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호를 ‘촌놈’이라고 쓰는 사람. 그의 명함을 받고 다시 보니 영락없는 촌놈이다. 까무잡잡한 얼굴에다 헙수룩한 옷차림. 시골 이웃집 아저씨 같다. 그러나 그가 던진 한마디는 두고두고 내게 ‘빛’이 되었다. 첫 만남이 인상적이다보니 그를 알면 알수록 신비로웠다. 나는 그렇게 10년을 그와 만났다. |
현대인은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몹시 바쁘든가 때로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하기도 하다. 실업도 문제지만 바쁜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우리는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까. 임락경(林洛京·63)씨는 하루 두 시간만 일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만나 삶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보고 느낀 건 미소였다. 미소(微笑)는 한자니까 우리말로 ‘웃음’이 더 어울리지 싶다. 임락경과 첫 만남에서 본 웃음은 ‘촌놈의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10여 년 전. 정농회(正農會) 연수회 때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아남기 위해 농사를 연구하고 고민하던 때였다. 모두 다 떠나려고 하는 농촌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니 정농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두루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간 연수회 첫날, 자기소개 시간. 참석한 사람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하고 농사 경험을 나누는 자리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장면이 하나 있다. 키도 작고 얼굴도 자그마한 사람이 눈을 껌벅이며 마이크를 잡았다. “두 시간이면 한 사람이 자기 먹을 거 마련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어요.”
거침 없이, 망설임 없이 당시 100여 명이나 되는 참석자의 인사말 중 이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두 시간만 일하면 자기 한 몸 사는 데 문제가 없다니…. 소개가 끝나자 그에게 다가갔다. “뭘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명함을 한 장 건넨다. ‘촌놈 임락경’ 헉, 자기 호를 ‘촌놈’이라고 하다니. 명함을 받고 그를 다시 보니 그는 영락없는 촌놈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다 헙수룩한 옷차림. 그냥 시골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그러나 그가 던진 한마디는 두고두고 내게 빛이 되었다. 첫 만남이 인상적이다보니 그를 알면 알수록 신비했다. 막힘이 없고, 거침이 없다. 형식과 허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까발리고,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이웃에게는 연민과 사랑을 가득 보냈다. 그는 자기 말 그대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강원도 화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장애인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그의 식구들이 어울려 사는 집을 일러 ‘시골집’이라 한다. 시골집에는 20명이 살고 있다. 장애인들과 함께 산다고 누구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고 대부분 농사지어 자급한다. 그가 하는 일은 조금 더 많은데, 정농회 회장에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학벌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그가 상지대(총장 김성훈) 초빙교수로 유기농업을 가르친다.
“웃기고도 돈 안 받아” 사실 이런 화려한 직책보다 그가 더 열성을 가지고 하는 일이 있다. 사람들 건강을 지켜내는 일이다. 이름하여 ‘임락경의 건강교실’. 두 달에 한 번꼴로 연다. 취재를 위해 그가 여는 건강교실에 참여했다. 강의를 들으며 짬짬이 인터뷰했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망설임이 없고 거침이 없다. 말투부터 그렇다. 나를 친동생 대하듯 말을 낮춘다. |
▼ 촌놈이라는 호는 낯선데, 그렇게 지은 이유라도 있나요.
“촌놈이니까 촌놈이지, 뭐. 어릴 때부터 촌놈이라는 걸 밝히고 살고 싶었어. 촌놈은 촌놈이지. 명함을 줘보면 그 사람을 알겠더라고. 똑같은 농림부 장관에게 명함을 준 적이 있는데 한 사람은 그것 때문에 무척 친해졌고. 또 한 사람은 ‘왜 하필 촌놈이냐?’고 해. 아니, 자기가 촌놈 때문에 장관 되었으면서 왜 촌놈을 무시하느냐고.”
▼ 두 시간만 일하면 자기 한 몸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 그 근거를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세요.
