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내용은 첫째 : 나 자신을 한 가지 특별한 목표에 헌신한다. --- 헌신(Commit)
둘째 :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시작한다. ---- 습관(Habits)
셋째 : 한 번에 한 걸음씩 행동에 옮긴다. --- 행동(Action)
넷째 :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실수할 수도 있다. --- 도전(Never)
다섯째 : 긍정적 목표를 세우고 실천한다. --- 목표(Goal oriented)
여섯째 : 자기를 스스로 평가하고 시상한다. --- 자기평가(Evaluate)
저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갑자기 어제 보았던 『성공 시대』에 나왔던 노르웨이의 라면 왕 '이철호'씨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라면 왕 이철호씨를 중심으로 성공하는 시대적 인물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Ⅰ. 이철호씨와 한국전쟁
이철호씨는 천안 태생으로 14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구두 통을 들고 돈 벌기에 나섰습니다... 미군을 쫓아다니면 수입이 좋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쪽으로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마 그 곳이 지금의 의정부와 동두천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 건너가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다가 그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익사 직전 미군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구출이 되었습니다.
철호는 오갈 데가 없는 몸이라 미군 부대의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구두도 닦았습니다. 남보다 구두 닦는 솜씨가 뛰어 남은 물론이거니와 빨래를 해도 남보다 더 깨끗하고 윤이 나게 빨았습니다. 더욱이 비누로 빨아도 때가 잘 안 빠지는 흰옷은 삶아서 빨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만화책을 주어다가 달달 외우다 시피 읽었습니다. 이렇게 철호는 또래의 아이들하고는 뭔가 다른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불행이 다가 왔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미군부대 막사 안에 적의 포탄이 떨어진 것입니다. ..... 그곳에서 철호도 배에 파편을 맞고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철호를 가까이에서 눈여겨보았던 미군들은 철호를 그냥 죽게 내 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전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상처가 깊은지라 노르웨이 야전병원의 시설로서는 그를 완치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철호를 노르웨이 본국으로 보내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의사들이 주선해 주었습니다. ..... 철호는 수개월 후 노르웨이로 출국을 하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17살.... 철호는 비행기 안에서 두 번 다시 이 더러운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각오를 합니다. ..... 그러면서도 그의 가방 속에는 중등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의 역사책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Ⅱ. 노르웨이에서의 굶주림과의 전쟁
이렇게 17살 꽃다운 나이에 고국을 떠난 이철호는 1954년 4월 노르웨이의 첫 한국인이 됩니다. 그러나 이철호씨의 앞길에는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르웨이의 국립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으나 먹고사는 것만큼은 혼자서 해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이국 땅에서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철호씨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우리나라처럼 새벽에 열리는 인간시장에서 밤새 기다렸다가 일을 맡아 떠났습니다. 그런데 처음 맡은 일이 다른 것이 아니고 화장실 똥 푸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푸세식이 아니고 엘리베이터 식으로 파이프에서 똥물이 내려오면 바닥에다 넓은 다라 같은 것을 놓았다가 그 똥을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다라를 치웠는데 파이프를 통해 똥이 내려오면 그대로 얼굴이나 몸에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파이프를 통통 두드려서, 지금은 똥물을 치우고 있으니 잠시 중단하시오 하고 신호를 보내면 참았다가 다시 바꾸어 놓으면 대변을 보는 그런 화장실이었습니다.
