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 10집 원고>- 2008년
이요섭 시인의 시와 지형학적 위치
송수권 (시인,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1)
이요섭 시인의 등단연보를 살펴보면 1981년 『시조문학』에 「사모곡(1981)」, 「고궁유회(1982)」 그리고 『한국문학』신인상에 「시인의 아들(1985)」이 당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조라는 그릇에 몸 담고 태어난 지도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등단 12년 만에 첫시집 『아침산책』(1993, 푸른숲)을 펴냈고,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산이 와서 새소리 놓고 가네』(2001, 태학사)가 있다.
고등학교(김제고)를 졸업한 다음 해(1981) 약관의 나이로 등용문을 밟기 시작했으니 가히 시적 재질을 타고 났음을 알 수 있다. 학이지지(學而知之)의 시인이 아니라 생이지지(生而知之), 즉 태어나면서 ‘그것’을 아는 시인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 전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첫시집 『아침산책』과 『산이 와서 새소리 놓고 가네』에 실린 81편, 그리고 왕성하게 활동해온 동인지 『역류(1~9집)』가 전부인 셈이다.
필자는 그와의 평소 친교관계로 첫시집 발문을 쓴 바 있으니 그것이 벌써 15년 전이고 100인선을 살핀 지도 7년여의 세월이 격하였다. 따라서 이번 『역류』10년 특집호에 대표작 10편, 신작 5편에 대한 작품들을 토대로 그의 시세계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2)
첫시집 『아침산책』「고궁유회」의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그의 출발 당시에 쓰여졌던 전통어의 구사력이 얼마나 세심한 그늘을 치고 유현한 감각이 돋보였던가 하는 뜻에서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도 약관의 나이에서다.
팽나무 등걸 밑동 움 트던 새아침에
한하늘 푸르름이 외려 청자 고운 호수
얼비친 백제 와당의 소생하는 연잎이여.
뒤뜰 거북비(碑)의 글발 촘촘 자란 이끼
묵시로 더듬어서 천 년을 헤아리면
할배님 오래인 빛깔 단청마다 상기롭다.
왼 뜨락 예스런 봄을 홀로 누벼 가는 걸음
채이는 조약돌도 양지께로 뛰어든다.
꽃그늘 산죽 마디마디 상기되는 역사의 장.
- 「고궁유회」 전문
이와 같이 섬세한 그늘을 누비는 시적 공간과 언어의 조탁은 시조를 현대 일상 어법으로 끌어올린 가람에게서도 읽을 수 없는 섬세함이다. 이 작품이 원광대 재학 중인 일학 년 때 쓴 작품이라면 가히 놀랄만한 천재성이 일찍이 그에게 있었음을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니다. 이 말은 필자보다는 당시 지도교수였던 박항식 선생이 그를 소개할 때마다 두고 썼던 말임도 새삼 기억에 새롭다.
그런데 80년대 후반에 들면서 「시인진단」,「쥐구멍」,「철산동 땅 따먹기」,「우물 안의 잉어」,「길 잃은 땅 강아지」등의 작품에서 보이고 있는 그의 시 ‘의식전환’을 두고 당시 유행이었던 알레고리나 풍자로 인한 새디즘적 언어로 옷을 입기 시작한 그의 시를 다음과 같이 걱정한 말을 쓴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단아하고 고품격인 시조라는 그릇 속에 사회의식이 확장되면서 시단 전체에 일어나는 비시적 또는 반시적 풍조 때문이었다. 앞으로 이 그릇에 담기는 음식물의 내용은 민족어의 금기식이 아니라 사회의식을 방목하는 자유시 즉 시조도 시다는 한 시대의 언어폭력 앞에서 방기될 위험부담이 그만큼 높다는 기우에서였다.
또 그때 어느 자리에서 나는 시조의 전범을 말할 때 민족어의 구사력이 뛰어난 백수(白水)를 두고 ‘백수가 백수를 잃으면 백수가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 사발에 고이는 냉수에 침전물이 끼면 저 하늘에 비추어 보아도 거기엔 하늘이 담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맛으로 볼 진대, 그 맛은 혼탁하며 속기나 혐오로 떨어질 우려 때문이었다. 맛뿐 아니라 이 그릇 속에서 우리는 민족어의 세련된 교양미와 함께 어떤 격이 높은 멋을 기대할 순 없다는 기우에서였다.
이 일장일단의 모순어법을 두고 무어라고 설명할 것인가? 가라고 할 것인가 가지 말라고 할 것인가?
세상은 날더러
게병에 걸렸단다.