“예전에는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 보니 가족까지 가능해. 그러니까 논 두 마지기만 농사짓는다고 생각해보라고. 그 정도면 쌀 여섯 가마니 나오잖아? 일이란 게 모내기할 때만 하루 이틀 걸리지. 나머지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김매는 데 아침에 두 시간씩, 사흘이면 다 맬 걸. 그렇게 김매기 서너 번하고. 그 다음은 타작할 때 며칠. 1년을 평균해서 보면 두 시간도 안 걸려. 모내기와 타작할 때를 제외하면 물꼬 좀 봐주고, 논두렁에 풀이나 깎아주면 되잖아. 농사지어보면 알지 않아?”
▼ 장애인을 돌보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까, 같이 사는 거지. 그게 뭐 이유가 있어?”
▼ 그렇게 하기가 쉬운 건 아니잖아요.
“능력껏 하는 거지. 능력이 없으면 못하는 거고.”
말투가 워낙 거침이 없고 답변이 간단하니 그에 대해 따로 자료를 찾아야 했다. 그가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이현필(1913∼64) 선생의 영향이 컸다. 이현필은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폐병환자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아 ‘맨발의 성자’라고 불렸다.
▼ 장애인과 함께 지낸 지 오래됐죠? 그동안 겪으면서 생각한 것도 많을 텐데….
“탤런트는 바보 흉내내면서 웃겨. 모자란 사람을 흉내내면서 웃기더라고. 그런데 장애인은 흉내 안 내고 웃기더라고. 그러니 날마다 웃어. 탤런트는 웃기면서 돈 버는데, 이 사람들은 웃기고도 돈 안 받아(웃음).”
‘제멋대로 강연’
▼ 그렇게 본다면 장애란 기준도 달라져야 하지 않나요? 장애의 기준을 뭐라고 생각합니까.
“자기가 자기 먹을 거 벌어먹지 못하는 사람은 다 장애인이지.”
이것 또한 대답이 간단하다. 질문을 다시 던져야 또 다른 말이 나온다.
▼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손발 멀쩡해가지고, 도 닦는다고 일도 안 하고, 기도 한다고 앉아 있는 것도 장애지. 장애는 자기 생활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거지. 노력해도 먹고살지 못하면 다 장애지.”
▼ 열심히 일해도 먹고살기 힘들어하면 그것도 장애겠네요.
“장애지.”
▼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저도 공동체 생활을 두 해 정도 해본 적이 있는데 생각처럼 잘 안 되던데요.
“우리나라는 공동체가 안 되게 돼 있어. 왜냐하면 병원비하고 학비하고 노후생활비를 공동체에서 해결하지 못해. 보통 부자가 아니고는 안 돼. 생각을 해봐. ‘자녀 셋 있는 사람과 자녀가 없는 사람이 같이 공동체를 한다. 일을 똑같이 하고 같이 산다.’ 그럼, 자녀 셋 있는 사람은 자녀를 대학까지 보내야 하니까 여기 공동체 전체 생활비에서 삼분의 이는 그 사람 혼자 써버린단 말이지. 그것까지 서로 이해하고 함께 산다고 쳐. 그럼 돈을 다 써버리고 노후에 돈이 없단 말이야. 그럼 몸은 못 움직이고, 돈은 없고. 그럼, 어떡할 거냐? 그런 염려 때문에 공동체가 깨져. 선진국 가운데 공동체가 잘되는 곳은 병원비, 학비, 노후생활비를 정부에서 맡아줘. 그런 곳은 그냥 공동체만 하면 돼.”
▼ 그럼, 시골집 공동체는 어떻게 운영하는 겁니까.
“나는 공동체란 말을 한 번도 쓴 적이 없어. 다른 사람이 괜히 공동체라고 하니까 그렇지.”
▼ 그럼 뭐라고 합니까.
“뭘 뭐라고 해. 그냥 사는 거지.”
