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천국)가 낙원(천당)과 다른 점
ㅡ신앙의 지식, 교리는 신앙에서 중요하지 않는가?ㅡ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해 구하고, (엡 6:10~18)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해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4~5)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징조로서 ‘말세에 이르러 기적을 행하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는 예언보다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심을 받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는 경고의 말씀이 성경에 많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즉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기적을 행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1~23)고 말씀하신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활동한다(마 24:4~5절)는 점에서 우리 싸움은 더욱더 불투명하다. 그러므로 우리 싸움은 더욱더 치열하며 힘든 싸움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이 있다. 또한 그 하나님 말씀으로 이끄시는 성 삼위 성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요 14:16~17,26)는 점에서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교리는 죽은 하나님 말씀이고, {매일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이다.”?
지금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성신님께서는 옛 우리 선조, 하나님의 사람들을 역시 하나님 말씀으로 이끄셨다. 그런데 성신님의 이끄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려고, 교리를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신앙의 보수주의”를 부르짖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측이 “신구약 성경이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믿고 따른다.”는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1)이다.
이 교리서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뜻은 무엇일까? 이 교리서들은 다만 옛날 것으로 오늘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과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계셔서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성신 하나님만 계시면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은 옳은 생각일까?
성신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요일 2:27). 그러나 그 말씀이 지닌 뜻을 모두, 또는 항상 깨닫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행 8:26~35, 롬 10:14, 행 8:26~35). 성신님께서는 가르치는 사람(먼저 깨달은 사람)들을 도구로 삼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옛 교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뜻이다. 즉, 성신님께서는 옛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이 깨달은 바를 ‘체계를 따라 정리한 교리’를 도구로 삼아 오늘을 사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옛날에 성신님께서 행하신 일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자동차 고장 수리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필요 없고 혼자 고장 난 자동차를 연구해 차를 고치겠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자동차 고장 수리법을 배운 사람은 고장 난 곳을 곧바로 고쳐 목적지에 닿은 뒤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려고 할 때, 이 사람은 열심히 고장을 고치는 법을 연구하고 있지 않겠는가.
이 비유가 뜻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무엇인가? 교리란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말씀에서 새로 깨닫기를 바라시는 것들을 깨닫기 위한 밑바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QT 서적 “{매일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이고, 교리는 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말이 우리 가운데 돌고 있는가? 또한 장로교 교리대로 가르친 분을 왜 장로님들이 “이상한 교리를 선동하는 사람”으로 간주해 쫓아내야만 했는가? 그래서 왜 장로교란 장로님들 비위를 맞춰야 만이 목회할 수 있는 교단이라는 슬픔을 느껴야만 하는가? 그리고 왜
“교리에 대한 열심은 조주석 전도사님 개인이 뿌려 놓은 씨앗이잖아!”
“아니오. 원래 이 교회에 이미 뿌려졌던 씨앗을, 누군가가 짓밟은 씨앗을 다시 물을 줘 자라게 한 것뿐이요.”
라는 말다툼이 있어야 하는가?
그 까닭은 “보수(개혁) 신앙”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 보수 신앙이 지닌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몰라서인지, 교권 싸움에만 혈안이 돼서인지, 교인들에게 보수 신앙이 지닌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장로 위임서약에서 “본 장로회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을 {신구약 성경}이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믿고 따르느뇨?”라는 물음에 그저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 않는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데서 오는 우상숭배: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
한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하려면, 그 교회를 이끌어 가는 장로님들 신앙 지식이 건전하고 튼튼해야 한다. 그런데 우상숭배 하나인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는 마당에, 그것도 장로님이 공 예배 때 기도하는 마당에, 나중에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진리야 어떻게 되던지, 그저 교회만 평안하면 되는가?
초대 교회는 진리에 관한 확실한 지식이 없이 어떤 문제가 생기면 소란과 혼란을 겪었다(행 15:1~31, 고전 15:1~58).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진리에 관한 확실한 지식이 없이도, 어떤 문제가 생겨도 평온하게 유지해 나가는데, 이런 교회는 무슨 교회인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성숙한 교회인가?
