕 양키스) 이후 56년간 깨지지 않았던, 앞으로도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이라던 기록을 립켄이 깬 것이다. 13년간 성적이 부진하지도 않고 사고도 없어야 가능한 기록. 그는 무릎이 뒤틀리고 코뼈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묵묵히 팀을 위해 뛰었다. 겸손한 립켄이 관중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돌아오자 팀 동료들이 그를 관중석 가까이 끌어냈다. 그는 팬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손을 마주치며 야구장을 돌았다. 기립박수는 22분간 이어졌다.립켄은 그 후 3년간 연속출장 기록을 501경기나 늘렸다. 1982년 5월 30일부터 1998년 9월 21일까지 모두 2632경기에 출장하면서 7회 이전에 교체된 것은 단 4번이었다. 그는 통산 3184개의 안타와 43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0년 연속 20개 이상의 홈런과 2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그는 볼티모어에서만 20년을 보내고 19년간 매년 100안타 이상을 치면서도 다른 선수와 팬들에게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아 늘 존경을 받았다.마지막 시즌인 2001년 올스타전에서 박찬호 선수를 상대로 ‘고별홈런’을 쳐 MVP에 오른 그는 2007년 역대 3위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그는 기록 연장에 연연하지 않았다.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아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1998년 볼티모어의 마지막 홈경기가 열리기 직전 그는 감독을 찾아가 연속 출장을 그만두겠다고 밝혔다. 연속출장 기록이 더는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그는 고별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팬들이 저를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저는 꿈을 위해 살았기에 이 모든 일을 이뤘습니다.”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동아닷컴 2007-09-06 03:02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906/8486864/1
1991 - 소련, 발트 3국 독립 승인1991년 오늘 소련은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이른바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한다.소련의 최고집행기구인 '국가평회의'는 이날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1939년 체결된 독일-소련 밀약에 따라 그 이듬해 소련에 강제합병됐던 발트지역 3개 공화국이 51년 만에 독립국가로 국제무대에 재등장하게 됐다.우리 나라 정부는 곧바로 세 나라를 독립국가로 승인하고 곧 외교관계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한다. /YTN
1984 - 전두환 대통령 일본 공식 방문, 한 일 정상회담
전두환 대통령 일본 공식 방문
1984년 9월 6일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는 일본을 방문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공식 일본 방문은, 1983년 1월 나카소네 총리가 전두환 대통령의 방한초청을 받아들인데 대한 화답으로 정상회담에서 나카소네 총리의 방일초청 제안을 전두환 대통령이 전격 수락함으로써 성사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과 1950년, 1953년에, 그리고 1961년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방미 길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모두 비공식 방문이었다. 이 점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공식 일본 방문은 한·일 관계의 신기원을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4년 9월 6일 하네다 공항 도착 후 오후 3시 영빈관에서 거행된 공식 환영행사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대통령과 일본의 천황이 대면하였다. 공식 환영행사 종료 후 전두환 대통령은 궁성으로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예방하였다. 예정시간 보다 10여분이 지난 예방 후 일본 천황은 현관까지 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같은 날 오후 4시 30분부터 1시간 35분 동안 영빈관에서 나카소네 총리와 1차 정상회담을 가진 전두환 대통령은 저녁 8시 일본 천황이 궁성 2층에서 주최한 공식만찬에 참석하였다. 이날 만찬은,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황실 의전 사상 최대의 인원을 초청한 전두환 대통령 환영만찬이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 천황은 만찬사를 통하여 “금세기의 한 시기에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명하였다. 관례상 국가원수의 공식 사과가 외교 용어상 ‘유감’으로 표시하는 것에 비추어 일본 천황의 그러한 표현은 현실적인 수준에서 사과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특히 일본 천황의 사과는 한국의 원수가 직접 받았다는 점에서 지난 역사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수탈 등이 “불행한 과거”라는 표현 속에 농축되어 있으며 그것에 대해 일본 천황은 “진심으로 유감”이라고 하였다. 일본 천황의 사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인 일본 천황이 직접 한국의 국가원수를 맞이하여 최초로 과거의 침략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했다는 것이다. 히로히토 천황은 당시 83세로, 재임 초기 20년간 직접 식민지 통치를 관장하였던 장본인이었다. 둘째, 일본 천황의 과거사 반성은 같은 민주주의 진영으로서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동반자적 한·일 관계를 구축할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한·일 양국은 1965년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은 법적·공식적으로는 정상화되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과거의 상처로 인한 응어리가 맺혀 미묘한 관계였다. 양 국민감정 속에는 지난 역사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어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양국은 상호 주요 교역 대상국이었고, 일본 내 외국인의 90% 정도가 한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국내 여론조사 결과 서로 싫어하는 나라로 나타났다. 