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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평선교회(JESUS PEACE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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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1) 스크랩 팔복 요약
주평선 추천 0 조회 37 17.01.23 07: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팔복 요약





우리는 주에 걸쳐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산상수훈인 팔복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먼저 마무리를 하기에 앞서 몇 주 동안 은혜를 받은 7복을 다시 한 번 상기를 하고,

마지막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입니다.(마 5:3)

심령이 가난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물질로부터 오는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마 5:5절을 통해 보았으며,

또한 지식적인 갈망을 말하는 것도 아닌 것을 빌 1:9절을 통해 보았으며,

그리고 자기 비하를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고전 7:23절을 통해 살펴보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심령이 가난하다”는 이 말씀의 참 뜻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절대적 빈곤”을 뜻한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이 말씀의 참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는데,

이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로 인해 자신의 완전 파산을 선언한 상태,

 

다시 말해 성령님의 역사로 이 세상에는 자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선포한 상태,

돈도 권력도 명예도 지식도 심지어 자신의 생명, 자신의 영혼까지도 파산되었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전적으로 필요로 가난한 자,(히 프토코스:거지)가 된 상태를 가르켜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일상 언어로 쓰여진 성경에서는 심령이 가난한자의 복에 대하여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려 죽음 앞에 서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파산을 선언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선포한 사람,

이러한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 사람들에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사 35장을 통해 보았었습니다.

먼저 1절∼2절을 보니까 땅의 회복과 부흥이 일어난다고 하셨으며,

3∼4절에서는 위로와 용기가 생길 것이라고 하셨으며,

5∼7절에서는 영혼육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 날 것이라고 하셨으며,

8절에서는 구속함을 받음으로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으며,

9절에서는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으며,

10절에서는 기쁨과 찬송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보았었습니다.

 

이사야 35장은 절망과 고통과 흑암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새로운 회복의 메시지,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과의 회복, 인간과 인간과의 회복,

그리고 인간과 천연과의 회복을 기쁨으로 노래한 책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애통하는 자의 복”이였습니다.(마 5:4)

애통이란 “성령의 역사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파산을 선언하고

찬 38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두 손 바짝 쳐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사람,

 

성령의 역사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의 파산을 선언한 사람,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애통하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애통은

단순히 허물과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거나 또는 슬퍼하거나 탄식함을 넘어서

내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인, 사랑과 긍휼, 온유와 자비, 인내와 겸손, 감사와 찬송

이런 것들은 없고, 내게 없어야 할 것들인 더러운 집착과 욕심, 교만과 오만과 고집,

그리고 돈, 권력, 명예, 인기, 지식, 쾌락만이 가득하다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하며, 슬퍼하며,

탄식하는 것이 애통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애통한자의 복에 대해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복이 있다.” 라고 말입니다.

 

다윗은 시 6:6절에서 자신의 죄를 이렇게 애통해 하며 회개 하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성경은 애통해 하는 모습들을 다양하게 표현을 하여 놓았는데,

먼저 창 37:33~34절에서는“옷을 찢고”여 7:6; 삼상 4:12; 암 2:7절에서는“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삼하 3:31에서는“굵은 베를 띠고” 4:26절에서는“재 가운데 앉았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아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죄와 허물에 대해

애통해 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육의 “保惠師”이신 慰勞者勸勉者辯護士이신

 성령님(파라클레토스)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다음은“온유한 자가 받는 복”이였습니다.(마 5:5)

헬라어 직역 성경은 겸손한 자는 행복하니 라고 되어 있다. 라고 말씀 드렸었으며,

그리고 유진 피터슨의 일상 언어로 쓰여진 성경에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사람 복이 있다. 라고 되어 있다. 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온유는 타고난 성품이나 또는 교육에 의해서 학습 되어진

부드럽고, 따뜻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이런 인본주의적인 온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나타나는 모습이

“온유”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아나우”그리고 헬라어로는 “프라우스”라고 하는데

“아나우”라는 말의 뜻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물질적인 가난과, 억압과,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겸손하게 여호와의 도움을 바라며,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뜻과(시40:17, 사41:17, 습2:3).