아니다. 잘못을 지적하기는 쉬우나 그 잘못을 고치기는 어려운 시대에서, 지금은 잘못조차도 지적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아니, 불화로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보다도, 이른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 교인들 잘못된 신앙 지식을 꼬집지 않기 때문이다. 즉, 교회의 평화가 진리보다 우선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개혁 교회의 본질인 진리를 향한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가치를 지니려면: 진리 문제에 민감해야 함
어떤 교회가 평화롭다고 해서, 사랑이 넘친다고 해서, 그런 교회 모두를 ‘하나님의 교회’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오늘날 가장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로마 천주교가 아닌가. 또한 신학박사라는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흑인들을 위해 여생을 보냈다고 해서 그를 ‘참된 휴머니스트, 하나님을 높이 받든 참된 휴머니스트’로 평가할 수 있는가? 또는 그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해서 그를 “기독교인”으로 말할 수 있는가?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다 하는가? ‘착각 때문에 실패를 했던 인간 예수’로 말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어떤 교회가, 사람들이 모인 사회단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진리 문제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장 7절부터 14절에 나오는, 그릇된 베드로 사도 행동을 책망한 바울 사도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교회의 참된 평화(사랑)는 무엇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인가?’다.
교회의 평화나 성도의 교제보다도 중요한 것: 진리
갈라디아서 2장 7절~14절에 나오는, 바울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책망한 것도 중요하지만, 베드로 사도가 여러 사람 앞에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바울 사도 책망을 받아들인 것도 중요하다. 왜냐면 진리를 위해 다른 사람 잘못을 지적하기도 매우 어려우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에게는,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반석(마 5:21~27, 마 16:13~18) 위에 서는 것이 중요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잘못을 기억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 부활 뒤 세 번이나 했던 고백,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요 21:15~19)이 자기 삶의 목표였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가 자기 권위를 내세우며 바울 사도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성도의 교제는, 교회의 평화는 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고 해서 바울 사도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평화가 깨지더라도, 교제의 악수가 끊어지더라도,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니려면,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이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경륜에서 버림을 받은 까닭은 지식(진리)을 쫓지 않았기 때문(롬 10:2)이었다. 이 사실을 뼈에 새기고 있는 바울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교회 역시 하나님의 경륜에서 버림을 받지 않으려면 진리 위에 튼튼하게 서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가, 교회의 평화가 깨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갈 1:8)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베드로 사도를 여러 사람 앞에서 과감하게 책망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 ‘모든 지식을 알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적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에서 신앙의 지식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고전 13:6 하)이요, 진리는 그 사랑을 튼튼하게 한다. 사랑 없는 진리는 교회에서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진리 없는 사랑도 교회에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 본질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이 교회에 넘치게 된다면, 결국 그런 교회는 사랑을 위해 사람들이 모인 집단, 사회단체일 뿐이다. 이런 사랑은 불신자 세계에서도 누릴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 이것은 바울 사도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님에게서도 볼 수 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그릇된 행위나 생각들을 지적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자신들 그릇된 생각이나 행위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판을 “예수님의 큰 사랑”으로 말할 것이다. 잘못을 깨달은 바리새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것이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잘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바리새인 비판은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다만 십자가 위에서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을 놓고 예수님께서 하신, <용서를 위한 기도>(눅 23:34)만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ㅡ이런 예수님의 사랑은 기독교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에게서도 볼 수 있다(행 7:60). 그런데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비판, 유대인들을 놓고 하는 비판은 논리를 따른 비판이면서도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꿰뚫고 있지 않는가.ㅡ
진리 문제에 민감한 것, 이것을 반석으로 한 교회의 평화(사랑)는 ‘참된 하나님의 교회’로서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 줄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낙원을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큰 구속에 욕을 돌리는 교회
천국이란 무엇이냐 할 때, 우리나라 교회 교인들은 죽어서 가는 낙원(천당) 정도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마 16:22~23절)처럼, 예수님의 구속을 가로막는, 모든 역사와 우주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능력을 가로막아 버리는 생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욕을 돌리는 생각이다. 즉, 천국을 죽어서 가는 천당 정도로 여기는 생각은 베드로나 사탄이 하는 생각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역사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싸우는 역사다.’고 교훈(창 3:15)한다. 그런데 이 두 나라 싸움에서 우리나라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놓고 잘못 이해하는 것, 이것은 예수님 초림과 부활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탄 나라에 힘을 보태 주는 영양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면, 잘못 배운 것을 놓고 거룩한 분노를 느끼며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회개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어떤 윤리나 사랑을 우리가 행하지 못했다는 것만이 예수님께 욕을 돌리는 일이 아닌 것이다.
