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적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하는 섬이다. 이 섬에는 덕적면의 진리(鎭里), 서포리(西浦里), 북리(北里) 등 3개 법정리가 있다. 덕적군도는 8개의 유인도와 3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덕적도는 덕적군도의 주도(主島)이며, 면적은 22.97㎢, 해안선 길이는 37.6 km이다.
인천 덕적군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660년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신라의 요청에 부응하여 당나라의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덕물도(德物島, 德勿島)가 바로 덕적도이다. 덕물도란 '가득한(德) 물(勿)에 있는 섬', 즉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덕적도는 갯벌이 발달되어 바지락, 굴 등을 양식하고, 흑염소나 포도, 표고버섯 등의 특산물을 많이 생산한다. 섬에는 세 개의 해변이 있다. 일주도로가 개설돼 차를 가져가도 좋다. 대부두 방아머리 선착장에서 카페리에 차를 실으면 자월도를 거쳐 1시간40분 만에 덕적도 진리 선착장에 닿는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을 탄다면 1시간 거리이다. 덕적도 내에서는 서포리, 밭지름 해수욕장과 비조봉 등이 찾아볼 만하다.
딸린 섬
- 소야도(蘇爺島) : 덕적면 소야리(蘇爺里). 덕적도의 동쪽에 있으며, 부속 섬 중 가장 크다. 새곶섬이라고도 한다.
- 선미도(善尾島) : 덕적면 북리. 등대가 있다.
- 먹도(墨島) : 덕적면 진리. 먹통도, 흑도(黑島)라고도 불린다.
덕적도 전경
덕적도 개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德積面)에 딸린 섬으로, 최고점은 국수봉(314m)이다. 덕적군도(德積群島)의 어미섬으로 가장 큰 섬이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75km 해상에 위치하며 484가구에 1,447명, 유치원 9명, 초등학생 24명, 중학생 26명, 고등학생 34명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입도하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며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번갈아 점령하여 그때마다 소속이 바뀌었다. 삼국시대부터 서해상의 해상교통의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수군 진지와 말을 기르는 국영 목장도 있었다고 한다.
명칭 유래를 보면 덕적도라는 이름은 ‘큰 물섬’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이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큰물섬’이 한자화되면서 덕물도(德勿島)가 되었고, 다시 덕적도(德積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큰물이’ 혹은 ‘덕물도’라고 부른다. 덕적도의 관문인 진리에는 선사시대 조개무덤이 발견되었다.
역사의 섬 덕적도
덕적도는 우리나라 도서 중에 기록상으로 가장 오래 됐다. 삼국사기와 당서(唐書) 등 사서에서도 중요한 지역으로 표기됐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수차례 걸친 유물 조사와 1983년 4월 국립박물관 조사에 의하면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백제시대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삼국시대에는 덕적면 지역이 백제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옹진군 하면 백령도와 연평도 그리고 덕적도를 떠올린다. 옹진의 ‘옹(甕)’자는 ‘독, 단지’ 등을 뜻하지만 옹진군 어느 지역의 모습을 나타낸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옹진군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자체로 115개의 섬이 있고, 그중에 23개의 유인도가 있다.
해상왕국의 바닷길 덕적도
덕적면 지역은 기록상으로 우리나라 도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의 고장이다. 백제가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372년) 이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상실한 개로왕 21년(475년)까지 100여 년 동안 사용되던 해상통로의 거점 지역이 덕적면이었기 때문이다. 인천 능허대에서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황해를 횡단하고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 · 내주로 이르는 항로로 오래전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오면서 동양의 해상지배권을 장악해 해상왕국으로 등장했던 시대에도 덕적도는 바다로 나가는 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려시대에도 해상활동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덕적도의 갈대숲은 여행자의 감성을 흔든다.
덕적도는 역사적 역할을 보면 중국과 교류를 하는데 중간 기착지로서 고대 항로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당시 중국과의 교역로는 주로 덕적도를 경유해서 산동반도를 가는 길이었다. 옛날의 교통 수단은 풍선으로 반드시 중간 기항지에 들어가서 다시 출항을 했다.
삼국시대에 신라와 당나라 소정방의 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하려고 660년 9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서해상을 따라서 백제로 건너왔다. 당시 신라 태자 김법민이 군선 100척을 이끌고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했던 기록이 있다.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는 4개월 동안 덕적도에 13만명을 주둔 시키며 군수품 보급기지로 활용했다. 덕적도 바로 건너편 소야도에는 당나라 군대의 진지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나라 군대는 덕적도에서 현재의 금강 하구인 장항읍에 해당하는 기벌포로 상륙해 신라와 협공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중기까지 삼별초의 득세와 왜구들 침략으로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공도 정책이 실시되었다. 다시 사람이 입도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덕적도의 위치는 인천과 경기 화성, 충남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다. 예전에 어장이 풍성하고 사람도 많이 살아서 덕적도의 뱃길은 세 군데 방향으로 나아갔다. 인천으로 가는 직통 길, 화성의 남양반도 가는 길, 그리고 충남 당진으로 향하는 뱃길이다. 이 세 길 중에서 인천과 당진으로 나가는 뱃길을 가장 선호했다. 이런 지리적 환경 때문에 덕적도 방언에는 충청도의 사투리가 조금 섞여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2) ‘택리지(擇里志)’에 덕적도를 표현하기를 ‘충청도의 서산 북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고 했다.