이철호씨는 이러한 화장실 청소 외에도 무슨 일이든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일 잘하는 청년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철호씨는 야간에 학교를 나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학비가 모자라서 그는 맛있는 것도 마음대로 사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돈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고자 슈퍼에서 개 먹이나 동물 사료 감으로 쓰는 묵은 딱딱한 빵을 일 주일에 한 번씩 사서 그것을 한 참 동안 물에 담갔다가 뚱뚱 불은 것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습니다. 그것도 남에게 들킬가봐 침대 밑에 넣어두었다가 밤마다 몰래 꺼내 먹었습니다. ..... 그것이 이철호씨가 먹는 하루 식사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하고 오다가 그만 길에서 쓰러졌는데 ... 눈을 떠보니까? 병원 침상이었습니다. . 의사는 이철호씨에게 그동안 무엇을 먹고 지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 다름 아닌 영양실조로 쓰러진 것입니다. ...... 40년이 지난 오늘에는 진수 성찬을 차려놓고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너무나 배고픔이 심해서 한번 원 없이 실컷 먹다 죽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철호씨는 배고픔의 서러움을 달래고자 호텔의 주방 아르바이트를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Ⅲ. 호텔 주방 아르바이트
호텔 주방장의 꿈을 갖고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되자 배고픔의 고통은 사라졌습니다. 이철호씨는 「헐문 호텔」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의 근면성과 부지런함은 어디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냄비를 닦을 때에 조금이라도 탄 것이 냄비에 붙어있으면 꼬챙이를 가지고 후벼서 그것을 깨끗이 떨어내고 닦아놓았습니다. 주방장은 이철호씨가 자기의 맡은 일을 충실하게 일하는 것은 물론 마지막까지 남아서 내일 사용할 것까지 챙겨놓고 가는 것을 몇 달 동안 눈여겨보던 요한스 주방장이 그를 불렀습니다. "너 정말 요리사 되고 싶냐?" 물었습니다. 그 순간 이철호씨는 너무 기쁜 나머지 큰 소리로 "녜"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주방장 요한스의 소개로 요리전문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고, 헐문 호텔의 일급 요리사로 까지 발 돋음을 하게 되었음은 물론 호텔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들고 1961년 스위스로 본격적인 요리사가 되기 위한 부푼 꿈을 안고 유학 길에 오르게 됩니다.
Ⅳ. 스위스로 요리사 유학공부
스위스에 도착한 이철호씨는 한 유명 호텔에 요리사로 취직을 하였는데 그곳에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요리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스페인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역시 자기 나라에서 일류 요리사로 5-6년 간 일하다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노르웨이에서 일류요리사로 곧 온 이철호씨는 명함도 못 내미는 그런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어려움은 이렇게 자기 나라에서 일류 요리사로 있었던 사람들도 이곳 스위스에 오면 주방장에서 감자 깎는 일부터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1-2년이 아니라 3년씩이나 오로지 감자만 깎아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이철호씨도 감자 깎기부터 요리 수업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철호씨는 감자를 깎으면서도 한국인의 끈기와 근면성을 숨겨놓을수가 없었습니다. 홀든파크 호텔 주방장에서 일했던 것처럼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꼬박 일하면서도 농땡이를 치거나 겉치레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함과 근면은 기본이었고 더 나아가 이철호씨는 감자를 깎되 그냥 막 깍지 않고 그 날 그 날의 요리 메뉴 표를 보고 그 요리에 알맞게 여러 모양으로 감자를 잘라 놓았습니다. 어떤 것은 네모 모양, 어떤 것은 둥근 모양, 어떤 것은 얇고 길쭉한 모양, 어떤 것은 삼각 모양 등 보기 좋고 먹기 좋게 여러 모양으로 깎아놓았습니다.
호텔의 주방장은 이철호씨가 남다른 눈썰매를 가지고 감자를 깎아놓는 것을 보고 큰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철호씨는 남들과의 차별화를 두기 위한 작업이 서서히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이 지나자 주방장은 이철호씨를 불러 드디어 요리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한 계단을 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노력 끝에 성공이 있다고 부지런히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하며 최선을 다하는 근면의 한국인의 기질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입니다.
Ⅴ. 헐문 호텔의 주방장이 되다.
스위스에서 3년의 요리공부를 마치고 1966년 노르웨이로 돌아와서 홀든 파크 호텔에서 2년 간 근무한 후 헐문 호텔에서 다시 그를 주방장으로 불렀습니다. 헐문 호텔은 그가 처음 배고픔을 잊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일 자리를 얻었던 곳입니다. 그가 헐문 호텔 주방에 발을 처음 디딘 지 만 8년 만에 이철호씨는 헐문 호텔 주방의 최고 주인인 주방장의 모자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를 주방장으로 부른 헐문 호텔의 사장님은 이철호씨에 대하여 말하기를 "다른 16-18세 나이 사람들 중 그가 가장 부지런히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요리사가 되어 배고픔을 달래보고 싶었던 그는 드디어 노르웨이의 최고 요리사의 훈장도 받았습니다.
