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의 멋을 찾아서
- 월하시조문학회 영주문학기행-
하늘이 쪽빛으로 높아진 가을날 월하시조문학회는 충절의 고장,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영주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영주에 거주하고 있는 필자를 포함한 회원 다섯 명은 시인들에게 잘 어울리고 시인들이 꼭 가 보아야 할 곳을 선정해 답사일정표를 알뜰하게 짰다. 우리 다섯만을 믿고 먼 곳에서 달려오실 분들을 생각하니 책무가 무겁게 느껴졌다.
9월23일 금요일 오후 1시 시민회관에서 이광녕 회장을 비롯한 23명이 집결했다. 회원 외에 원용문 박사님과 백필기 시인님 정진상 박사님 이병필 시인님, 김숙선님 부군께서 함께 하여서 더욱 반가운 기행을 시작했다. 시내 ‘우리 복어“집에서 복어탕으로 간단한 점심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를 세우고 백운동서원이라고 한 것이 그 시초이나 그 후 안축과 이보를 추배하고 명종5년(1550년)에는 이황이 풍기로 부임해 오면서 주세붕을 추배하며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지금도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한 이 곳은 강당, 대학학장의 숙소인 직방재,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 학생들의 숙소인 학구재, 지락재와 안향의 영정(국보111), 문성공묘가 있으며 특히 강당에는 명종임금의 친필“昭修書院"편액이 걸려있다. 아직도 배우고 가르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상 깊은 것이 그 곳에 있었다. 바로 건물의 배치다. 스승의 거처보다 제자들의 기숙사를 두 칸 물러서 세웠으며 스승의 거처 보다 방 높이를 한 자 낮추어 지었는데 당시 스승공경의 풍토가 지극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편 지금의 교실인 강학당은 배흘림기둥 건물로 툇마루가 사방 둘러져 있고 그 끝에 한 뼘 정도의 턱이 올라와 있는데 이는 스승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하는 학생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니 제자는 스승을 공경하고 스승은 제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배어있는 학당이다.
근년에 조성된 선비마을을 둘러보고 금성대군 신단으로 이동했다. 순흥은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된 금성대군이 위리 안치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성대군은 위리 안치되어서도 순흥 부사 이보흠과 또다시 복위 운동을 꾀했으나 실패하여 순절하고 순흥 도호부는 폐부 되었다. 그 후 숙종9년에 복원이 되고 그 자리에다 복위운동에 가담한 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 바로 금성대군신단이다. 이 곳이 충절의 고장이라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시 피살된 백성들의 피가 죽계천을 흘러흘러 지금의 동천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 까지 가서야 멈추었다니 참상의 규모가 얼마나 크고 잔혹했는지 짐작이 갔다. 핏물이 흐르기를 멈춘 곳의 이름은 아직도 “피끝마을”로 불린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아는가 모르는가. 눈이 부신 하늘에 하얗게 떠있는 구름은 말이 없다. 권력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형제의 피까지 뿌려야 하는 건가. 씁쓸하고 애잔한 눈길로 살펴보는 신단주변은 달래가 무성히 자라나서 파란 잔디밭처럼 고왔다. 금성대군신단 내부신단 출입문 앞에서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부석사로 향했다.
선묘낭자의 전설을 가진 부석사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도 유명하지만 낙조의 풍광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마침 추분이라 영주에서는 6시 22분경에 일몰이라니 시간을 조절할 겸 잠시 막걸리 집에서 도토리묵과 감자전을 사이에 두고 그간 미루었던 정담을 주고받았다. 도토리묵의 양념 맛은 너무도 강렬하고 인상적이어서 여행 내내 도토리묵 맛이 화제에 올랐으니 봉황산의 토질이 맛있는 도토리를 키웠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봉황산 부석사는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과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신 조사당, 당간지주, 소조여래좌상이 있는데 관광객이 대부분 모르고 지나치는 공포불이 있다. 공포불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양루의 조각틈사이로 무량수전의 붉은 벽면 색체가 보이면서 이루어내는 환상적인 현상인데 가사를 입고 정좌하신 부처님이 대여섯 분이 보이니 과히 건축미학의 극치라 할만했다. 공포불은 바라보는 방향이 맞지 않으면 보이지 않거니와 해가 돋을 때면 부처님의 옷이 금빛으로 찬란히 반사된다고 하는데 이 진기한 현상을 행여 놓칠세라 나는 아는 대로 회원들에게 설명해 주느라 진땀을 흘렸다. 산 속이라 약간 일찍 몰 하는 부석사의 황홀한 일몰광경은 환상 그 자체였다. 숨을 죽이고 보다가 탄성을 지르며 보다가 부지런히 마음의 샷터를 눌렀다. 하늘과 산이 붉어지는 황홀한 광경 앞에서 시 한 수 떠오르지 않는 시인은 없었으리라.
