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에 있는 남편에게 바치는 자서전
이정길 김정숙 가정
1. 남편(이정길)의 생애
2. 나(김정숙)의 생애
3. 약혼과 임지생활
4. 6000가정 축복가정
5. 뜻길 따라 복종의 생활
6. 남편의 성화
1. 남편(이정길)의 생애
남편은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원리 250번지에서 1956년 12월 4일,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시아버님은 6•25 참전용사로서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하셔서 몸이 불편하셨다. 거동이 불편하여서 정상적인 취업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주민들의 협조로 동네에서 작은 이발소를 운영하셨다. 그때 시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모친(양재임권사)과 같이 감리교회를 다니셨는데, 담임목사가 야목교회 차상순이었다. 차목사님이 통일교회로 입회하면서 신도들을 데리고 왔다. 1957년 4월 17일,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의 야목 감리교회 신도 120여명 통일교회로 단체 개종하였다. 이때 모친(시할머니) 양권사님과 함께 자연스럽게 시어머니께서도 통일원리를 접하시고 많은 정성을 드리시면서 통일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시어머니는 유년기의 어린 나이에 때로는 혼자서 산을 넘어 통일교회로 갔다. 이를 기특하게 여기신 권사님들은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그것이 참 좋았다.”고 시어머니는 회고하셨다. 식구분들은 “너 혼자 산을 넘어오기가 무섭지 않았냐?”고 묻기도 하면서 안전을 걱정해 주셨다. 그러면 시어머니께서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하나도 안 무서워요.”라고 답했다. 권사님들이 예뻐해 주시니까 더욱 신명이 나서 열심히 다니셨다. 사랑과 귀여움을 받으니까 그저 신명이 나서 틈나는 대로 교회로 가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라는 존재를 대단한 인물로 여기고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곳으로 자주 가게 되는 법이다. 그것이 심정과 참사랑의 힘이고 매력이다.
남편이 태어났다. 형제들이 5남매였지만 아들은 혼자 뿐이었다. 대개 그런 집안에서는 아들이라서 귀여움을 많이 받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남편의 경우는 그러지 않았다. 시아버님이 6•25참전용사로 부상을 당하셔서 겨우 동네 이발소를 하면서 힘든 생활을 하시다가 남편이 9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시어머님이 가계를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시느라 엄청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남편은 아버지 사랑을 못 받아서 늘 마음 한 구성이 턴 비어있었다. 사람은 음식을 먹고 배를 불리지만, 또한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서 사랑의 배를 채워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랑에 굶주리게 된다. 남편은 아버지 사랑에 굶주리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짠 했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야목 통일교회에 갔으나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아니었다. 분위기에 끌려서 갔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부성애를 제대로 체험하지 상태에서 교회 어른들의 귀여움은 큰 도움이 되었고, 마음 한 구석에 텅 빈 사랑의 공간을 채울 수 있었다. 통일교회라는 참사랑의 식구공동체는 아픔이나 고독함을 가진 식구들을 통합적으로 보듬어주고 치유해주고 성장시켜주는 데 있어서 훌륭한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남편이 그 혜택을 보았다.
고등학교를 수원에 있는 삼일상고를 가면서 성화학생 활동을 하게 되었다. 다른 교회도 그랬듯이 학생들이 토요일에 만나서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지냈다. 심정대가족의 따뜻함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자존감도 충족하였다. 졸업할 때가 되었다. 당시 기성교회에서 남편에게 목사로 기르기 위해서 전체 학비를 들여서 신학교를 보내준다는 제안을 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입장에서 등록금을 제공해 준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이 있는 제시였다. 남편은 어떻게 할지를 두고서 고민하였다. 통일교회와 기독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그러자 꿈을 꾸었다. “꿈에 커다랗게 잘 닦여진 길과 좁은 길이 있었다. 양갈래 길에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할 때 어디선가 ‘너는 좁은 길로 가야 살 수 있다.’는 음성이 우레처럼 들렸다.” 남편은 기독교 제안을 단념하고 거절했다.
