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뺏기 우리 일행이 날이 훤하게 밝은 시간에 차를 세운 곳은 대전(大田)이었다. 운전사도 지쳐 있었고 우리들도 긴장이 풀려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에 두어 시간이라도 쉬었다 가자는 의견이었다. 수첩이 없어서 전화국의 안내를 통해 겨우 찾아낸 녀석은 성균이었다. "우아, 너도 사람 놀래킬 때가 다 있구나." 오랜만에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임마, 우선 최고로 안락하게 쉬고 싶다. 느네 회사 찾아가서 콜라로 목욕부터 할까 생각 중이다." 싶으면 와라. 한 트럭만 쏟아 부으면 이가 갈리겠지." 성균이는 콜라회사의 대리점을 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학교 졸업하고 다른 녀석들은 취직 못할까 봐 전전긍긍할 때 이 녀석은 아버지를 잘 만나서 직접 사장 노릇을 시작한 녀석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사귄 녀석이지만 뼛골도 단단하고 용심이 있어서 쉽게 친해졌었고 졸업식장에서 대형 트로피를 안고 축하 퍼레이드를 할 때 앞장을 서 준 녀석이었다. 성균이네 집은 대전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접경 지역이었지만 서너 번씩이나 찾아가 귀한 집 아들 친구 노릇을 단단히 하고 온 경력이 있었다. 성균이는 양조장집 외아들이었다. 떡먹듯 했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푸짐하게 살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술 만드는 회사가 대형으로 생기면서 사양길을 걷게 된 양조장이 거덜이 나긴 했지만 살던 흉내가 있어서 제법 시골 유지 노릇을 하는 성균이네 집에서 우리는 막걸리로 목욕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무지하게 커다란 막걸리통 속을 들여다본 내가 물 타지 않은 맑은 술에 취한 호기로 성균이에게 물었다. 양조장집 외아들로 살면서 한번이라도 대형 술통에 들어가 목욕을 해 봤느냐고 물었다. 녀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녀석에게 사내로 태어나서 그 정도의 호기 없이 왜 살았느냐고 따졌고 녀석도 술김에 지금이라도 술통에 들어가 우리는 옷을 입은 채 구두만 벗어 놓고 술통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람들이 뛰어오고 우리들은 강제로 끌려 나왔다. 성균이 녀석은 그날 밤 늦게까지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내 잘못까지 용서를 받는 고역을 치르고 말았다. 녀석이 콜라 대리점을 경영하면서 시간 있을 때마다 내려와서 이번에는 콜라로 목욕을 한번 해 보자고 떠들었지만 그럴 기회가 한번도 없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편히 쉬면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싶었다. 고바야시의 입을 한 시간이라도 빨리 열게 하여 전모를 알기 위해서도 조용하게 쉴 곳이 필요했다. 장인복이와 지애의 공통적인 의견은 바닷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미 철수를 채로 이쪽 소식을 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라고 했다. 거창하게 한국 내에 신민회의 조직이 침투한 것처럼 떠벌린 것은 연극에 불과했으며 나를 같은 편으로 만든 뒤에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전자장비와 컴퓨터 장비도 실험 케이스로 들여왔을 뿐이라고 했다. 당분간은 안심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은밀하게 숨어 지낼 곳 좀 수배해라." "사고 쳤냐?" "여자 한명 데리고 튀었는데 별수 없잖아." "그럼 온천 쪽으로 골라 주랴?" "여자의 직전 애인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는데 온천엘 어떻게 가냐?" "너도 지랄병할 때가 있구나. 다혜 씨는 어쨌냐?"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냐. 우선 만나자." 녀석은 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정말 총알처럼 달려 나왔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 녀석들은 언제든지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시쳇말로 발바닥이 안 보이게 달려와 주곤 했었다. "어떤 여자야?" "생긴거 보면 알잖아." 지애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랄병할 만큼 생겼다. 어떤 놈은 염복이 터져 쩔쩔매고 어떤 놈은 여자 기갈이 들어 짜고 앉았고...... 세상 참 공평해서 좋다." 성균이는 결국 내가 여자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라 일본인 고바야시의 입을 열게 하고 일행이 쉴 수 있는 곳을 찾는다는 걸 알았다. 성균이가 찾아낸 것은 어떤 부잣집의 별장이었다. "이왕이면 자동차도 빌려 다구." "콜라도 한 트럭 보내랴?" "나중에 내가 얼마나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헌신 봉사를 열나게 했는지 알 거다."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얘기해라." 우리 일행은 성균이가 정해 준 별장으로 이동했다. 젊은 애들은 온천 쪽으로 보내 연락할 때까지 편히 쉬도록 일러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인복, 운전사와 나 그리고 고바야시, 이렇게 다섯 사람이었다. "웬만해서 입을 여지 않을 거라는 건 각오해야 합니다." "내가 장총찬입니다. 열게 할테니 두고 보십쇼." 장인복은 고바야시가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몹시 초조해 했다. 고바야시가 자해라도 하는 날이면 일본에 있는 자식을 구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나에게 기억시키려고 애썼다. 고바야시의 혈을 풀어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더니 변한 상황을 짐작한 듯 가볍게 웃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제법 야무지게 우리 말로 물었다. 내 말에 고바야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애와 장인복이를 훑어 보았다. "우리는 잡혔어요. 지금 장총찬 씨네 부하들이 완전히 에워싸고 우릴 감시하는 데다 배는 침몰됐어요. 전자장비와 컴퓨터 기기도 모두 압수됐구요. 우린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털어 놨어요. 고바야시도 살아남는 길을 선택하길 바래요. 상황은 절망입니다. 오죽하면 우리가 손을 들었는지 아시겠죠?" 지애가 이렇게 거들었다. "정말입니까?" 못 믿겠다는 듯이 장인복이에게 물었다. 장인복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바야시, 삽시다. 살 수 있어요.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고바야시, 내 얼굴을 똑바로 봐라. 내가 장총찬이란 사람이다. 너도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난 한다면 하는 놈이다. 내가 묻는대로 솔직하게 털어만 놓는다면 살려는 주겠다. 그러나 시시껄렁하게 나오면 너를 다시 일본으로 팔아넘기겠다. 넌 일본에 가서 처절하게 죽게 될 것이다. 네 동족의 손으로. 선택은 네가 해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사내다. 더 설명하지 않겠다. 네가 할 얘기가 있다면 지금 해라. 네가 우리 말을 유창하게 한다니 다행이다. 네 정체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미스 민이나 장인복 씨나 모두 조직에서 이탈하기로 결심을 했다." 내 말이 끝나자 고바야시는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내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연락선은 어떻게 됐죠?" 고바야시는 지애에게 물었다. "배는 침몰했어요. 우리 쪽은 모두 투항했고요. 사실대로 다 얘기 하는 길밖에 이제 남은 게 없어요. 어차피 실토할 수밖에 없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처신하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고바야시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그리고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도요. 지금껏 쌓아 올린 걸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순 없잖아요." 고바야시의 표정은 난감한 듯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입을 열면 나와 내 가족은 몰살됩니다. 그러나 내가 입을 다물면 나 한 사람만 죽습니다. 나는 신의를 가진 선택할 겁니다." 고바야시의 입에서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고바야시, 당신과 당신 가족이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내가 비밀만 지킨다면 당신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고 당신 가족들도 살 수 있다. 당신이 원한다면 여기서 살 수도 있다."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시시한 단체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 하나쯤은 살릴 수 있다.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내가 일본에 잡혀 가는 방법이라도 불사할 수 있다. 이건 당신 입을 열기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실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혈을 짚어서 입을 열게 할 수도 있다. 내 전체를 미워하지 않는다. 더구나 개과천선하는 자를 미워하진 않는다. 