시내로 돌아와 영주 특산물인 한우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노령에도 불구하시고 10번째 시조집을 상재하여 젊은이들에게 귀감을 보이신 김 준 박사님의 “아내 얼굴”을 위해 깜짝 출판기념회를 하고 시조작법에 대한 세미나 후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9월 24일 토요일도 쾌청이었다.
유학의 고장이자 양반도시, 안동을 답사할 계획이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고즈넉한 봉정사에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았다. 입구에는 코스모스가 수줍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너무 밝고 깨끗해 급한 용무로 함께 오지 못한 노을재님과 연화향님이 생각났다.
부석사를 지은 의상대사가 종이학을 날려서 멈춘 곳에 절을 짓고 鳳停寺라 이름 지었다는 설화가 있단다. 봉정사의 기억은 영산암으로 마무리된다. 흡사 양반집 정원같이 품격 있고 정겨운 영산암의 뜰에 서서 나는 내 마음이 나를 빠져나와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물이 돌아가면서 만들어 낸 하회마을에 잠시 들렀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 대표적 집성촌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 형제의 성장지로 유명하며 류씨들이 600년을 이어가며 살아온 터전이다. 기와집과 초가집, 양반집과 상민의 집이 어울려 오랜 세월을 지나서도 원형의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어 유네스코에 지정된 민속자료이니 가장 한국적임을 부언해서 무얼 할까.
조선시대 대표적 유교건축물이자 류성룡의 업적과 학문을 기리는 병산서원을 답사했다. 찾아가는 길이 비포장도로라서 옛 모습의 현존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컸다. 원래 풍산 류씨 자손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풍산에 있었고 풍악서당이라 하였으나 선조 5년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기고 철종 임금께서 ‘병산’이라는 이름을 내리셨다한다. 시간이 빡빡하여 일정에 넣을까 뺄까를 망설인 곳인데 시인들에게는 정말 뜻 깊은 곳이었다. 변화라는 미명아래 새로운 형태의 시조가 출현하는 이 때에 정격을 고수하고 계승하려는 시조시인들과 병산서원의 만남은 참으로 의미 있고 뜻 깊고 잘 어울리는 만남이라 하겠다. 배룡나무가 화사하게 웃어주는 복례문을 들어서서 만대루를 지나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 너머로 보이는 산수를 바라보자니 선계가 달리 없다는 생각이었고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사계절이 차례로 담기는 7폭 병풍 같은 만대루의 건축묘미를 이 무딘 필치로 어떻게 표현하랴. 벼슬을 마치고 이 곳으로 돌아오시면서 읊으셨을 듯한 학자 류성룡의 시 한 수가 생각났다.
전원귀로
류성룡
전원으로 돌아가는 길 삼천리,
사십년의 벼슬길 그 은혜 깊었구나.
말 세우고 머리 돌려 도미를 바라볼제,
남산의 그 모습은 예 대로 의연쿠나
아름드리나무와 수백 년 된 배룡나무가 우거진 오래된 고궁 같은 우아함을 뒤로하고 안동댐으로 향했다.
안동에 왔으니 특산물인 간 고등어를 반찬으로 하여 별미로 꼽히는 헛제사밥에 안동 식혜로 점심을 끝내자 조성국 시인님께서 벌떡 일어서더니 즐거웠던 만남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담은 즉흥 시조 한 수를 읊으셔서 박수를 받았다. 시조시인이 아니면 도저히 부릴 수 없는 멋이었다.
안동댐 주변을 관광했다. 안동댐은 다목적댐으로 경제적 현대적 산물이지만 이곳마저 과거를 불러서 공존하고 있었다. 주변에 민속촌과 사극 촬영장을 거느려 양반도시의 면모를 어느 곳에나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 댐 푸른 물을 가로 지르는 우아한 목조다리 월영교위를 400년 전 러브스토리 ‘원이 엄마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서 건너는 운치도 근사했다.
계획된 일정이 모두 끝났다. 옛 선비들의 정신과 품격을 배우고 멋을 느껴보는 기회였다고 영주문학기행의 의미를 두고 행사를 마무리 했다. 운영이 미숙하고 불편사항도 허다했지만 모든 회원님들이 애써 흡족한 얼굴을 보여주시며 수고했단 말씀만 해 주시니 참으로 고마웠다. 고향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마음껏 해드리지 못해 미안해하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정겹게 손을 흔들어 주시는 얼굴들에게 무사 귀가를 빌면서 머지않아 또 한 번 이런 행사로 회원들을 초대하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