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적됐다. 시조 이우칭(李禹偁)은 고려 때 문하시중에 오른 뒤 재령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이전까지는 경주가 본관이었다.
이오는 고려가 망하자 경남 함안군 모곡리에 낙향했다. 고려 왕조 유민의 땅이라해서 모곡리는 원래 고려동이라 불렀다.
숙종 조 이후 영남학파 중심인 남인과 기호학자 중심인 서인은 각종 예론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을 벌인다. 이때 영남학파를 대표한 인물이 이현일이다.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퇴계 학통을 전승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넘어온다. 그로부터 5년 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 피비린내나는 정치 보복이 일어난다. 이현일 또한 전라도 광양 등으로 유배되는 시련을 겪는다. 이후부터 남인은 조선조말까지 집권과는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이휘일. 이현일 형제는 도덕지상주의를 지향한 성리학자였다. 이현일은 형 이휘일의 유지를 받들어 경세학 저술인 "홍범연의"를 마무리 지었다.
이현일의 어머니 장씨 부인은 재령이씨를 빛낸 인물이다. 그는 경당 장흥효의 딸로 태어나 이미 10여살 때 시서에 능통한 재원이었다. 이시명에게 출가한 뒤에는 내조와 자녀양육에 힘써 세칭 7현자(賢者)를 길렀다. 요리책인 "규호시의방(閨壺是議方)"과 "장부인실기"가 전해진다.
2000년 현재 50,940명이다. 주요파는 ▲청도파 ▲밀양파 ▲함안파 ▲맹현파 ▲율간공파 ▲사의공파 등이다. 충북 제원시 송학면, 경북 영양군 석보면, 청도군 이서면, 경남 하동군 옥종면, 진주시 대곡면. 수곡면,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전남 광양시 진상면 등이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