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순성길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한양도성 성곽길 이라고 명시되었는데
이번에는 순성길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드라구요 순성이라는 뜻은 잠시후 다시 설명하도록 하고
건장한(??!!) 남자 3명에서 정말 빠르게~빠르게 후다닥 다녀왔습니다.
너무 빨리 이동하는 탓에 재대로 설명도 못하게 지나간게 더 많았던 순성길 ㅎㅎㅎ
서울 한양도성[사적 제10호]은 조선을 개국(1392년)한 태조 이성계에 의해 1396년(태조 5년),
도읍지인 한성부(한양 => 한성으로 변경)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곽입니다.
한양을 둘러싼 북쪽[백악산(북악산)], 동쪽낙타산(낙산), 남쪽목멱산(남산), 서쪽인왕산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성,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는 약 18.6km 이며,
동서남북 방향으로 4개의 문과 각 대문 사이 4개의 소문을 설치 하여 한성을 지켜왔다고 해요
4대문은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쪽의 혜화문, 남동쪽의 광희문, 서남쪽의 소의문(소덕문), 북서쪽의 창의문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과 그 사이에 4개의 간문이 있었다.
따라서 한양도성의 성문은 모두 8개이다. 정문인 4대문으로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 있고,
4대문의 중간 중간에 간문인 4소문으로 혜화문 · 소덕문 · 광희문 · 창의문이 위치했다.
성문 이름은 정도전이 유교 사상을 담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지었서
스템프 투어할때 인의예지신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동쪽에는 어질 인(仁), 서쪽에는 의로울 의(義), 남쪽에는 예의 예(禮), 북쪽에는 지혜로울 지(智),
그리고 중앙에 믿을 신(信)을 사용해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조선의 건국 이념을 드러냈다.
(정말 옛선조들님께서는 깊이가ㅎㅎㅎ)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각각 조선시대 중층 목조건축물과 조선후기 다포계 건축물을 대표한며,
창의문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숙정문과 광희문, 혜화문은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돈의문과 소의문는 일제강점기에 멸실되어 현재 터만 명시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유교사상과 음양오행을 나타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
4대문의 이름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신(信)'자는 도성의 중심지에 있는 보신각에서 찾아볼 수 있고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동쪽으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두개의 수문(水門)을 두었다.
한양도성은 처음 태조(조선 제1대)시기에는 흙을 주재료로 하였으며
세종(조선 제4대) ∙ 숙종(조선 제19대) ∙ 순조(조선 제23대)시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모든 성곽을 석성(돌)으로 바꾸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개축되었고, 오늘날의 성곽에는 이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다양한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기술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다.
이후 식민지시기와 해방 이후 지금까지 620여 년간 우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의 터전이자 수도 서울의 상징으로 그 역할을 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 유산이다.
출발지는 이 곳 남대문인 숭례문부터 스템프 찍고 시작합니다.
소의문(昭義門)
한양 도성의 서소문 ‘소덕문’
한양도성의 서소문으로서 소덕문(昭德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아침부터 닭둘기가 저에게 다가옵니다.
렌즈 땡긴게 아닙니다 ㅋㅋ
무서워랏~;;;
돈의문(敦義門)
터로 남은 ‘돈의문’
한양 도성의 서대문으로 '의(義)'는 서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다.
한양 도성의 4대문들 중 가장 많은 수난사를 가진 문으로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으며, 경희궁의 서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세종 4년(1422)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종 이후 돈의문이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으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터만 남아있다.
돈의문에서 조금만 오르다보면 인왕산이 보일무렴
홍난파 가옥이 눈에 들어옵니다.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지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은 서양식 건물로
(어쩐지 좀 고급지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ㅎㅎ)
《봉선화》《고향의 봄》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1898~1941)가 6년간
말년을 보낸 집이라고 합니다.
2007년 9월 소공연장으로 새롭게 리모델링하고 거실과 안방으로 사용하던 지상 1층에 음향시설
50명 정도 수용 규모의 공연장으로 만들었으며 지하에는 자료실과 시청각실을 만들어 홍난파 관련 서적과 비디오테이프 등 있으니 개방시간 확인하여 방문하면 좋은 추억에 남을거 같습니다.
이렇게 인왕산은 말없이 남자 3명은 후다닥 눈썹휘날리게 지나갔습니다.
청계천 발원지??? 정말??
창의문(彰義門) [보물 1881호]
한양 도성의 북소문 ‘자하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으로서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인조반정(1623)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이 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한다.