이웃에 대하여 함부로 화를 내거나 또는 교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상태를 가르켜서 “아나우”라고 말씀을 드렸으며,

 

그리고 헬라어“프라우스”라는 말에 대해 설명을 드렸었는데

프라우스라는 말은 정글의 사나운 맹수나 조류 또는 초원을 자유롭게 달리는 야생마 등을 포획 하여다가 사람들의 어떤 이익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먹이와 채찍으로 길들인 상태를 가르켜서 “프라우스”라고 한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즉, 짐승이 사람에 의해 길들여진 상태를 말할 때 프라우스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이“온유”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리고 친절하고, 상냥한 윤리와 도덕적인 이런 행동들이 아니라

 

정글의 사나운 맹수처럼 자유로운 초원의 야생마처럼 살던 죄인들

돈, 권력, 명예, 인기, 쾌락을 쫓아 살면서 이것을 성공과 행복으로 알고 있는 지옥 갈 죄인들을,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창세전에 택한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시고 인도하신 죄인들에게

영혼의 양식인 만나 생명의 말씀을 사랑으로 먹이시므로 양육을 하신다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양육 되어진 상태,

이러한 상태를 가르쳐“아나우”즉, 온유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길이 들여진 사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다음은 “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을 상고 해 보겠습니다.(마 5:6)

유진 피터슨의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을 해 놓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입맛이 당기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라고 되어 있다.”라고 읽어 드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義란 사회적 정의 또는 윤리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 따위를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과 그리고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표현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상태가

義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인 음식과 음료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었으며,

 

마태복음 6:33을 통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찾아보았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더하시리라”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의“”인 빵으로 음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라 라고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과연 무엇에 주리고 무엇에 목말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까?

돈, 권력, 명예, 인기, 지식, 쾌락, 편안, 성공에 목말라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여 어리석어 지옥에 갈 사람들은 이것들로 영혼육의 목마름을 해결해 보려고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혼육에 주림과 목마름은 이러한 것들로는 해결 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으며,

설령 이것들을 찾아 영혼육에 목마름을 해소 하였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이것들로 인해 목마름만

더욱 가중하여 고통을 당한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영혼의 목마름, 하나님을 거역한 영혼의 목마름,

하나님 두기 싫어하는 영혼육의 목마름이기에

먹어도, 먹어도 주릴 뿐이며, 마셔도, 마셔도 해갈 되지 않는 영혼육의 영원한 목마름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義가 무엇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까?

하나님의 義는 곧 하나님 자체가 義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義이시며,

그리고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義이시며, 공의가 하나님의 義이시며,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義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죄악으로 더럽고 악한 인간에게는 전혀 거룩한 하나님의 義가 있을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義를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말씀 하시기를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義에는 차별이 없다. 라고

로마서 3장 21~22절에서 바울이 말하였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義니 차별이 없느니라고”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악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즉, 義人이 되었으므로 義人이 된 믿음에 사람들은 유진 피터슨의 번역대로 날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음식과 음료로 삼아 먹고 마심으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로마서 1:17절을 함께 보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 받은 義人은 불의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義人은 순간마다 義에 주리고 목이 말라서 기도를 하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주리다”라는 이 말은 단순히 먹지 못해 배가 고픈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함으로 인해 죽을 지경에 있는 상태,

그러므로 간절하게 먹을 것을 구하는 상태가 주린 상태라고 말씀드렸었으며,

 

그리고“목마르다”라는 말은 햇볕이 내리 쬐는 뜨거운 사막에서 물을 먹지 못해서 의식이 몽롱하여

눈에 헛것이 보일 정도로 의식이 희미한 상태를 가르켜서 목마르다는 상태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또한“주리고, 목마르다.”라는 이 말은 사람이 무엇에 만족을 간절히 원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배고픔과 심한 목마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유는 예수가 마음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처럼 심령 속에 예수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만 다니는 종교인이라고 말씀을 드렸으며

이러한 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서 끝없는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의 특징은 무조건 만족과 감사와 기쁨과 찬송이 없고,

반드시 조건에 의해서만 만족과 감사와 기쁨과 찬송이 있다. 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이처럼 조건에 의하여 만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은 종교인이며 이러한 종교인들의

종교행위로는 자신과 그리고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는 못하므로 구원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은 하나님의 義이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다음은“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마 5:7)

유진 피터슨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을 하여 놓았다고 읽어 드렸습니다.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라고

 

긍휼이란 히브리어로 “라하밈” 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뜻은 생명인 태아를 품고 있는 여성의 자궁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성경의 “긍휼”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가엾게 여겨 동정하다.”로 되어있는데

해석만으로는 하나님의 긍휼을 제대로 이해 할 없어서 영어 성경을 보았었습니다.

