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미치광이 같은 짓들을 이해하라, 그대 자신에 대해서 해온 것들, 그대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도록 허용해 왔는가를, 그리고 그대가 축적해 온 여러 가지 종류의 모순들을 이해하라, 그 전체를 꿰뚫어보라.
찬성이나 반대도 하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판단도 하지 말라, 단지 그대가 가진 전체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숨기지 말라,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라고 평가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라,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자가 되라, 그대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대 존재의 전체를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그대가 아무리 복잡한 상황에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하나의 이해가 떠오르는 순간, 갑자기 그것은 떨어져나간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벽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다가 “이것은 벽이고 문이 없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과 같다, 그렇다고 이제 그 노력을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
그대는 단지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단순하다, 좋고 싫은 것이 없다, - 그대는 단지 이것이 전혀 소용이 없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말의 의미이다, 그대는 단지 지켜본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움직인다, 거기에는 선택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대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해가 있을 때 그것은 무위가 된다, 그리고 무위적인 상태일 때 그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노력이 있을 때 그것은 추함이 된다, 그것은 언제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한다, 노력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대가 무엇인가와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 그대는 싸우고 있는가? 그대가 싸우고 있는 대상이 여전히 그대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적도 역시 의미를 갖는다, 친구와 마찬가지로, 반대이기는 하지만 적도 의미를 갖는다.
그대들은 그대의 적이 죽었을 때 그대의 내부에서 즉시 무언가가 죽는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친구의 죽음만을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적의 죽음도 역시 괴로워한다, 그대는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인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모하메드 알리 진나와 마하트마 간디는 서로 적이 되어 오랫동안 싸웠지만 간디가 죽었을 때 진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몹시 슬프다, 내 안의 누군가가 죽었다.”
이제 진나는 누구와 싸우겠는가? 누구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될 것인가? 누구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는가? 적이 없으면 에고는 떨어져나간다, 그대의 존재는 그대의 친구들과 그대의 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대는 모순 그 자체이다.
오직 적도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만이 전체적인 인간이다, 그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저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선택함이 없이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삶이 그에게 무엇을 가져오더라도 그는 그것을 허용한다, 그는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떠다닌다, 그는 투사가 아니다, 그는 자유로움 속에 있다, 그대가 만일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예수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말을 탈 수 없으며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쏠 수도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보통의 의미로는 이 말이 “한 주인만을 택해야 하며, 두 주인을 택해서는 안 된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을 통해서 그대는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 사람의 주인 중 한 주인만을 선택하라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여전히 노예이고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오직 무 선택만이 그대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선택하지 않으며 모든 노력을 버린다, 그대가 이해를 하면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나간다, 그때 그대는 주인이다.
인도에서는 산야신을 스와미라고 불러왔다, 스와미란 ‘자기 자신의 주인’ 이라는 뜻이다, 선택을 버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제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에고이스트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만약 대립되는 두 개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면 그대는 희생자가 된다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립되는 두 개 사이에서 그대가 선택한다면 그대는 그 대립되는 것 사이에서 분열된다는 깊은 이해를 함축한다, 산야신은 이 세계는 부정하고 저 세계는 긍정하거나 하지 않는다, 산야신은 찬성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친구나 적이 없이 단지 움직여간다.
선(禪)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의 산야신이 어느 날 아침 언덕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 언덕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는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마침 아침 산책을 하고 있던 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
그들은 그 남자를 보고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말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저 중을 알고 있다, 때때로 그의 소가 길을 잃는데 그는 지금 저기에 서서 언덕 주위를 바라보며 소를 찾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가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무엇을 찾고 있지는 않다, 그의 눈은 거의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틀림없이 친구와 아침 산책을 나왔다가 친구가 뒤에 처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게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가끔씩 뒤돌아보며 친구가 오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기도를 하고 있거나 명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그들은 호기심이 생겨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인지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언덕에 오르는 일은 힘들었으나 그래도 그들은 올라갔다, 그들이 그 남자가 있는 곳에 이르자 첫 번째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지금 소를 찾고 있는 중이지요? 나는 당신의 소가 가끔 길을 잃기 때문에 당신이 그 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눈을 뜨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소를 찾는 것도, 다른 무엇을 찾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이 맞을 겁니다, 당신은 뒤에 오고 있는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지요?”
그 남자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말했다. “나에게는 적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러니 기다릴 친구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혼자이다, 아무도 뒤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혼자다, 완전히 홀로이다.”
이번에는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이 완전히 맞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나는 당신이 기도하거나 명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남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야말로 가장 어리석다, 나에게는 기도할 대상이 없다, 그리고 성취해야 할 목표도 없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명상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그들 세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남자가 말했다. “나는 그냥 서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다, 이것이 바로 산야스라는 말의 의미이다,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자유를 얻는다, 친구와 적으로부터의 자유, 소유와 비소유로부터의 자유,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물질과 정신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선택과 분리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때 불가능은 떨어져 나가고 그대는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대는 도(道) 그 자체가 된다, 그대는 흘러 다닌다.
불가능한 것을 구하려는 노력이 없어지면 근심은 사라진다, 그러면 그대는 더 이상 걱정 속에서 살지 않는다, 걱정 속에서 살지 않게 되면 환희가 솟아오른다, 환희는 성취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그대는 그러한 능력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 근심 속에서 살지 않을 때 환희는 일어난다.
그대는 그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대는 문을 열었고 햇살이 들어와 그대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대는 근심 속에 있고 분리되어 있으며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다.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쏘려고 애쓰고 있다, 그대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다, 그대는 병들어 있다, 그대는 흔들리고 있다, 아니면 기껏해야 그대는 타협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노이로제에 걸려버린다.
보통의 사람들은 어쨌든 자기 일을 수행한다, 노이로제는 그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순응하는 시민,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비록 그대가 순응하는 시민, 선량한 시민, 그저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환희감도 그대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슬픔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성취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대에게 더 깊은 슬픔을 가져다줄 뿐이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라, 그대보다 앞서 달리고, 그대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한 사람들을 보라, 그대는 그들이 그렇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