순 촉수의 감각으로만 사고하는 눈치병에다 파도가 밀려간 갯바닥에 엎드려 그리 먼 아쉬움과 고뇌에 깡마른 각질병에다 늘 삐딱하게 행동하는 선천성 횡보병에다 말라 비틀어진 베레모 하나 쓰고 집 근처만 배회하는 방황병에다 촉촉한 가랑비와 물소리와 억새밭을 그리워하는 애수병에다.......
눈물은 바다로 보내고
햇볕으론 등살을 데우고
밀물 썰물 그 언저리 살면서도.
- 「시인진단」전문
실제로 그는 한 시대의 조직적인 언어 폭력 앞에서 그 무렵 많은 고뇌에 차 있었던 듯하다. ‘세상은 날더러/ 게병에 걸렸단다’라는 그 비틀걸음이 그 의식을 대변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한때, 생존의 존립마저 얻을 수 없는 병고로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선 그의 모습에서 나는 과중한 짐이 되는 주문을 사실상 숨겨온 셈이다. 왜냐하면, 세상 한복판에서 부딪치고 있는 그에게 유현한 생각, 그윽한 전통어법 운운하면서 현대의 어질병 나는 삶과 언어를 외면하고 가라면 그는 덧친 병에 질식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한가지 우리 정형의 그릇인 시조에 대한 내 생각의 바람을 토로한다면, 그것은 구원이라든가 초월이라든가 꿈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여튼 자의식으로 비뚤어진 그런 정신이 아니라 높은 세계의 구도정신을 말하고자 함이 더 옳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한 시인이 가진 염결성이요 멋이요 격(格)으로 보고 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3)
첫시집 『아침산책』 이후 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해 왔고 또 변모되어 가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은 그의 시작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익모초꽃 듬성히 핀
산마을 고향집엔
아내가 좋아하는 모과 향기 그윽하고
어머님 속머리결엔 갈대꽃이 날릴 텐데.
-「아내여,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5」중에서
위의 시는 첫시집에 실려 있는 연작시 「아내여,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의 여섯 편 중 다섯 번째 시다. 모두가 고향이라는 시적 공간에 그의 원초적 숨결이 닿아 있다.
더 정확히 짚어본다면 그의 고향 숨결은 어머니로 상징되는 모악산이나 그 언저리가 된다. 정읍 산내면 능교리에서 태어나 섬진강 수몰민으로 김제에 옮겨 그곳에서 1980년까지 고등학교를 나왔고, 익산에서 대학을 마칠 때까지 모악산은 그의 고향이요 어머니로서의 시적 모티브가 되고 있다. 그래서 첫시집엔 표제도 선명한 「모악산」한 편이 원형 이미지로서 기둥처럼 박혀 있다.
늘 푸른 두루마기 입고
의젓이 서 있는 산
뜸부기 우는 만경들로
나들이나 갈 것이가.
다박솔
새둥지보다
먼저 깨어 있구나.
- 「모악산」전문
이처럼 모악산은 그를 키워 온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김제 모악산엔 금산사가 있고 이웃한 내장산엔 내장사가 있다. 이것이 만경강 더 폭을 넓히면 금강과 함께 한 울타리를 잇는 그의 시에 있어서 하나의 지형학인 셈이다. 그래서 ‘골 깊은 물소리/ 따라 들면 울 안일레’라고 「내장산」을 노래하면서 ‘망부석 앞에 서서/ 다시 듣는 정읍사’라고 유현한 전통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륵사지를 깔고 뭉개며 「서동이의 꿈(1~8)」을 복원한다.
마뜰에 천 사백 년 전 흰쌀 같은 싸락눈이
고구마 탄내 나는 삼기마을 에두르며
동녘땅 그리움만큼 포근히도 쌓인다.
두툼한 손톱 밑에 황토흙 끼고 살며
오금산 밑 숯을 굽고 마를 캐는 서동이의
농익은 가슴아리를 해와 달은 아는지.
하얀 솜이불 같은 밤 눈길 걸을 때면
보고픈 선화공주 하늘녘 별점 찍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꿈이 부푼 서동이.
- 「서동이의 꿈- 1」 전문
위의 시에서 보듯 이는 실로 어제 오늘도 아닌 천 사백 년 전 마뜰에서 벌어진 민족 서사를 천 사백 년만에 시로 복원한 셈이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는 서동요와 정읍사의 지형학적 위에서 ‘모악산’으로 상징되는 모태 원형의 근원적 세계를 열어 보인다고 할 것이다.
(4)
「서동이의 꿈(1~8)」은 100인선 『산이 와서 새소리 놓고 가네(2001)』를 장식하는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는 연작시다. 첫시집 『아침산책(1993)』에 실려 있는 「아내여,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1~6)」에 이은 두 번째 연작시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역류』10집에 상재하는 「모악산(8~12)」까지의 5편 연작은 신작이다. 따라서 「모악산(1~7)」까지를 연결하면 세 번째의 연작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서사에 이은 「모악산- 1」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형제 팔남매처럼
줄줄이 거느리고
만경강 가장자리
끝둥이 산
못 미더워
해 지는 서녘 하늘에
눈물 훔쳐 쌋더니
구름이 자욱한 날
허리 저린 능선 아래
금산사 범종 소리
문빗장 거는 걸까
팔 형제
품에 모으고
뜬 눈으로 날 새우네.