 

영어성경 KJV에서는 긍휼을 mercy라고 번역을 하였고 이 mercy라는 뜻은

하나님의 은총,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사형수에 대한 감면이나 사면,

그리고 연민의 정, 또는 긍휼, 자비, 관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단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단어로서 긍휼은 Compassion인데 이 Compassion이란 단어는

Com(함께 나누다)이란 단어와 Passion(수난, 고통)이라는 두 단어가 합성되어진 단어로

그 뜻은 함께 고난이나 수난을 받는다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죄 때문에 빌라도의 뜰에서 그리고 동족인 제사장의 뜰에서 조롱과 침 뱉음을 당하는

수모와 그리고 채찍에 맞는 끔직한 고통을 당하시고 끝내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저주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죽으셨으므로

mercy, 또는 Compassion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고 했으며,(시 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그리고 사 49:15절에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는지 시 121:3~6절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다고 말씀을 드렸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원수를 긍휼이 여겨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엄청난 일이 우리나라에 일어났습니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 304명의 귀중한 목숨을 빼앗아간 이 엄청난 대 참사는

몇몇 기독교 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자연 재앙도 아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채찍도 아닌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엄청난 서거차도 앞바다 세월호 침몰 해난 사고는 우리 사회 전반적인 안전 부재와

당리당략만 쫓는 정치와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인들이 가져온 예견된 해난 사고였으며,

그리고 예수가 없는 종교인들이 빚어낸 인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성경을 살펴보았었습니다.

10:30~37“예수께서 대답하여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지난 주간 살면서 과연 나의 삶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인 긍휼이 나타났는가?

 

이 시간 조용히 자기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며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인 긍휼이

나의 생활 속에 없었다면 세월호 사고를 낸 선장과 그리고 학생들을 구조하지 않고 자신들만 살아나온

선원들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은 때는 말을 아끼고 조심하고 행동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시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다음은“마음이 청결한자가 받는 복”입니다.(마 5:8)

유진 피터슨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을 하여 놓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면세계, 곧 마음과 생각이 올바른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때에야 너희는 바깥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라고 말입니다.

 

한 뼘도 안 되는 인간의 마음은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측량을 할 수 없음은 물론

인간의 마음이라는 세계가 너무나도 오묘하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하여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작은 우주”라고 한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있는 곳으로서 인격이 여기서 만들어 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인격에서 말이 나오고 그리고 이 말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란 인간의 모든 것들이 자리하는 곳이라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레미야는 렘 17:9절에서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그리고 바울은 1:29~31절을 통해 부패한 마음에서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 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런

것들이 나온다고 기록 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가 없는 종교인이나 사람들의 마음에선 이렇게 악하고 더러운 것들만 나오지만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의 마음에선 이런 것이 나와야 된다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말했다고 함께 읽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무흠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을 뵈올려면 마음이 청결해야하며,

죄악으로 부패하여 더러운 인간의 마음은 인간 스스로가 청결하게 할 수 없는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고 말씀 드렸으며 이 일만이 영원 형벌인 사망 권세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하였다고 읽어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골3:5,8)

 

그리고 마음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 중심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좋은 교육과 교정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각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부패하여 더러워진 굳은 마음을 제거함과 동시에

마음을 주신다는 것을 에스겔 36:26절 말씀을 통하여 보았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 죄로 딱딱하게 굳은 영혼의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 영,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는 것을 아시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날마다 마음을 청결케 하셔서

하나님을 뵈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마 5:9)

유진 피터슨은 이 말씀을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알게 된다.” 라고 번역해

놓았다고 라고 읽어 드렸었습니다.

