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은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한다. 나아가서 역사적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성육신과 선재를 말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기 때문이다.
현대신학은 18세기이래 상승기독론에 부착한다. 인간 예수에게서 시작하여 가치판단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 슐라이어막허는 예수는 한낱 인간이지만 자연적 개발에 의해 이룩한 그의 무한한 신의식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과 일치시킨다. 릿츌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그의 인간성의 한계 내에 둔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가 구원을 위해 일했다는 가치평가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선재할 수 없고 만물이 향하는 목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우월한 것을 주로 표기했을 뿐이다.
부룬너도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간으로 보지만 그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완전히 일치했을 뿐이다. 신약은 동정녀 탄생을 알지 못하며 영원한 신자도 알지 못한다. 칼 발트도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 내에 살고 활동하다가 죽은 자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선재는 인격으로 영원에서 존재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변증법적으로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하기는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신학에 있지 않다. 틸리히도 한 인간 예수가 그리스도일 뿐이라고 보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로고스라는 원리가 예수에게 나타났다고 함으로 그리스도가 새 존재라는 것이다. 불트만은 신약의 그리스도 증거를 전부 신화로 봄으로 인간 예수뿐이다. H. 베르크호프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간으로서의 완전성으로 이해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영원한 선재자가 아니고 예수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카알 라아너도 상승기독론의 입장을 취한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지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성육신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유일한 사건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가능한 사건이 예수에게서 구현되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의 통보와 피조물의 자기 상승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다. 신존재 통보가 예수에게서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것이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성경비평작업을 하는 신약학에서도 인간 예수일 뿐이다. 역사적 예수에게서 출발하고 거기에 국한하므로 초자연적 기원을 다 거부한다. 예수는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 예수일 뿐이다. 초대교회 시기에 에비온파가 예수를 한낱 사람으로만 보았다. 그런데 세례받아 특별한 권능을 행하였고 부활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본다. 현대신학에서 진행된 기독론도 다 그 근본은 고대 교회시 이단의 주장과 동일하다.
이와 같이 역사적 예수에서 출발하여 가치 판단에 의해 하나님으로 인정되고 추앙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앙은 그의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와 성육신에서 출발한다.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므로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하강 기독론이어야 한다. 상승 기독론을 취하면 다 비신화화에 이르러 역사적 예수만 남고 신약의 기독교는 소산된다.
1. 하나님의 구원경륜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의 속죄 제사의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한 하나님의 작정이 구원협약이다. 이렇게 구원중보자를 세우고 구원의 방식을 정하셨다.
먼저 중보자를 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 전통적으로 성부와 성자간의 협약으로 논의해 왔으나 삼위 간으로 보아야 합당하다. 성자께서 인간이 되사 속죄 제사의 방식으로 죄를 제거하고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기로 약속하셨다. 새언약으로 모든 택자들의 죄를 속량하시므로 인간에게 신형상을 회복하고 아담대신 순종을 이루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시어 백성을 회복하기로 약속하셨다. 성부께서는 이 약속을 받아 아들을 구원중보자로 선언하시고 그의 희생의 제사를 택자들의 죄를 위한 완전한 속량으로 받으시기로 약속하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언약의 보증이 되고 제2아담이 되시기로 하셨다. 아들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을 보내어 그 구원을 적용하사 교회를 조성하시고 가르치시고보호하시기로 약속하셨다. 이 협약은 하나님의 약정이므로 타락이 전제되지만 영원한 작정이다.
다음으로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구속에 의하여 타락한 인류 중에서 일부를 구원해 내시기로 작정하셨다. 구원에 이르게 할 자들의 선택은 영원, 특수, 불변의 특성을 가져 완전한 구원이 되게 하셨다. 선택과정은 예지하고서 작정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호의이므로 택자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택자들은 선택의 확실성을 가지며 마지막까지 신앙에 머무르게 된다. 유기는 죄 때문에 정죄에 이르기로 한 작정이어서 그의 공의대로 은혜입히심에서 간과하심이다. 내적원인은 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이므로 징벌 공의이다. 또 외적원인은 그리스도의 공로 거부이다. 이 유기에 의하여 은혜입음에서 간과하여 영원한 구원의 상속에서 제거되고 영벌을 입음이다. 이 유기 작정도 영원하고 불변하다.
2. 하나님의 성육신
성육신의 동인: 성경은 모든 인류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하고, 그의 속죄의 죽음을 말한다. 죄에서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의 성육신과 죽음이 필수적이다. 신학사에서 성경의 진리와 반대되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오리게네스는 로고스의 성육신을 만유의 회복에 더 중점을 두었다. 종말에 사탄까지 회복됨을 말하였다. 둔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육을 영화롭게 해주려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성육신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당시 루터교회 목사인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성육신은 죄와 상관없이 작정되었다고 하였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류를 방문하기로 작정하셨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앞당겨진 것뿐이라고 하였다.
매개신학은 죄에서의 구속때문이 아니라 인류의 앙양을 위해서 성육신이 발생하였다고 주장.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통일하셔서 만물의 머리가 되어야 하는데, 이 일을 위해서 성육신이 필수적. 또 인류를 하나님처럼 만드는 것 즉 신화하기 위해 필연적. 이러한 앙양의 주장이 20세기에도 계속되어 신학계의 주류 사상이 되었다. 칼 발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인간을 교제의 대상으로 지으시고 교제 후에 자기의 존재에까지 끌어올려 자기 존재에 동참하게 하셨다고 주장. 이 일을 위해 성육신을 이루었다. 죄는 이 신인 연합에로 가는 길에 생긴 삽화적 사건에 불과. H. 베르크호프도 처음 창조시 하나님은 이 예수를 눈에 두고 창조하였다. 그리고 임시적인 창조를 예수를 원형으로 삼아 다시 짓기 위해 예수의 출생이 생겼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여 창조를 새로 짓는 과정에 정화를 위해 필요하다. 칼 라아너는 성육신은 신적 존재의 통보 혹은 분여를 이루어 인간을 신화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주장. 성육신은 하나님의 인격의 성육신이 아니고 신존재의 통보와 인간의 초훨의 결합으로 생긴 것.
전통적 기독교에서 성육신은 백성을 죄에서의 회복을 위해서 이루어졌다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믿어지고 고백되었다. 인류의 타락에서 원래의 상태의 복을 위해 성육신이 발생하였다. 성경의 증거를 따라 성육신의 동인은 죄라고 함이 진리이다.
성육신의 필요성: 언약의 성취 첫 언약은 인간과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체결. 하나님이 백성을 가지사 섬김받으시려고 함이 하나님의 창조 경륜. 그런데 인간이 언약을 파기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거부. 하나님은 언약 준수의 책임을 자신에게 지우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처음 경륜을 이루시려고 하셨다. 이 언약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인간으로서 인간이 지켜야 할 언약의 법을 지킴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성육신이 필수적이다.