일본 천황의 사과는 양국이 서로 감정의 앙금을 풀고 태평양시대의 동반자로 새 출발할 수 있는 지표를 설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하여 일본 천황의 사과 이전에 외무장관과 총리 등의 對한 사과가 있었지만, 일본 천황의 법적·상징적 지위와 정치적·역사적 의미 등의 무게가 있으므로 일본의 반성의지를 밝히는 데는 일본 천황의 직접 사과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천황은 만찬사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유감을 표시한 외에 일본이 한국을 통해서 문화를 수용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일본 천황은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예를 들면 기원 후 6, 7세기에 우리나라가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 귀국의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학문, 문화, 기술 등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수한 사실을 기정사실로 공식 천명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이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까지 일으켰던 상황을 감안하면 상호 감정적인 앙금을 푸는데 좋은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둘째 날인 9월 7일, 나카소네 총리는 총리관저에서 베푼 오찬 석상에서 “일본은 한국에 숱한 고난을 겪게 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일본 정부와 국민은 이 과오에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장래를 위하여 엄숙히 계심(戒心)하려고 결의하고 있음을 밝힌다”고 하였다. 일본 천황의 사과에 이어 총리가 천황의 사과 표현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사과의 뜻을 재차 밝힌 것이다. 이러한 나카소네 총리의 사과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과오를 시인하면서,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며 새로운 한.일관계 설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국 정상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실현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갖고 광범위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965년 국교정상화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상처로 인한 응어리가 맺혀 미묘한 관계였던 한·일 양국은 전두환 대통령의 공식 방일로 실제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지표를 설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법적·공식적인 국교 정상화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관계를 지속해온 특수한 관계는 한·일 양국 모두에게 불이익을 주었지만 20여년이 지나도록 양국 정부 어느 쪽도 이를 타개하지 못한 채 끌어오기만 하였다. 피해자인 한국의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서 처음으로 공식 일본을 방문한 것 자체가 가해자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또한 가해자로서의 실질적인 책임자이자 상징인 일본 천황의 직접 사과와 연이은 나카소네 총리의 구체적인 사과는 한·일 양국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갈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양국 정상 간의 회담은 그러한 과거의 청산 위에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정립해나가려는 두 나라 정부의 우호적인 자세를 대변하였다.
전상숙(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가기록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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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스와질란드, 영국으로부터 독립
스와질란드 [Swaziland]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정식명칭은 스와질란드왕국(Kingdom of Swaziland)이다. 동쪽 일부가 모잠비크와 접하며 나머지 지역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접해 있다. 면적은 작지만 산악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린다. 비옥한 토지, 온난한 기후, 물·광물 자원 등 좋은 조건을 가졌지만 경제적으로 인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배 아래 있다. 세계에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감염률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하며(38.8%, 22만 명, 2003년), 평균 수명도 32.62세(2006)로 매우 낮아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행정구역은 4개 행정구(district)로 이루어져 있다.
스와질란드의 역사
스와질란드의 스와지족은 전통적인 영토가 고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북쪽으로부터 점차 남하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영토로 정해진 것은 19세기 전반(前半)의 네덜란드계 백인의 침략에 따른 것이었다. 1881년에는 영국이 독립을 보장하고, 1884년에는 남아프리카(트란스발)공화국이 독립을 보장했으나, 1890년에 양국 공동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영국에 대해 그 영유(領有)를 요구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에 반대하는 영국은 이를 거부하고 보츠와나·레소토와 함께 한 사람의 고등판무관(高等辨務官)의 통치하에 두었다. 그후 1963년 10월에 고등판무관제를 폐지하고 전임(專任) 판무관하에 입법심의회와 행정심의회를 설치하였으며, 1964년 6월에는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1968년 9월 6일에 마침내 독립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왕족이 지배하는 입헌군주제가 되었다.61년간 왕위에 있던 소브자 2세가 1982년 사망하자 왕족 내에서 대립이 일어났으며 1986년 18세의 음스와티 3세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스와지족의 국왕이 지도하는 임보코도보당(黨) 주도에 의회정치가 실시되고 있었는데, 1973년 4월에 국왕이 헌법을 폐지하고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1977년 4월에는 의회정치를 폐지하고 사실상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하였다. 1978년 10월 새 헌법이 공포되고 새 의회가 성립하였다. /naver
1966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총리 헨드릭 페르부르트(Verwoerd, Hendrik) 피살
페르부르트 [Verwoerd, Hendrik Frensch, 1901.9.8~1966.9.6]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수·편집인·정치가.