 

지구상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의 인사말은 환경과 문화와 관습에 따라 각기 다르며,

말은 달라도 그 뜻 대부분은 무사, 안녕, 평화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말은 “살롬”이며,

히브어로“살롬”이라는 말의 뜻은 “평화”(peace)를 의미하며,

성경에서“살롬”이라는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었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그 의미의 첫 번째는 개인, 가정, 부족 간의 성장과 번영을 의미하며,

두 번째는 개인, 가정, 부족 간 분쟁과 전쟁이 없는 영육간 평안한 상태를 말하며,

세 번째는 서로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상대방을 축복하는 인사말이며,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언약을 통해 주시는 복(안녕과 평화)이며,

다섯 번째는 인류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준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이 샬롬이라고

 

이사야 9:6절을 통해 살펴보았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리고 하나님은 이웃에게“살롬”이라고 반드시 인사를 하도록 명령을 하고 있는데

이 명령은 상대방을 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예수님도 남에 집에 들어 갈 때,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고 마태 10:12~13절 말씀을 읽어 드렸었습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리고 지금이나 예수님 당시나 유대인들이 만약 “살롬”이라고 인사를 하지 않으면,

이는 상대방을 저주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요한복음 20:19절에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우리나라의 인사말 “안녕하세요”또는 “평안하세요”라는 인사말도 위에서 살펴본

“살롬”이라는 뜻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으며,

 

그리고 신학적 의미로도 한 번 살펴보았었는데 이 샬롬이라는 말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모든 계약 조건들이 어김없이 이행 되었을

주어지는 완전한 관계에서 오는 평화와 평안이“살롬”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가 깨어지고 이로 인하여 평화의 동산, 에덴동산에서 불안, 공포, 두려움 그리고 죽음이 있는 곳으로 추방되어 죄인이라는 사망의 쇠사슬을 목에 걸고 산다고 말씀을 드렸으며, 이로 인하여 아담의 피를 이어 받은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5:12절을 통해 말했다고 전해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가 깨진 인류는 샬롬이 없으며,

이 샬롬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즉, 죄의 값을 지불하여야 만이 샬롬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9:30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헬라어로“테텔로스타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상업 용어로서

물건 값을 지불했다는 뜻과 함께 끝나다. 성취하다. 완성되다. 이며,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치루었다는 의미이며,

이 말은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 회복을 위해 더 이상 무언가를 지불할 필요도

또는 무엇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끝내고. 성취하고. 완성하셨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에 달려 죽으심이 자신의 더러운 죄 때문이라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인 화평을 허락하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죄로부터 구원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서 회복인 것이며,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신 성령님과 동행을 하는 “살롬”인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평화 이웃과의 평화 천연과의 평화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없는 현대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없는 이유는 탐욕이라는 기관차 뒤에 권력의 객차와 명예라는 객차, 인기라는 객차,

쾌락이라는 객차를 매달고 성공이라는 역을 향해서 밤과 낮 구별이 없이 열심히 달려만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으며,

 

이렇게 성공이라는 역을 향하여 열심히 달리다 보니 자기 자신도 모르게 부모님과 아내, 남편과 형제자매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야고보는 약 1:15절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읽어드렸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말입니다.

 

브레이크가 없이 돈, 권력, 명예, 인기, 쾌락을 향해 달려가는 정욕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평화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 샬롬”이라는 평화는 없다고 전해드렸으며,

 

샬롬”이라는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하나님과 사람의 화평이 깨진 것은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깨져버렸고, 이렇게 하나님과 화평이 깨져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후 낳은 첫 아들인 가인은 동생과 화평을 하지 못하고 끝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의 화평이 깨졌고 이로 인하여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도

저주를 받아 힘이 강한 동물은 힘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현상,

즉, 약육강식으로 바뀌었다고 전해드렸습니다.

 

이렇듯 사람들도 돈 있고, 배우고, 힘 있는 사람이 돈 없고, 못 배우고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짓밟아

종으로 삼아 군림하며, 통치를 하며, 국가들도 군사력을 앞세워서 경제력을 앞세워서 약한 국가를 침략하여 지배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류는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진정한 평화가 없이 분쟁과 전쟁의 연속 이였으므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성경 구약도 전쟁에 관한 기사들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명분과 실리에 따라 분쟁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죄의 결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 평화,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 샬롬”이 없는 사망과 어두움의 전쟁만 있는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의 평화라고

누가는 누가복음 2:14절에서 말했다고 읽어 드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롬이며, 평화이며, 평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또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라고

로마서 5:1절에 기록하고 있다고 읽어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렇게 말을 하였는데,