▼ 여럿이 어울려 살다보면 식구 관계에서 어려움도 많지 않나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매일 어려운데…. 원체 워낙 어렵게 살아왔으니까, 점점 쉬워지는 거지. 처음에야 먹을 것도 없고 집도 없어 힘들었던 거지. 지금이야 등 따습고 배부르지.”
3박4일 동안 진행된 건강교실. 참석자는 20여 명. 대체의학을 연구하는 학자, 학교 선생, 그리고 암 환자도 있다.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강의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워낙 이야기가 경험적이고 파격적이다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불편하기까지 하다. 좋게 말해 파격이지 ‘제멋대로’란 말이 더 어울리지 싶다. 첫날부터 까놓고 말한다. “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학술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검증할 만한 근거도 없다.”
“몸은 쓰레기통이 아니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보다 그 말이 나오는 삶의 토대를 이해하면 형편이 달라진다. 우선 환자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환하다. 연민과 사랑이 넘친다. 그리고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한다. 벽에 기대거나 눕고 싶으면 누워서도 듣는다. 또 그마저 힘들어 쉬고 싶으면 숙소에서 쉬라고 한다.
나는 강의보다 전체 분위기나 참석한 사람들의 고민에 더 관심이 많다. 여러 사람 앞에서 강의하다보면 긴장하기 쉽고 그러면 목이 마른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나보다. 어떤 주제든 강의를 하는 동안에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긴장은 고사하고 강의하다보면 군침이 돈단다. 그만큼 강의에 확신이 있고, 강의 자체를 기쁘게 한다.
강의 마지막 날 평가회를 할 때 보니 암 환자들 소감이 절실했다. 뒤늦게나마 깨우친 환자들이 한 줄기 희망을 간직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은 기쁨의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아토피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아이 부모는 ‘여기 온 뒤로 아이 증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아이가 밤에 잠을 잘 잤다’고 했다.
3박4일에 걸쳐 건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촌놈’이 강조한 이야기 중에서 몇 가지만 추려본다. 어찌 보면 상식에 가까운데 그래서 그게 진리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먼저 음식을 달리 대해야 한다. 음식이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몸이 건강하려면 몸에 들어가는 음식이 깨끗해야 한다. 우리 몸이 신성한 것임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한다. 습관으로 마시는 음료수나 심심해서 먹는 과자 또는 밥해 먹기 귀찮아서 먹는 라면 같은 경우는 몸을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거와 다름이 없다.
흰쌀밥 대신에 현미잡곡밥을 먹자. 땀 흘리며 일하자. 음식 좀 적게 먹자. 제철음식을 먹자. 이를 구체적인 질병과도 관련을 지어 설명한다. 이를테면 당뇨병이라면 무엇이든 즐기는 음식을 한 가지만 끊어보고, 싫어하는 음식을 먹어보란다.
흥부 놀부 이야기에도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놀부는 흰쌀밥에 고기 먹고 땀 흘리지 않아서 성욕도 없고 아들딸도 없지만, 흥부는 잡곡밥에 채소 먹고 땀 흘리니 아들딸이 16명이나 되지 않으냐. 지금은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은 드물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고 아무렇게나 먹어서 병이 생긴단다.
그가 살아온 역사는 질병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1960년대는 결핵환자가 많아 광주 무등산 동광원에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1970년대는 반민주와 독재라는 ‘사회적 질병’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 1980년대에는 뇌성마비, 정신박약, 관절염 환자가 시골집에 많이 모여 살았고, 1990년대에는 암 환자가, 최근에는 환경 문제로 아토피성 피부염 환자가 늘어난단다.
장애인에게 임상실험?
‘촌놈’은 이런 경험과 생각들을 묶어 ‘돌파리 잔소리’란 책을 펴냈다. 여기서 돌파리는 돌팔이가 아니고 突破理다. 그러니까 이치를 부딪쳐 깨친다거나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언제부터 건강에 확신을 가졌을까.