1958~6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차별정책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아파르트헤이트). 페르부르트가 생후 3개월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스텔렌보슈대학교의 우수한 학자였던 그는 1927년 이 대학교의 응용심리학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933년 사회학과 사회복지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페르부르트는 1937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새로운 국민당 일간지 〈트란스발러 Die Transvaler〉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정치적 유력인사가 되었다. 그는 1948년까지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그해 총선에서 국민당의 승리로 국민당 소속 상원의원이 되었다. 1950년 원주민문제담당장관이 되어 인종차별 법안을 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58년 선거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요한네스 게르하르두스 스트레이돔 총리가 죽자 국민당 의원 간부회의에서 1958년 9월 스트레이돔의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총리직에 부임한 페르부르트는 백인·혼혈인·아시아인·아프리카인(흑인)을 분리하는 복잡한 법체계를 가지고 인종차별정책을 완전하게 실행했다. 1959년 그는 반투 자치촉진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흑인들의 거주지를 8개의 독립 보호구역, 즉 반투홈랜드(현재 블랙 스테이트로 지정됨)로 옮기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인종정책들은 흑인들의 시위를 불러일으켰는데, 1960년 3월 샤르페빌에서 일어난 시위는 유혈사태로까지 번졌다. 1960년 10월 5일 백인 유권자들은 근소한 표차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영국연방에서 탈퇴시키고자 하는 그의 제안을 승인했다. 그리하여 공화국을 실현하고자 하는 페르부르트의 꿈은 1961년 5월 31일 현실로 이루어졌다. 1960년 4월 9일 한 미친 백인 농부가 페르부르트를 암살하려고 총을 쏘았으나 실패했다. 6년 뒤 그는 의회 회의실 안에서 모잠비크인 이민으로 혼혈인인 차펜다스라는 이름을 가진 임시의회 대리인의 칼에 찔려 죽었다. /브리태니커
1966- 미국의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Sanger, Margaret) 사망
마거릿 생어(Sanger, Margaret, 1883.9.14~1966.9.6]
산아제한운동을 활발히 벌인 미국인 여성 운동가이다.
뉴욕 출생.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간호학교를 졸업, 보건간호사가 되었다. 1900년 건축기사인 윌리엄 생어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간호사로서 빈민가에 근무하는 동안 빈곤과 다산이 모자(母子)의 사망률을 높인다는 것을 보고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4년에 기관지 《산아제한평론 Birth Control Review》을 발간하는 등의 활약을 계속하고, 1916년에는 미국 최초로 브루클린에 산아제한진료소를 열었으나 공안질서 방해죄로 체포되어 감화원에서 30일간의 노동형을 치렀다. 또한 1929년에도 생어 산아제한진료소가 검색당하여 서류를 압수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사·사회사업가 등의 지지자가 늘어나자 소송은 각하되었다.
1936년에는 피임문서와 기구의 사용을 풍속교란죄로 다스리고 있던 1873년의 풍속교란방지법이 개정됨으로써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피임을 지시하는 일은 의사의 정당한 권리임을 인정받게 되었고, 1953년에는 국제 산아제한연맹도 조직되었다. /네이버
- '흰소'
- '투계(鬪鷄)'
1956 - 한국의 서양화가 이중섭(李仲燮) 사망
이중섭 [李仲燮, 1916.4.10~1956.9.6]
화가 이중섭(李仲燮)의 삶은 6·25를 전후해 둘로 나뉜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던 젊은 시절과 월남(越南) 이후 겪어야 했던 일련의 비극적인 삶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각광받던 중섭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5년. 10년 만이었다. 곧 그를 쫓아온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결혼하고 함남 원산에 둥지를 틀었다. 짧았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그러나 분단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사업가로 원산에서 승승장구하던 형이 처형당한 것이다. 1950년 12월 중섭은 가족과 함께 원산을 떠났다. 고행의 시작이었다. 부산을 거쳐 제주에 일시 머문 중섭은 대표작 '황소'와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을 그리며 모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952년 7월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면서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홀로 된 중섭은 고독을 곱씹으며 방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붓을 잡았다. 대폿집에서도 그렸고, 부두에서도 짐을 부리다 짬이 나면 그렸다. 종이가 없으면 담뱃갑 은종이에도 그렸다. 이 시기 거의 매일 계속되는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은 중섭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1956년 9월 6일 중섭은 마침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고달픈 생애를 접었다. 시신은 무연고자로 3일간이나 방치됐고, 침대에는 밀린 18만원의 입원비 계산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선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포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담뱃갑 은지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잘 곳이나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 시인 구상(具常)