“그의 십자가의 피로“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라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인해 죄인이였던 우리와의 화목을 이루셨다고 고후 5:18~20절을 통해 살펴보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화목” 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화평을 해야 한다고 바울은 로마서 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화목”하라”라고 하였다고 전해드렸으며

 

그리고 고후 13:11절에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 할지어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라고 말했다고 읽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딤후 2:22~24절에서는 바울은“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화평”을 따르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라고 말했다고 읽어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히브리어 12:14절에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과 더불어“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삶들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마음에는 욕심, 탐욕과 안일과 쾌락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화평”그리고 이웃과“화평”이 없다. 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5:9절에 이렇게 말씀 하고 계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웃과 화평을 이루려면 먼저 십자가에서 죽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이 없는 화평은 계산이며, 위선이며, 거짓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웃과의 화평을 원한다면 손해를 봐도 남을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해도 이웃과 원수와의 화평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참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입니다.

나를 손해 보게 하고, 분하게 하고, 억울하게 하고, 원통하게 하는 원수라고 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사랑해주는 것이“화평”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화평”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명심 또 명심하셔서 하나님과 그리고 원수와 이웃과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종족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천연 세계와 화평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는 일컬음을 받으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 대한 복입니다.(마 5:10~12)

유진 피터슨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박해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라고

 

저는 지난 5월 31일 미국 CNN 방송 뉴스에서 참 안타까운 뉴스를 하나 보았습니다.

내용은 아프리카 수단의 한 여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내용 이였습니다.

 

메리암 예히야 이브라힘 27세된 이 여성은 기독교인인 미국인 남편과 결혼을 하면서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친척들이 알고 그녀의 오빠들이 그녀를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오빠들의 고발로 인해

이브라힘은 배교와 간음이라는 죄목으로 법원으로부터 교수형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브라힘은 교수형 외에도 이교도와의 간음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채찍형 100대를 선고 받았습니다.

사실 이 채찍 100대가 이미 죽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이슬람법 샤리아에서는 무슬림(이슬람)이 아닌 사람들과의 결혼은 결혼으로 인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브라힘이 크리스챤과 결혼한 일이 간음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채찍과 사형 선고를 받을 당시 이브라힘은 20개월이 된 아들이 있었고,

그리고 뱃속에는 8개월이 된 둘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선고로 이브라힘은 20개월 된 아들과 함께 어두운 감옥에 갇혔고 그 감옥 안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로

딸을 출산 했다고 합니다.

 

이슬람법 샤리아에서는 불법적인 결혼으로 낳은 아이들은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아이들 또한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수단의 법정은 이브라힘에게 5월 15일까지 기독교를 포기하라고 설득과 온갖 협박과 경고를 하였지만

이브라힘은 동요하지 않고 핏덩이인 딸과 20개월 된 아들과 함께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부인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이브라힘은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I am a Christian, and I will remain a Christian."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으로 남을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이 말씀이 이슬람 여인 이브라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앞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받는 복에 대해서 살펴 볼 때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를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따로 의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지 않고 핍박이 무엇인지 대하여

성령님의 조명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예수님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초신자나 성령님의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을 할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는 일이 도대체 무슨 복이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이 말씀의 뜻을 바르게 깨달으면 이 말씀이 팔복 가운데

아름다운 꽃이라는 것을 또는 결혼이나 약혼반지의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말입니다.

 

“핍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디오코”인데, 뜻은 악의를 품고

계속 따라다니며 몹시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스토킹(stalking)을 의미하는 말인데 이 말의 해석은 상대방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고의적으로 쫓아다니면서 집요하게 정신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몹시 괴롭히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르켜 스토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단에게 속아 멸망의 길로 가는 줄을 모르기에

이 사람들에게는 스토킹이 아닐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이 사단이“디오코”또는 스토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은 우리를 사단은 보이지 않게 끈질기고 집요하게 ?아 다니며,

우리를 시험하며, 유혹하여 멸망의 길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벧전 5:8절에서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정말 사단은 가장 악랄하고 끈질기고 포기 할 줄 모르는 스토커(stalker)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핍박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쿼바디스 도미네란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핍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미친 로마 황제 네로가 신 로마를 건설하려고 로마를 불태웁니다.