“누가 물 찾아달라고 해서 가보니까, 집터가 안 좋더라고. 물은 없으면 길어다 먹으면 되지만 집터가 잘못되면 이건 안 되더라고. 그 다음에는 집터를 봐주러 다니다보니 또 다른 환자가 있어. 집터 때문에 병이 생긴 게 아니더라고. 보니까 음식 때문이었어.”
▼ 대체의학 등은 어떻게 공부했습니까.
“나는 공부한 일 없어. 경험이지. 장애인들과 오래 살다보니까 평소에 임상실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거야. 식구들이 많다보니까, 무슨 병이 있으면 뭘 안 먹여보고, 뭘 먹여보면 금방 나타나잖아.”
▼ 임상실험이면 위험하잖아요?
“아니, 음식 좀 먹여보는 게 뭐 위험해! 음식이야, 잘 들으면 약이고 안 들으면 본전이지.”
▼ 강의 때 ‘병이 나서 치료하기보다 병이 나지를 말자’고 하던데, 그게 쉬운 경지가 아니잖아요? 시골집 식구들 경험은 어떤가요.
“여기 가까운 군부대에서 우리 집에 상비약을 갖다준 적이 있어. 우리 식구가 많다고 많이 가져왔지. 해열제, 진통제 이런 걸 잔뜩 갖다줬지. 그러고 나서 아마 7, 8년 됐을 거야. 그동안 한 알도 안 없어졌어. 약병 뚜껑도 안 따고 그대로 있어.”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묵은 게 내려가는 듯 시원하다. 질문할 거리는 잔뜩 있었지만, 워낙 답이 간결하니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입으로 묻기보다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건강교실이 끝나고 그를 따라 시골집에 갔다. 건강교실에 참석했던 암 환자 한 사람도 동행했다. 생명의 불꽃을 다시 태우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느껴진다. 시골집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화악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돌과 나무와 흙으로 지은 이층집.
도착하니 간식시간이라고 식당으로 바로 들어갔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고구마를 먹고 있다. 말로만 듣던 몽고증(다운증후군) 환자가 여럿이다.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겉모습이 조금은 특이하다. 그들은 나를 별로 경계하는 눈빛이 아니다. 걷지도 못하는 중증장애인 한 사람은 벽면에 기대앉아 뭔가를 먹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 몇 분도 눈에 들어온다. 아이도 셋.
행복이란…
내 맞은편에 앉은 석준(39)씨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대신한다. 간식을 다 먹고 나니 내 둘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서로 사진 찍어달라고 보챈다. 사실 이렇게 취재를 하다보면 사진 촬영이 어려울 때가 많다. 자연스러운 사진이 좋은데 카메라만 들이대면 얼굴이 굳어진다거나 어떤 이들은 사진 찍기를 몹시 꺼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내 카메라가 호강하는 셈이다.
간식을 먹고 있는데 석준씨가 돼지 밥 주러 가는 데 같이 가자 한다. 나로서는 무척 반가운 소리. 석준씨를 따라가니 닭 100여 마리가 있는 닭장 옆에 돼지우리가 있다. 그가 맡은 일은 돼지 다섯 마리 돌보기. 돼지 먹이를 삽으로 퍼주면서, “꿀꿀꿀, 자 먹어라” 한다.
먹이를 주는 모습이 꼭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 같다.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많은 걸 말해주는 듯하다.
“여기 생활이 좋은가봐요?”
“좋지요. 편해요. 여기서는 누가 뭐라 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이리로 오게 되었어요?”
“정신병이 있었어요. 정신분열. 회사 다니면서 일이 잘 안 되니까 마음이 초조하고. 그러다가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회사 그만두고 세차장에서도 일하고, 노가다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몇 해 전에 이곳으로 왔어요.”