1950 - 한국군에 여군 창설
1950년 9월 6일 6·25전쟁 중이던 당시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로써 한국군 조직에 최초로 여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1951년 11월 여자의용군교육대가 해체되면서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여군과로 편입되었고, 1955년 7월 여군훈련소가 설치되어 여군의 훈련을 전담했다. 1959년 1월 여군과가 육군본부 여군처로 개편되었으며, 1970년 12월 여군단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른다. 본래 여군은 남성들의 전투활동을 지원·보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창설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다양한 교육내용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통해 실제상황에 대처할 만한 능력을 소유한 군대로 발전했다. /브리태니커
[어제의 오늘]1950년 여군 창설
ㆍ일부는 적진에 침투해 첩보활동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신화 속에서도 전쟁을 일삼은 인류는 사회를 만들면서 군대를 조직했다.군대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전쟁 때면 여자들도 밥을 짓고, 군수품을 나르고, 부상병을 치료하며 전장의 한 자리를 지켰다. 한국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치마를 이용해 돌을 나르며 전투에 가담해 훗날 성 이름을 ‘행주산성’으로 바꿔 놓기까지 했다.하지만 잔 다르크 등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군인 아닌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공식적인 여군의 등장은 19세기 후반에 이뤄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 중 여군을 뽑았고, 이스라엘도 유대 임시정부 때 여군을 조직했다.한국은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지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무렵에 여성을 군에 흡수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국방부 일반명령 제58호를 근거로 1950년 9월6일 여자의용군 교육대가 발족되면서 여군시대 개막을 알렸다.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본부를 설치한 교육대는 제1기로 500여명의 지원자를 선발하고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쳐 같은달 28일 491명의 여군을 배출했다.당시 여군은 후방에서 주로 행정·경리·통신 분야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일부는 전방 전투사단에 배치돼 정보수집·수색활동·선무활동에 참가하는가 하면 특수교육을 받고 적진에 침투해 첩보활동을 벌이기도 했다.이후 전선이 교착된 채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여군의 역할이 줄어들어 1951년 11월 여자의용군 훈련소는 해체되고 만다.하지만 여군 기술사병 양성의 필요성에 따라 1953년 2월1일자로 육군보병학교에 여군교육대가 다시 창설돼 휴전 때까지 4기에 걸쳐 이곳에서 군사훈련과 병과기술훈련을 했다. 여군교육대는 1955년 7월 여군훈련소로 확충돼 독자적인 여군교육기관의 토대를 이뤘다.이후 여군훈련소가 1990년 ‘여군학교’로 승격되는 등 군에서 여군의 비중은 점점 커져 갔다. 1993년에는 훈련소 연대장과 신병교육대 소대장직도 여군에게 개방되고, 1996년부터는 3군사관학교에서도 여자생도를 뽑았다.이어 2002년 1월 여군 최초의 장군(양승숙 예비역 준장)이 나왔으며, 그 해 9월에는 공군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지난해에는 학군단 문호도 열려 여성 학군사관후보생(ROTC)이 60명 나왔으며, 올해는 그 규모가 지난해의 3배에 이를 전망이다.여군은 창설 60여년 만에 우리 군의 핵심 전력이 됐다.엄민용 기자 margeul@khan.co.kr /경향신문 2011-09-05 21:42: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9052142255&code=100100&s_code=ap005
1948 -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 즉위
[책갈피 속의 오늘]1948년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 즉위
1948년 9월 6일 율리아나(1909∼2004) 여왕이 네덜란드의 제5대 국왕으로 즉위했다.왕위에 오르기까지 율리아나 여왕은 몇 년간 힘든 시기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네덜란드가 독일에 침공당하자 여왕은 두 딸과 함께 캐나다 오타와로 피란했다. 국민을 두고 도망쳤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임신 중이었던 이국땅에서 셋째 아이를 낳아야 했다. 슈퍼마켓에 가서 직접 장을 보고 요리도 해야 했고 갓 낳은 아이를 포함해 세 딸을 돌봐야 했다.그렇지만, 이 시간은 여왕의 장점을 처음으로 증명한 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율리아나가 차기 국왕으로 적합하겠느냐며 미덥지 않아 했다. 전쟁 중 율리아나가 보여 준 모습은 그런 의구심을 사라지게 했다. 캐나다에 머물 때는 이웃 사람들조차 왕족인 줄 모를 정도로 수수하면서도 따뜻한 품성을 보였으며, 네덜란드의 일부 지역이 수복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귀국해 임시정부를 세울 정도로 과감함을 보였다. 여왕으로 즉위했을 즈음엔 국민의 지지도 압도적이었다.여왕의 강인함과 소박함은 통치 기간 내내 빛을 발했다. 