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鄧禹가 自馮愔叛後로 威名이 稍損하고 又乏糧食하여 戰數不利하니 歸附者가 日益離散이더라 赤眉가 暴亂三輔하니 郡縣大姓이 各擁兵衆하여 禹가 不能定이거늘 帝가 乃遣偏將軍馮異하여 代禹討之할새 車駕가 送至河南하여 敕異曰:「三輔가 遭王莽、更始之亂하고 重以赤眉、延岑之酷하여 元元이 塗炭하여 無所依訴하니
○등우가 풍음(馮愔)이 배반한 후로부터, 위엄과 명망이 차츰 떨어지고, 또 양식도 부족하여, 싸워서 여러 번 승리하지 못하니, 귀순한 자들이 날로 더욱 흩어졌다. 적미(赤眉)가 삼보 지방에서 포악하게 어지럽히니 군현의 큰 성씨들이 각기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등우가 능히 평정하지 못하거늘, 황제가 마침내 편장군 풍이를 보내서 등우를 대신하여 토벌하려고 할 때, 황제의 수레가 전송하여 하남에 이르러, 풍이에게 말하기를 “삼보 지방은 왕망과 갱시의 난을 만나고, 거듭하여 적미와 연잠(延岑)의 혹독함이 겹쳐서, 백성들(元元)이 도탄에 빠져서 의지하고 하소연할 곳이 없다.
將軍이 今奉辭하여 討諸不軌營堡하니 降者를 遣其渠帥하여 詣京師하고 散其小民하여 令就農桑하고 壞其營壁하여 無使復聚하라 征伐은 非必略地、屠城이라 要在平定安集之耳니 諸將이 非不健鬪나 然이나 好虜掠이라 卿은 本能御吏士하니 念自脩敕하여 無為郡縣所苦하라!”異가 頓首受命하고 引而西하여 所至에 布威信하니 羣盜가 多降이더라
장군이 이제 황제의 사명(辭命)을 받들어 법에 어긋나게 보루를 영위한 자를 토벌하니, 항복한 자들을 그 우두머리만 보내서 경사(서울)로 가게 하고, 그 작은 백성들은 흩어지게 하여, 농사짓고 뽕나무를 기르게 하고, 그 군영과 보루를 무너뜨려서, 다시 모이지 않도록 하라. 정벌은 반드시 땅을 경략하고 성(城)을 도륙(屠戮)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평정하여 편안히 모여 살게 하려는데 있을 뿐이니, 여러 장수가 건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노략질을 좋아하니, 경은 본래 능히 관리와 군사들을 통제하니, 스스로 닦고 신칙할 것을 유념하여, 군현에서 고통받는 바가 없도록 하라!”하였다. 풍이가 머리를 조아려서 명령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이르는 곳에 위엄과 믿음을 베푸니, 여러 도적이 많이 항복하였다.
溫公曰:昔에 周人이 頌武王之德하되 曰:「鋪時繹思하여 我徂惟求定하리라」言王者之志는 在布陳威德安民而已이라 觀光武가 所以取關中하면 用是道也이니 豈不美哉리요!