원상회복의 법. 하나님은 죄과가 범해진 그 본성에서 죄가 속량되게 하셨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속량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을 입으시고 인간이 범한 죄과 때문에 입을 형벌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법, 곧 의를 세워야 한다.
속죄제사.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을 속죄제사의 방식으로 정하셨다. 이 제사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사 죄는 피로 즉 생명으로 속량되는 것임을 알게 하셨다. 이것을 이삭의 제사에서 유월절 제사에서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참제사의 예표였다. 죄를 완전히 속하여 생명을 살리는 제사는 사람의 피여야 한다. 그것이 유월절 설립시 애굽장자 살해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갚는 원상 회복의 법이다. 속죄제사는 흠없는 몸이어야 한다. 흠없는 필로 제사하여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샤 했다. 새인류의 조성. 하나님께서 아담에 의해 타락한 인류에게서 새 인류를 만드시기 위하여 새 인류의 머리로 산 영이 아니라 영적 인간을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다. 성령으로 수태되어 형성되었으므로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새 인류를 조성하기 위해 새 조상이 필요로 하였다. 이 일을 위하여 성육신이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임마누엘): 성육신의 주제. 삼위 하나님의 제2위격이신 로고스, 성자.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전본성 곧 육체와 영혼을 취하셨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니케아신경의 고백처럼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요 빛에서 나온 빛이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시다. 성육신의 방식.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사 성육신하신 로고스, 신인이 되셨다. 한 개인 곧 한 인간 인격을 취하심이 아니라 한 인성 곧 영혼과 육체를 위하셔서 사람이 되셨다. 즉 무인격적 인성의 취택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무인격적 인성이다. 그러나 인성은 신적 인격에 결합되어 인격적 결합을 하였다. 그리스도, 신인의 인격은 신적 인격으로 자기 의식과 자기 결정의 주체. 하나님의 본성 곧 신성이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적 인격 곧 제2위격이 인성을 취하사 사람이 되셨다. 이때 신성도 성육신에 동참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인성은 인격을 가짐으로 독립적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은 무인격적 취택이기 때문에 그의 인격에 의존해서 존재하므로 다르다.
출생의 길. 성령의 역사로 잉태하사 동정녀 탄생을 하였다. 성령의 역사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남자의 개입없이 한 인성을 수태시부터 형성하였다. 둘째, 그 인성을 성화하였다. 죄의 오염과 부패가 전혀 전달되지 않게 마리아를 지키고, 그의 육을 깨끗하게 하였다. 죄과의 전달도 전혀 없고 죄가 전혀 없는 인간이 탄생.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출생. 셋째, 형성한 인성을 로고스의 위격에로 부착시켰다. 처음부터 완전한 인성의 형성시까지 역사하셔서 완전히 결합되게 하셨다. 남자의 개입이 없이 성령께서 마리아의 실체 곧 피에서 모든 인성을 다 취하셨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심으로 우리의 주세주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이다. 영혼은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리스도의 영혼으로 창조되었다. 이에 브룬너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여 논한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출생이 마태와 누가에게만 있고 다른 복음서와 바울의 글에 언급이 없으므로 근본주의식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발생에 관계한다고 한다.
동정녀 탄생은 성경의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 그러나 성경 진술이 횟수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확실한 진리를 전달한다. 바울이 동정녀 탄생과 영원 신자의 성육신을 몰라서 침묵한 것이 아니라 그는 명백히 알고 있었다(갈4:4). 또 그리스도께서 남자 없이 여자만을 통해 출생하였으면 인성으로 부족하다고 한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도 전혀 그리스도의 영원신자됨을 믿지 않고 인간 예수만 알려고 하기 때문.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창조사역을 하심으로 남자 개입없이 예수가 출생되게 하셨다. 슐라이어막허도 동정녀 탄생은 그의 인격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한 인간 예수의 출생에 관한 기사일 뿐이라고 한다. 초자연적 방식으로 형성되었어도 출생의 방식은 자연적이다. 정상적인 출생과 성장을 하였다. 루터교회 신학처럼 속성전달로 신성의 속성인 전지와 편재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로 의인으로 출생한 오직 하나의 인간이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출생하였다. 모든 인류는 다 아담의 죄과의 전가 아래 있었지만 예수는 새 인류의 조상으로 새롭게 조성되었으므로, 전혀 첫 아담의 죄과와는 무관하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이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으로 결합되었으므로 각 본성은 자기의 특성을 유지한다. 두 본성이 변화없이, 혼합없이, 분열없이, 분리없이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결합되었다. 이 두 본성은 영구히 그 결합한대로 존재하며 그 특성을 유지한다. 이렇게 출생하여 신인이 되셨다.