앞서 나는 “개혁 교회의 교리란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말씀에서 새로 깨닫기를 바라시는 것들을 깨닫기 위한 밑바탕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만약 우리나라 교회가 성신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이미 밝혀 주신 교리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계속해서 이런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원에 있는 성도들: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중간기 상태
예수 그리스도 낮아지심을 이야기할 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7문답>은 ㅡ예수님께서 대속하신 사람들 죄에 따른 형벌로서ㅡ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 아래 계셨다.”고 적는다. 그런데 “권세”라는 말까지 쓴 이 답이 뜻하는 것 하나는, 죗값으로서 죽음은 하나님 백성들 목적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죽음(천당)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 목적지라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 죽음을 보시고 슬퍼하실 까닭이 없다. 또한 부활하셔야 할 까닭이 없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구속 사역을 마치셨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개혁 교회 ‘조직신학’ 한 분야인 {종말론}에서는 믿는 사람들 죽음을 놓고, 즉 낙원(천당)에 있는 성도들 상태를 놓고 “중간기 상태: 목적지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한동안 쉬는(계 6:11) 과도기 상태”로 말한다. 이 점에서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도 표현한다(고전 15:18).
죽음은 하나님 창조의 본의本義ㅡ천지창조 때 아담처럼 영혼과 몸이 함께 있는 산 사람(전인全人)으로서, 낙원(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ㅡ를 반역反逆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모습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원래 모습 그대로, 즉 영혼과 몸이 함께 있는 전인全人 상태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온전穩全(거룩)히 섬기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죽은 성도들도 포함)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재림으로 몸이 구속받는 부활을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롬 8:23)이다.
{신구약 성경}은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는가(시 1:1~3, 히 11:1~12:1), 또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가(마 5:1~27)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낙원ㅡ아담이 살았던 낙원이 아니다ㅡ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전한 것은 천당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행 28:31). 바울 사도의 사상이나 생애에서 중심된 것은 천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재림으로 몸이 구속받는 부활(롬 8:17~18, 빌 3:21, 딤후 4:8)을 바라며 이 땅 위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일이었다(행 20:24).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천국의 삶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삶과 얽혀 있기에 바울 사도는 이 땅 위에서 사는 삶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이 세상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삶(마 5:16, 고전 10:31)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낙원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잘못된 성경 풀이: 고린도후서 5장 1절~4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4)
우리나라 교회는 종말을 이해할 때 죽어서 가는 천당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선입관으로 작용해, 고린도후서 5장 1절~4절을 풀이하는 데 큰 잘못을 저지른다. 그것은 곧 “땅에 있는 우리 장막 집”을 ‘지금 우리가 사는 집’으로 풀이하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또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공간을 차지하는 천당’이나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황금성(새 예루살렘성)’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막 집”과 “영원한 집(처소)”을 ‘사람이 사는, 공간을 차지하는 건물’로 풀이하면,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에서 ‘“덧입기”를 어떤 뜻으로 풀이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보통은 ‘문학적인 표현’으로 풀이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3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는 구절은 ‘“장막 집”이나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집)”가 곧 문학적인 표현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즉, “이렇게 입음”과 “덧입기”라는 표현은 ‘옷을 입는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 몸보다 더 큰 어마어마한 집(城)을 옷으로 입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간단해진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집, 또는 처소ㅡ{킹 제임스 번역(KJV) 영어 성경}에서는 “Building, House”ㅡ로 번역된 이 말들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사람 영혼이 사는 집으로서 몸을 뜻한다. 즉, “땅에 있는 무너질 장막 집”은 ‘죽음과 함께 흙으로 돌아갈 우리 몸’을 뜻한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과 함께 우리 영혼에 덧입게 될, 다시는 썩지 않는 영화로운 몸, 부활의 몸’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부끄러움을 상징하는 “벗은 자”가 뜻하는 것은 ‘몸이 없는 영혼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죽음의 상태’를 뜻한다.