후진국의 빈곤과 아동복지 문제를 해소하는 데 앞장서는 여왕의 모습에 세계 각국이 찬사를 보냈다. 1953년 폭풍이 네덜란드를 강타해 전국이 쑥대밭이 됐을 때 흙탕물 속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면서 구호에 앞장서 국민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이렇듯 한 나라의 여왕으로서 추앙받는 삶을 살았으나, 여성으로서의 율리아나의 일생은 순탄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남편과 자식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바람기로 유명했던 데다 나치 당원이었다는 소문, 미국 록히드 마틴사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 등이 잇달아 제기됐다. 임신 중에 앓았던 풍진 때문에 막내 크리스티나 공주는 시력을 거의 잃은 채 태어나 어머니에게 평생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둘째 이레너 공주가 부모 몰래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독실한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의 국민이 아우성을 쳤다.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평생 상냥하고 정 많았던 율리아나 여왕을 네덜란드 국민은 아끼고 사랑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율리아나 여왕의 생일인 4월 30일을 ‘여왕의 날’로 지정해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제를 즐긴다. 1980년 베아트릭스 여왕이 제6대 국왕에 올랐지만 국민은 4월 축제가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1월의 베아트릭스 여왕 탄생일은 간단하게 기념하고 4월의 ‘여왕의 날’을 오래도록 축하하기로 했다.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동아닷컴 2006-09-06 02:58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906/8347766/1
1920 - 미국 전설의 복서 뎀프시 첫 방어전
[책갈피 속의 오늘]1920년 美전설의 복서 뎀프시 첫 방어전
“여보, 내가 고개 숙이는 걸 깜빡 잊었어(Honey, I just forgot to duck).”1981년 3월 미국 워싱턴 힐턴호텔 앞에서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광적인 팬 힝클리가 쏜 총에 맞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부인 낸시 여사에게 이런 농담을 건넸다. 원래 이 얘기는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잭 뎀프시가 1926년 진 터니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뒤 영화배우 출신 아내 에스텔 테일러에게 했던 것. 피격 소식으로 충격에 빠진 미국인들은 대통령이 ‘농담할 수 있는 상태’라는 데 크게 안도했을 것이다.역사상 최고의 복싱 챔피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뎀프시는 1895년 콜로라도의 매너사에서 11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화물열차의 노무자, 광부 등으로 일하던 그는 돈벌이가 되는 자신의 진짜 능력을 발견했다. 주먹질이었다.술집에서 내기 권투로 푼돈을 벌던 그는 1914년 뉴욕에서 진짜 링에 올랐다.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싸우던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는 상하좌우로 상체를 격렬히 움직이며 타격하는 ‘뎀프시 롤’이란 기술로 팬들을 매료시켰다.KO 행진을 이어가던 그에게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은 제스 윌러드. 키 186cm, 몸무게 85kg인 뎀프시와 200cm, 111kg인 윌러드의 경기를 당시 언론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보도했다. 경기를 앞둔 심정을 묻는 기자들에게 뎀프시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싸운다”라고 말했다.1919년 7월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경기는 시작과 동시에 이런 예상을 무색하게 했다. 뎀프시는 1라운드에만 윌러드를 7번 다운시켰다. 이가 부러지고 턱이 깨진 윌러드는 4라운드에 기권했다. ‘매너사의 난폭자(Manasaa Mauler)’ 뎀프시는 챔피언에 등극했고 최초의 복싱 스타로 떠올랐다. 1920년 9월 6일에는 빌리 미스크를 상대로 첫 방어전을 치렀다. 3라운드 KO승.1921년 3차 방어전에서는 프랑스 선수 조르주 카르펜티에와 격돌했다. 뉴저지에서 열린 이 경기의 흥행수입은 사상 처음 100만 달러를 넘어섰고 미국 전역에 라디오로 생중계됐다. 터니에게 질 때까지 6년간 타이틀을 지킨 그는 1927년 터니에게 재도전해 실패하자 은퇴했다. 통산 전적 80전, 60승(51KO), 6패, 8무승부, 6무판정 경기. 은퇴 후에는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음식점을 차렸고 ‘골리앗’ 윌러드와 평생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1983년 세 번째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88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졌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동아닷컴 2008-09-06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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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 독일의 정치가 프란츠 슈트라우스(Strauss, Franz) 출생
슈트라우스 [Strauss, Franz Josef, 1915.9.6~1988.10.3]
독일 정치가.
뮌헨에서 출생했다. 뮌헨대학을 졸업한 후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 1945년 바이에른주(州)에서 그리스도교사회동맹(CSU) 창당에 참여, 1949년 서기장으로서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다. 1952년 당 부총재, 1953년 무임소장관, 1955년 원자력장관, 1956년 국방장관에 취임했는데, 1962년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활동에 관한 국가기밀누설사건을 보도한, 이른바 《슈피겔 Der Spiegel》지(誌) 사건으로 국방장관을 사임하였다.