나는 당신의 혈을 짚고 고통스럽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어쩔 수 없는 사실을 듣고 싶진 않다.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당신 가족이 불의에 의해 몰살당하는 걸 보고 싶지도 않다. 비록 내가 가장 미워하는 민족일지라도 말이다." "나를 살리려는 이유가 뭡니까?" "너희들의 음모를 알고 싶다.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이 다시 한국을 지배하고 싶어한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신 못차리고 넘어가는 게 더 큰 문제이지만...... 나는 당신 입이 아니더라도 사실을 밝히고 말겠다. 당신은 쓸데없이 희생자가 되지 해결되지도 않지만 우리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내가 당신을 살리고 싶은 이유는 당신이 희생당하는 것도 원치 않을 뿐더러 우리가 똑같이 최후의 진리를 생각해 보고 싶어서다. 남을 아프게 하면서 잘 사는 게 진정한 행복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거다." "내게 시간을 주십쇼." 고바야시가 괴로운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바야시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지애도 고바야시의 손을 잡았다. "고바야시, 우리 모두 살아야 돼요. 죽으면 그만예요.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잖아요? 당신은 역사에 이름이 남지도 않아요. 그리고 암살 위협 속에서 무슨 진리가 있으며 그게 무슨 일이지만 내 생각엔 살아남는 것이 현명한 것 같애요. 우리는 고바야시 편예요." 지애의 말에 고바야시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나가 있어요. 단둘이 있을 테니까. 어서요." 나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람들이 방에서 나가고 나자 고바야시는 두려운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최후의 선택이다." "차마 내 입으로, 내 정신으로는 입을 못 열겠습니다. 그러니 혈을 짚어서 고통스럽게 해 주시죠. 나도 무슨 핑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고 싶어요. 이대로 죽을 순 없잖아요." "차라리 그게 편할 거다. 사내로 사내라면 나도 싫으니까. 꽤 고통스러울 거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고바야시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단련된 몸은 아니었지만 강건한 신체조직을 가진 자였다. "혀를 깨물고 죽을 수도 있다. 난 당신을 참담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게 내가 베풀 수 있는 최후의 아량이다. 당신 같은 사내에게 차마 할 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고 싶습니다." "좋아." 혈을 짚었다. 아까처럼 잠들게 하는 혈이 아니라 오장육부가 모두 뒤틀리고 꼬인다는 혈이었다. 이런 고통은 참아 낼 수 있는 사내는 아직 보질 못했다. 그런 나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무초 스님께서 싶었다. 아무리 내공으로 견디어 보려고 해도 처참한 고통을 헤어나올 수는 없었다. "으으으으......" 고바야시는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가며 신음을 내질렀다. 소리도 크게 지를 수 없는 고통이었다. 고바야시의 몸은 꼬이기 시작했다. 나는 시계의 초침을 세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그렇게 철저하게 뒤엉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고바야시는 자지러졌다. 숨이 탁탁 막혀 금세 숨을 놓을 것 같았다. "말하겠다면 풀어 주겠다." 정확하게 삼십 칠 초만에 고바야시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진땀이 배어 나와 금방 사우나탕 안에서 나온 사람처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는 혈을 잡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겠습니다. 대신 약속을 해 주십쇼. 비밀을 지켜 주고 내가 살 수 있도록 조치를 해준다면......" "내가 장총찬이다. 목을 걸겠다." "믿겠습니다." 주전자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벽에 기대 앉았다. 땀을 닦으며 고바야시는 피식 웃었다. "지옥에서 금방 나온 기분입니다. 그렇게 지독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믿어라. 너만은 살린다." "얘길 시작하지요. 나도 사냅니다. 하려면 까놓고 합니다." "고맙다." 고바야시는 다시 주전자 물을 벌컥벌컥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형제에게 비밀을 털어 놓는 것은 우리 율법에도 용서가 됩니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님 같은 사람을 알게 된 게 기쁘고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 의형제는 무덤까지 지켜집니다." 나는 잠깐 사이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맹랑한 일본 녀석과 의형제를 맺는다는게 당혹스러웠다. 일본 녀석을 동생 삼는다는 건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형님이 허락한다면 얘기를 시작하고 그렇지 않다면 못합니다. 이건 제 신의의 표시고 목숨을 건 맹세입니다." 고바야시는 명색이 야쿠자의 나는 녀석을 믿기로 했다. 의리란 국경을 초월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좋다." 고바야시는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한 뒤에 내 발등에 입술을 댔다. "이젠 됐습니다. 형님이 궁금해 하시는 것부터 물어 보시면 숨김없이 이 동생은 얘길 해 드리겠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열살 가량 더 먹은 녀석에게 형님 소리를 들었고 깍듯한 동생의 예를 갖추었다. "너를 믿는다. 아는대로 죄다 얘기를 해라. 그 편이 우리 의형제의 신의일 것 같다." "좋습니다. 형님, 물 좀 더 마시겠습니다. 워낙 지독하게 혼이 고바야시는 아직도 땀을 닦으며, 주전자째 물을 마셨다. 단단히 경을 친 것 같았다. 그렇게 된 혈을 짚이고도 쉽게 풀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은 넘는 사람이 분명했다. "시작하지요." 발음은 아직도 일본식 어투가 들어 있어서 명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말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본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세계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 하수인이었으니 확실한 얘깁니다." "침략 전쟁? 일본은 형식이겠지만 무장도 하지 않았잖나?" "아니죠. 속으로는 만반의 준비가 됐을 겁니다. 내가 듣기로는 1987년이면 커버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겠다는 건가?" "이젠 이차대전식의 전쟁은 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전쟁을 한다는 건가?" "새로운 전쟁이죠. 현대는 경제전쟁입니다. 경제속국을 만들기만 하면 어느 나라든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친일 경제, 즉 친일파 경제인을 밀어주고 일본 상품을 무한정 소비시키는 계획이죠." "그렇게 속아넘어가는 나라가 있을까?" "많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친일파 정치가를 후원하게 되죠. 정치와 경제만 흔들 수 있게 되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일본에 유학 가기가 아주 옛날엔 미국에서 한국의 유학생을 장학금도 주고 편의도 제공해 가며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 그 일을 일본이 하고 있습니다. 결국 장학금을 받고 편의를 제공받으며 공부를 한 유학생들이 돌아온 뒤에 친일적인 사고방식을 하게 되고, 그렇게 유도를 하겠지요...... 십여 년이 흐르는 사이에 그들은 알게 모르게 이 나라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고...... 결국 일본편에 선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경제나 정치나 문화 예술계 종사자들이 그렇게 돌아서면 그때는 속국이나 사실 다름이 없는 거지요. 옛날처럼 총독을 두고 총칼로 다스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지만 경제나 정치나 문화 예술을 거머쥐게 되면 전혀 눈치 채지 않게 마취된 뒤에는 아무리 빨라도 수십 년을 지배하게 되지요. 총칼로 빼앗기면 독립운동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엔 보통 어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내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고바야시의 입을 통해 나열되는 얘기는 상당히 아픈 것이었다. 그걸 장인복이나 민지애도 새로운 침략 형태라고 표현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새로운 전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치고, 어째서 나 같은 한량이 필요할까? 나는 전혀 그런 구상에서 쓸모 없는 놈 아닌가?" "아니죠. 상당히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납니다. 이런 문제를 형님이 그렇다치고라도는 표현을 쓴다는 건 말이 미래를 흔들려는 음모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긴지 알겠다. 