남편은 6•25 참전용사 아들이라서 졸업할 때까지 원호원(지금의 보훈청)에서 생활을 했고, 그 후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화성교역에서 헌신생활을 했다. 조항선목사님(777가정) 밑에서 신앙지도를 많이 받고 뜻에 심취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심정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A타잎 성전을 지을 때 목사님을 도와서 온 정성을 다해서 성전 건축 일에 동참했다.
어려운 교회 재정을 돕기 위해 만물복귀를 하였다. 하루 수십리 길을 걸으며 성미사업도 열심히 했다. 한번은 어떤 가정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기성교회 다니는 권사를 만났다. 그 분은 남편이 찾아올 줄을 이미 알고 있었고,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아들이군요.”라면서 쌀독에 있는 쌀을 바닥에 소리가 나도록 퍼서 담아 주셨다. 하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남편은 더욱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그 후 제7차전국순회전도단 활동을 할 때는 막내로서 철이 없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사업 활동도 했고, 전도에도 몰입하였다. 사탄이 주관하는 인간과 만물을 찾아 세워서 하늘 앞으로 복귀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체험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통일교회로 인도해 주신 어머니께 감사했다. 어머니는 친어머니이기도 하고 믿음의 어머니가 되셨다.
활동기간이 끝나고 경기도 양평군 용문교회장으로 목회도 했다. 그러나 목회생활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했고, 특히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장 나이가 드신 시어머님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득이 집으로 와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목회생활을 중간에 그만 둔 것이 아쉬웠고, 하늘 앞에 죄송스러웠다. 그러던 중에도 화성군 반월교회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하시는 목회자님(777가정)을 도와서 식구님들이 정성을 모을 때 남편은 시어머님과 상의하여서 집안에 마지막 남은 땅 50평을 헌납했다. 전부를 하늘 앞에 봉헌하였다는 조건을 세웠다.
그 후 어머니를 따라 모든 가족이 거주지를 인천으로 옮기면서 남편은 한국티타늄에 근무하게 되었다. 성일(聖日)에는 인천교구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였다. 문홍권 교구장님이 시무하실 때였다. 교구성가대가 50명 정도였고, 피아노는 이명진(6000가정)씨가 맡았고, 지휘는 남편이 담당했다. 남편이 고등학교 때 트럼펫을 연주하였기 때문에 성가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 음악으로서 하늘 앞에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큰 보람이었다.
목회자와 함께 승공강의도 다녔다. 그때 대부도(현재 안산시)로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갔다. 지금은 육로로 갈 수 있어서 참 편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 때는 불편 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직장 일, 성가대 봉사, 승공강의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1975년 여의도 희망의 날 대향연 때에도 열심히 활동했다.
2. 나(김정숙)의 생애
내 고향은 경북 영양에서도 수비면이라는 아주 산골이었다. 아버지는 경주김씨로서 김귀봉이시고, 어머니는 현풍 곽씨로서 곽후달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고, 나는 1954년 5월 21일(음), 셋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다. 그리고 한학(漢學)을 하셨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동네 청년들을 모아서 한문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아버지는 글을 잘 모르는 집에 제사가 돌아오면 ‘지방문’을 써 주시기도 하셨고, 또 가축들이 병이 나면 침을 놓아서 고쳐주기도 하셨다. 의로운 가문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다방면에서 재능이 있었던 아버지는 성품도 온화하시지만 신문물(新文物)도 일찍 받아 들이셨다. 그렇게 깊은 산골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다른 집보다 일찍 들여오셨고, 사촌 큰오빠와 나의 오빠를 타지로 유학을 보내셨다. 그때 학교 졸업비로 돈을 보냈는데 오빠는 부모님 께 허락도 안 받고, 원리강론을 비롯하여 여러 책들을 샀다. 당연히 졸업장을 못 받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큰어머니께서 학교에 가서 졸업장을 찾아오셨다.
어머니도 성품이 온화하시고 정성을 많이 들이신 분이다. 통일교회 뜻을 모르실 때도 한겨울새벽에 겨울에 얼음을 깨고, 찬물로 목욕을 하시고 자식들을 위해서 정성을 들이셨다. 소위 한국 전래의 비손 정성을 지극히 들이셨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지성감천(至誠感天) 격언이 어머니께 잘 어울렸다.