그 후 K.G.키징거 내각에서 1966∼1969년 재무장관을 지냈고, 1978년 연방의회 의장직을 사퇴한 후, 1980년 총선거에서는 독일기독교민주동맹(CDU)과 CSU의 단일후보로 나섰지만 독일사회민주당(SPD)의 H.슈미트에게 패하고, 바이에른주 수상에 임명되었다. 1961년 이래로 계속 당총재로 있었다. 저서에는 《도전과 반응 Herausforderung und Antwort》(1968) 《당신의 미래, 독일 Deutchland Deine Zukunft》(1975) 등이 있다. /naver
- Marshal Joffre (1852~1931) - 50th Anniv. of Battle of the Marne, 1964
1914 - 독일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대패한 마른 전투 개시
마른전투 [Battle of Marne]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6일~12일에 프랑스 파리의 북동족 마른강(江)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파리의 공방(攻防)을 놓고 벌인 전투.
개전 당시 독일의 작전계획으로는 중립국 벨기에까지 포함하여 우익(右翼) 쪽을 대선회(大旋回)하여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파리의 남서 방면으로 편익(片翼) 포위하여 공격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우익을 강화하라’는 슐리펜 원수의 유언을 무시한 독일의 참모총장 H.몰트케는 우익 병력을 축소했기 때문에 포위력이 둔화되어 마른강 선(線)에서 J.조프르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주력부대의 반격을 받았다. 독일군은 엔강(江)까지 후퇴하였고 독일의 전격작전이었던 슐리펜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후 서부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으며, 이 때문에 몰트케 대신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이 되었다. /네이버
1906 - 아르헨티나의 생화학자 루이스 를루아르(Leloir, Luis) 출생
를루아르 [Leloir, Luis Federico, 1906.9.6~1987.12.2]
프랑스 태생의 아르헨티나 생화학자.
1932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영국과 미국에 유학하였다. 1947년 자산가의 도움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설 생화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에 종사하였다. 1962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50년에 우리디2인산글루코오스(UDPG)를 발견하여 그 생합성메커니즘을 해명하였다. 당 뉴클레오티드의 발견과 탄수화물의 생합성에서 그 역할에 관한 연구로 1970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아르헨티나과학아카데미,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등의 회원이었다.
1970년 복잡한 탄수화물이 깨져 간단한 당(糖)으로 변하는 과정을 연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34~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 생리학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했다. 1년 동안 케임브리지대학교 생화학연구소에서 일한 뒤 1937년 다시 생리학연구소로 돌아가 지방산의 산화(酸化)를 연구했다. 1947년 재정지원을 받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생화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젖당인 락토오스의 생합성과 분해를 연구해 탄수화물의 자연 대사과정을 밝혀줄 당 뉴클레오티드를 발견했다. 또 글리코겐의 형성과 이용에 관해 연구했고, 글리코겐의 합성에 관여하는 간(肝) 효소를 발견했다. /naver
1903 - 한국의 동요 작곡가 윤극영(尹克榮) 출생
윤극영 [尹克榮, 1903.9.6~1988.11.15]
동요작가, 동요작곡가, 아동문화운동가.
세칭 반달할아버지. 서울 출생. 조선 말기의 승지 직선의 손자이다. 교동보통학교(校洞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도요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 등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1923년 색동회 창립동인이었으며, 조선가사를 붙인 찬송가곡이나 일본 노래뿐인 시대에 동요 창작을 시도하였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4년 서울로 돌아와 동요단체 ‘다리아회’를 조직하였다. 어린이문화운동과 동요 창작과 작곡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월 피아니스트 오인경과 만주 용정(龍井)에 가서 동흥중학교·광명중학교·광명고등여학교 음악 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후 10년간 〈제비 남매〉·〈우산 셋이 나란히〉·〈고기잡이〉·〈외나무다리〉·〈담모퉁이〉 등을 작곡하였다. 1936년 가을 서울로 돌아와 음악 활동을 하였다. 그 해 일본으로 가서 1937년 극장 가수로 취직하며 예술단 창립을 연구하였다.
1940년 서울·간도를 거쳐 중국 하얼빈예술단을 창립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1년 용정에서 역마차 사업을 하다가 간도성협화회(間島省協和會)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친일로 기울어져 괴뢰만주국에 적극 협력하기도 하였다. 하얼빈에서 예술 활동을 하다가 1946년 용정에서 경비대에 붙잡혀 3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보석되었다. 1947년 톈진(天津)에서 손수레를 끌다가 남한으로 탈출하였다.