돼지를 돌보는 석준씨 사진을 여러 장 찍었는데 모두 잔잔한 웃음이 흐른다. 그 웃음은 대상에 몰입할 때, 대상과 하나 될 때나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살아가다가 어떤 대상이 벅찰 때, 그게 일이든 사람이든 누구나 정신이 분열되는 느낌을 갖는다. 반면에 그 대상에 몰입할 때는 행복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석준씨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내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농장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준다. 내게 말 한 마디를 건넬 때마다 행복한 웃음이 흐른다. 자랑스러움이랄까 뿌듯함이 느껴진다. 시골집에서는 누구나 자기 능력만큼 일한다. 석준씨가 돼지를 돌보고 한 달에 받는 돈은 5만원. 행복이란 돈보다 일에 있음을 석준씨는 그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곳에는 석준씨말고도 장애인이나 정신박약아가 여럿 있다. 가족이 버리고 또 나라조차 거두지 못한 사람들. 몽고증인 봉수(37), 원석(36)씨. 이들은 나이는 서른이 넘었지만 정신연령은 보통 서너 살 수준의 아이란다. 그리고 정현(11)이 엄마는 아이 둘을 데리고 여기로 들어왔다. 인천에 살 때 남편과 이혼하고 삶에 지쳐 한 달만 쉬었다가 가겠다고 왔다가 눌러 살고 있다. 여기서 지내자 아이들이 인천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여기가 좋다고 함께 살자고 했단다. 정현이 동생 정환(9)이는 어른을 두려워해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자, 입가에 웃음을 머금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밥주걱이 칼자루
할머니부터 아이들까지 20여 명이 모여 사는 ‘시골집’. 시골집 식구들이 농사짓는 규모는 대략 밭농사 5000∼6000평. 여기서 30여 가지 곡식을 무공해로 기른다. 닭, 돼지, 오리도 길러 가끔 고기를 먹는다.
시골집 식구들이 돈벌이로 주력하는 건 된장과 간장이다. 자신들이 손수 농사지은 콩으로 담근 된장과 간장을 판다(문의 033▼ 441▼ 4298). 시골집에는 메주를 쑤는 큰 가마솥이 여럿이고 된장, 간장을 담아두는 큰 장독 역시 100여 개가 더 된다. 장독 가까이 가자, 메주 냄새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곧이어 저녁을 먹고, 이층 거실에서 식구 여럿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몇 사람은 TV 연속극을 본다. 식구가 많으니 내가 묻고 싶은 것들이 샘솟듯 다시 솟아난다. 우선 가족부터 그렇다. ‘촌놈’은 자기 자식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입양하여 키운 아이는 여럿이다. 시골집 안살림을 맡고 있는 이애리(48)씨와의 결혼도 그렇다. 아이들을 입양하기 위해 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가족에 대해 궁금하다고 말을 던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날아온다.
“기존 법에다가 자꾸 맞추려고 하지 마. 그거 참 갑갑하더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더라고. ‘여기는 이런 법이 있구나.’ 가족이 없고 부모 형제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 와서 있는 거에 맞추지 말라고. 나는 우리 식구에게 그래. ‘우리는 부모 없어도 슬프지 말자, 가족 없어도 외롭지 말자.’ 그러니 우리 삶을 가족이라는 틀에다 맞추려고 하지 말라고. 안 맞아.”
▼ 할머니는 몇 분 계시는데 할아버지는 안 보이네요.
