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수요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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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저장한 개나리주유소
담장을 붙잡고 바람에 흔들립니다
이 꽃은 리터당 1,569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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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을 접으면 수요일에 주름이 집니다
월화는 지났고 목금이 남은 오늘
카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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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를 붙잡고 흔들거리는 카페
이 커피는 350밀리리터에 3,500원입니다
뜯어먹다 반을 먹고 남긴 빵 같은 수요일
물끄러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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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만지작거리는 오전 11시
간밤에 두고 간 누군가의 안부가
아침이기도 점심이기도 한 이 시간에 식어가고 있습니다
올 것 같기도 하고 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수요일은 점점 미지근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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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할 수 없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뒤집어봐도 별 볼 일 없는 일과에서
꽃이지만 꽃이 아닌
피어 있지만 피지 않은
남아 있지만 남아 있지 않은 수요일을 야금야금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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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수요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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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꽃의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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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질 때마다 무늬가 생겼어
물결이 굽이칠 때마다 결 따라 남긴
소용돌이치고 모이고 만나서 몸에 남은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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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골을 따라가면 전생을 꿈꾸듯 어딘가에 도착하곤 했어
언니가 나를 업고 가던 그 저녁 신작로
등에서 수박 향이 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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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 떨어진 달을 아무리 길어올려도 두레박엔 아무것도 없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하루는 흔적도 없었지
물일을 많이 해서 닳아버린 지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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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에 남은 잎맥들은 해독 못한 채로 남았어
이불 뒤집어쓰고 울던 밤이거나
해고 통지를 받은 봄이거나
구급차를 타던 날이거나
생채기 하나 없이 오는 아침은 없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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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무늬로 말라버린 압화
갈비뼈 어디쯤 숨겨놓은 기억처럼
책 읽던 중간에 끼워놓았지
가슴에 눌러 찍은 지문 같아서
기억 속 누군가의 무늬 같아서
꽃의 마지막 말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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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기러기라 부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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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의 말들은 금세 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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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소맷부리처럼, 당신에게 닿으면 올이 풀리는 날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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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발 비비며 겨울을 읽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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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잔고가 줄듯 심장의 말도 줄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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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빌린 언어들은 붉은 딱지가 붙어 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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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꼍에서 곱은 손으로 보낼 깃을 짰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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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기러기처럼 떠나는 것을 시라고 한번 불러보아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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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긴 안부들이 그렁그렁 내려앉은 꿈결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우체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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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워 계절을 건너간 꿈은 또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오고 돌아오고야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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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랍 속에 얼음장 같은 종이들을 밀어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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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처마 밑에 쩔쩔매던 그런 문장들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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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에서 가끔 똑똑 햇볕이 떨어지기도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