창의문의 문루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현재도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신분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북악산
간단한 신분확인 후 돌진합니다.
▽ 자북정도(紫北正道)
참고로 '자하문 북쪽의 정의로운 길' 이라고 해석되며 박정희 前대통령의 친필이라고 전해옵니다.
한양도성 순성길에서 제일 힘든오르막을 올라 정산 백악산 인증 두둥
다른 주변은 촬영이 금지되어 달랑 이렇게만
한양도성길을 걸으면서 만난 1.21사태 소나무
1968년 1월 21일에 일어났기에 붙은 이름으로 경복궁 뒷산인 백악산까지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침투해 온 사건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나라의 경찰병력과 맞닥뜨렸는데 심각한 교전이 벌어졌고,
이 작은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을 남길 정도였으니,
그 때 당시로는 심각한 상황이라걸 나타내 줍니다.
백악산 하산하면서 보이는 청운산 이또한 사진만 찰칵하고 바로 무브무브;;;
숙정문(肅靖門)
음기가 강한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항상 닫혀있던 ‘숙청문’
한양 도성의 북대문으로서 본래 북쪽에 해당되는 것은 '지(知)'인데,
'꾀 정(靖)'자를 사용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는 의견에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北)은 음의 기운이 강한 것이고
남(南)은 양인 까닭에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숙정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규모 면에 있어 그 크기가 현저히 작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76년 문루를 새로 지었다.
숙정문을 지나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도착하는 말바위 안내소
이곳에서 표찰을 다시 반납합니다.
벌써 3번째????
마지막 동대문인 홍인지문만 남았습니다 후훗
말바위안내소에서 와룡공원으로 내려가는 길
이 곳 성곽길은 태조부터 숙종까지 그 역사의 성벽들을 구경 할 수가 있습니다.
공원에서 내려오는 도심지 이곳은 성북구와 종로구의 경계점
바로 앞 왕돈까스집 엄청난 매스컴으로 유명한 돈까스집인데
느끼한곳이라고 하기에(누군가가 옆에서 조언;;;;)
점심은 동대문으로~~
요기서 먹을까하고 생각하던 곳이였는데 말이죠 ㅠㅠ
개인 집 성벽???
개인주택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 성벽
추척한 돌을 보니 아마 세종때 그리고 숙종때 추척된거라 생각됩니다.
도로구축으로 이렇게 떨어져 있고 지금은 옛 모습이 없는곳으로
근래에 들어 새로 추척한 모습입니다.
혜화문(惠化門)
한양 도성의 동소문 ‘홍화문’
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며,
창경궁이 세워지면서 동문의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짓는 바람에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 보니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헐려 없어진 것을
1994년 서울 도성 복원 사업 때 원위치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새로 지었다.
이 곳 혜화문 위치도 저 곳이 아니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 도로인 창경궁로 이 위치가 아니였나 생각해봅니다.
성벽과 도로사이가 엄청난 높이차이가 보이시죠??
아마 도로 공사와 현대에 접어들어 공사를 통해 이렇게 차이났다고 보여집니다.
바로 길건너 올라간 낙타산
지금의 낙산공원입니다.
현재 요기도 보전이 정말 잘 되어 있습니다. 태조 / 세종 / 숙종 때의
축성된 돌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낙산공원 내려올 무렵 보이는 이화동 벽화마을
그리고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보이는 옹벽에 둘려쌓인 바로 홍인지문
그 당시 축성하였을 때, 시대 그리고 이름 관직이 성벽 밑부분에 새겨져 있습니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다.
옹성을 홍인지문에만 세워둔 이유는 다른 4대문 중 동쪽인 이 곳이 제일 지반이 낮고
외부세력에 침략을 당하기 쉽다고 하여 옹성을 세워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흥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이제4개의 스템프 도장을 이곳에서 다 찍고
그래도 순성길 한바퀴는 돌아야 되기에 남대문까지 돌진합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첫댓글 서울에 이런곳이 있다니 ㅎㅎ
아직 역사스토리는 현재 쓰고 있으니 30분 후에 글과 함께 보세요 ㅡ_ㅡ
@셰르파(박상철) 응응 30분후에 정독할께
@혜원(임혜원) 정독 필독 자세가훌륭하십니다
이제 정독하시고 감상문 300자 이상 서술하시기 바랍니다.(--+ )
@셰르파(박상철) ㅋ정독중~~~~~확대해서 보고있다
300자 이내 이십니다 -과락-꽝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