Ⅵ. 체인점 사업에 손을 대다.
1985년 이철호씨는 자기의 꿈을 더 넓게 펼쳐보기 위하여 '마틴 멜 하우스' 체인점의 지배인이 되어 일을 하게 됩니다. 개점 첫날 직원들이 개장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 문을 열지 않고 서성거리며 지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은즉 화장실의 변기가 막혀서 물이 내려가지 않으므로 고치는 사람이 오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자신이 입고있던 양복의 윗도리를 벗어 의자 위에 올려놓고 와이셔츠를 걷어 부치고 똥물이 잔뜩 들어있는 변기를 막대기와 손으로 들 쑤셔서 변기를 뚫어놓았습니다. . 지배인 이철호씨의 솔선수범과 겸손함은 부하직원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 날 부로 '마틴 멜 하우스' 체인점은 날로 날로 번창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가 간부가 그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회사가 부도가 나서 이 체인점을 넘겨야 하는데 당신은 이곳에 계속 있도록 조처를 해 놓았으니 해고될 걱정은 없다고 안심하라며 위로하자 이철호씨는 그것이 본심이 아니고 자신을 유명세를 담보로 더 많은 돈을 받고 체인점을 넘기고자 하는 속셈임을 알고 ... 체인점의 지배인 직을 포기하고 백수로 돌아섰습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50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
지금의 우리나라 같았으면 한 물 같다 이제 무엇하노? 일 자리는 구하기 힘들고 무얼 먹고 사노?하며 걱정할 나이인데 이철호씨는 달랐습니다. 체인점 사업에서 실패한 후 자기만의 고유 브랜드를 가진 사업을 해야 안정성을 가지고 탄탄한 미래를 달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휴식도 할 겸 모처럼 만에 고국 땅 한국을 밟았습니다.
그는 어느 조그마한 분식 집에 들어가서는 메뉴 표를 보다가 전혀 낯 설은 음식메뉴를 보게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라면이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애들도 다 아는 라면을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오로지 노르웨이에서만 살다온 이철호씨에게는 처음 보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라면을 시켜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자신도 라면을 식혔습니다. 그런데 음식은 주문한지 정확히 4분 후 라면이 식탁 위에 놓여졌고 그가 먹어보는 라면은 정말 요즘말로 뿅 가는 그런 맛이었습니다. 얼큰하고 담백한 라면 맛을 먹어보는 순간 이철호씨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언제 가는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이것을 꼭 먹일 거야 !』 여기고 귀국한 후 한국에서 날라 온 라면에다 그 유명한 "미스터 리 (Mr. ri)" 라는 상표를 붙여서 손수 들고 노르웨이의 슈퍼를 돌아다녔습니다. 어떤 곳은 한 개 두 개, 세 개 그러면서 슈퍼주인과 사귀게 되어지고 1년이 가고 2년이 지나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조금씩 조금씩 라면의 존재가 알려졌고 3년이 되면서 주문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92년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에릭하우겐 식품회사』를 방문하게됩니다. 그리고 우연찮게 그곳에서 사장에게 라면을 시식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한 달 후 컨테이너 분량의 물건 량을 주문 받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라면 사업에 뛰어들게됩니다.
Ⅶ. 미스터 리 고유 브랜드의 라면을 만들다.