그리고 방에는 항상 밥상을 간단히 차려 두셨다. 그리고 나에게 이웃에서 누가 놀러 오시면 꼭 밥을 챙겨 드리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밥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라고 생각하면서 어머니께 왜 그러는지를 여쭤보았다. “끼니를 못 먹는 집들도 있으니까 잘 챙겨드리라.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큰 설움이고, 밥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큰 적선이다.”고 하셨다. 이웃과 더불어 밥을 먹으면서 허기를 면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어머니는 실천하고 계셨다. 가난한 이웃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는 그런 태도는 내게 성녀(聖女)의 모습으로 비쳤다. 그런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참아버님께서 강조하신 “밥이 사랑이다!”는 말씀이 오버랩된다.
그 깊은 산골에도 참아버님께서 전국을 순회 하실 때 사냥을 오셨다. 앞으로 경북 영양이 참부모님의 왕림을 기념하는 사냥터가 되기를 고대해 본다. 그때 오빠(김경진)가 전도 되었으며 어린 내동생과 나에게 벽이나 문에 원리내용이나 성가를 붙여놓고 가르쳐주었다. 오빠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와 동생은 뭔지도 모르고 열심히 배웠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오빠는 군대를 다녀와서도 전도하러 다닌다고 여기저기로 바쁘게 살았다. 집에는 별로 없었다. 그리고 만물복귀를 위하여 다녔다. 이런 모습을 알려지게 되었다. 동네아저씨들이 집에 오셔서 “요즘 집의 아들이 거지가 되어서 돌아다니니까 잘 터일러라.”고 핀잔했다. 그때는 교통편도 좋지 않은 시골이라서 먼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다. 수련을 간다고 어머니가 몇 달을 거쳐서 짜 놓은 삼베를 틀에서 몰래 잘라서 가져가 제값을 못 받고 팔았다. 삼베를 판 금액으로 차비하고 수련비를 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저 녀석을 호적에서 파 버리라.”고 하신 적도 있다. 다시는 밖으로 못나가게 어머니께 지키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나 오빠는 뒷문으로 나가서 담장을 넘어 교회 수련회에 참석하였다. 그렇게 하여서 430가정 축복을 받고 목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냉방에 잤다. 참부모님의 고난의 생애를 답습하다는 각오로 고통을 감내하면서 서 오직 뜻길에 정진하였다.
오빠는 내게 믿음의 부모이다. 오빠가 축복을 받은 후에는 아버지께서도 교회 활동하는데 많이 협조하셨다. 새언니가 부산에서 왔는데, 그때 시골에서 본 언니는 정말 예뻤다. 밤이면 수비교회 2층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성가와 한문을 가르쳤다. 그때 나와 같이 배운 친구가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그때 수비교회에서 배운 한문이 지금도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배운 교육 효과가 평생 동안 가는가 보다. 공부는 어릴 적에, 때를 놓치지 말고 해야 좋은 것이라는 교훈이 맞는가 보다.
그런 믿음의 기대가 조성된 터 위에서 나와 동생(6000가정 김두진)은 신앙생활을 쉽게 따라 올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왔지만 정식으로 입회 원서는 1975년 5월 1일에 제출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조카들을 돌보고 오빠를 따라 다니면서 문경(점촌)교회를 지을 때 오빠와 함께 노동했고, 주일학생, 성화학생을 인도하며 교회생활을 했다. 7일 금식을 했는데 정말 어렵게 완료했다.
3. 약혼과 임지생활
1978년 10월에 6000가정 약혼식을 했다. 수택리 수련소에서 참아버님께서 매칭을 해주셨다. 커플들이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커플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주체(이정길)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만나려면 서울대 앞에 가지 왜 여기에 축복을 받으려 왔느냐? 결혼을 하려 온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으려 왔으면 하늘 앞에, 부모님 앞에 경배를 드리고 감사해야 되지 않느냐?”라고 충고를 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등을 돌리고 있던 커플들도 하나 둘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감사해 하였다.