3. 그리스도의 인격
신인의 인격: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신인인격이다. 신성과 인격을 가졌어도 인격은 하나이고 하나님으로서 인격이지만, 성육신으로 신인 인격이다. 칼세돈 신경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셨지만 그 인격은 신적 인격으로 인성을 취하였으므로 두 본성에 한 인격으로 좍정고백하였다. 한 인격에 두 본성이 혼합, 변화, 분열, 분리없이 계심을 이해한다. 이단적 견해들은 칼세돈 신경과 배치된다. 아폴리나리스는 인간의 구성요소를 지성, 영혼, 육체로 3구분하고 로고스가 지성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여 인격의 통일성을 세우려고 하였다. 만일 육체와 영혼은 있어도 지성이 없으면 우리의 완전한 인성이 못된다. 부족한 인성으로는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유티커스는 한 본성 한 인격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였으므로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제3의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 그러나 켈세돈 공의회는 유티커스를 정죄하여 두 본성에 한 인격을 확립하였다. 안디옥파의 네스토리우스는 두 본성을 그대로 보존하였으나 인격도 하나님으로서의 인격과 인간 인격의 결합으로 말하여 두 인격을 말하므로 성경의 근본진리를 변경시켜 두 머리를 가진 괴물적인 존재로 만들므로 에베소 공회의에서 정죄되었다. 케노시스 이론은 빌 2:7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을 주장하는데 두 단계로 나눈다. 초기 케뇌스 이론은 정통파 루터교회의 속성 전달에 근거하여 성육신하신 아들은 그의 지상생애 동안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해 인성에 전달된 속성들의 사용을 포기하였다. 이에 비해 브랜츠와 튀빙겐 학파는 전달된 속성의 계속적인 사용을 포기한 것으로 말하였다. 개혁신학처럼 속성전달을 말하지 않음이 바르다. 19세기에 이르러 케노시스주의자들은 루터교회의 신학을 버리고 케노시스의 주체를 성육신하신 아들이 아니고 성육신하실 아들로 보며 신적 존재의 자기 제약으로 주장. 케노시스를 아들의 아들의식의 무력화로 규정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불변 존재를 로고스가 포기하여 영원한 자기 의식을 포기하였다고 주장하기도, 19세기 케노시스 이론대로라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고 완전 인간일 뿐이다. 그러면 성육신은 없어지고 만다. 케노시스주의자들은 예수의 신인인격과 통일성과 그의 의식의 통일, 순수한 인간 존재를 구하기를 바랐으나 결국에는 성육신을 부정하는데 이르렀다. 현대신학도 그리스도의 두 본성교리를 배척하여 인간 인격만을 취하게 되었다. 비더만에 의하면 예수의 인격의 신성이 확정되면 취택된 인성은 단지 인간적 현현형식일 뿐이다. 반면 인성이 신인에게 있어서 실재라면 그의 인격은 인간인격이라는 것이다. 신인이 신적 인격이면 실제로 인간이 아니시다. 혹은 인간인격이라면 참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처럼 두 본성의 교리를 배척하여 성육신을 부인하게 되고 인간 예수만 남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이 설명할 수 없으나 신인으로서 통일인격으로 계신다. 로고스, 제2위격 곧 그리스도의 신격이 바로 신인의 인격이시고 인성은 종속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 인성은 독립적이기에 우리 인성의 존재방식과 다른 점이다. 두 본성은 그 본성대로 역사한다. 그리스도는 신격으로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 곧 세상을 통치하시고 인선은 그 본성의 법칙대로 인간의 배고픔, 피곤, 성장들을 다 동일하게 경험하였다. 개혁신학에 의하면 그리스도의인격은 인성과 함께 도 그안에 계시지만 그 밖에도 계신다.
속성전달은 위격적 전달이다. 루터교회의 신학에 의하면 성육신으로 신성의 속성들 중 전지와 편재가 인성에 전달되었다고 주장하나 인성은 인성의 속성들을 신성에게 전달하고 신성은 신성의 속성을 인성에게 직접 전달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각 본성의 속성들이 위격에 전달된다. 만일 루텨교회식으로 속성전달을 주장하면 성육신이 부정된다. 신적 속성이 인성에 전달되었으면 인성의 정상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다. 위격에 신성의 속성들이 귀속되기 때문에 신적 속성의 일도 인간 예수의 일로 말할 수 있고 또 인간 속성의 일도 하나님의 일로 귀속될 수 있었다. 한편 인성은 무인격적 인성의 취택이므로 모든 인격적 결정은 다 신격적 일이다. 두 본성이 한 인격내에서 통일되므로 합당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무죄성: 그리스도는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출생하였다. 또한 성령의 도움과 역사로 인해 잉태시는 물론 범죄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다. 죄책과 오염이 전달되지 않았으므로 중생도 성화과정도 필요 없다. 시험과 유혹에도 죄는 결코 구성하지 않았다. 시험에도 죄있는 대응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거룩자로서 죄와 분리되었다. 그리스도는 첫 언약의 대상이 아니므로 아담에 의한 범죄의 죄책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완전한 우리의 인성이어도 무죄하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무인격적 인성의 취택이므로 그의 모든 인격적 결정은 신격적 일이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제를 벗어나서 인성의 의지가 죄에로 나아가고 죄된 것을 욕망할 수 없다.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만 다 행했다. 제세례파는 그리스도의인성의 무죄를 해결하기 위해 천적 인성을 이야기하나 그것은 우리의 인성이 아니므로 온전한 성육신이 못되며 따라서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다. 로마교회는 마리아의 무흠수태를 가르치나 마리아가 원죄의 유전에서 전적으로 벗어났다고 할 수 없으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저촉되어 불가하다. 마리아 자체가 무죄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성화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죄의 오염과 전가가 이루어지지 않게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무죄하다.
4. 구원중보자
구원중보자
아들 하나님, 로고스는 구원협약에 의하여 삼위간에 구속 중보자로 합의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구원작정을 이루시기로 하셨다. 이 구원 사역을 위해 사람이 되신 후 제자들과 언약을 체결하사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확증한 구원을 위해 죽으시기로 하였다.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 중보자 곧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등극은 죽음을 통과하고 승천으로 이룬다. 세례받음으로 인류의 죄를 전가받았다. 그는 의인이고 무죄자이므로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었지만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므로 자기를 죄인들과 일치시켰다. 또한 그리스도는 왕, 제사장, 선지자의 삼중 직임을 지닌 그리스도로 세워졌다. 더욱 정확하게는 제사장적 왕으로 세워졌다. 구속주는 왕으로서의 출생이었고 성령 세례받음이 왕으로 임직됨이다. 이렇게 임명된 왕은 영구히 다스린다. 그러나 이 왕권은 피흘려 백성을 속량하므로 이루어진다. 구속된 백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다 중보자로서의 사역이다.
중보자의 인격: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중보자로 세워졌으므로 여러 이름들을 가진다. 이 이름들은 중보자의 직임에 따라 나타나는 그의 인격을 뜻한다.
예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으므로 주어진 이름이다. 구주로서 예수는 그러므로 메시야와 같은 뜻이다. 예수가 메시야이기 때문에 예수를 주라고 칭하게 되었다. 예수는 구약에서 그 예표를 갖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두 방면에서 예수를 예표한다. 구약이 희랍어로 번역될 때 여호수아는 예수로 번역된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입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토지를 분배하여 완전한 삶을 보장하였다. 이 면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을 보장하는 예수를 예표한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였다. 완전한 구원의 배분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제사장으로서 속죄를 통해 구원을 이룩한 예수를 예표한다. 포로귀환후 성전을 건축하여 여호와의 종교를 재건하였다. 그리스도를 맞기 위한 준비작업으로서 성전을 건축하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회복시킴을 예표한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받은자로서 메시야의 번역어이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아 메시야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이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이방에 공의를 베푸는 의의 왕으로 세상의 구주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제사장적 왕이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살렘왕 멜기세덱의 반열에 선 왕으로 말하므로 왕이고 대제사장임을 말한다. 메시야에게 왕과 제사장이 합쳐지는 것이 후기 유대교 랍비들의 근본 가르침이며 사도요한이 바르게 증거한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하였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다윗의 자손이면 충분했고 메시야는 하나님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므로 이스라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 메시야는 고난의 종으로 와서 죄를 해결하는 제사장이었다.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지 않고 고난의 종으로 왔으므로 그가 배척되고 또 처형되게 되었다.