이철호씨는 라면을 파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라면으로 인식시키고자 '미스터 리 ( Mr. ri) '라는 고유의 이름을 같고 새로운 맛을 찾는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특급 호텔의 주방장 출신 이철호는 모든 라면의 스프를 뜯어서 맛을 보기도 하고 섞어서 먹어보기도 하고 간장을 더 넣어 보기도 하면서 노르웨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최상의 라면을 만들고자 열심히 노력하던 중 한국의 농심 라면 회사를 직접 방문하여 기술진들과 직접 제품을 만드는 일에 상담을 하였습니다. 농심의 사람들은 이철호씨가 실험해보고 말하는 맛의 모든 내용들이 연구진들이 그간 연구한 것 이상으로 더 확실하고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요청한대로 간장을 조금 더 섞어서 노르웨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최상의 라면 '미스터 리 ( Mr. ri) '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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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리 ( Mr. ri) '의 라면은 노르웨이 시장에 큰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철호씨는 주문이 많다고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내놓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출고량을 늘려나갔습니다. 또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미스터 리 ( Mr. ri) 시식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 각종 보도를 통해 '미스터 리 ( Mr. ri) '의 라면이 전파를 타고 급속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외에도 각가지 아이디어의 경품행사도 가졌습니다. 그는 태극기 그리기와 한국의 수도는 어디이냐?를 퀴즈 문제로 내기도 함은 물론 경품행사도 가졌습니다. 경품 선물로 한국 여행권을 선사하여 한국을 노르웨이에 소개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같은 '미스터 리 ( Mr. ri) '의 라면은 전국 슈퍼에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전국의 80%이상을 '미스터 리 ( Mr. ri) '의 라면이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인구 4백만의 노르웨이에서 연간 800만개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면의 원조라고 하는 일본이 이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 입니다. 일본 외에도 다른 여러 나라에서 라면 사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미스터 리 ( Mr. ri) '의 라면 앞에서 기를 펼 수가 없었습니다. '미스터 리 ( Mr. ri) '의 라면은 단순한 라면 이상으로 노르웨이가 선정한 최고 일류요리사의 훈장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그의 맛과 명성에 도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전국 슈퍼를 돌아다니면서 '미스터 리 ( Mr. ri) 시식회'를 가졌습니다. 그것도 이제는 노르웨이 한 나라에 그치지 않고 이웃 아이슬란드까지 시식회를 벌렸습니다. 하루 8시간 서서 라면을 끓이는 고된 일이지만 이철호씨는 정상인이 아닌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으로도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며 한국의 이미지와 맛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Ⅷ. 두 개의 조국을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뛴다.
이철호씨에게는 조국이 둘 있습니다. 한 나라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한국이요 또 다른 하나는 자기 병을 고쳐주고 지금까지 살아온 노르웨이입니다. 그는 그동안 벌은 돈으로 호의호식(好衣好食)하지 않고 그 옛날 새 먹이와 동물먹이로 먹이던 묵은 딱딱한 땅을 침실 밑에서 꺼내 몰래 먹던 그 자취 집을 샀습니다. 왜냐하면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에 참여한 300명의 노르웨이 참전 용사를 위해 한 달에 한번씩 저녁식사를 풍성하게 차려 대접하는 일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7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사람이 남는 그 순간까지도 이 일을 계속하겠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가 노르웨이 아내와 결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자녀들 모두 이철호씨의 이씨 성을 따서 이름을 지었으며 또 손자도 이 씨 성을 따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3대가 현재 이씨 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철호씨는 철저하게 두 개의 조국을 가지고 있으며 또 현재 살고 있는 노르웨이를 위해서도 열심히 경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레나에 만두공장을 세워 100여명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부푼 꿈에 들떠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국을 떠날 때 가져왔던 중등학교 역사책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이철호씨는 말합니다. "산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산으로 가라."고 이것이 오늘의 성공시대를 살아가는 이철호씨의 일대기였습니다.
Ⅸ. 이철호씨의 성공 비결 6가지
우리는 여기서 이철호씨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6가지 변화(CHANGE)의 원리를 대입하여 간단하게 설명하므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
먼저 변화(CHANGE)의 C 에 해당하는 헌신(Commit)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이철호씨는 오직 하나 음식 사업에 온 인생의 목표를 걸었습니다. - 목표에 헌신(Commit)
라면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단지 라면 맛 많이 아니라 미스터 리 가 보여준 요리사로서 걸어온 그의 인생 외길에서 얻어진 값진 노하우에 대한 시민들의 보상이기도 한것입니다.