약혼식이 끝나고 1978년 12월에 전도 임지에 배정되었다. 임지는 전남 화순교역이었는데 6명의 대원들이 함께 생활했고, 청년 식구들이 참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처음으로 시골에 가서 여러 가지 작물을 심어보고, 베어보고, 모내기도 했고 성미(誠米)사업도 했다. 낯선 동네에 가서 성미 사업을 할 때 같이 간 김창숙 대원이 개한테 다리를 물렸다. 다행히 긴 부츠를 신고 있어서 다치지는 않았으나 정말 무서웠다.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 성미 사업으로 거둬들인 무거운 쌀자루를 팔에 들고, 머리에 이고 교회로 오기도 했다. 연말에는 불우이웃돕기를 한다고 광주 역전에 가서 성금 모금도 했다. 모금 통을 잘못 붙여서 동전이 역전 바닥에 와르르 다 쏟아진 적도 있었다. 지나는 행인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부끄러움을 참고 돈을 주워 담았다.
화순에서 활동하다가 대원들이 4명으로 재배치되면서 전남 영암으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성화 유치원 교사를 했다. 보육 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지만 전도생활을 하면서 유치원도 함께 운영했다. 피아노도 아닌 오르간으로 서툴지만 노래도 가르치고 율동도 하며 즐겁게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지금도 가끔은 내가 정을 담뿍 쏟아서 키웠던 그 아이들이 어떻게 변했을까 보고 싶기도 하다. 노인학교도 운영 했는데 월출산 기슭에서 도토리를 따다가 도토리묵을 만들어 노인잔치도 했다. 김귀분 언니가 그런 일을 잘 했다. 어르신들은 우리를 친딸처럼, 며느리처럼 환영하고 반겨주셨다. 그때 자상하셨던 그 어르신들은 지금은 다 하늘나라로 가셨겠지? 그 분들도 보고 싶다.
영암에서 활동 할 때 5•18 광주사태를 겪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제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데모대들이 경상도 사람은 다 죽인다.”는 말도 떠돌았으니까 경상도 출신인 나는 더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전도활동을 하다가 길에서 창문을 다 깬 버스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살벌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데모대들도 봤다. 그래서 “죽더라도 도망가다 죽자!”라면서 우리 대원들이 뛰어서 골목에 가 숨은 적도 있었다. 그 무섭고 몸서리치는 여름에 괴나리봇짐을 하나 지고서 고향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도 만났다. 제2의 6•25전쟁이 난 것 같았다. 걷다가 지치고 목이 말라서 물이라도 한잔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의 참상이 어떤지를 목격하였다. 그때는 뭐가 뭔지도 몰랐다. 왜 그러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또 임지가 바뀌었다. 충북 음성으로 갔다. 활동하면서 유치원 보조 교사를 했다. 이미 경험을 가진 경력이 있어서 좀 더 노련하게 교사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 읍•면•동을 다니면서 승공강의도 했다. 군청에서 차량지원과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어서 다행이었다. 목사님이 써 주신 원고를 가지고 동네마다 다니면서 승공강의를 했다. 처음에는 많이 떨리고 긴장이 되었으나 차츰 익숙해졌고 용기도 생겼다. 우리는 반드시 공산주의를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강의를 했고, 청중들에게 강조했다. 하늘의 힘과 배경이 아니면 꿈도 못 꿀 큰 일들을 경험했다. 음성에서 김용관이라는 고등학생을 전도하였고, 임지생활 끝나갈 즈음에 고등학교 신입생이었던 최장운 학생을 전도하게 되었다. 많은 심정과 사랑을 못 주었는데도 장운이는 뜻길 안에서 잘 생활해서 일본 부인 기무라교꼬와 6500가정 축복을 받았다. 임지를 끝내고 올 때 내가 사용하던 원리강론 책을 선물로 주었다. 이들은 지금 충북 청원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 참 고맙고 자랑스럽다.