1924년 〈반달〉을 비롯하여 〈설날〉·〈까치까치 설날〉·〈할미꽃〉·〈고기잡이〉·〈꾀꼬리〉·〈옥토끼노래〉 등의 창작 동요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 〈고드름〉·〈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여 동요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점층수법에 의한 동요 창작과 작곡을 통하여 초창기 아동문학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대 초 북경(北京)에서 조선족 김정평과 그의 아버지 김철남이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하여 30년간 애송되다가 1979년 〈하얀쪽배 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 전국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었다. 1956년 제1회 소파상을 수상하였고, 1963년 서울교육대학 제정 ‘고마우신 선생님’에 추대되었으며, 1970년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1987년 어린이의 심성계발과 순화를 목적으로 동화·동요·그림·연극 등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단체인 동심문화원(童心文化院)을 설립, 운영하였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마리/……”로 시작되는 그의 대표적인 동요 〈반달〉은 맏누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쪽배’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토끼’는 우리 나라를, ‘샛별’과 ‘등대’는 희망을 빗대어 상징한 미래지향적인 민족 동요로 해석되었으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당시 그의 친일 활동을 감안한 결과 창작 동기가 애국애족 정신에 있다기보다는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동요작곡집 ≪반달≫(1925)과 ≪윤극영 111곡집≫(1963) 등 다수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02 - 토고의 대통령 실바누스 올림피오(Olympio, Sylvanus) 출생
올림피오[Olympio, Sylvanus, 1902.9.6~1963.1.13]
토고 정치가, 초대대통령.
로메 출생. 프랑스령 토고 지역에서 생활하다가 런던대학에서 공부 한 뒤 1926년 영국의 통일아프리카회사(UAC) 에 들어갔으며, 나중에 토고지구 지배인이 되었다. 영국령·프랑스령으로 분리되어 있던 토고 에웨족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영국령 토고랜드는 가나에 흡수되었다. 친프랑스적인 N. 구르니츠키와 대립하면서 토고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60년 독립을 달성하였을 때 초대 토고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북부의 주민 및 자파(自派)인 토고통일위원회(CUT)의 급진파 반대가 심했으며, 1963년 정규군 편입을 요구하던 퇴역병사에게 암살당하였다. /yahoo
1901 -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피습사건 발생
매킨리 피습사건 발생
1901년 9월 6일 미국 대통령 매킨리가 버펄로에서 열린 범미국박람회에서 무정부주의자인 레온 촐고츠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매킨리 집권 당시 미국은 1895년에 일어난 쿠바 독립운동과 그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가혹행위에 대한 소문들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매킨리는 이 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1898년 2월 15일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스페인과 전쟁(미국-스페인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협상에서 매킨리는 패전국 스페인의 해외식민지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둘 것을 주장했고, 이로써 미국은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그 결과 매킨리는 1900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미루었던 국정 운영에 박차를 가하던 중 총격 테러를 당해 그로부터 8일 후 사망했다. 당시 부통령으로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브리태니커
1890 - 미국의 공군 준장 클레어 셔놀트(Chennault, Claire) 출생
셔놀트 [Chennault, Claire Lee, 1890.9.6~1958.7.27]
미국의 공군준장.
중국에서 미육군 항공대를 지휘했으며(1942~45), '날으는 호랑이'로 잘 알려진 미국 지원병 부대(American Volunteer Group/AVG)를 창설했다. 그는 미국 육군과 육군항공대에서 20년 동안 복무하면서 '비행그네 위의 3인조'로 알려진 곡예비행단을 이끌었고 비행술 교과서인 〈방어용 전투기의 역할 The Role of Defensive Pursuit〉(1935)을 집필했다. 귀가 멀게 되어 전역했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뒤 그는 장제스[張介石] 장군의 공군 군사고문이 되었고, 'AVG' 부대를 조직해 일본의 우세한 공군력에 맞서 싸웠다. 이 부대는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미국 정규군인 육군항공대에 편입되었고, 셔놀트는 다시 군대에 소환되어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1945년에 퇴역했지만, 중국인 아내 안나와 함께 장제스의 강력한 지지자로 남아 있었다. /브리태니커
1860 - 미국의 사회운동가 제인 애덤스(Addams, Jane) 출생
애덤스 [Addams, Jane, 1860.9.6~1935.5.21]
애덤스는 북아메리카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헐 하우스의 창시한 미국의 사회개혁가·평화주의자이다. 애덤스는 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을 여행하던 중 런던의 화이트채플 산업지구에 있는 사회복지기관인 토인비 홀을 방문하고, 미국에도 그와 비슷한 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귀국 후 애덤스는 시카고 노동자지구의 빈 집을 얻어 헐 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1889년 9월 18일 이사했다. 헐 하우스는 자원봉사자나 미래의 사회사업가들에게 사회에 봉사하고 여러 가지 기능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우고 일하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 이밖에도 애덤스는 최초의 소년심리원법과 공동주택법, 여성노동자의 1일 8시간 노동제 등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민자와 흑인에 대한 사법제도 정립을 위해 힘썼으며,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옹호했다. 1910년에는 전국 사회사업가 회의에서 최초의 여성 의장이 되었으며, 1915년 국제 여성회의 의장이 되어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 국제연맹'을 설립했다. 니콜라스 머리 버틀러와 함께 1931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브리태니커