두 번째로 변화(CHANGE)의 H 에 해당하는 습관(Habits)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이철호씨는 항상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아울러 상대방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아끼는 자상한 마음이 있었다. - 습관(Habits)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그것도 가장 늦게 퇴근하기로 소문난 그의 독보적인 행동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은 끝까지 남아서 그릇에 묻은 찌꺼기와 때를 닦아내는 불같은 열정과 책임성, 그리고 요리사가 편하도록 여러 모양으로 감자를 썰어놓는 일은 이철호씨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세 번째로 변화(CHANGE)의 A 에 해당하는 한 걸음씩 행동(Action) 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이철호씨는 처음서부터 하나 하나 일을 배워 나갔듯이 한 계단 한 계단 사업을 펼쳐 나갔다. - 한 걸음씩 행동(Action)
처음부터 대량으로 물건을 들여온 것이 아니라 한 개 두 개 세 개, 한 박스. 세 박스 판매하였고 또 라면의 이름이 알려진 후에도 욕심을 내어 한꺼번에 대량으로 내다 팔지 아니하고 처음서부터 조금씩 양을 늘려 출고하므로 맛의 소중함을 간직하게 하였다.
네 번째로 변화(CHANGE)의 N 에 해당하는 끊임없는 도전(Never)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이철호씨는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 없었다. 노력하면 모든 것이 다 되었다."- 끊임없는 도전(Never)
이철호씨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었듯이 ... 구두닦이 소년에서부터, 세탁소 일, 똥 푸는 일, 주방 아르바이트 일, 스위스 주방에서 깔끔하게 감자를 까놓는 일, 체인점의 부도 등,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고비가 많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늘 성실함과 근면성으로 모든 어려움 들을 이겨나갔다. 우리도 그의 고백처럼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 없다 노력하면 모든 것이 다 되었다는 고백을 하였으면 한다. 무엇보다 그가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이 내 곁에서 나를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었다고 고백하였다.
다섯 번째로 변화(CHANGE)의 G에 해당하는 긍정적 목표(Goal oriented)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이철호씨는 "나에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끊임없이 두 조국을 위해 열심히 살아 갈 것이다 " -긍정적 목표(Goal oriented)
그는 모든 판매전략에 한국을 알리는 홍보를 최고의 마케팅으로 사용하고 있음은 물론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저녁 만찬과 지역 경제를 위한 일터 창출을 위해서 이철호씨는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하려면 여러분도 끝까지 일을 하십시오. 도중에 중단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여섯 번째로 변화(CHANGE)의 E에 해당하는 자기평가(Evaluate)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이철호씨는 "일을 추진하고 계획함에 있어 빈틈이 없었다."-자기평가(Evaluate)
이철호씨는 밤늦게까지 남아서 내일 요리에 사용할 감자를 요리하기에 알맞도록 썰어놓는 일 외에도 노르웨이 국민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라면 맛을 내기 위하여 많은 시험의 과정을 거쳤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한국을 방문하여 최고의 노르웨이 라면 맛을 창출해내는 기적이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시식회를 통한 일의 추진력은 빈틈없는 그의 단면을 엿보기에 충분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이철호씨는 에이스웰 청소년 관에서 강의도 한다고 합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일류 요리사로서의 성공담이 아니라 "언제나 즐겁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텔레비전에서는 특정종교를 자랑할 수 없어 그의 신앙적인 면은 내세우지 못했지만 곳곳에 은은하게 흐르는 그의 모든 행동은 크리스챤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천진난만한 웃음 항상 밝고 깨끗한 마음을 믿음 안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항상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40번의 대 수술로도 온전히 고침을 받지 못하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주님으로 인한 세상의 어두운 면은 조금도 없습니다. "절뚝발이로 봐도 좋다. 나의 생긴 그대로 봐달라 내 얼굴 그대로 봐달라 나는 늘 주님으로 인해 감사하며 평안함 속에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고 간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