덕적도는 한국전쟁 당시에 이념 갈등은 번졌지만 다행히 백령도처럼 크게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행운을 누렸다. 1973년 도서지에 나타난 인구 분포는 901가구에 5,274명, 중학교 301명, 초등학교 1,062명이다. 1954년 덕적도 인구를 보면 1만2,788명이다. 한국전쟁 직후에 북한의 피난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인구가 대폭 증가한 것.
고마운 최분도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를 사랑하라.”
당시에 최분도(Benedict Zweber · 1932~2001) 신부의 천주교와 기독교가 대세였다. 덕적도를 얘기할 때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이 있다. 1932년 미국에서 출생한 최분도 신부는 30년간 덕적도에서 살면서 병원을 짓고, 전기공급, 상수도 시설, 양식사업, 간척사업, 고아원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가는 그에게 1971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1959년 미국 뉴욕 메리놀 신학대학을 졸업한 베네딕트 즈베버 신부는 메리놀 외방교회 사제로 한국에 왔다. 1966년 덕적도 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해 10년간 서포리에 머물면서 덕적도 주민들의 자립과 복지를 위해 큰 공헌을 했다. 푸른 눈의 키 작은 신부님 베네딕트 즈베버, 한국이름은 최분도 신부님. 마을 주민들은 고마운 신부님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서포리해변 입구에 그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천주교 성당
그의 업적은 ‘인천에 사는 사람보다 더 인천을 사랑한 미국인 최분도 신부’, ‘서해낙도의 슈바이처’ 등의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그가 1976년 당시 김태호 인천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으며 ‘인천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최 신부를 빼놓으면 인천 도서 지역의 천주교 역사를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대단했던 파시의 섬 덕적도
덕적도는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주민들은 어업을 생활수단으로 삼으며 풍족한 삶을 누렸다. 이때 덕적도의 생활 중심지는 북리였는데 어업 활성화와 궤를 같이 하며 크나큰 번영을 누렸다. 오죽하면 울도 어화라는 말이 생겨났으랴. 당시 사람들은 새우를 가리켜 황금이라고 불렀으며, 새우가 무진장으로 널린 바다를 황금 바다라고 불렀다. 이 황금 바다가 바로 덕적도 인근의 울도를 말하며, 울도 어화 또한 이때 생겨난 말이다.
덕적도 일대는 일찍이 울도를 중심으로 새우 잡이, 굴어도를 중심으로 민어 잡이가 성시를 이루었다. 문화라든가 각종 복리증진 정책들은 튼실한 경제력의 산물이라고 했던가. 어업을 통해 지역경제가 살아나니 덕적도에서는 어민들의 복리증진을 위하여 1930년 12월 5일, 덕적 조합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당시 북리항의 인구는 1만을 웃돌았으며 병원, 영화관부터 시작해 있어야 할 것이 다 갖춰져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덕적도는 민어 파시로 유명하며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까지 정착해 살던 풍요로운 섬이었다.
덕적면 북리 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배를 타고 피난 나온 사람들까지 합쳐서 1만여 명이 살던 대단한 마을이었다. 그 당시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하여 여기서 흘러나온 담배와 과자 등을 판매하는 좌판도 3개 정도 있었다. 이 섬에 의사 3명, 한의사 2명, 수의사 1명과 의대생 3명이 살 정도로 잘 나가는 섬, ‘작은 인천’이라고 불렸다던 북리 마을의 한때를 유추해 본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파시의 몰락으로 상설극장까지 있던 북리 마을의 선주와 선원들은 인천 등 사방으로 흩어지고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했다. 지금은 마을 항구에 꽃게잡이 어선 몇 척이 정박해 있다. 여기에서 배를 타는 선원들 중에는 외국인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북리 마을은 근현대사에 중요한 역사의 한 지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북리 해안의 어선들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장면
민어파시로 번창했던 북리항
연평도가 조기파시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에 덕적도 북리항은 민어파시로 성시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덕적도 앞바다가 민어의 산란장이었기 때문. 1937년의 북리항은 수천 명의 어업 종사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번창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모래 채취와 남획으로 인해 덕적도에서 더 이상 민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지금은 꽃게잡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포구를 밝히는 북리등대와 북리 파시촌만이 그 당시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북리항과 등대
관광의 섬으로 변한 덕적도
인천 앞바다에 자리잡고 있는 섬들 중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덕적도이며, 그 다음이 바로 이작도와 백령도이다. 1994년 5월 인천~덕적도행 쾌속선을 운항하면서 2시간 거리가 50분으로 단축되어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게 되었다. 울도 어화로 회자되는 과거의 영광은 어족자원 감소와 함께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현재는 고기잡이 대신 자연산 굴이 어민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있을 뿐이다.
인천~덕적도행 쾌속선
[출처] 한국의 유명 섬 시리즈 - 인천 옹진 덕적도 (030)|작성자 ECO 전도사
첫댓글 대단 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