"미국의 미래는 가정과 학교에 달려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그들이 배운 대로 성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 제인 애덤스
1757 - 프랑스의 정치가, 혁명가, 군인 라파예트(Lafayette, Marquis de) 출생
라파예트 [Lafayette, Marquis de, 1757.9.6~1834.5.20]
Marie 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Motier, Marquis de Lafayette
de La Fayette라고도 씀. 프랑스의 귀족.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에 대항해서 식민지 아메리카 편에서 싸웠으며, 뒤에 프랑스의 혁명적 부르주아들과 손을 잡음으로써 프랑스 혁명 초기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유서 깊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774년 세도있는 아옌 공작의 딸과 결혼하여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루이 16세의 궁정에서 젊은 관리들과 어울렸으나 곧 군인으로서 이름을 떨치겠다는 야망을 품었고,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난 몇 달 후인 1777년 7월 27일 필라델피아로 갔다. 거기서 식민지 아메리카 군대의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식민지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과 지속적인 친교를 맺게 되었다. 1777년 9월 11일 펜실베이니아의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활약했고, 1778년 5월 28일에는 사단장으로서 배런힐 철수작전을 능숙하게 수행했다. 1779년초 프랑스로 돌아와 루이 16세 정부(政府)를 설득, 6,000명의 군대를 파견해 식민지인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1780년 4월 다시 미국으로 가서 곧 버지니아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영국군 사령관 찰스 콘월리스 경의 군대를 버지니아에서 몰아낸 다음, 7월말에 요크타운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프랑스 함대와 식민지 군대가 이 포위전에 합류했으며, 마침내 10월 19일 콘월리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영국은 전쟁에서 완전히 패했다. '두 세계의 영웅'으로 환호를 받은 라파예트는 1782년 프랑스로 돌아와 준장으로 진급했다. 178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몇 개의 주(州)로부터 시민권을 받았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자유주의 귀족의 지도자가 되어 종교의 자유와 노예무역 폐지를 열렬히 주장했다. 1789년 5월에 열린 삼부회(三部會)에서는 귀족 대표로 참석했고 제3신분인 부르주아들이 삼부회를 지배하여 혁명적인 국민의회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이 취한 여러 조치들을 지지했다. 7월 11일에는 '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초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했는데 그 초안은 상당한 수정을 거친 뒤 8월 27일 채택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하루 뒤인 7월 15일에는 새로 만들어진 파리의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10월 6일 성난 군중들이 베르사유 궁전을 습격했을 때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했고 왕의 가족들을 파리까지 호위했으나 그들은 파리에서 혁명의 볼모가 되었다. 그의 인기와 영향력은 이듬해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귀족의 손에서 부르주아의 손으로 권력을 옮기는 조치들을 지지했으나 민주화가 더 진행되어 하층계급들이 재산권을 침해할까 두려워했으며 공화주의자들이 입헌군주제라는 새 체제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불안을 느꼈다. 1791년 7월 17일 군중들이 마르스 광장에 모여 왕의 폐위를 요구했을 때, 라파예트는 방위군에게 발포를 명령해 시위자 5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사건으로 그의 인기는 추락했고 8월에 방위군 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791년 12월 메스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된 뒤 급진적 민주파를 탄압하려 했는데, 아마도 왕의 이름으로 이 일을 추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패했고,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군주제는 민중봉기로 무너졌다.
그는 8월 19일 오스트리아로 도피해 1797년까지 그곳에서 포로로 억류되어 있었는데, 그때 만약 오스트리아로 가지 않았더라면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자 프랑스로 돌아와 부농(富農)으로 자리잡았다. 루이 18세(1814~24) 때는 하원의원을 지냈고 1824~25년 미국을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830년 7월 국민방위군을 이끌어 샤를 10세를 타도하고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6개월 뒤 은퇴했다. /브리태니커
1729 -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Mendelssohn, Moses) 출생
멘델스존 [Mendelssohn, Moses, 1729.9.6~1786.1.4]
독일의 유대인 계몽철학자.
데사우 출생. 작곡가 F.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이다. 1754년 G.E.레싱과 만나 깊이 교우하였고, I.칸트와도 편지 왕래가 있었다. 유대인의 독일 시민사회에 대한 융합을 주장하였다. 신학적으로는 이신론(理神論)에 서서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철학적으로는 줄처와 마찬가지로 감정작용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뒤의 테텐스에 의한 정신활동의 지정의 삼분법(知情意三分法)에 선행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감각에 관하여》(1755) 《패돈-영혼의 불멸에 관하여》(1767)가 있다. /nave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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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출처: 꿈꾸는 다락방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