내가 왜 그 음모에 필요한지 궁금하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경제나 정치나 문화 예술을 잠식하려면 먼저 여러가지를 실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신문의 광고를 자세히 보시면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판매하지도 않는 여러가지 일본제 기계류나 전자제품의 광고를 보게 됩니다. 어째서 판매하지도 않으면서 비싼 돈을 주고 주기적으로 광고를 하겠습니까? 한국인들 머릿속에 일본상품을 잠재적으로 심어 놓기 위해 투자를 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가 형님 같은 사람을 잡는 겁니다. 일본 상품이 한국산보다 월등하다는 건 아직은 인정해야 합니다. 집에 가보면 일제 전자 제품 없는 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물건은 정식 수입품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일본의 지하조직과 한국의 지하조직 사이에 밀수 루트를 연결하고 일본인이 한국에서 활동하는데 보조역할을 시키며 한국의 지하조직을 일본의 지하조직이 통제 내지 관리해야만 새로운 침략전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형님 같은 경우는 물론 지하조직의 책임자가 아니라는 걸 압니다. 그러면서도 형님을 잡으려는 것은 한국의 지하조직을 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게 한 뒤에 그 사람을 일본인이 조종하자는 뜻입니다." "설득력이 약해, 그 정도 이유라면." 내가 이렇게 말하자 고바야시는 고개를 "한국에 일본 학생이 유학을 많이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나요? 그리고 어째서 한국인을 일본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지 아세요? 심지어 일본의 어떤 곳에서는 한국인 교수나 학생들에게 웬만하면 박사학위를 주고 있습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일본에 가서 공부하지 않고 적당히 논문만 만들어 보내면 학위를 붙여 주기도 합니다. 그런 판인데 형님같은 사람을 일본이 쥐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막대한 이득이 따르니까 우선 거절을 하지 않을 거고 한국의 지하조직을 이용하여 친일 세력을 보호하려는 웬만큼 주먹이라는 게 필요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어떤 저명인사가 친일적 발언이나 일본의 이익을 대변했을 때 혈기 있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럴 때 지지자가 필요합니다. 주먹으로든 말로든 말입니다. 그렇게 계속되면 나중에 아예 공개적으로 친일 발언이나 일본 편을 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는 지식인이 늘어 갑니다. 이완용 일파나 소극적 친일파라고 일컬어지는 독립투사들보다 훨씬 나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서고도 전혀 나라 팔아먹었다고 느끼지 않는 무리들이 수두룩 해집니다." "그런 일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더구나 일본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아닙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떻든 잘 살자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유도하기도 쉽고, 경제대국인 일본과 가까운 사람이 잘 살고, 일본 편을 들면 과감하게 거절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금 얘기하는 데 핵심이 안 나왔어. 뭔가 다 얘기하는 것 같으면서, 몽땅 털어 놓는 것처럼 보이면서 진짜 할 얘기는 감추어진 것 같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지 모르지만...... 널 의심하는 건 아니다." 고바야시는 빙긋이 여유있게 웃었다. 녀석의 표정은 내 마음속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녀석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인 실증보다는 예증을 들거나 실감나지 않게 말을 피해 나가기 때문이었다. "나를 의심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너는 너의 걸 의식하고 있다. 이건 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옳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자꾸 내 가슴속에 내 나라를 팔아먹는 게 아닌가 하는, 내 한 목숨 살려고 내 조국을 팔아먹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의적으로 뭘 숨기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좋다, 쉽게 가자. 내가 어떤 역으로 등장하게 되는 거냐?" "전위대죠. 파괴시키고 폭력을 휘두르고 납치나 청부살인까지 하는 총책이죠. 형님에게 수십 억을 써도 그건 금방 되돌려 받습니다. 전자제품 밀수만 해도 금방 본전을 뽑는 판입니다. 텔레비전, 라디오, 오디오 세트, 비디오, 면도기나 시계, 수 있으니까요. 이것만 보아도 지금 한국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말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신민회는 그러면 누구의 조종을 받으며 자금은 어떻게 조달하느냐?" "신민회라면 사실 별것 아닙니다. 신민회는 허울만 그럴 듯한 사회봉사 단체일 뿐입니다.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짱구 돌리는 소수의 멤버들, 우리는 그들을 머리가 좋다고 해서 짱구라고 합니다만...... 그들이 조종하고 있어요. 정치가, 경제인은 물론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까지도 포함된 연구회가 있습니다. 기생관광을 그냥 두고 보는 이유를 생각해 보세요. 일본 국민들에게 한국을 깔봐도 좋다는 한국인은 외화 때문에 약점이 잡혀 그걸 받고 있습니다." 녀석의 말에 나는 피가 거꾸로 튈 것만 같았다.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내 비위를 자구 건드리지 마라." "형님, 좋습니다. 할 얘기는 해야죠." 녀석은 아예 각오를 한 것 같았다. 기생관광으로 우리나라가 얼마쯤 외화를 벌어들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일본인인 고바야시의 눈엔 그것마저도 잔수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어쨌든 한국을 통치했었잖아요. 나는 일본 역사를 배우며 고대에 일본인이 건너가 한국을 지배했고 결국 일본의 작은 집이 한국이라고 배웠습니다. 또 도와 줘서 잘 살게 해 주려고 통치한 걸로 배웠습니다. 아직도 일본 역사책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일본이 통치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노인네들이 아직도 깊은 향수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 여자가 있는 술집엔 으레 일본 늙은이들이 줄을 잇는 것도 그런 것 때문입니다. 일본이 굳이 침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못살고 어려운 동생을 도와 주기 위해 통치를 한 것이며 강제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형님, 내 말이 듣기 거북하더라도 들어 둬야 합니다." 나는 녀석의 입으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은 쉬엄쉬엄 미국이란 나라가 해방 이후에 보여 주었던 예술이 침투를 들먹여 가며 일본의 방법이 훨씬 단수 높은 침투라고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 "네 생각엔 지금 어느 선까지 연결되었고 어느 정도 추진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각계 각층에 고루 손을 뻗쳤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당사자들도 아무런 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매수되었다거나 앞잡이가 되었다고 느끼면 갈등이라도 할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죄책감도 없고 갈등도 없이 그냥 앞잡이와 친일파가 되어 가고 있는 거지요. 내가 들은 얘기 가운데 나까지도 충격을 받은 것은 옛날에 친일파 노릇을 했던 한국의 원로들이 은근히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과 젊은이들, 특히 똘똘한 젊은이들이 잘 사는 일본 모습을 보여 준 뒤에 의견을 물으니까 대번에 일본에 와서 살고 싶다는 반응과 일본을 미워하지 않게 되더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좋아하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 얘기 말고 이젠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하자." "이젠 이해가 됐죠? 형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이해시키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보통 국민들에게 일본이 새로운 침략을 하고 있다고 해 보세요. 믿겠습니까? 미친 놈이라고 할 겁니다." "무슨 얘긴가 알겠다." "각계 각층을 파고드는 데 돈과 미래를 보장한다는 것을 은연 중 보여 주기만 하면 다 넘어갑니다. 그런데 형님 같은 않으면 여러 가지 위험 부담을 안게 된다는 걸 안 거죠. 형님 같은 실력자들이 정신 차리고 있으면 전진 기지나 친일 특공대가 당할 염려가 있는 거죠. 배운 척하고 잘난 척하고 여유있는 무리들, 이른바 지식인입네, 지성인입네, 엘리트입네, 상류층입네 하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보여 주지 않거든요. 입만 살아서 입으로만 떠드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기 마련이죠. 