구약의 기름부음받은자들은 성령으로 기름부름받은자 곧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왕, 제사장,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을 사전 표상한다. 메시야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인류의 구원으로 죄과 제거와 용서로 이루어졌다. 이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서 예표되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왕권을 세우기 위해 일생 진력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허락하사 그리스도의 왕권에 연결시켰다. 그리하여 다윗이 그리스도의예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조상이 되었다. 혈통으로만은 영구한 나라가 지속될 수 없으므로 메시야의 영원한 나라에로 연결시켰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으로서 참 평화의 왕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받아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제물로 삼아 완전한 속죄 제사를 이룬 제사장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제사장과 제물이 일치된다. 대제사장으로 구원자가 되었다. 현금 종교신학에서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고 구주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설립자들에게 타당하다고 말한다.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유일한 사건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신인 연합이 다 가능한데 예수에게서 구현됐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기독교를 근본에서 허는 일이요 하나님의 성육신 자체를 허는 일이다.
인자: 예수 자신의 호칭으로 성육신의 신비를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인자를 자기에 대하여 사용하므로 하나님이 인간으로서 신분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지시한다. 즉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법이다. 인자로서 성육신하여 제2아담임을 함의한다. 인류의 새 조상이 됨을 뜻한다. 인자로 인류의 심판주됨을 많이 강조하였다. 인자의 유래. 본래 시8:4는 메시야적 의미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지칭함이 표현되지 않았지만 70인경이 메시야적으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수난받고 승귀하힌 그리스도의 예언이 되었다. 에스겔서는 그 전체로 인자가 중심에 선다. 하늘에 계신 인자가 예비되었다. 이 인자에게 심판이 위임되었다. 단 7:13-14는 인자가 구속주로 하강함을 예시한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과 갖는 가장 친숙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썼다. 성령의 특별 공작에 의해 특별한 출생을 표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지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에 의해 조성되고 출생되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격을 표시하기 위해 쓰여졌다. 근세 신학은 이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을 부인한다. 종교개혁 때 세러베투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니므이 영원한 아들되심을 부인하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척하였따. 슐라이어막허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신의식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운다고 하였다. 릿츌도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됨을 거부하고 그의 완전한 윤리 때문에 아들로 호칭. 카알 발트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변증법적으로 하나니의 성육신을 말할 뿐이다. 브룬너도 예수의 영원한 아들의 신분을 거부한다.
주: 교회의 최초의 신앙고백은 주 예수이다. 이것은 신적 대권자, 통치자임을 뜻한다. 또한 주 예수는 주로서의 구약의 야훼와 동등, 동일자임을 지시한다. 예수는 자기가 구약의 여호와임을 지시하기 위하여 의 희랍어역인 를 사용하였다. 부활하심으로 예수가 주로서 천지의 대권을 받았다. 교회의 주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안전하다. 교회는 온갖 핍박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하나님: 예수가 하나님으로 고백되기는 부활 후에서이다.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 성육신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에서 출발한다. 예수는 성육신 전에 영원하신 하나님이셨는데, 성육신하사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요한은 성육신하신 말씀 하나님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바울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라고 고백한다. 그외에도 함의적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지칭한 신약의 본문들이 많다. 니케아 신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 이라고 고백한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 신학은 양성교리를 배척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 본성이면 그의 인격은 인간 인격이고 하나님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제2아담: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살려주는 영이 되어 새 인류를 살려내는 자로 지목되었다. 제2아담은 새 인류의 조상됨을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신령한 백성을 가지시기 위해 그리스도, 제2아담을 영으로 출생케 하사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로 새 인류를 조성케 하셨고 새 인류는 다 영으로 난 자들이다.
주의 종: 주의 종의 칭호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한 칭호이며 이사야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하여 예언된 칭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의 형상을 입어 종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그가 예언받았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 것은 종으로서 일한 것이다.
5. 그리스도의 비하
그리스도의 비하는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와 그 활동 방식과 영광과 권세가 감추어지고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으로서 인정되고 경배받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멸시를 받았다. 그러므로 다시없는 수치요 굴욕이다. 이 굴욕의 상태에서 구원사역을 이루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였고 그의 몸을 우리의 화목제물로 바쳤다. 우리의 죄를 지고, 죽고,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하여 도고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해하여 구원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비하는 속죄와 화해를 위해 이루어졌다. 성육신자체가 비하로 성육신이 비하의 시작이다.
하나님, 창조주께서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을 입음이니 성육신 자체가 비하이다. 종의 형상이 되었으므로 종의 존재방식이 되었다. 19세기 매개신학은 인류가 신화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므로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께 비하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 루터교회 신학도 성육신 자체가 비하가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법을 제정하여 모든 피조물의 존재방식이 되게 하였다. 이 법들에 입법자 wtls이 매이면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견손이고 비하이다. 성육신은 신적 존재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피조 존재의 방식에로 들어옴이어서 존재 자체와 그 표현방식이 구분된다.
피조물의 법에 종속함은 존재 자체는 변하되지 않았어도 그 표현방식은 변화되어 인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비하의 주체. 루터교회에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육신자체가 비하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 곧 신적 위격이 인성을 입었으므로 비하의 주체는 신격이다. 그리스도가 피조물의 형상을 입었으므로 종의 형상이 되었으니 이것이 비하이다. 여기에 신성의 비수난성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본성은 고난에종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피조물을 입으신 것은 다 비하이다. 본성적 수난은 아닐지라도 위격적 감수라고 해야 타당하다.
고난의 생이 그리스도 비하의 두 번째 단계이다. 고난의 생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계속되었다. 이 고난의 생은 의의 성취여서 우리의 의가 되었다. 그러므로 고난의 생도 우리의 구원사역으로 합당하게 다루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죄악 아래 사심.
첫째는 외로움을 당했다. 사람들 가운데서 홀로선 사람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기도할 때 홀로 감당해야 했다. 가야바의 법정과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홀로 서서 자기 증거를 해야 했다. 외로움의 극치는 십자가상에서 당한 버림받음이다. 제자들도 도망갔고 따르던 무리들도 흩어졌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질고가 더했고 그리고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죄인으로 죽는 예수의 얼굴로부터 하나님께서 돌이키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처럼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은 인류가 하나님과의 절연에서 오는 외로움을 회복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외로움 감당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므로, 예수 이후에는 모든 일을 혼자 당해도 외롭지 않게 되었다.