“예전에는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들은 못 견디더라고. 할머니들은 아무리 몸이 약해도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건사하는데 할아버지들은 다 해줘야 해. 할머니들은 청소하고, 아이들 깨우고 다 해. 할아버지들은 목욕을 안 해. 아, 더운 물 데워놓아도 안 해. 옷을 갈아입으라고 해도 성질내며 안 갈아입어. 그러니 어떻게 견디냐고? 너무 깔끔하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남한테 냄새나게 하지는 말아달라 이거지. 자기 몸 병나는 거는 자기 아프니까 이해해. 문제는 남에게 피해가 가니까. 그 옆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뺀질이’ 봉수의 진심
▼ 식구가 많다보면 별별 사연이 많았을 텐데, 애리씨가 이야기를 좀 해주실래요? “많지요. 공동생활에서는 밥주걱이 칼자루잖아요?(웃음) 한번은 몽고증이 있는 아이인데 말을 잘 안 듣는 거예요. 그래서 ‘말 안 들으면 밥 안 준다’고 했더니 파출소 가서 신고를 한 거야(웃음). 연락 받고 파출소에 가보니까 거기서 커피 얻어먹고 앉아 있더라고(웃음). 또 한번은 메주를 쑤고 있는데 집으로 경찰 백차가 슥 들어오는 거야. (경찰이) 두 명이나 왔더라고요. 무슨 일로 왔느냐니까, 도난 신고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누가 그랬냐니까, 세상에! ‘석준이 돈을 봉수가 가져갔다’고 석준이가 신고한 거예요. 얼마나 없어졌냐니까. 500원도 가져가고, 300원도 가져갔다는 거예요(웃음). 경찰들도 너무 황당해가지고…그래도 경찰은 신고를 받으면 무조건 현장에 와봐야 하는 가봐요. 와서 보고는 신고한 사람이 약간 정신분열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돌아간 적이 있어요.” ▼ 여럿이 어울려 살다보면 그렇게 서로 오해하는 일도 종종 있지 않나요. “장애인들은 오히려 문제가 안 돼요. 오히려 걔네들이 나름대로 윤활유 노릇을 해요. 사람들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준다든지. 어떤 틈이랄까 여유를 만들어주더라고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잖아요? 말하기 좀 창피한 일이 하나 있는데, 한번은 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였어요. 농사철에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밥숟갈 들기도 힘들잖아요? 모든 게 귀찮고. 방청소는 우리가 쓸고, 닦는 거는 애들이 하는데. 봉수가 ‘뺀질이’예요. 자기 몸 보호하는 데는 잔머리를 끝내주게 굴리거든요. 근데 내가 밥을 먹고 마당으로 나오니 봉수가 다리를 탁 꼬고 앉아 이빨을 쑤시는데 얄밉게 보이는 거예요. ‘야 너 방 안 닦고 앉아 있어?’ 그랬더니 닦았다고 막 눈을 부라리는 거예요. 그냥 거기서 끝냈어야 하는데. (이 녀석 말이 거짓인 걸 확인하러) 방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닦은 거예요. 그러고는 다시 봉수 앞을 지나가야 하는데 정말 쪽팔리는 거예요. 정말 뭐라고 말도 못하고, 그 때는 아무 경황이 없는 거야. 그 다음날 아침에 식당에 밥하러 나왔는데 이 녀석이 그 시간에 빗자루 들고 복도를 어슬렁어슬렁하는 거예요. 거기를 지나가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봉수가 경쾌하게 ‘잘 잤냐’고 인사하는데, 창피하더라고요. 정말 나 같은 사람이 하나만 더 있으면 공동체 안 돼요(웃음). 잔머리 굴리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안 좋은 징조라 봐요(웃음).”