머리통 속에 올바르게 뭐가 들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입네, 엘리트입네 하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두려워하질 않아요. 학위를 주거나 일본여행 정도 시켜 가며 구슬러 대면 그만이라는 판단을 한 거죠. 일제시대의 경험에 의하면 배운 자들은 거죠. 아무리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나 국산품 애용을 부르짖고 밀수의 뿌리를 캔다고 하더라도 소위 가진 자와 배 부른 자와 배운 척한 자들은 여전히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우직한 자들입니다. 농민과 보통사람들은 한번 불이 붙으면 물불 안가리고 대든다는 거죠. 한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을 형님이 장악한 뒤에 일본 편이 되기만 한다면 한국은 일본이 거저 먹을 수 있고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왜 그들이 형님을 악착같이 포섭하려는지 이제 납득이 갑니까?" "간다." "형님을 일본에서 불러들인 것도 사실은 계획적이었고 흑장미나 형님을 도와 준 마음을 테스트해 본 거죠." "음......" 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래서 내가 일본에서 활약한 것들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이구나.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흑장미까지도 신민회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마음을 그렇게 산란하게 만들고 나를 끝까지 보살펴준 흑장미가 결과적으로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네가 얘기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근거를 댈 수 있겠지?" "물증 말입니까?" "그렇다." "내 얘길 못 믿으시는군요. 그럴 만도 않습니다. 일본에 가면 증거를 잡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형님은 일본에 가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납치가 된다면 그때는 정말 복잡해집니다. 그들은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고 형님이 방해를 하면 형님을 없앨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증거없이 어떻게 일본의 간접침략 얘기를 할 수가 있냐?" "그것도 그들의 묘수입니다. 일본 상품이 한국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나면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내 생각엔 지금도 어느 정도 침략을 당했다고 하는 게 옳습니다. 이대로 십 년만 가보세요.어떻게 되겠습니까? 똑똑한 젊은이들이 지금 일본으로 쏠려가고 있습니다. 적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이 자신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외국의 학자들이, 특히 경제전문가들이 일본에서 연구하고 돌아가면 일본파가 돼 버린다는 걸 알았고 그동안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돌아간 뒤에 어떻게 변하는가를 세심하게 관찰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이 일본파가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됐답니다. 한쪽에 대고 저쪽 아이가 너를 이긴다고 했다며 충동질을 하고 다른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충동질을 한 뒤에 쌍방에다 똑같이 내가 도와 줄 테니 마음 놓으라고 일러 놓고는 정말 싸움이 벌어지면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한쪽이 심하게 기울거나 코피가 터지면 그때야 말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꼬마들은 힘 된다는 걸 알게 되고 그래서 힘 있는 아이는 꼬마 대장이나 골목대장 노릇을 오래 하게 됩니다. 국제문제는 이것보다 더 진합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별의별 비열한 방법이라도 다 쓰기 마련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지금 일본 얘기를 내 입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한국이 강대국이 되고 일본이 약소국이라고 가정해 보세요. 직접 침략하기가 어려울 때는 당연하게 간접침략을 하게 됩니다. 물론 나이가 어는 정도 든 사람들, 비판의식이 있고 경륜과 학식과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일본의 허점을 아주 잘 파악하지만 그 사람들도 단기간 체류했다면 역시 친일파가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대부분이 무서운 경제성장과 친절과 깨끗함, 근면성과 평화스러운 풍경, 전쟁을 일으키는 무력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점 등을 들어서 일본에 매료되기 쉽다는 걸 안 겁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그렇게 쉽게 안 될 거다. 더구나 일제치하를 경험한 사람이 아직도 많은 나라다." 나는 이 얘기를 하면서 녀석이 굉장한 깊이로 한국과 일본에 대한 비교를 할 수 있는 저변이 무엇인지 캐내고 싶었다. 적어도 이정도로 세심하게 사회를 볼 수 있으려면 오랫동안 공부를 했거나 그 자신이 교육을 받아 왔을 것 같았다. "그건 형님 생각입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 자동차 속에 일본 노래를 담은 교육받을 때 확인했습니다. 또 요즘 똘똘하다는 젊은이들은 학교 다닐 때는 목소리 높여서 민족이 어떻고 나라가 어떻다고 식민지 사관이 어떻고 떠들지만 현실로 돌아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상품에 빠지고 일본 담배나 일본 오락물에 물이 들어 버리기 쉽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판 능력이란 물질로 쉽게 누를 수 있다는 걸 형님은 모릅니다. 정신보다 무서운 게 물질이란 걸 요즘의 젊은이들에게서 느낄 겁니다. 파이로트 만년필, 소니와 내셔널 제품, 여성지와 다른 잡지들이 일본 것을 베껴먹는 행위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국의 문명이나 문화 예술 분야가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속으로 일본것을 베끼거나 응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광고, 각종 그릇류와 병 모양까지도 일본 것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겉으로 이젠 별로 다를게 없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의 특성이 없어지고 일본 것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분위기가 됐습니다. 심지어 애들 먹는 과자나 껌은 물론이고 라면이나 간장까지도...... 고추장이나 된장까지도 일본식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걸 사람들은 현대화니 발전이니 말합니다. 하다 못해 꽃꽂이며 양초 공예며 한복의 디자인까지...... 주택의 설계나 도시계획이나 책 만드는 방법까지도 말입니다. 국민학교 애들의 책가방 속을 보면 일제투성이입니다. 어려서부터 일제가 좋다는, 그래서 일본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양색시는 부끄러워 하지만 왜색시는 활개를 치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무엇인가 한국의 뿌리가 침식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어 학원에 가 보세요. 외국어 배워서 나쁜건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정신입니다. 일본 유학이 쉬워졌다니까, 일본 책이 흔하니까...... 아무튼 그런 식의 정신, 말하자면 현실적인 이득을 쟁취하려는 계산으로서의 일본파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국산품 애용하자고 떠드는 사람들 집에 가 보세요. 일제 상품투성이입니다. 밥솥 하나 제대로 못 만들면서 엄살만 부리는 국산품 애용 때문에 일본인들이 얼마나 기분 좋아지는지 아십니까?" 가지고 있다. 아가리 닥쳐." 나는 정말 녀석의 얘기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도 녀석이 지적한 일제 상품 선호와 일본의 경제력을 은근히 부러워했고 일본의 젊은이들의 자유와 분방함과 사회적 대우가 은근히 시샘날 정도였었다. 녀석의 말대로 우리는 너무나 일본화했고 일본을 답습해 가고 있고 그래서 은연 중 일본의 힘에 종속되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죄송해요. 내가 아는대로 얘기를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두서 없이 지껄인 겁니다." 녀석은 역시 보통 사내가 아니었다. 내가 화를 내도 쉽게 머리를 숙이거나 기가 죽지 않았다. 아주 떳떳하다는 표정이었다. 제 짓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좋다. 신민회 얘길 해 봐라." "비밀 조직이어서 나도 자세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직속상관이나 몇몇 핵심인물은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인물일 뿐 진짜 뒤에서 조종하는 인물은 아닙니다." "어느 선까지 올라가는 것 같은가?" "명확한 구분은 아니지만 정책 결정의 핵심인물과 경제인, 실질적인 행정 요리가와 기회책임자들이 관여하고 있거나 묵인 내지 동조하고 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형님이 일본의 통치 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면 쉽게 납득이 갈 겁니다. 평화다 사랑이다 하는 건 다 자신이 잘살고 자신이 아닙니까? 일본 땅은 한정돼 있고, 따지고 보면 좁고 자원도 풍부하지 못한 섬입니다. 