이렇게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신자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전 부활을 먼저 이야기한다. 고린도후서 5장은 영화로운 부활을 바라면서 신자의 죽음을 놓고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해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며 죽어서 가는 천당을 놓고 이야기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 삶을 경홀히 여기지 않는, 이 세상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후 5:9)는 결론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 목적지가 될 수 없는 낙원: 그러나 위로와 축복을 누리는 자리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낙원(천당)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ㅡ이 땅 위에 이미 도래한,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ㅡ였다고 할지라도, 또한 믿는 사람들 영혼이 거하는 낙원은, 최상으로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닌, 몸이 구속받는 날을 기다리며 탄식하는 자리일지라도, 그 자리는 위로와 축복을 누리는 자리이다. 왜냐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신 예수님, 높이 되신 그리스도(시 110:1, 마 22: 43~45, 행 2:34~36)와 우리 영혼만이라도 함께 거하는 자리(눅 23:43, 고후 5:8)이기 때문이다. ㅡ우리 영혼만이라도 우주 중심에 있는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높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며 높이 되신 주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점에서 낙원(천당) 역시 하나님 나라(계 6:9~11)다. 또한 낙원은 장차 우리가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입고 성 삼위일체 하나님 섬길 장소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고후 12:1~6, 계 4:1~5:14, 7:9~12,21:1~7, 22:1~5)이기도 하다. ㅡ
물론, 이 세상에서 그 자리를 앙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날 마땅히 해야 할 자기 일을 팽개치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면서 무작정 날마다 교회 일에 충성하거나, 그 자리를 앙망하면서 산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다(참고; 살후 3:6~15). 즉, 그 자리를 앙망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삶을 업신여기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울 사도처럼 “내가 달려가야 할 길을 마치고”(딤후 4:7)라는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목회자로서 삶을 살든지, 노동자나 기업가로서 삶을 살든지, 학생이나 주부로서 삶을 살든지, 자기가 처해 있는 곳에서 에베소서 6장 10절~18절과 고린도후서 10장 4~5절에 적힌 선한 싸움을 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 이름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서 자기 일에 충실하며 선한 싸움을 싸울 때, 하나님 나라는 그 사람 삶에 이미 임한 것이다.
되풀이하는 이야기이지만, 개혁교회 교리란 하나님께서 오늘날 개혁 교회가 {성경}에서 새로 깨닫기를 바라시는 것들을 깨닫기 위한 밑바탕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신앙의 선조 개혁자들이 물려준 교리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나라를 전인으로서 사람 자체가 아닌 영혼만이 가는 낙원 정도로 여기는 큰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신학교 교수님들이 “정통 보수주의 개혁 신학”을 외치면서, 이와 함께 그 신학을 제대로 연구했더라면, 이 죄를 좀 더 빨리 청산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입으로만 그 신학을 외쳤을 뿐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하면, 앞서 간 서구 정통 보수주의 개혁신학자들ㅡ{신국론神國論}을 지은 어거스틴, {기독교 강요}에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의 왕직을 증거하며 {기독교 강요 제3권} [제25장]에서 이 세상에 이미, 그리고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 왕국을 증거한 존 칼빈, 게할더스 보스2), 존 머레이 같은ㅡ 이름만을 외쳤을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그들이 그들 선조로 무척 존경하는 존 머레이, ‘존 머레이 {구속론}’) 마지막 장 [영화榮化]3)만이라도 제대로 읽었더라면, 천국을 ‘죽어서 영혼만이 가는 천당’ 정도로 생각하는 생각을 놓고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들이 세력다툼에 신경 쓰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더라면, 그들에게 배운 목사에게서 “{매일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이고, 교리는 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모순된ㅡ‘{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이고, 교리는 죽은 하나님 말씀이다. ’고 하셨다면, 이해하고픈 말이지만ㅡ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 교회 신앙의 지식인 개혁 교회 교리: 하나님 은혜로 태어남
종교개혁 시대의 우리 위대한 신앙의 선조, 개혁자들은 자기 후손들이 {성경}으로 나아가는 데 ‘웨스트민스터 교리서들’이 방해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들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 개혁자들이 바라고 뜻한 대로, 그것들은 놀랍게도 지난 4 세기 동안 그것을 배우는 하나님 백성들을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리지 않게”(엡 4:14)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배우는 하나님 백성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데로 이끌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교리서들’ 자체에 어떤 신령(신성)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뿐만이 아니라 이미 내려주신 말씀(시 119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경륜을 깨달은 위대한 사상(삼상 17:45~47)을 지님으로써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3)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드높이는 위대한 사상’으로써 거대한 중세 로마 천주교 암흑시대를 물리쳤던 우리 신앙의 선조, 개혁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체계(순서)와 논리를 따라 적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음(죽어서 영혼만이 가는 천당)을 구원의 목적지로 삼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과 재림을 부인하는 것과 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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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를 뜻한다. 이에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 {웨스트민스터 교회 정치 조례}를 더할 수 있다.