둘째로 수치를 당했다. 수치를 당하므로 인간이 자기 가치를 부인받고 자기 존재 근거가 흔들리므로 인간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수치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으므로 반복적으로 수치를 경험하였다. 나사렛에서 처음부터 배척을 당하였고 지도자들 곧 바리새인들, 서기관과 제사장들의 배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백성들이 다 예수를 배척하였다. 처음에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야로 믿고 따랐지만 예루살렘 입성 후 그 기대가 무너져 내리자 실망하고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충동에 따라 예수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 그러나 예수가 수치를 당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고 회복하여 수치를 제겨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범법자로서 수치를 결코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세례받음. 요한에 의해 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 죄인과 자기를 일치시켜 세상의 죄과를 전가받았다. 구속 중보자로서 정식 죄과를 전가바다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작정되었다. 세상 죄의 전가가 세례에서 이루어졌음을 세례요한이 증거하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죄를 위해 제물이 될 어린양으로 지목되었다. 성령 세례받아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직에 임직되고 선포되었다. 요한에게 세례받고 물위에로 예수가 나올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성령으로 기름부으셨다. 예수 자신도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메시야임을 정식으로 선언하셨다. 성령기름부음으로 성령 담지자와 파송자가 되었다. 예수 이전까지는 성령을 담지한 사람이 없었는데 예수만이 성령을 전유적으로 소유하고 담지자가 되었다. 예수에게 담지되었던 성령이 인류에게 올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의 몸이 깨쳐져서 성령을 내보내야 했다. 예수는 지상 생애 동안에는 성령담지자였으나 부활 후에는 성령파송자가 되었다. 성령파송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이다. 성령담지자가 성령을 보내어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파송으로 그가 이룩한 구원을 인류에게 적용하사 실제로 백성들을 만들어 다스리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성령을 받아 기름부음받은 공동체가 된다.
시험을 받음. 공생애 시작때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다. 이 시험에서 승리여부는 그의 메시야로서 바로 설 수 있는지가 결정되는 계기였다. 마가는 첫 아담의 낙원에서의 생활과 대조시킨다. 아담이 동산에서 유혹자에 의해 시험받았듯이 예수도 광야에서 사단에 의해 시험받았음을 명시하므로 첫 아담과 대비하여 제2아담임을 분명히 한다. 첫 아담의 시험을 이기어 먹는 시험에서 이기고 아담의 죄를 속상하여 회복한다. 두 번째 시험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므로 대리통치자가 되기를 거부하므로 시험에 실패하여 범죄하였다.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도 이미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없이 왕되는 길로 유혹받았다. 세상구원은 세상적 권세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길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므로 합당히 세상 구세주가 되었고, 속죄의 길로 자기의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세 번째 마귀의 시험은 고난로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세인의 이목을 끄는 영웅적 방식을 채택하도록 요구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방식이 아니므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배척하였다.
감람 동산에서의 시험. 누가는 예수가 들어간 곳이 감람산이라고 하여 에덴동산과 대비시킨다. 동산에서의 첫 아당은 아내에 의해 유혹되어 범죄하였으나 둘째 아담은 그의 아내되는 교회가 전혀 개입하지 못하여Te. 그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되도록 촉구받았다. 예수는 제2아담, 곧 새인류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였으므로 첫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사망을 폐하여 그의 의로 많은 인류를 살게 하였다.
율법준수, 성취. 예수는 모든 율법의 요구에 자기를 종속시켰다. 출생 후 할례받음으로 언약 백성의 표를 받아 율법을 다 담당하셨다. 모든 구약 백성이 바란 율법준수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짊어지셨다. 세례받음으로 예수는 자기를 죄인과 일치시키고 율법을 지켜야 살 수 있는 길이 열림을 분명히 하였다. 새 인류의 대표로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의를 이루었다. 하나남의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니의 법을 지킴 곧 순종하므로 생존권이 허락된다. 이 생존권을 주 예수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므로 획득하였다. 이 생존권을 획득하므로 백성들에게 전가할 의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모든 율법만이 아니라 십자가에까지 이른 순종이었다. 하나님의 법이 정한대로 죄값이 사망이므로 속죄와 함께 죄값대로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예수의 순종 곧 율법준수는 완전한 순종이었다. 따라서 그 의는 완전하여 죄를 속량하고 생명을 이룬다.
6. 새언약의 체결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생의 마지막 시간에 새언약을 제자들과 체결하였다. 그 언약은 그의 피로 세운 새언약이다. 이 언약은 예레미야 선지자로 약속한 그 새언약의 체결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중보자로서 언약을 체결하여 언약 설립자가 되고 또 자기 피로 언약을 세우므로 그 언약의 보증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피를 믿으면 구원에 확실하게 이른다. 이 언약은 구약에서 아담과 체결하고 그후 이스라엘 백성들과 체결한 모든 언약들의 성취이고 완성이다. 따라서 이 언약 체결이 마지막 언약이어서 새로운 언약 체결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구약의 언약들은 짐승의 피로 세운 언약들이기 때문에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언약들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질 언약의 예표로 역할하였다. 신약이 아는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제자들과 세운 이 새언약이고 영원에서 하나님께서 셩육신하실 아들과 이중으로 세운 은혜언약이 있지 않다.
은혜언약은 구원협약에 근거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성육신하실 그리스도를 대표로 하여 선택자들과 맺은 언약으로 제시되었다. 전통적 개혁신학의 이해에 의하면 구원협약과 은혜은약은 내용이 같고 한 목적을 위해 두 당사자 성부 하나님과 로고스 간에 두 번 언약이 체결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삼위 간의 구속 경륜을 구원협약으로 바로 믿으며 은혜언약은 히브리서가 그렇게 강조하는 새 언약으로 바꾸어 말해야 한다. 구약의 피언약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새언약의 피가 이루었다. 즉 완전한 죄용서와 구원을 이루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가 시간에 역행해서 구약 백성들에게 적용되었다. 또한 새언약은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죄과가 용서되어 성령의 임재로 성취되었다. 이 구원에 이름은 성령에 의한 믿음과 회개로 이루어진다. 구속주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 인간은 행함은 구원얻음에서 전적으로 배제된다. 이 면에서 은혜언약이라고 칭할 수 있다. 구원이 완전히 성취되고 적용되었으므로 택자들이 실제로 구원을 소유하고 확신한다.
영생에 이르는 길로 그리스도의 피에 죄의 용서와 의를 설립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의를 붙잡음으로 신형상의 회복에 이르고 영생에 이른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여서 구원에서의 탈락은 불가능하다. 또 전적으로 은혜이므로 인간의 모든 공로나 믿음의 가능성이 배제된다. 새언약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다. 이 성례의 예표였던 구약의 예법들인 할례와 유월절이 폐지되었다. 세례는 새언약의 가담의식이고, 성찬은 새언약 백성으로서의 존속의 방식이다. 새언약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택자들의 구원의 창시자가 되사 확실하게 백성을 회복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홀로 구원자가 되시어 하나님 단독으로 구원주로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7.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구속은 두 방면으로 성립한다.