그들의 의식 속엔 언제고 섬이 아닌 육지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잖겠습니까? 거기다 옛날처럼 직접통치를 하기엔 복잡한 사연이 있고 또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접통치 방식으로 섬나라 아닌 육지를 생각했을 것이고 가장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을 누구라도 생각할 거 아닙니까? 형님이 일본의 통치자이거나 상품을 자꾸 팔아 먹어야 할 경제인이거나 하다 못해 장사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해가 가는 얘기였다. 녀석은 불신받지 않기 위해 나를 설득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이미 그는 일본의 신민회 입장으로 보면 배반자가 된 셈이었다. 결심을 했는지 일본인들의 움직임까지 죄다 털어 놓고 있었다. 나는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메모를 해 가며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번 입이 트이니까 유창한 한국말 솜씨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서슴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참으로 복잡해졌다. 녀석의 말을 다 소화하기엔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아무리 보아도 너무 아는게 많았다. 그만큼 한국의 책임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철저하게 받은 탓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도 떠도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87년도에 전자장비와 컴퓨터 장비가 완료되면 무서운 군사력을 가질 거라는 거냐? 아니면 괜히 힘자랑을 미리 해보는 거냐?" "내가 아는 한 신빙성 있는 얘깁니다. 군사력을 갖지 못하면 일본의 힘은 보잘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가지 군사무기 개발은 불가피한 겁니다. 특히 전자무기나 컴퓨터 무기를 집중적으로 개발하는 걸로 알며 어느 정도 성공을 확신한 걸로 압니다. 일테면 어느 특정 지역만 커버하는 무기가 아니라 전세계를 커버하는 종합 무기라고 생각됩니다." "너는 분명히 일본놈 아니냐?" 나는 녀석이 너무 떠드는 걸 정리해 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일본인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내 조국이 평화를 지키는 나라가 되기를 "너는 아까까지만 해도 간접침략의 선봉장였잖아?" "나도 마음의 갈등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형님을 만나고 또 그동안의 내 의문이 풀리는 계기가 있고 해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 무기는 어떻게 쓰여지는 것이냐? 공격을 한다는 것이냐?" "때론 공격도 불사하겠죠. 그러나 그것보다는 위협무기로 사용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한국처럼 남북문제가 심각한 경우, 또는 다른 힘없는 나라들은 일본의 전자 무기우산을 바라게 될 것이고 그걸 빙자해서 정치인들을 손아귀에 넣어 일본의 의사대로 정책을 결정하게 유도할 겁니다. 미국의 핵우산도 사실은 그렇잖습니까? 설득하려는 게 아니고 현실일 테니까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놀 때 자기 땅을 많이 차지하려고 싸웁니다. 그때 힘센 아이가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는 건 당연합니다. 또 힘 있는 아이는 자신의 힘을 확인하기 위해서 가끔씩 힘 없는 아이들을 패 봅니다. 그래서 힘이 있다는 걸 과시해 둬야 유리하다는 걸 압니다. 더구나 꼬마들이지만 힘 있는 아이가 비슷한 또래의 힘 없는 아이들끼리 싸움을 붙입니다. 정치인이나 경제인, 이른바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과 지식인들, 그리고 문화 예술인들을 움켜쥐기만 한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문제는 아까 지적한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문제입니다." 녀석의 지적이 틀렸기를 바라고 있는 내게 여러가지로 충격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그걸 방지하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고바야시에게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소문이거나 루머일 수 있지만 일본과 한국의 바다 밑으로 터널을 뚫어 안전한 대형 수송로를 만든다는 얘기가 일본에서 끈질기게 떠돌고 있습니다. 이 해저 터널이 완성됐을 때를 상상해 보세요. 기차 타고 서울서 제주도 가듯 일본을 다니게 될 때를 말입니다" 나도 그런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어쨌든 고바야시는 쉬임 없이 지껄였다. 나는 녀석의 여러가지 지적을 들으며 한국인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녀석의 말에 나는 공감하는 부분이 꽤나 많았다. 신민회라는 곳이 어떤 단체인지 모르지만 한국에 대한 연구와 자료조사를 열심히 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간접침략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깊은 조사와 연구를 하고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리라. "너희 조직 말고 지금 한국에 너희와 유사한 임무를 가진 팀들이 꽤 많이 들어와 있겠구나." "그러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 팀처럼 세밀한 계획을 세워서 들어오는 팀은 아직까지는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각 분야에서 정밀조사를 하는 팀은 당연히 행위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예술계만 연구할 테고 어떤 사람은 정치, 어떤 사람은 회사, 어떤 사람은 경제...... 그런 식인 데다가 첩보나 정보 성격이 아니라 그냥 조사 연구이거나 파견 근무이거나 합작회사의 기술 용역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목적으로 온 사람도 많겠지요. 일본의 외국 근무자들은 상당수가 그 근무지의 정보 수집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보다는 무역회사의 주재원들이 보내는 텔렉스가 더 정확하다는 나라입니다. 물론 그들은 주어진 임무대로 상품을 팔아 먹고 원자재를 수입하고 하는 정보를 입수하지만 그런 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하면 세계 각국에서 일본인이 들어가서 자리잡지 않은 곳이 없는 형편이니......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이 무슨 정보를 알지 못하며 무슨 계획을 못 세우겠습니까?" "네 보따리 속에 괴문서들이 많은데 나는 물론이고 일본어를 잘 하는 미스 민이나 장인복 씨까지도 해독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어떤 서류냐?" "친일세력 포섭 명단도 있고 정보 분석도 있고 각종 잡지나 신문이나 방송 출연자들 가운데 일본 편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인사들의 기록과 글 등을 간추린 것도 있습니다. 또 돈으로 우리 편을 만들 수 있는 사람과 박사학위 같은 걸로 우리 편을 만들수 있는 사람, 물건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여행 한번만 시켜 주면 될만한 사람, 놓은 것입니다. 그 문서 속에 형님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내 것은 어떠냐?" "출생, 성장, 학교, 성적, 교우관계, 개인적인 취향, 특기, 성격 등 모든게 있습니다. 분석 자료 가운데 이런 것도 있습니다." "어떤 거냐?" 그 말은 내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분석하고 평가한 자료일 터이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분석을 토대로 그들이 어떤 전략을 세우는지도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일본의 간접침략을 눈치채고 일본의 음모에 속지 말자고 글을 통해서나 강연을 통해 부하들을 시켜 주도면밀하게 사생활을 조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쩌다 화류계 여자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기라도 한다면 즉시 입체적인 취재를 하고 그 상대 여자를 포섭해서 위장결혼을 시킨 뒤에 정식으로 고소장을 제출하게 해서 파렴치범으로 생매장을 시키거나 또는 고소하기 직전에 타협을 하는 겁니다. 일본에 유학을 시켜 준다든지 일본 상품에 대한 판매 이득을 준다든지 해서 침묵을 시킨 뒤에 일본편을 만들어 역으로 일본 찬양론자를 만드는 겁니다." "내가 겨우 그따위 일이나 하는 놈으로밖에 안 뵈더냐?" "더 가관이 있지요. 반일파나 일본의 간접침략을 경계하는 저명인사나 학자나 겁니다. 말하자면 미인계인데 보통 기업인들이나 회사원들이 하는 접대식 미인계가 아니라 교묘하게, 완전히 눈치 챌 수 없게 투입시켜 낚아채는 겁니다. 특히 미모의 처녀들을 투입해서 낚기만 하면 사회적으로 아무리 저명한 인사라고 하더라도 꼼짝없이 덫에 걸리게 됩니다. 앳된 처녀를 농락한 파렴치한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죠. 아직도 한국에는 간통죄가 있고 저명인사가 앳된 처녀를 농락했다고 하면 생매장이 되는 사회입니다. 저명인사들, 덫에 걸린 사람들은 결국 타협하지 않고 못 배깁니다. 형님은 그런 일까지도 하게 될 거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형님이 한국에서 활동한 여러 상황으로 미루어서 그런 인사들을 것이죠." "만약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됐겠냐?" "아마 여러가지 사정으로 거절할 수 없게 엮어 놨을 겁니다. 