4. 6000가정 축복가정
1982년 10월 14일, 참아버님께서 흥남감옥을 승리로 출옥하심을 기념하는 날에 6000가정 축복식이 있었다. 남편은 축복을 받고 건설회사에 정비사로 일하다가 축복 1주년이 되는 날에 가족을 떠나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 그때는 아직 첫째 아기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공항에서 뒤도 안돌아 보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냥 한없이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어쩌면 그렇게 야속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마도 남편은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쏟았으리라. 나중에 귀국한 후에 내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갈 수 있었어요?” 남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뒤돌아보면 도저히 가족을 두고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앞만 보고 걸었지요.” 우리 부부는 이별의 아픔과 한(恨)을 체험했다. 그리고 행복한 참가정의 가치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시어머님과 아가씨들과 같이 살았다. 가난한 환경에서 추워도 울고 더워도 울었다. 같이 울면 그나마 위로가 되고 힘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집 떠나 먼 이역의 땅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렸다. 남편이 사우디로 떠난 2개월 뒤 첫째 아기 향정이가 탄생했다(1983.12.16.). 얼마나 귀여운지 나는 향정이를 땅에 내려놓지 않고 업고 안고 키웠다. 첫째아이라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잘 몰라 아이가 울면 같이 울고 웃으면 같이 웃으며 키웠다.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런 심정으로 길러 오셨으리라. 하늘부모님은 철부지 인간들을 위해 태초부터 오늘까지 수고하고 계시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표현하고 보답을 할까?
향정이가 두 돌이 될 때 쯤, 남편이 귀국했다. 향정이는 아빠가 어색했는지 뒷짐을 지고 아빠 주위를 빙글 빙글 돌기만 했다. 말을 맨 처음 배울 때에는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말했는데, 정작 아빠를 보게 되자 서먹해 하였다. 낯가림을 할 나이이기도 했고, 갑자기 어른이 눈 앞에 와서 떡 버티고 앉아있으니까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핏줄의 힘은 놀라웠다. 향정이는 곧 아빠 품에 안겼고 재롱을 떨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라는 선조들의 격언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남자는 한명도 없고, 여자들만 6명 있었다. 할머니, 고모4명, 나였다. 남편의 귀국 후에 동생 권선이가 태어났다(1986.3.5.). 여자만 있는 집에 남자 아기가 태어나니까 시어머님이 너무 좋아 하셨다. 그런데 여건이 좋지 않아서 남편이 또 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는 셋째 권진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는데 남편이 리비아로 가신지 6개월 뒤 권진이가 탄생했다(1987.3.14.).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바쁜 탓에 남편이 없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었다.
그래도 첫째가 조금 더 커서 동생들을 살펴주기도 했다. 세 아이를 데리고 인천 교회를 다녔다.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고, 또 한녀석은 옷자락을 잡고 다녔다. 남편은 리비아에서 근무하다 귀국해서 세일여행사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중간에 다쳐서 퇴사하고, 안양으로 이사해서 카센터도 운영하고 택시 회사도 다녔다. 카센터를 할 적에는 돈을 아끼려고 직원을 두지 않고 우리 부부가 일을 했다. 내가 뒷심부름을 다 해야 했다. 처음으로 낯선 공구를 들고 사용하려니까 어색했다. 공구 이름을 모르니까 혼도 많이 났다. 다행히 안양에서 종족적 메시아 선포식도 하고 160가정 운동도 승리했다. 1997년 9월 6일에 황선조 협회장으로부터 표창장(제4471호)을 받았다. 남편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교회 활동에도 열심을 다했다.
그러다 택시를 하면서 안산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얼마 후에 제작 회장을 맡게 되었다(2003.3). 그때에 ‘평화 세계를 위한 동 지도자 결의 대회’를 했다. 안산과 시흥을 합쳐서 43개 동을 다 했다. 직장 생활하면서 43개동을 목사님과 식구님들과 함께 하루에 2-3개동을 대회 할 때도 있었다. 강의도 하면서 온 식구들과 함께 충효의 열정을 다 했다.
그 후 상록수 학사 교회를 지었다. 선주삼 학사장을 모시고 임점동(1800가정)장로와 함께 식구들의 정성으로 헌당식을 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식구들의 많은 정성으로 2세들을 위한 학사 교회를 세웠다. 상록수 학사에서 협회 인준 장로(1042호) 장립식도 했다(2004.11.24.). 이재문 학사장이 근무할 때였다.