첫째는 팔리운 어떤 것을, 그것을 산 사람에게 그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죄와 사망과 율법 아래 매인 사람들을 속량 곧 되샀다. 사내되 종말론적 구원에 이르도록 사내셨다. 첫 언약 때 범한 모든 죄를 속하므로 완전한 구원이 되어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게 하였다.
둘째로, 구속은 원수들에 의해 포로된 자들을 구출하고 그 속박에서 해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해방과 자유에 이르도록 값을 지불하고 사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다. 피흘림이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피로 죄가 속해지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의 죽음. 그의 죽음은 속죄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키신 화해이다. 구약제사가 예표해온 참 속죄제사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될 죄목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자기 증거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으므로 요한의설명대로 이스라엘만을 구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예수가 처형될 죄목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고소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는 세상의 왕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왕임을 그리스도 자신이 분명하게 하였다. 로마의 반역자로서 죽게 되었으므로 극악한 수치의 죽음인 십자가 처형에 이르게 되었다. 나무에 달렸으므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로서 죽은 죄인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악한 사형이었다. 그리스도가 받은 저주는 죄인으로서 받은 저주여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우리 대신 죽은 죽음이다. 십자가의 죽은은 예수의 전존재가 당하는 큰 고통이었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음이 얼마나 무서운 멸망인 것인가를 그리스도의 죽음이 밝힌다. 예수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어서 사망이 확인되었다. 하나님의 작정대로 예수의 죽음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화해 제사이며 속죄제사이며 대리적 속죄이다.
첫째, 십자가의 죽음은 화해제사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간의 언약 파기로 하나님이 입은 피해를 보상한다. 즉 죄에 의한 사망의 법을 피와 죽음으로 해결한다. 죄를 용서하여 범죄의 자리에 의를 세움으로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셨다.
둘째로, 십자가의 죽음은 속죄제사이다.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로 작정하셨다. 속죄 제사로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사 이 구원의 방식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시고 유월절 제사와 성막과 성전에서 속죄 제사가 진행되도록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정하신 속죄제사의 방식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죽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지목된 예수 자신이 흠없는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구약의 제사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로 예수가 자기 몸을 드린 영원한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죄를 단번에 제거하고 완전한 제사를 하였다. 영원하신 성령에 의하여 흠없는 제물로 마련된 예수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피가 죄를 속량하는 속전이 되었다. 피에 생명이 있기에 죄는 생명으로만 속해지는 데 그 피는 짐승의 피여서는 안된다. 성령으로 깨끗하게 된 거룩한 피인 예수 자신의 피로 속전이 되었다. 또한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서 죄를 속하였다. 이 점에서 이삭이 예수를 예표한다. 그는 첫 제사에서 제물이 되고 두 번째 제사에서 제사장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제물이 됨과 동시에 그의 인격으로는 대제사장이 되었다.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영원한 제사를 드려 완전한 속죄 제사를 이루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지상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또한 아론 계통의 제사장이 되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좋으므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 대제사장은 단 한번의 제사로 죄를 완전히 속하였다.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이 된 자기 피를 하나님 앞에 바쳤기 때문에 완전한 제사에 합당하다. 또한 그 제사는 하늘의 성소에서 이루어졌고 그 성소 곧 하나님의 얼굴 앞에 바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열납되어 완전한 속죄를 이루어 이 완전한 제사 후에는 우리가 담대하여져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십자가 죽음은 대리적 속죄이다. 한 의인이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거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리적 속죄이다. 여기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기 보다는 택자들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죽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값을 지불함이어서 죄의 세력이 궤멸되므로 사망이 물러가고 생명이 도입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어서 의의 행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가 제거됨으로 의가 세워졌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가 사망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생명 곧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
구속에 대한 그릇된 현대신학: 슐라이어막허는 구속을 죄와 사망에서의 속량이 아니라 예수가 갖는 무한한 신의식에 신자들을 수납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릿츌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윤리적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기와 교제하게 허락하신다. 칭의는 죄과와 형벌의 제거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아니라 죄의식을 제거하고 우리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한다는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다. 객관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죄인의 주관적 변화로만 보았다. 칼 발트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 신인연합을 통하여 피조물을 하나님의 존재에로 동참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구원은 죄에서의 회복이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에까지 동참하여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또 인간을 교제의 대상으로 지으셨으므로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존재에의 동참을 이룬다 이것이 화해이다. 칼 라아너도 성육신의 목적을 죄에서의 구속이 아니라 인간의 신화를 위해 신적 존재의 분여를 위해서 이루어졌다. 구원은 하나님의 존재를 통보받아 신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가르침을 주장한다. 신화는 성경이 원죄로 정죄한 것으로 그것을 구원으로 보고 있다. 죄에서의 구속은 없어지고 인간의 앙양만 구하는 신학은 배척되어야 한다.
8. 그리스도의 죽음과 지옥강하
그리스도의 사망과 장사지냄: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들의지과를 속량하는 사역이다. 전가받은 죄값을 인하여 만인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었다. 몸과 영혼이 분리된 상태에서도 로고스의인격은 그가 취택한 인성과 인격적 연합을 계속하였다. 이 인격적 연합이 해소되었다면 아버지의 작정하신 언약이 수립되지 못하여 우리는 죄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장례되어 부자의 무덤에 묻히므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였으므로 이사야가 예언한 구속주로서 속죄 제사를 완수하였음을 증명하였다. 예수는 죽음의 상태에 삼일간 머무르므로 죽은 자들의 세계에 속하였다. 무덤의 저주를 우리에게서 제거하여, 휴식의 처소가 되게 하였다. 또 완전한 죽음을 죽으므로 죽음의 실체를 파괴하였다. 그리스도의 신격은 자기의 영환과 함께 하늘에 있었고 그의 몸은 무덤에 있었다. 장례와 무덤에 누음이 비하상태의 마지막 정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해체와 부패를 보지 않았다.
지옥강하: 희랍교회는 지옥강하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과 영혼과 함께 음부에 가서 거룩한 조상들의 영혼들을 해방하여 낙원으로 옮겼다고 가르치며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음부 곧 조상림보로 가서 아무 고통없이 구속의 소망에서 살지만 신직관은 못하는 영혼들을 해방하고 승리자로서 귀신들을 쳐서 그들에게서 영혼들을 탈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러나 구약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 속에서 중보자의 의가 전가되어 구원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시간에 역행해서 구약성도들에게 적용되고, 또 그들의 제사에 적용되어 그들이 구원에 이르렀다. 벧전 3:19,20에서 베드로의 가르침은 그가 영의 권세로 구속사건을 선포하심이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전 우주적 사건이므로 지옥에까지 이 복음이 선포되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혼이 희생제물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버림받은 자들의 자리인 지옥에 갈 수가 없다. 땅아래 곳으로 내림은 지옥강하를 뜻하지 않고 성육신 강하와 땅속에 묻힘을 뜻한다. 개혁신학에 의하면 지옥강하는 그리스도가 그의 영혼으로 지옥에 친히 감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극치가 땅에 묻힘을 말한다.