“아! 손가락 건전지?” 다시 임락경씨에게 물었다. ▼ 집도 손수 지었다면서요. “새들은 손이 없어 입하고 발만 가지고 집을 짓잖아. 그런데 사람은 손이 있는데 왜 남에게 시켜서 짓나? 동물은 다 자기가 집을 짓지. 물론 뻐꾸기같이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 놈들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황토집이 좋다고 저 멀리 해남에서 가져다 지을 필요는 없어요. 지역에서 맞는 걸로 자재를 조달해야 하는데, 강원도엔 돌이 많기에 처음에는 돌로 계속 짓다가 나중에 나무로 짓게 되었어. 계기는 우리 집에 사람이 하나 왔는데 여기 오기 전에 욕창이 생겨 썩어 죽어가는 사람이었어. 그 사람 냄새가 멀리까지 났었다고. 그런데 나무 밥상을 들여다놓으니까 그 냄새가 안 나더라고. 그 뒤로도 나무를 가까이 하니까 좋더라고. 장애인 찌든 냄새가 안 나. 나무가 정화를 시키더라고.” ▼ 애리씨는 집을 지으면서 나름대로 느낀 거 없어요? “보통 여자들이 하는 일은 굉장히 소모적이지, 그치요?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그렇잖아요. 빨래하고 밥해대고 설거지하고. 남자들이 왜 그런 역할을 만들었는지 알겠더라고. 남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고. 그런 일은 하나만 해놓으면 번듯하게 백년 가고 천년 가고. 저건 누가 지었다고 자랑하고. 남자들이 나빠요(웃음).” |
▼ 집을 보니 나무랑 기와로 지어 건축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겠어요?
“만만치? ‘만만하게’ 들었어(웃음). 식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식구들이 했지. 미장이라든가 보일러 까는 것도 대부분 식구들이 했지. 그리고 내가 집짓기 좋은 나이였어. 나이가 있으니까 경험도, 인연도 잘 맞은 거지. 집 바닥에 까는 숯도, 지붕에 올리는 흙도 다 인연이 되어 쉽게 구했지. 기와도 그래. 내가 아는 분이 인간문화재 기능 보유자인데. 그때 그분 나이가 칠십이었어. 덕수궁 수리 끝나고 ‘이제 나, 손 놔버린다. 나이 칠십 넘어서 일하냐?’고 손놓아버렸는데. 내가 ‘형님, 마지막으로 우리 집 한번 해주어야지요?’ 그랬더니 두말 않고 ‘어? 해 줘야지.’
덕수궁 일 끝나고 바로 이리로 왔거든. 얼마나 일을 잘하나 몰라. 처마 곡선 잡는데 줄도 안 띄우고 눈짐작으로 하는데 일이 얼마나 빠른지. 기와도 무슨 기와로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그분이 좋은 기와를 소개해주어 원가로 사고. 기와를 다 이고 나서 ‘얼마 드릴까요?’했더니 ‘에이, 마지막으로 한번 해준건데 뭐. 그냥 술값이나 좀 줘.’ 나이 칠십 된 분이 돈 보고 오겠어? 형님이라고 불렀으니까. 와준 거지.”
집짓기에 대해선 누구나 할 이야기가 많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인 양 영웅담에 가깝다. 촌놈은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런데도 그이를 천재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농사는 기본에다가 풍수, 수맥, 발효식품, 집짓기, 강의, 글쓰기, 노래…. 그를 가까이 보는 애리씨는 이를 어찌 보는지 궁금하다.
“자기 필요에 따라 배우면 누구나 천재가 되지 않을까요? 여기 이웃집 할머니는 구멍가게 해가지고 자식들 다 공부시키고 출가시켰거든요. 그런데 그 할머니는 글을 몰라요. 숫자도 모르고. 자기 이름도 못 쓰는데, 보고 듣는 건 다 외워요. 외상값, 물건들 다 기억해요. 그리고 1.5볼트 건전지를 사려고 물어보면 ‘볼트’라는 말이 할머니한테는 생소하잖아요? 그런데 할머니는 ‘아! 손가락 건전지?’ 그러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 말이에요? 공부도 자기에게 필요한 걸 찾아서 독학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싶어요.”
학교 이야기가 나오니 ‘촌놈’이 다시 이야기를 받는다.
“학교를 왜 안 갔느냐 하면, 노래부터가 실망이야.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어서 모여라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하잖아? (노래를 배우고 나서) 학교를 갔는데 선생님이 안 기다리더라고. 거기서 실망했어(웃음). 학교 노래가 잘못된 게 한두 군데가 아니지. 그런 걸 노래라고 짓고 또 부르게 하고. 살아가는 데 절실히 필요한 것을 배워야지, 필요 없는 걸 넣었다가 다시 뺄 필요는 없는 거잖아.”