그 당시에는 참부모님께서 한남동에서 훈독회를 자주 하셨다. 그때까지도 남편은 일찍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에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참부모님으로부터 아버지 역할을 배우고자 훈독회 맨 앞자리에 앉았다. 참아버님 바로 앞에서 눈길을 마주할 정도였다. 그때 남편은 참아버님의 따뜻하고 자상하신 눈길을 보고 진정한 아버지의 정을 느꼈으며 그 이후로 아이들에게도 자상해졌다. 이전까지는 자식에게 그냥 엄하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참전용사이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원호원에서 자랐기에 아버지 사랑과 정을 못 느꼈다. 한남동 훈독회 경험이 남편을 전적으로 참된 아버지 역할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부모님, 감사드립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우리 남편과 자녀들이 힘들어했을 것이며, 축복가정으로서 흠이 많았을 것이다. 참부모님과의 상견(相見)이 우리 가족의 분위기를 확 바꾸었다.
5. 뜻길 따라 복종의 생활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가정당 후보로 상록구에 출마한 염상록(현 양천 교회 목하)후보를 선거 사무장으로 하여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자세로 활동했다. 딸은 선거 운동원으로, 나는 회계담당으로 전 식구가 동원되어서 전력투구했다. 그런데, 실망스런 선거결과가 나오게 되자 딸은 엄청 울었다. 세상은 아직 이전투구의 정치판에 빠져서 복귀섭리의 눈에 먼 상태였다. 참부모님을 빨리 한민족이 왕으로 추대하고, 세계가 모셔야 하는데, 참아버님의 연세가 90을 바라모시는 시점에서 초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섭리에 따라 남편이 아이슬란드에도 다녀왔다. 이승대 회장, 이재문 학사장, 남편 이정길 장로, 이상남집사들과 같이 갔다 왔다. 멀고 먼 그 이국땅 얼음나라에도 식구들이 있었고, 하늘부모님의 말씀과 참사랑은 자라고 있었던 것이 신기했고, 기적과 같았다. 속히 지구촌 전체가 참부모님의 심정과 참사랑과 말씀으로 충만한 천국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드린다.
2세들과 식구님들의 어려운 학사 생활이 끝나고 교회 통폐합으로 다시 안산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기원절 때 시어머님이 영육축복을 받으시게 해 드렸다. 또 기원절에 ‘천운영쇄’를 받았다(세가세본 0246, 천일국원년 1.13 양력2.22. 천일국 진성덕 황제). 참부모님의 어인이 찍힌 것을 가보로 여기며 자랑과 긍지를 갖는다. 그리고 더욱 뜻길을 향해 전진하고 필승의 실적을 봉헌할 것을 다짐한다.
자서전 430권 보급에 승리하여 표창장을 받았다(1986호 참부모님 표창, 천기2년 천력12.7,양력12.31). 천보축제 때 축복으로 천보가정에 등재되었다(2021.10. 제2022-09호 천보 KR 02153). 천보가정 등재 때는 믿음의 자녀(최 장운, 6500가정)와 3만가정 시누이의 협조가 있었고, 김종영목사님(6000가정회 총무수석부회장, 교구장, 2023.3부터 야목교회 근무)의 많은 정성으로 승리 할 수 있었다.
6. 남편의 성화
남편은 젊은 시절 당뇨로 인해 합병증이 와서 신장투석을 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렇지만 애착을 갖고 전력투구 활동한 것에 비하여 만족스런 실적을 내지 못할 때에는 많이 힘들어 하기도 했다. “내가 사는 동안에 교회 3곳을 세우고 싶다.”고 했는데 그 꿈이 실현되었다. “화성교회, 반월교회, 상록수학사교회를 세우는데 힘을 보탰으니 어느 정도는 꿈을 이룬 것 같다.”고 회고했다. 반월 교회를 건립할 때에 땅을 헌납한 공로로 교구장 상도 받았다(경기남 09-3호. 이상채). 아들, 딸 3남매 낳아서 교회에 손잡고 가는 것도 꿈이었는데, 그 꿈도 이루었다. 우리 부부는 뜻길을 따르면서 얻은 참행복의 신비스럽고 달콤한 맛을 체험했다. 몸이 불편하여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면서 3층 성전으로 올라 갈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가슴이 많이 아팠다. 다행히 김윤중식구가 많이 부축해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남편이 성화를 하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졌고, 땅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흔들거렸다. 내 몸은 강한 폭풍을 만난 것처럼 휘청거렸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삶 자체가 먹먹하고 망망하였다.