미스 민 같은 여자라면 공부도 많이 했고 빼어난 미인이며 가정도 부유합니다. 결혼을 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을 수 있고 형님네 가족을 인질로 잡아서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었지요." "그래도 거절했다면?" "없애죠. 당연합니다. 그리고 대타를 구합니다." "대타를 누구로 잡게 돼 있었냐?" "여러 명 있습니다. 김포 넙치, 절로 들어간 제갈공명, 동주파 두목도 있고요. 아예 똘똘한 친구 가운데 사업에 실패해서 돈이 궁한 친구를 쓸 계획도 세웠고, 상품을 기술 지원하는 조건으로 정상급 재벌로 키워 주는 조건하에서 떠맡기는 경우도 고려했었습니다." "치밀하구나." "그 가방 좀 줘 보세요. 재미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나는 말없이 고바야시의 가방을 내밀었다. 고바야시는 뒤적거리더니 한 장의 메모지를 꺼냈다. "이것은 최근에 어떤 보험회사의 사보에 초대석이라고 해서 대신문사의 논설위원이라는 이 아무개 논설위원이 쓴 겁니다." "읽어 봐라." "미국 사람은 미국적인 것을 자랑한다. 영국사람은 영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는다. 물론 유태인도 유태적인 것에 긍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가 긴 민족이나 강대한 나라들은 스스로의 고유한 것에 긍지를 갖고 있다. 그 긍지가 바로 힘이기도 한 것이다. 한데 한국인은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고 있지 않다. 옛날에도 그러했고 오늘날도 예외없이 그렇다. 학교 교육에서도 한국적인 것이 좋다고는 별반 가르치고 있지 않다. 긍지나 자랑은 커녕 한국적인 것은 빨리 없애 버릴수록 좋다는 그런 열등감을 갖는 데 예외가 없다." 고바야시는 여기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별 개 같은 소리 다했구나." "바로 그겁니다. 계속 읽어 드리면 점점 말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면 기분 좋은 말입니다. 한국의 지성인입네 하는 이런 친구들, 더구나 사대일간지라는 신문, 일제 때 싸웠다고 소리치는 신문의 논설위원의 글이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인은 뭣도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한국적인 것도 없고 한국인의 긍지도 없으니 별것 아닌 민족이라는 얘깁니다. 이른바 뭘 좀 안다는 친구들이 이러니 나머지는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이 아무개 논설위원이 쓴 논설이 어느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쓴 논설의 어느 구석에 이처럼 한국인을 무시하는 글이 실리게 되고 그게 쌓이게 되면 한국인들은 나중에 어떻게 내 동족은 보잘것없는 엽전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아무개 논설위원은 숫제 예외없이 그렇고 예외없이 열등감을 가졌다고 했죠. 바로 이것은 식민지 사관에 입각한 아직도 일본의 그늘을 느끼게 하는 식민지 시대의 유물입니다. 일제시대에 한국인의 긍지를 꺾고 한국인의 기상을 줄이고 별것 없다는 식으로 가르쳐 준 허위를 그대로 아직도 믿고 한국적인 것이 예외없이 없다고 믿는 저런 부류가 많아 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의 지식인들이 이렇게만 돼 간다면 뭐하러 직접적인 방법으로 침략을 하겠습니까? 간접침략을 하면 눈치 채지 않게 뿌리를 캐 먹을 수 있는데요.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그래서......" "이러다가 말입니다. 필리핀처럼 미국의 한 개의 주로 편입하자는 주장을 하는 썩어문드러진 지식인과 지도층이 한국에도 안 나오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본의 한 개의 현이 되자고 주장할 놈이 나온다는 말이냐?" "예." "너 뒈지고 싶냐?"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죄다 하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조직원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의 현이나 미국의 주가 되어 버리면 훨씬 살기 좋고 복잡한 일도 안 생길 거라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답니다. 심지어 젊은 애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런 넘어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공작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호의를 베풀어도 일본 신도가 됩니다. 일본편이라고 하기에 너무 지나쳐서 일본 신도라고 합니다. 이 아무개 논설위원 같은 사람들을 낚아채기는 식은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일단 한국이 별볼일 없다거나 우습다는 친구들은 낚아채기 쉽습니다." "기껄여 봐라." 나는 녀석을 차마 때리지 못하고 어금니를 맞물었다. "이왕 시작한 겁니다. 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조사한 것에 따르면 그동안 한국으로 기생관광 온 숫자가 굉장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신민회에서 조사해 여자를 며칠 동안 데리고 잔 그 소감이 어떠냐니까 많은 사람들이 옛날 생각이 난다면서 한국을 통치하는 날이 가능하면 생전에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만약 한국을 통치하게 되면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하니까 한국에 나가 사업체를 하면서 한국 여자를 첩으로 데려다 앉혀 놓고 싶다는 얘기도 솔직하게 하더랍니다. 사실이 그렇거든요. 남의 나라 전쟁터에 가면 그 나라 여자들을 못살게 굴고 욕심 채우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한국이 일본을 침략했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형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본 여자들을 형님은 그냥 두겠습니까?" "더 지껄여 봐라." 내 부릅뜬 눈길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 같았다.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어지러운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녀석은 너무 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물주전자의 물을 마저 비우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탓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네가 너무 자신감에 차 있는 건 싫다. 한국인이 네 생각대로, 네 말대로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다는 걸 말해 주고 싶을 뿐이다." "압니다. 여러 학자들이 일본의 간접침략에 대해 논문을 발표했고 책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도 봤습니다. 의식이 있는 출판사나 학자들이 정말로 명징하게 일본의 문제는 다수의 대중이 별반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소수의 학자나 지식인의 주장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사실은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첨예한 시각으로 씌여진 책들이 상당수 있지만 한국인들이 읽어 주지도 않고 그런 식의 좋은 책을 책답게 생각해 주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은 일본인 입장에서 정말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74년 일본의 수상인 다나카(田中)란 친구가 식민통치 시대의 식민교육을 찬양하면서 그것이 한국인에게 유익한 것이었노라고 지껄인 적이 있다. 그 뒤에도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 녀석들이 많지. 그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넋 떨어진 안전 때문이라고 했다. 제 여편네가 옷 벗어 던지고 화냥질하러 다니는 거 놔두고 남의 여편네 속치마 끝단이 보인다고 지랄한 녀석들이니까 그렇다치고...... 네놈 심보를 모르겠다." 사실이 그러했다. 녀석이 꼬치꼬치 캐고 들어가는 얘기를 듣다 보니 은근히 부아가 돋았다. 내 자신이 너무 모르고 산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 일본 녀석에게 너무 속이 보인 것 같아 약이 오르기도 했다. "제 얘기는 다른 게 아닙니다. 이왕 제가 살기 위해서 형님을 삼은 이상 아는대로 들은대로 다 털어 놓자 이겁니다. 나도 사냅니다." "좋다. 네가 사내라는 걸 인정하마. 우선은 여길 떠나자. 마음이 급해서 도저히 "나는 어떻게 합니까?" "네가 생각해라. 네가 일본으로 돌아가도 살 수 있는 방법을 머리로 생각해서 나한테 알려라. 내가 약속했으니 틀림없이 지키겠다." "내가 살 길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일본으로 연락을 해 봐야 합니다. 그쪽 상황을 모르니까요." "그럼 우선 내가 숨겨 줄테니 쉬면서 연구해 봐라. 자세한 얘기는 계속해야 된다는 걸 잊지 마라. 그리고 행여라도 잔꾀를 써서 빠져 나가려고 하지 마라. 준비해라." "나를 믿으시죠." "믿겠다. 그 방법밖에 지금은 없다. 빼먹은 얘기가 많을 것이다. 내일이고 나는 밖으로 나와 한시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미스 민과 장인복이가 놀라서 물었다. "이 밤에 갑자기......" "마음이 급해서 그럽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여러가지로 심상치 않아요. 올라가서 미루어 놓은 일도 정리해 보고 찾아뵐 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쩌죠?" "장인복 씨께서 책임지시죠 뭐. 