又詔徵鄧禹還하여 曰:「愼毋與窮寇로 爭鋒하라! 赤眉가 無穀이니 自當來라 吾以飽待飢하며 以逸待勞하여 折箠笞之하리니 非諸將憂也라 無得復妄進兵하라!」
(丁亥) 三年이라 立四親廟於雒陽하다
온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주나라 사람이 무왕의 덕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왕의 공적을 찾아) 생각한 것을 널리 펴서 내가 가서 안정을 구하리라.’하였으니 왕자(王者)의 뜻은 위엄과 덕을 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함에 있을 뿐이라. 광무제가 관중을 취한 것을 보면 이 도를 사용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또 조서를 내려 등우를 불러서 돌아오게 하고 말하기를 “조심하여 궁지의 적과 더불어 창끝으로 다투지 말라! 적미는 곡식이 없으니 저절로 마땅히 올 것이다, 우리는 배불리 있으면서 적이 굶주리기를 기다려서, 편안함으로써 피로하기를 기다려, 채찍을 꺾어 매질할 것이니, 여러 장수가 걱정할 것이 아니다. 다시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키지 말라!”라고 했다
(정해년) 건무 3년이라. 네 분의 조상(舂陵節侯 劉買, 鬱林太守 劉處, 鉅鹿都尉 劉回, 南頓令 劉欽)의 사당을 낙양에 세웠다
○馮異가 與赤眉로 約期會戰할새 使壯士로 變服하여 與赤眉同하고 伏於道側이러니 旦日에 赤眉가 使萬人으로 攻異前部거늘 異가 少出兵以救之한데 賊이 見勢弱하고 遂悉衆攻異거늘 異가 乃縱兵大戰이더니 日昃에 賊氣가 旣衰하고 伏兵이 卒起하여 衣服이 相亂이라 赤眉가 不復識別하여 衆遂驚潰거늘 追擊하여 大破之於殽底하고 降男女八萬人하다
풍이가 적미와 더불어 기일을 약속하여 회전할 때 장사들로 하여금 변복하여 적미와 같게하고 길가에 매복하였다. 아침에 적미가 만명으로 하여금 풍이의 전방 부대를 치게하였는데, 풍이가 병력을 조금 보내서 구원하자, 적이 세력이 약한 것을 보고, 마침내 모든 군사가 풍이를 공격하거늘, 풍이가 마침내 군사를 풀어서 크게 싸웠다. 해가 기울자, 적의 기운이 이미 쇠하고,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서 의복이 서로 (같아) 혼란스러우니, 적미가 다시 식별하지 못하여 군사들이 마침내 놀라서 흩어지거늘, 쫓아가서 공격하고, 효저(殽底)에서 대파하니, 남여 8만 명이 항복했다.
帝가 降璽書勞異하여 曰:「始에 雖垂翅回谿나 終能奮翼澠池하니 可謂失之東隅요 收之桑楡로다。方論功賞하여 以答大勳하리라」 하다。赤眉餘衆이 東向宜陽이거늘 帝親勒六軍하여 嚴陳以待之더니 赤眉가 忽遇大軍에 驚震不知所謂하여 乃遣劉恭乞降曰:「盆子가 將百萬衆降하리니 陛下가 將何以待之잇고?」
황제가 옥새가 찍힌 문서를 내려서 풍이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처음에는 비록 회계(回谿)에서 날개를 드리웠으나, 끝내는 능히 민지에서 날개를 떨쳤으니, 가히 동우에서 잃고, 상유에서 거두었다고 이를 것이다. 이제 공을 논하여 상주고, 큰 공훈에 답하겠다.”했다. 적미의 남은 무리들이 동쪽 의양(宜陽)으로 향하거늘, 황제가 친히 육군(전군)을 점검하여, 엄히 진치고 기다렸다. 적미가 홀연 대군을 만나자 놀라고 떨며 이를 바를 몰라, 마침내 유공(劉恭)을 보내서 항복하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유분자(劉盆子)가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할 것인데, 폐하께서 장차 어떻게 대우할 것입니까?”하였다.
帝가 曰:「待汝以不死耳니라!」 盆子及丞相徐宣以下三十餘人이 肉袒降하고 上所得傳國璽綬하고, 積兵甲宜陽城西하니 與熊耳山으로 齊더라。赤眉衆이 尙十餘萬人이거늘 帝令縣廚하여 皆賜食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너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대우할 뿐이다!”하니, 유분자(劉盆子)와 승상 서선(徐宣)이하 30여명이 웃통을 벗고 항복하고, 노획한 전국옥새와 인끈을 올렸다. 병기와 갑옷을 의양성 서쪽에 쌓으니, 웅이산과 나란했다. 적미의 군사가 아직 10여만 명이거늘, 황제가 현(縣)의 요리사를 시켜 모두 식사를 주도록 하였다.