남편이 마지막 가실 즈음에 피부에 염증이 생겨서 피부 이식수술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가족의 간절한 마음만큼 피부 소생은 되지 않았다. 2개월 정도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안됐지요. 성화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퇴원하여서 방에 누워 계셨다. 5살짜리 우리 손녀딸 서연이가 “할아버지가 아야 하니까 아무도 할아버지 방에 들어 가지마!”라고 하면서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 곁에 있어야 돼”라고 하면서 방에 들어가서 할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서연이도 할아버지가 영계로 가시는 것을 눈치챘나 보다. 남편은 기력이 없어서 아무 말씀도 못 하셨다. 귀염둥이 재롱둥이 손녀를 지긋이 바라보셨다. 그리고 나에게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남편은 나를 마지막으로 꼭 안아 주시고 그 밤에 조용히 편안한 모습으로 성화하셨다.
인명은 재천인 줄 알면서도, 육신 사후 영계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저 멀리 떠나는 남편이 야속하게 여겨졌다. 가정출발부터 해외로 비행기를 타고 이국 땅으로 가서 나에게 이별의 눈물과 고통을 안겨 준 남편은 그렇게 나를 두고 먼저 떠나셨다. 남편이 떠난 다음날, 낮은 낮이되 내게는 낮이 아니었다. 정신이 멍했다. 넋이 나갔다는 말을 체험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진다는 말이 무섭고 고통스럽고 몸서리치도록 나를 내려눌렸다. 현기증으로 휘청거리면서 성화식 기간을 지냈다.
성화식은 “6000가정 이정길 장로 2지구 성화식”으로 해드렸다. 참어머님께서 “천보 등재 축복가정 천일국 백성지 완성”이라는 휘호를 내려 주셨다. 이 휘호를 갖고서 승리자의 모습으로 영계에 입성하셨을 것이다. 입관식, 기도회, 성화식은 지구장님이 섭리일정 때문에 못 오셨고, 김종영 이천교구장님, 최정환 경기남부 대교구장님, 옹대수 안산교구장께서 주관해 주셨다. 이 지면을 빌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남편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다.
“어디를 가더라도 내 손을 꼭 손잡고 다니시던 사랑하는 남편 이정길 장로님, 긴 세월 동안 건강이 안 좋으면서도 참 열심히 뜻길을 사셨어요. 주어진 사명을 다 하셨어요.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장로님이 내 남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영계에서 웃으면서 다시 만날 그때까지 영계에서 참아버님가 하늘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한 영생을 누리세요.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천일국 안착을 위해 열심히 일하세요. 사랑하는 남편, 이정길 장로님, 이 자서전을 당신께 바칩니다. 영계에서는 늘 건강하시고 활기차게 참아버님, 하늘부모님을 모시면서 천일국 안착을 위해 지상에서 보다 더 큰 열정을 쏟으세요. 귀여운 손주들인 재홍, 소영, 서연이도 할아버지를 많이 많이 사랑한대요.”
딸은 2세 이용주(777가정2세)와 축복을 받았는데, 6000가정 축복기념일과 같은 날이이다. 그래서 같이 축복결혼기념 이벤트를 한다. 이 또한 우리 가정에 추가로 주어진 은혜의 축복이다. 우리는 그저 무한히 하늘 앞에 감사하며 영광과 찬양과 찬미를 올린다. 우리 가족들은 남편이 못다 하신 일들을 우리의 몫으로 생각하고 감당하기 위해 더욱 열심을 낼 것이다.
6000가정 형제자매님들! 모두 모두 건강하세요. 몸이 아프면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해야 하니까요. 지금 사랑하는 배우자와 가족이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웃고 행복하십시오. 멋과 낭만을 향유하는 훌륭한 축복가정이 되어 하늘 앞에 효정(孝情)의 영광과 찬양과 찬미를 봉헌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