- 「모악산(母岳山)- 1」 전문
원형 모태로 서 있는 서시격인 「모악산」‘늘 푸른 두루마기 입고/ 의젓이 서 있는 산// 뜸부기 우는 만경들로/ 나들이나 갈 것인가// 다박솔 새둥지 보다/ 먼저 깨어 있구나.’의 그 원형에서 「모악산 - 1」은 시인의 가족에 비유되어 있다. 여덟 개의 봉우리는 곧 시인 남매의 숫자와 같다. 끝둥이 막내가 못 미더워 눈물 흘리는 어머니, 그 산산한 삶이 곧 모악산의 역사성이며 시인의 길임을 은유체계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강가에 나와 모래성을 쌓던 한 아이는 「유년의 강」을 건너와 이제는 「시인의 아들」로 의젓하게 성장해 있음을 본다. 그의 시련들을 읽고 있으면 현대시의 전원풍을 확립한 신석정 시인의 애틋한 그리움을 주도로 한 시상에 잠긴다. 그러니까 단아한 정형의 그릇은 가람 이병기의 대물림이요 서정의 순수함은 신석정의 ‘자연’에 뿌리를 댄 그것과 같다.
돌아가신 석정(夕汀) 선생님
산 부르는 메아리
애틋한 그리움이
대를 이어 받았던가.
---------------
문만 열면 산이 와서
새소리 놓고 가는
부안 땅 생가에서
문고리 잡고 앉아
세세히 빛살져 오는
풀꽃들을 보고 있다.
-----------------
- 「시인의 아들」 일부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의 표제가 『산이 와서 새소리 놓고 가네』로 되어 있음도 결코 우연이 아님도 이 까닭이다. 지형학의 위치에서 본다면 부안의 석정, 익산의 가람 선생의 ‘끝둥’이며 「시인의 아들」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형의 그릇은 가람에게서 거기에 담기는 시정신은 석정에게서 대물림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5)
첫시집 『아침산책(1993)』에서 단 한 편으로 시작된 「모악산」을 원형으로 하여 『산이 와서 새소리 놓고 가네(100인 시선, 2001)』에 보이는 「모악산(1~7」, 그리고 이번호 『역류』 10집에 발표되는 「모악산(8~12)」신작까지의 거리는 무려 15년이 상거한 셈이다.
정신적인 지주요 삶 속의 원형 모태인 『모악산』 연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음은 이요섭 시인의 시와 지형학의 위치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시적 성취도를 가늠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되리라 예단된다.
춥고 배고파서 겨울나기 어려운가
초가집 부엌으로 파고든 산토끼들
어머닌 집에 든 산짐승 잡지 말라 하신다.
- 「모악산 - 12-1」
아직도 초가집이 있고, 어머니가 있는 고향, 그 고향 속에 우뚝 선 「모악산」이야말로 자비의 땅이다. 서해 갯벌을 막아 김만경 들판을 열었던 동진강 벽골제가 있고, 익산의 황등제, 고부 눌제 등 3대 못자리도 이 안에 있다.
이 벌판의 ‘좀도리쌀’을 모아다 자비를 빌었던 금산사, 내소사, 내장사가 있고 남도 풍류의 맥을 형성한 유상대(流觴臺)가 섬진강 상류에 위치하기도 한다.
특히 모악산은 ‘어머니 산’으로 신흥종교에서 말하는 화조월석(花朝月夕)으로 명명되는 증산도나 개정유도 그리고 농민봉기의 ‘동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동학군 숨어들어
날밤으로 숨 조였던
그 몇 해
태운 가슴 얼마나 무너졌으면
골마다 매운 바위
속눈물이 배일까.
- 「모악산 - 3」에서
그 대역사적인 사건이 무참히 껶였던 자리, 그 이전은 백제 마지막 부흥운동인 주유성, 백강전투가 참패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보는 금강서사, 신동엽의 『금강』서사시,-----이곳이야말로 미륵이 솟아날 수 있는 문학의 메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현대문학 100년 시사(詩史)에서 우뚝 선 가람, 석정, 서정주의 탯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점에서 아쉬운 것은 동학현장 속에 살면서도 이 현장성을 비껴갔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요섭 시인이 이 현장에 뛰어들어 『모악산』연작으로 제2시집이 간행되기를 바라며 『모악산 서사시집』이 우리 문학사에 출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