○初에 梁王劉永이 據國起兵하여 以董憲、張步로 為將軍하여 專據東方하여 稱帝睢陽하고 復立步為齊王이더니 帝가 方北憂漁陽하고 南事梁楚라 故로 步가 得專集齊地하여 據郡十二焉하다 ○涿郡太守張豐이 反하여 與彭寵으로 連兵하다 時에 關中衆寇가 猶盛이라 馮異가 且戰且行하여 屯軍上林苑中하여 以擊豪傑不從令者하니 威行關中이더라
○ 처음에 양왕 유영이 양나라에 근거하여 기병하고, 동헌과 장보를 장군으로 삼아, 동방을 독차지하여, 수양성(睢陽城)에서 황제라 칭하고, 다시 장보를 제왕으로 세웠다. 황제가 그때 북쪽으로 어양을 걱정하고 남쪽으로 양과 초를 정벌하였기 때문에 장보가 제나라땅을 독차지하여 12개 군을 점거할 수 있었다. ○ 탁군태수 장풍이 반란을 일으켜 팽총과 더불어 군대를 연결하였다. 이때 관중의 여러 도둑들이 아직 성하여, 풍이가 싸우면서 또한 행군하여 상림원 가운데 주둔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는 호걸을 치니, 위세가 관중에 행해졌다.
○蓋延이 圍睢陽하여,斬劉永한데 蘇茂가 奔垂惠하여 共立永子紆하여 為梁王하다 ○耿弇이 從容言於帝하여 自請北收上谷兵하여 定彭寵於漁陽하고 取張豐於涿郡하고 還收富平、獲索하고 東攻張步하여 以平齊地라 한데 帝가 壯其意하여 許之하다
○ 개연(蓋延)이 수양성을 포위하여, 유영을 목베자, 소무가 수혜로 달아나서 유영의 아들 유우(劉紆)를 함께 세워서 양왕으로 삼았다. ○ 경엄(耿弇)이 조용히 황제에게 말하여 자청하기를, 북쪽으로 상곡의 군대를 거두어서, 어양에서 팽총을 평정하고, 탁군에서 장풍을 취하며, 돌아와 부평과 획색(獲索)을 거두고, 동쪽으로 장보를 공격하여 제나라 땅을 평정하겠다고 하니, 황제가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戊子) 四年이라 吳漢、王梁이 擊破五校於臨平하다 ○耿弇、祭遵等이 討張豐於涿郡하여 禽之하다 ○王莽末에 天下가 亂이거늘 臨淮大尹 侯霸가 獨能保全其郡이더니 帝가 徵霸會壽春하여 拜尙書令하니 時에 朝廷에 無故典하고 又少舊臣이라 霸가 明習故事하여 收錄遺文하여 條奏前世善政法度하여 施行之하다
(무자년) 건무 4년이라. 오한과 왕량이 오교(五校 ; 농민군)를 임평에서 격파했다. ○ 경엄(耿弇)과 제준(祭遵) 등이 탁군에서 장풍을 토벌하여 사로잡았다. 왕망 말에 천하가 어리러웠는데, 임회(臨淮) 대윤 후패(侯霸)가 홀로 그 군을 능히 보전하더니, 황제가 후패를 불러서 수춘(壽春)에서 만나, 상서령으로 제수하였다. 그때 조정에는 옛 전적(典籍)이 없고, 또 옛 신하가 적었다.후패가 고사(故事)를 밝게 익혀서 남아 있는 글을 모아 적고, 전대의 선정과 법도를 조목조목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다.
○更始之末에 公孫述이 卽皇帝位於成都거늘 隗囂가 使馬援으로 往觀述한데 援이 素與述로 同里閈,相善이라 以為旣至에 當握手歡如平生이러니 而述이 盛陳陛衛하고 以延援入하여 交拜禮畢에 使出就館하고 更為援하여 製都布單衣하여 交讓冠하고 會百僚於宗廟中하여 立舊交之位하고 述이 鸞旗、旄騎로 警蹕就車하여 磬折而入하여 禮饗하니 官屬이 甚盛이러니 欲授援以封侯大將軍位하니
○갱시의 말년에, 공손술(公孫述)이 성도에서 황제로 즉위하거늘, 외효가 마원으로 하여금 가서 공손술을 보게 하였다. 마원은 평소 공손술과 더불어서 같은 마을에 살아서 서로 친하였으므로, 이미 도착하면 당연히 손을 마주잡고 평소와 같이 환영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공손술이 호위병을 층계에 세우고, 마원을 인도하여 들여서 교배례를 마친 후 나가서 관사에 있도록 하였다. 다시 마원을 위하여 (평민의) 도포단의와 교양관(交讓冠 ; 손님과 주인이 서로 만날때 쓰는관)을 만들고, 백관을 종묘에 모이게 하여, 옛 친구의 자리를 세우게 하고, 공손술이 천자의 깃발과 장식에,경필(警蹕 ; 천자가 나갈 때 경계하고 엄숙히 하며 행인을 멈추게하고 길을 치우는것)을 하게 하고 수레에 올라, 몸을 구부려서 들어오게 하니, 예로써 주연을 베푸니 관속들도 매우 성하더니, 마원에게 후로 봉하여 대장군의 지위를 주려고 하였다.