9.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장사 이후의 비하에서 승귀에 이르는 과정이다. 부활이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으로 확정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인류의 대표가 부활하므로 사망을 멸하고 생명의 새 세상이 창조된 것을 뜻한다. 그의 부활로 인류가 새인류가 되며 마침내 온 창조까지 변화에 이를 것이다. 부활은 재창조의 시작이다.
부활의 근거. 그리스도가 인류를 대신하여 죽어 죄값을 지불하므로, 죄의 세력이 궤멸되므로 죄가 더 이상 죽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그의 죽으심으로 죄를 제거하였으므로 사망이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 그의 죽음은 죄을 위한 의의 행동 곧 순종이었으므로 부활에 이른 것이다.
부활자.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체가 합쳐져서 천상 곧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살 수 있는 영체로 부활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인류의 머리로 부활하므로 우리의 부활을 결정하고 보장한다. 그리하여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다. 그의 인성은 하나님의 현시기관이 되었다. 피조물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단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몸과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삽자가에 못막히고 장사된 그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비하상태를 벗고 하나님으로서의 존재방식에로 되돌아감이므로 승귀의 첫 단계이다. 루터교회는 지옥강하를 승리의 행진으로 보기 때문에 승귀의 첫단계를 지옥강하로 친다.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 옥에 갇혀 있는 구약 백성들을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육이 분리되어 있어서 죽은 자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아직 승귀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에의 복귀이다. 루터교회는 부활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와 전지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인성이 신화되어 편재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육신의 부정이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을 정복하고 새 생명을 도입하여 생명의 주가 되었고 천지의 대권을 받은 주가 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로 구약의 여호와의 칭호인 주를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부활의 권세로 인류를 새 인류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마침내 모든 창조를 변화시킬 것이다. 지금은 중생의 방식으로 새 인류를 만들지만 종말에는 부활의 권세로 새 인류를 완성한다.
부활후 40일. 부활자는 옛 세계의 질서에로 회복되신 것이 아니고 새 세계의 거주자로 오셨다. 그러므로 몸과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해도 이전의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 이제 부활자는 옛날 세계의 질서로 돌아오신 것이 아니고 새 세계의 질서에로 돌아오셨으므로 이 옛 질서의 세계에서 항속적으로 살 수가 없었다. 따라서 부활의 필연적 귀결은 승천이다.
그리스도의 승천: 승천은 부활자가 신인위격으로서 하늘로 장소적 이동이며, 상태의 변화도 포함한다. 부활자가 부활자로서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도, 그의 영광 때문에 거꾸러지는 그런 영광은 아직 현시하지 못했다. 신인위격이 완전한 신적 영광에로 복귀하신 것이 승천이다. 승천은 이처럼 상태의 과격한 변화를 동반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늘에로 그의 인성과 함께 가심이다. 루터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완전한 상태 변화 곧 인성의 신화로 이해한다. 일부에서는 장소적 이동도 인정하나 신성의 전달된 속성을 완전히 활용하여 편재와 전지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인성은 편재하지 못하며 전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신인 위격이 하나님으로서만이 아니고 인성을 가짐 곧 몸으로 하나님의 신적 영광 곧 하나님의 보좌로 장소적 이동을 해가심을 뜻한다. 승천으로 그리스도가 가신 곳은 하나님의 보좌 자체이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타나사 속죄를 보고하므로 속죄를 완성한다. 또한 승천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다. 보좌우편은 하나님의 통치의 자리를 말한다. 하나님으로서는 천지의 통치를 계속하셨지만 중보자의 위격으로 곧 인성을 입으신 분의 신분으로 천지의 대권을 받아 천지를 다스림을 뜻한다. 통치의 시작은 성령을 보내심이다. 우리에게 파송된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사역으로 획득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우리에게 올 수 있게 되었고 승천으로 성령을 파송해야 오실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육이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우리의 육이 하나님의 보좌앞에 가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의 구원의 확실한 보장이며 우리 인성이 하나님 앞에 갈 갈이 열림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의 죽음 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갈 길을 열었다. 그의 육체를 통하여 열어놓으신 그 길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다. 그리스도의 육체로 인류의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구속을 이루시지만, 또 그 육으로 하나님과 인류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 인류와의 연합을 위해 새 예루살렘성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다. 즉 하나님이 새 인류에게 오셔서 충만히 거하신다.
보좌에 앉으심(왕으로 다스림): 보좌에 앉음은 중보자의 위격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보좌에 앉음이 바로 왕직의 수행이고 성령을 보내심이 중보자로서 통치의 첫 번째 큰 사역이다. 성령을 보내심으로 자기의 구속을 적용하여 백성들을 조성하시고, 그 백성을 다시른다. 주의 재림시까지 교회가 존속하여 주를 맞게 되도록 교회를 조성하시고 다스리심이 그의 통치이다. 이 통치는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통치이다. 또한 성려으로 조명하시므로 교회를 진리, 곧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이해하게 하신다. 이렇듯 자기의 백성들을 성령의 조명에 의해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모든 세상을 다시리시고 역사를 주재하신다. 그가 역사를 주재하고 진행시킬 뿐 아니라, 역사를 종결시킬 것이다. 역사의 주이시고, 천지의 대 주재이시다. 역사진행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목표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주재하신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다 완성되었을 때 재림한다.
재림: 전통적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승귀에 재림을 포함시키나 재림은 승귀의 한 단계로 볼 것이 아니고 구원자의 구원완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원을 완성하고 악을 해소하여 역사를 종결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재림은 중보자의 통치완성이다. 이것은 통치권의 포기가 아니라 은혜의 통치에서 신적 통치에로의 전이이다. 또한 역사의 주재자로서 역사를 마감함이다. 악을 완전히 소제하심으로 더 이상 사탄과 지옥의 권세들이 악을 행사하지 못한다. 의가 거하는 새 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도입하여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신다. 이렇게 하여 모든 구속 사역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다 이룬다.