2) ‘게할더스 보스 {하나님의 나라} 정정숙 역 (서울: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71)’, ‘게할더스 보스 {히브리서의 교훈} 김성수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4)’.
3) 다음은 ‘존 머레이 {구속론} 하문호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79)’ [영화榮化]에서 옮기는 글이다.
영화榮化는 구속 적용에서 마지막 단계로. 그것은 유효有效한 소명召命으로 시작한 과정을 완성하는 단계다. 실로 영화는 전全 구속 과정을 완성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하나님의 선택選擇이 성부聖父의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서 예정된 바 그 목적 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 그리스도 구속 사역으로 이뤄지고 보장된 구속을 완성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 영화가 이뤄지는가 하는 것이다. 영화란 참으로 무엇이며 또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다뤄야 할 일이다.
영화란 신자信者들이 그 영혼이 들어가는 축복스런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육체肉體를 떠난 그들 영혼 편에서 보면 그들은 완전히 성화됐고,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으로 즉시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몸을 떠나는 것은 주님과 함께 거居하는 것이다 (참조; 고후 5:8). 영광스런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은 죄의 어떤 오염汚染도 내포內包할 수 없다. ㅡ육체를 떠난 성도聖徒 영혼은 “온전케 된 의인의 영”이다(히 12:2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小要理問答}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자들이 죽을 때 그리스도께 받는 혜택惠澤은, 그들 영혼이 완전히 거룩해지며 그 즉시로 영광에 들어가고 그리스도께 연합돼 부활復活할 때까지 육체는 그들 무덤에서 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百姓들이 죽을 때 그 변화變化가 아무리 영광스런 것이라 할지라도, 또 그들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아무리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할지라도(참조; 빌 1:23), 이것은 그들의 변화變化는 아니다. 이 상태는 신자의 소망과 염원의 궁극 목표目標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보장하신 구속은 다만 죄罪로부터 구속뿐만 아니라 모든 죄의 결과로부터 구속이다.
죽음은 죗값이고 신자들 죽음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출하는 일은 아니다. 최후의 적敵인 죽음은 아직파괴되지 않았다. 그 죄는 아직도 승리에게 삼키운 바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화는 죽음 그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을 때” (고전 15:54) 나타나게 되는 그 영광을 신자들이 죽을 때 들어가게 되는 축복스런 상태로 대치하는 것은 그리도스께 욕辱을 돌리며 그리스도인들 소망所望의 독특성獨特性을 깎아내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죽음과 관련해 이러한 선입관先入觀을 갖게 되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비뚤어지게 될 것이다.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 8:23)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것이 영화다. 하나님 백성들이 육체와 영혼 전체가, 부활 승천하셔서 영화롭게 되신 구속주救贖主의 형상과 같이 될 때, 그들 낮은 몸이 그리스도 영광스런 몸과 같이 될 때(참조; 빌 3:21) 전인의 완전한 구속이 이뤄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략)…
4) ‘에드먼드 클라우니 (설교와 성경신학) 김정운 역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2)’ 99쪽~102쪽을 참고함.
※. ‘천국(하나님 나라)’과 ‘천당(낙원)’을 분리하지 않고 구별해 ‘죽어서 우리 영혼만이 가는 하나님 나라로서 천당’보다는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인 천당에서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고대하며 ‘이미 이 세상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강조한 이 글은 독립개신교회 성약교회 김홍전 목사님 가르침으로 태어난 글이다. 즉, ‘김홍전 {신앙의 도리} (서울: 백합출판사, 1980)’ 30쪽~32쪽에 있는 글, <하나님 나라에 대해>에 적힌 가르침으로 태어난 글이다.
-1985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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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四季 朴埰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