賓客이 皆樂留거늘 援이 曉之曰:「天下雌雄이 未定이거늘 公孫이 不吐哺走迎國士하여 與圖成敗하고 反修飾邊幅하여 如偶人形하니 此子가 何足久稽天下士乎리오!」因辭歸하여 謂囂曰:「子陽은 井底蛙耳라 而妄自尊大하니 不如專意東方이니라」
빈객이 모두 머물기를 좋아하자, 마원이 깨우쳐주며 말하기를 “천하의 자웅이 정해지지 않았거늘 공손술이 입안의 음식을 뱉고, 달려가서 국사(國士)를 맞이하여 같이 성패를 도모하지 않고 도리어 겉모양을 꾸며서, 마치 꼭두각시 인형과 같으니, 이 사람이 어찌 천하의 선비를 오래 머물게 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사양하고 돌아가서, 외효(隗囂)에게 말하기를, “자양(子陽 ; 공손술의 字)은 우물안 개구리일 뿐이니, 망령되이 스스로를 존대합니다! 그러니 동방에 전념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囂가 乃使援으로 奉書雒陽하니 援이 初到에 帝在宣德殿南廡下하여 但幘坐迎하여 笑謂援曰:「卿이 遨遊二帝間하니 今見卿에 使人大慙이로다.」援이 頓首辭謝하고 因曰:「當今之世에 非但君擇臣이라 臣亦擇君耳니이다.
외효가 마침내 마원을 사신으로 보내 편지를 받들고 낙양에 가니, 마원이 처음 도착하자, 황제가 선덕전 곁채 아래에 있으면서, 단지 두건만 쓰고 앉아서 웃으며 맞이하였다. 마원에게 말하기를 “경이 두 황제 사이를 오가니, 지금 경을 보는 것이 사람에게 크게 부끄럽게 하노라.” 했다. 마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지금의 세상에서는, 비단 군주만 신하를 선택하는것이 아니라, 신하 또한 군주를 가리는 것일 뿐입니다!
臣이 與公孫述로 同縣으로 少相善이러니 臣이 前至蜀에 述이 陛戟而後에 進臣하더니 臣이 今에 遠來거늘 陛下가 何知非刺客姦人,而簡易若是니잇가!」帝가 復笑曰:「卿非刺客이라 顧說客耳로다」援이 曰:「天下에 反復盜名字者를 不可勝數러니 今見陛下하니 恢廓大度가 同符高祖라 乃知帝王이 自有眞也로소이다」
신은 공손술과 더불어서 같은 현(縣)으로, 어려서 서로 친하였으며, 신이 전번에 촉땅에 이르자, 공손술이 층계에 극을 배치한 후에 신을 나오게했습니다. 신이 지금 멀리 왔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자객이나 간사한 사람이 아님을 아시고, 이와같이 간편하고 쉽게 대하십니까!” 하자, 황제가 다시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자객이 아니고 생각건대 세객일 뿐이다.” 했다. 마원이 말하기를 “천하에 반복하여서, 제왕의 호칭을 훔친 자를 셀 수 없이 많은데, 이제 폐하를 뵈니 큼직하고 너그러워 고조(高祖)와 똑같습니다. 마침내 제왕이 스스로 진짜가 있는 줄을 알았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