학교 안 간 ‘대단한’ 이유
▼ 세상일을 두루 잘하니까 여기저기에서 와달라는 사람이 많잖아요? 농사도 지으며 그렇게 다니자면 쉽지 않을 텐데.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계속 솟아납니까.
“와달라고 다 갈 수는 없고, 충전해가면서 가는 거지. 그런데 중요한 건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하면 기가 금방 빠진다는 거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기가 안 빠져. 내 것만 소모하니까 금방 죽지. 정농회 같은 데나 건강교실 같은 데는 달라. 사람들이 초롱초롱 듣고 있으니 내 기가 살아나는 거지.”
▼ 요즘은 귀농하려는 사람이 많잖아요. 조언을 해주신다면.
“멍청하게 다 때려치우지 말고, 우선 반쪽만 귀농하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물론 부부가 같이 오면 가장 좋지. 그게 쉽지 않으니까 한 사람은 돈벌이가 되는 직장을 가지는 게 좋아. 같이 시골로 오더라도 한 사람은 시골 학교 선생이나 면서기 또는 공공근로 하고 또 한 사람은 농사를 지어 유기농으로 먹고. 그렇게 몇 년 해보다가 농업이 생산수단이 되고 자신 있을 때 하라는 거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속극이 끝나고 TV에서 저녁 9시 뉴스가 시작되자 모두들 자려고 총총히 일어선다.
그 다음날 시골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려고 짐을 쌌다. 그리고 인사를 하려고 하자, 시골집 안살림을 맡고 있는 애리씨가 뭔가를 내민다.
“이게 뭐예요?”
“도시락이에요. 먼 길 가다가 드시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올라온다. 우리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 소풍 갈 때 싸주시던 도시락 생각. 도시락을 가방에 넣으려고 하자,
“가방을 눕히면 혹시 국물이 샐지 모르겠네요. 반찬 가운데 무절임이 있어요.”
잊을 수 없는 된장주먹밥
가방을 둘러메고 도시락을 손에 들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고속도로 음성휴게소에서 도시락을 열었다. 주먹밥 네 덩이. 예쁘게 삼각형으로 모양을 냈다. 잡곡밥에 깨소금도 살살 뿌렸다. 반찬은 검은콩장과 무를 얇게 썰어 식초에 절인 무초절이. 목이 메지 않으라고 무초절이를 넣었나보다. 먹어보니 담백하니 좋다.
천천히 한 입 베어 무니 시골집 식구들이 떠오른다. 락경, 애리, 주리, 정환, 정현, 우행, 석준, 봉수, 원석…. 목이 멘다. 무초절이를 하나 씹으니 음식이 내려간다. 또 한 입 베어 물고 씹는데 어, 느낌이 이상하다. 짭짤하면서도 구수하다. 보니 된장이다. 날된장을 구슬처럼 작게 하여 주먹밥 한가운데 넣어둔 것이다. 된장과 주먹밥이 만나 이루는 맛이란!
한 시간쯤 천천히 먹어야 하는데 시간이 모자르다. 15분 휴식 동안에 이 귀한 음식을 다 먹는 거는 아무래도 무리다. 그러다가 언뜻 떠오른 생각. 주먹밥 하나를 집에 가져가는 거다. 아내도 보여주고 맛도 보여주고 싶다. 된장주먹밥, 내가 사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음식이다. 차를 네 번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고긴 여행에도 피로하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내 영혼이 더 맑아지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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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걸 보여준다고 한다.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자신이 만난 사람, 해온 일들이 얼굴에 나타난다. 임락경 얼굴에는 촌놈과 장애인 그리고 환자들을 보듬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또한 내가 모르는 훨씬 더 많은 모습이 어우러져 있지 싶다. 나도 촌놈이 가진 그 신비로운 웃음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갖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