하룻밤 편히 쉬시고 내일 고바야시 데리고 올라오시죠." "웬만하면 같이 가겠지만 워낙 몸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몸이 좋을 턱이 없었다. 혈을 되짚혔으니 어려운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풀어 주었다지만 한 번 되게 짚이면 하루나 이틀쯤 푹 쉬는 방법밖에 없었다. "저는 따라가겠어요." 지애가 강한 뜻을 비치며 말했다. "지애도 쉬지 그래." "싫어요. 따라가겠어요. 가면서 드릴 말씀도 있어요." "그러시죠 뭐."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장인복이가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 도착하면 밤 열 두시가 넘을 것 같았다. 지애가 머물 만한 곳이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무작정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나는 지애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 사정 얘기를 했다. 시간이라도 빨리 마무리 짓고 이번 일 때문에 찾아뵐 어른이 있어서 그러니까 내일 같이 올라오는게 어때? 이 밤에 서울 가서 갈 데나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걱정은 마세요. 생각한 김에 말씀이나 다 드려야 저도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그래요." "정 그렇다면 가자구." 나는 장인복에게 여러가지를 부탁해 두고 지애와 둘이 별장을 빠져 나왔다. 자동차는 빌려 타고 가면 며칠 사이에 서울 올라가야 할 일이 있으니 그때 찾아가겠다고 했다. 녀석에게 여러 가지 신세를 졌지만 우리 사이엔 미안해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정도 일은 우리들의 우정에 전혀 부담이 가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를 가게 앞에 세워 달라고 했다. "뭘 사게?" "살 게 있어요." 지애가 사 들고 온 것은 양주 한 병과 마른 안주였다. 음료수와 먹을 것도 몇 가지가 들려 있었다. "술은 내 거구요, 나머지는 총찬 씨 드시라고 샀어요." "술꾼인 줄 몰랐는데? 설마 나를 술 먹여서 황천에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마세요. 제가 고백할 게 있는데 멀쩡한 정신으로는 못할 것 같구요. 그리고 몸이 아파서 고백이 끝나면 잠들어 버리려고 그래요." 지애는 뚜껑을 따더니 두어 모금 벌컥벌컥 마셨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양주 뚜껑으로 마셔도 될 터인데 지애는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병째 마시고 있었다. 내가 뺏는다고 순순히 말을 들을 만한 고집이 아니라는 생각에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마셔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온정신으로 말해야지." 내가 이렇게 거들어 보았지만 대꾸없이 술병을 입에 댔다. "난 지애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어. 그저 착하고 예쁘다는 거, 공부도 많이 했고 집안도 괜찮다는 거 정도야. 어쩌다 저런 무리하고 어울렸는지 모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총찬 씨는 이해 못해요. 사람이 살아나가는 것이 쉬운게 아니잖아요?" "쉽다면 뭐러 살아? 어려우니까 개척하고 "그래요. 그런데 남들은 말하기 편하다고 결과만 가지고 따지죠. 총찬 씨도 마찬가지구요."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고통을 받기 마련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내가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렇게 된 사연을 인정해 왔는지는 의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편한대로 생각해 버렸다고 하는 게 옳은 것 같았다. 밤 깊은 고속도로인데도 차량의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도로에 늘어선 차량만 해도 수없이 많은 것 같았다. 지애는 술 마시는 일을 멈춘 듯 양주 뚜껑을 닫았다. 서울로 가기 위해 서두르던 내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들으면서 내 마음이 조급해졌던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 이른바 강대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국가지상주의에 가장 심각한 피해당사국으로 우리나라를 겨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여러 학자들이 경고도 했을 것이고 지식인들이 개탄을 했을 터인데 어찌해서 한국은 일본 경제의 종속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단 말인가? 1980년대 말이면 세계 최강의 무장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일본이 또 노리는 제일 침략 가능성은 어디란 말인가? 사람들처럼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살기 바빠서라는 핑계를 댄 채 나 혼자 잘먹고 잘살면 그만일까? 살기 바빠서라는 핑계를 댄 채 나 혼자 잘먹고 잘 살면 그만일까? 어째서 사람들은 일본이 저렇게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몰려오는 걸 모르고 있을까? "내가 얘길 해도 되겠죠?" 지애가 얼굴을 바짝 들고 물었다. "해 봐." 나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난, 흑장미의 일원예요." "짐작하고 있었어." 마음속으로는 놀랐지만 태연한 체했다. "그러셨군요. 우리 가족은 인질로 잡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 입장예요. 내가 부모의 사업체는 당장 망할 거고 가족들도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몰라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총찬 씨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요. 나는 이번 작전이 어렵겠지만 확신을 가지고 대든 이유가 있었어요. 총찬 씨의 모든 기록을 확인하고 사랑하기로, 그래서 행복한 미래를 같이 설계하기로 마음을 다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얘기였다. 그녀의 눈빛이 그러했었다. "알다시피 난 자격상실이야.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다혜 씨 말인가요?" "그래." "나도 그만큼 사랑받을 수 있는 세심하게 들여다봤어요. 좋은 여자였고, 총찬 씨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알아요. 다혜 씨 집안에서 반대하는 것도 알고요." "그런건 아무 상관도 없어. 내가 좋아하면 되니까." "나를 생각해 보셨나요?" "했지. 좋은 여자고 나한테는 과분한 여자지. 그러나 난 다른 여자를 좋아할 수 없어. 있다면 어떤 순간에 잠깐, 바람처럼 그렇게 좋아하는 경우가 있지만." "나를 바람처럼이라도 좋아할 수 있나요?" "미안하다." 괜히 태웠다는 생각을 했다. 사내 마음이란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가 그런 고백을 해 오면 거절할 수밖에 어쩔 수 없었다. "난 이런 결심도 해 봤어요. 다혜 씨가 총찬 씨를 살려 주기만 하면 총찬 씨를 포기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결혼을 하기로 말이죠." 나는 웃었다. "웃지 마요. 난 심각해요." "다혜에게 얼마나 겁을 줬으면 나를 살려 준다면 모든 걸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을까?" "그렇지 않아요. 물론 상황이 그랬으니까 겁을 먹었겠지만...... 나는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다혜 씨한테 내가 좋아하게 된 동기와 우리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결혼하게 될 거라고 얘기했어요. 우리는 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요." 말이냐?" "그래요." "취했지?" "취해 가요. 속 뽑아 놓고 얘기하려면 취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난 내버려 두는 게 좋아. 간섭받으며 살 순 없으니까. 내 성질대로 살기 위해서 이 꼬라지로 팽개쳐서 떠도는 거야. 나를 잊어 버려. 그것이 지애가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니까." "난 다혜 씨를 만날 용의도 있어요. 그래서 터놓고 얘길 해 보고 싶어요." "어리석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 "그렇다면 왜 나를 선택했죠?" "내가?" "그래요. 다혜 씨하고 한참 얘기했어요. 적이 없다는 걸 알아요. 그런 총찬 씨가 나를 선택했어요. 나는 그걸 진심으로 받았어요. 물론 한때의 충동일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어느 정도 결정을 했다고 믿었어요. 내가 이렇게 결정한 게 잘못인가요?" "그렇게 얘기하니까 나도 솔직하게 얘기하지. 난 살고 싶었어. 살기 위해선 지애의 유혹을 뿌리쳐선 안 되고 또 그걸 빙자해서 결정적인 시기에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었지. 물론 욕망이 전혀 없는 강요에 의한 것은 아녔어. 지애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말 미안하다." "......" 지애는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대꾸하지 않았다. 술기운이 꽤 오르는지 흘렀다. 괴로운 침묵이었다. 어둠을 뚫고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과 어지럽게 교차되는 자동차의 불빛만 응시했다. 차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지애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난...... 