10. 그리스도의 삼중직
왕, 제사장, 선지자의 삼중 직임은 하나님의 형상인 첫 아담에게 지워진 직분이다. 그러나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백성되기를 거부하므로 그에게서 이 삼중직이 박탈되고 상실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제2아담으로 세워지고 아담에게 부여된 삼중직을 수행하였으므로 그에 의해 합당하게 이 직임이 회복되었다. 이 회복이 새 인류에게 전이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 나라의 왕, 제사장과 선지자의 삼중직이 새 인류에 의해 수행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그리스도가 선지자되심은 그가 모든 신계시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되었다. 또한 구원의 길을 가르쳤다. 그리스도 자신이 구세주이고 구원을 위해 고난의 종으로 죽으므로 속죄를 이룰 것을 가르쳤다.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율법이요구하는 참된 의가 은혜로 구원 얻음임을 가르쳤다.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조명하여 지성과 심장으로 진리의 가르침을 바라고 그 가르침에 순복하게 한다. 이 직임은 승귀상태에서 계속하신다. 모든 구원진리를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친히 이루셨다. 제2아담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바르게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미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고 성취될 것임을 밝혔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다. 또한 구원지식뿐 아니라 세상적 지식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로 성령을 통하여 지식에 이르게 한다. 모든 성경계시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의 해석과 약속으로 종결된다. 그리스도 해석 후에 더이상 성경 계시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예언의 성취이고 완성이므로 그의 출현 후에는 새로운 계시나 예언이 필요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왕직: 그리스도의 통치가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가 피흘려 백성을 속량하여 자기의 나라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임직됨으로 시작한다.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아 그리스도로 세워지므로 새 시대, 구원의 시대, 메시야 시대가 열렸다. 죄의 제거로 성령이 오사 타락한 인류를 새 인류, 새 백성이 되게 하였다. 성령이 구속된 백성에게 오사 내주하심이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인류에게 오시는 일은 오순절의 반복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번 오신 성령이 새 인류와 함께 영구히 거하신다.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는 영으로 다스림이다. 성령파송이 그리스도의 왕권의 행사이다. 성령을 보내사 자기의 구속을 적용하여 백성을 삼으신다. 그리고 말씀으로 역사하사, 즉 말씀의 법을 좇아 영으로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은혜의 통치이다. 인 은혜의 통치는 각 개인에게서 죄의 제거로 성령오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좇아 우리로 살게한다. 그의 통치는 사람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부름으로 시작하고 심판으로 진행된다. 부름받은 자들은 성령의 내주를 허락하사 진리와 생명에로 인도한다. 교회를 보호하여 시허모가 유혹에서 지킨다. 이렇듯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의 영역이다. 또한 하나님의 법이 지켜시즌 사회가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영역이다. 죄악이 제거되고 그리스도의 법이 각 사회 영역에서 지켜지면,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중보자의 통치가 종말에는 직접적 신적 통치로 바뀐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구원의 완성이 된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구원을 완성을 위하여 악을 완전하게 소제함이다. 이 심판 후에 종말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해진다. 이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로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권은 우리가 확대한다. 그리스도의 통치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므로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법이 시행되게 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진보시킨다. 사람의 힘이 아니고 복음의 권세로 배겅들이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살게 하므로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넓히고 확립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한 왕권이다. 그리스도의 왕권행사 이후에는 세상 권력이 신적 성질을 가질 수 없고 세상의 어떤 세력도 궁극적이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직: 그리스도는 그의 이룩한 구원을 계속해서 성령으로 적용하고 그 백성들을 위해 도고하신다. 그리하여 그의 구속이 확실한 구원이 되게 하신다. 구속의 적용이 소명이고 사죄에 대한 칭의이다. 이일은 인류 역사의 끝까지 진행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직 수행은 구약의 모든 제사의 완성이므로 새로운 형태의 제사나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11. 그리스도의 구원
죄용서: 첫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나님의 백성되기를 거부하므로 죽음에 이르게 작정되었다. 반역한 인류는 처음 반역을 계속하여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생활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들의 삶은 모두가 죄이었다.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이 도기 위해서는 이 반역과 그 후의 좌가 속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의 법이므로 속량되는 길은 생명에 의한 속죄, 피흘림뿐이다. 제2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의인으로서 죄값대로 죽어 계명을 순종하므로 의를 구성하여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다. 예수의 피가 사람을 죄에서 해방하였다. 죄가 용서되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므로 인간의 존재목적을 이룬다.
의의 선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죄만 용서한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의를 선사하였다. 의는 하나님 앞에서 생존권인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획득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의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새 인류의 머리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그 의를 선사하셨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인데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에까지 이른 순종으로 모든 계명을 다 성취하셨다. 십자가의 죽음 곧 예수의 피흘림을 자기들의 구속으로 믿는 자들이 의를 얻어 구원에 이른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 때문에 죽었고 죽음의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의 죽음은 정당한 것이 되어서 의로 여겨질 수가 없다. 그 죽음이 정당화되려면 그가 부활해야 한다.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서 정당화한 것이다. 그의 죽음이 부활에 이르므로 죄가도말되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살게 되었다.
영생의 선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의가 된 자들은 창조주 앞에서 살게 될 생존권을 허락받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는 자들이 영생에 이른다. 그의 죽음과 피흘림으로 죄과를 제거하고 의를 세워 많은 사람들을 의인으로 만듦으로 영생을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있고 그의 구속으로만 회복되었다. 영생에 이르는 단 한가지 조건은 이 생명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아들들이 됨: 반역하여 창조주를 하나님으로 섬기기 거부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종과 백성이 아니라 아들들로 삼기로 하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 때문이다. 아들들로 삼으셨으므로 아들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아들의 영 곧 성령을 보내사 아들들을 삼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상속에 동참하게 하셨다. 아들들은 또한 종들의 섬김을 받는다. 천사들의 섬김을 받는다. 구원만 받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로 아들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의 영광의 몸에로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영과에 온전히 동참하게 하실 것이다.
부활을 보장함: 예수 빋는 자들을 아들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약속하셨어도 이 모든 것의 성취는 부활로 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바로 부활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부활이 이루어지도록 구원주가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구속된 자들에게 부활의 보증을 주셨다. 신자들의 부활의 보증이 바로 우리 마음에 보내신 성령이다.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 몸을 살리실 것이다.
창조의 변환: 인류의 반역으로 창조가 저주되었다. 만물이 부패와 해체에 굴복하게 되었다. 사람의 죄는 사람들만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자체도 해체되게 하는 역사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인류를 구속하였지만 그 구속으로 창조도 변화되어 하나님의 구속에 동참하게 하셨다.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히 나타날 때 창조도 합당하게 그에 상응하는 변화와 갱신을 겪어 새인류의 거소로 세워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류와 모든 창조를 다 포함하므로 완전한 구원이 된다.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성취되고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