 

그리고 불을 지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유언비어를 퍼트려 기독교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입니다.

 

이렇게 잡아들인 기독교인들을 어두운 감옥에 가두고 무참히 죽이기 시작을 하는데

그 방법들이 너무너무 끔찍합니다.

 

미친 네로의 지시에 의해서 굶주려 사나운 사자들을 원형경기장 안으로 들여보내어

아무런 무기나 보호 장구가 없는 기독교인들에게 풀어 놓습니다.

 

굶주린 사나운 사자들은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물고 뜯어 죽이는데 정말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눈을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장면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메달아 죽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끔찍하고 무서운 죽음을 보면서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금도 비굴하지 않고,

그리고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입을 모아 다 함께 찬송을 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 수가 있을까?

미친 로마 황제 네로는 이 광경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동시에 더욱 광분을 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찬송하며 죽어 갈까?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가?

 

이 광경을 구경한 로마인들은 이 거룩한 죽음에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후일 AD 313년에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합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그 끔찍하고, 무서운 죽음의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저는 그 질문에 답을 내리기를 나에게 저러한 죽음이 오기 전에 예수님께서 오시던지

아니면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든지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분명히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닌데도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교회를 다니는 어떤 집사가 12승 학원 지입 차량을 운전하다가

큰 학원에서 25인승 차량을 가지고 들어오면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제안을 해 왔습니다.

 

이 집사는 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하고 이곳 저 곳 아는 곳에서 돈을 끌어

25인승 차량을 구입하여 운행을 하다가 그 학원이 부도를 맞아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이 집사는 여러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게 되었는데 이때 이 집사가 하는 말이

내가 돈을 좀 더 많이 벌어서 교회를 위해 십일조도 많이 하고 감사헌금, 건축헌금,

그리고 봉사를 많이 하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핍박을 당한다고 말입니다.

 

아니 솔직히 자기가 더 돈 벌려고 욕심 부려 25인승 차를 사 놓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니까

이것을 가지고 핍박당한다고 하니까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또 어떤 주부는 남편이 사업을 하는데 목사가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고후 9:7) 말을 듣고

남편과 의논도 없이 통장에서 여러 차례 걸쳐서 6억을 꺼내 교회에 바쳤습니다.

남편이 회사 운영을 위해 통장을 보니 돈 6억이 비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보고 그 돈을 찾아오라고 욱박질렀고 이 여집사는 사람들에게 말하길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였는데 지금 남편이 자기를 핍박을 한다고 사람들에게 하소연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두 사람 결국 교회를 등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핍박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슬람 여인 이브라힘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비 진리를 위해 혹은 자신의 야심을 위해, 헛된 영웅 심리로 인하여 받는 고통을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핍박은 자신이 불러온 고통과 핍박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2: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핍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핍박이 뒤 따르기 마련입니다.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인 것입니다.

첫째 신앙의 절개를 지키느라 당하는 핍박,

다니엘 6:16절“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두 번째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당하는 핍박,

딤후 3: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세 번째 십자가의 복음 전하다가, 사명을 감당하다 당하는 핍박,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핍박은

성도의 신분을 증명하는 기회이며, 신앙과 인격의 연단 기회인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영광 돌리는 기회인 것입니다.

119:67,71“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의를 위해 핍박받은 자에게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먼저 “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이라고 예수님은 선포를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현재적인 천국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위로와 평안, 감사와 기쁨이 있는 현재적 천국이 복인 것입니다.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고 또 하나는 미래적인 천국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음으로 인하여 육신의 장막을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임하는 천국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라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봄에 따가운 햇볕과 싸우며 씨를 뿌리는 농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부는 씨앗을 뿌리면서도 즐거워합니다.

왜! 즐거워하겠습니까?

 

농부는 씨앗을 뿌리며 이미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가운 햇볕도 뿌리는 씨앗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씨앗을 뿌린다는 일은, 가을을 기다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시편 126:5~6절“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제 팔복에 대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유능한 피아노 연주자는 피아노가 낡고 좋은 것에 따라 좋은 멜로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8음계를 갖고 끊임없이 연습을 하기 때문에 내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여러분도 몇 주 동안 들으신 팔복에 대한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읽어서

여러분의 전 생애가 사랑의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아름답게 연주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시기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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