뛰어내리고 싶어요. 총찬 씨 마음이 두고두고 괴로워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지애의 말이었다. "지애,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내가 견딜 것 같애? 내가 잘못했다잖아. 지애가 싫어서가 아냐. 내 마음이 일찍 결정됐었기 때문야. 지애의 어디가 어떻고 그래서 싫은게 아냐. 한 남자의 일생에서 두 여자를 선택할 수 있다면 지애도 선택해 보고 싶은 그런 여자인 건 확실해. 그러나 이미 나는 선택했고 약속했어. 미안하지만 "내가 마지막 순간에 총찬 씨 편을 들지 않았다면 지금쯤 총찬 씨는 일본에 있을 거고 나하고 함께 살게 됐을 거예요. 그러나 난 총찬 씨가 억지로 끌려가는 게 싫었어요." "알아. 더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었어. 내가 그 신세는 꼭 갚겠어. 일본에 있는 가족을 구해내는 일도 최선을 다할 테고." "정말 안 되나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한다는 게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지애는 침묵을 지켰다. 이번에는 고개를 잔뜩 숙였다. 우는 것 같았다. 말로는 달랠 길이 없었다 지애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자동차 안의 시계는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서울로 진입해 들어오도록 지애는 술기운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라도 잠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혈을 잘 풀어 주었지만 몸이 풀리려면 하루쯤 더 쉬어야 할 것이다. 잠든 지애의 얼굴을 보며 내 마음은 몹시 아파 왔다. 한때의 욕망과 살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에게 욕정을 풀어 버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지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그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 분명했다. 나는 지금부터 큰 도박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지애의 가족과 가족을 구해내야 하며 고바야시에게도 약속대로 생명이 보장되도록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은주 누나네 가족의 안전도 걱정이고 시골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 미숙이의 신변도 생각해야 할 입장이었다. 더구나 파리에 있는 다혜가 어떤 경우에도 신변에 이상이 없게 조치를 해야만 했다. 우리나라 안에 있는 사람이야 내가 한데 모아서 끌어안고 살면 그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비행기를 타고도 하루 온종일 달려야 하는 파리의 다혜는 손쓸 대책이 없었다. 처음에 내가 잡혀 들어갔을 때 그들의 말로 이 지구 어디라도 보복작전을 펼 수 있는 조직원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일이 없다는 게 확인되었고 시골 어머니도 아직까지는 탈 없는 게 확인되었지만 일본의 신민회 녀석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대책도 사실은 없는 편이었다. 내 머릿속에 대충대충 수습을 해 놓고 찾아갈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무초 스님과 하릴없이 칩거하고 있는 은사를 찾아가 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 멋쟁이 노교수는 대학에선 걸물이었고, 학생들에게 추앙의 대상이었고, 학계에선 첨예한 시각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람인데...... 시운이 없는지 아니면 그런 사람은 미움을 받는 게 세상인지 은둔자가 되어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혼자 술을 따라 마시며 논문과 글을 쓰는 하지 않으면서 칩거한 이유를 물으면 세상이 좋아지면 자연히 내 글이 소용에 닿을 거라고만 했다. 대전까지 내려가는 동안에도, 고바야시의 말을 들으면서도, 또 대전에서부터 지애한테 시달리면서도 나는 무초 스님과 노교수를 계속 생각했다. 어떤 지혜든 얻게 되리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이야. 이제 일어나야지. 정신을 좀 차려야지." 지애는 사방을 쳐다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 데나 편한 곳에 내려 주고 가세요. 내 걱정은 말고요." "내 마음 좀 편하게 해 줘라. 어디든 데려다 달라는 데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난 별로 갈 곳이 없어요. 총찬 씨가 이렇게 아예 데리고 다니기 전엔. 어때요? 조수 노릇할 테니까 데리고 다니지 그래요." "여태 얘기했잖아. 좀 봐 줘라." "두 여자를 다 데리고 살면 되잖아요? 그럴 자신 없어요?" "없어." "내가 숫처녀였다는 걸 총찬 씨는 아셨죠?" "......" 나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숫처녀였는지 어쨌는지 확인하거나 음미해 볼 겨를도 없었고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적당한 경험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고통스러웠지만 총찬 씨에게 의도적이었어요. 총찬 씨 주변에 여자가 많으리란 생각을 했었죠. 일본에 와서도 우리 회장 언니와 떤 관계였는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총찬 씨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었어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래." "다혜 씨와의 약속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프랑스라도 가겠어요." "그건 안 돼. 어떤 약속 때문에 그러는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야." "그럼 왜 나를......" "얘기했잖아. 그 상황에서 살아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지애한테 호감을 산 뒤에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엿본 거야. 내가 얼마나 절박했었는지 알잖아." "이젠 어디로 가실 거죠?" 사람이 있어." "파리에 갈 건가요?" "상황을 봐서." "그렇게 다혜 씨를 사랑하세요?" "사랑해." "나도 총찬 씨를 사랑해요." "이제 얘길 끝내지. 지애 마음을 알아. 좀 봐 줘." "천하의 장총찬 씨가 봐 달라고 사정도 하나요? 좋아요. 총찬 씨가 명심해 둘 게 있어요. 난 총찬 씨를 사랑해요. 죽음을 각오하고 배반자가 된 여자예요. 가족의 몰살도 각오했고요. 내가 총찬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하고 언제까지든지 기다린다는 걸 명심하세요. 두고 보세요. 총찬 씨가 내게 돌아올 때까지 혼자 살 상관하진 않겠죠?" "기억하겠어. 어디서 내려줄까?" "제 마지막 부탁 하나 들어 주실래요?" "해 봐." "약속부터 해 줘요. 괴롭히거나 어려운 게 아녜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예요." "그러지." 지애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무리한 건 아닐 거예요. 오늘밤만, 날이 밝을 때까지만 나하고 같이 있어줘요. 이런 걸 이별식이라고 하나요? 십 년을 기다려야 할지 이십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판이잖아요. 어차피 나는 변두리 호텔에 머물러 있어야 해요. 일이 해결돼서 돌아가도 될 때까지요. 날이 밝을 때까지만 않으시겠죠? 마지막 부탁예요. 기다리는 것 빼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어요. 약속하겠어요." 나는 머리를 저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지애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녀를 달래 주고도 싶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족을 구해야만 했다. 장인복과 고바야시의 가족도 구해야만 했다. 지애가 불안해지면 일이 어긋날 수도 있었다. 고바야시와 장인복이가 올라오면 구체적인 전략을 짜놓고 대응해야 할 입장이었다. "좋아.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자구." "고마워요." "딴 생각 말고 몸조심 하고 가족 구할 자동차를 돌려 호젓하지만 말끔한 변두리 호텔로 방향을 바꾸어 잡았다. 지애의 표정은 밝아졌다. 호텔 차고에 차를 넣고 좁다란 지하계단을 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얼굴을 알아보는 종업원이 쫓아나와 눈을 크게 뜨고 귀엣말로 얘기했다. "형님이 여자를 다 데리고 오십니다." "그럴 일이 있다. 여러 날 묵을 손님이니까 디스카운트하고 잘 모셔라." "형님은요?" "난 새벽에 갈 거다. 자주 올 거다." "재미 많이 보세요." "이자식이 누굴 놀리나." "아닙니다. 하도 신기해서요." 하나님. 사람을 점점 우습게 만드실 겁니까? 지애의 약속대로 우리는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따근한 욕탕에서 알몸으로 나왔다. 술냄새가 덜 가신 지애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깨끗한 침대가 한쪽 모서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이 꺼졌다. 붉은 조명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지애는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덥석 안아 침대 위에 던졌다. 출렁이는 침대, 출렁이는 지애의 몸뚱어리. 날이 밝은 뒤에 나는 시내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햇살이 눈부신 겨울 아침이었다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