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제목: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법
https://youtu.be/cIn086oNpXc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7~8
설교를 위한 묵상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이별을 앞두고 중요한 교훈을 주셨다. 그것은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하라는 것과 그들을 돕는 보혜사가 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할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그들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 성령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게 무엇이 옳은 길인지를 나타낼 것이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서 성령이 하실 중요한 일이며, 본질적인 일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에베소서 3장 10절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신우회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청에서 근무할 때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할까?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까? 그들에게는 어떤 확신이 필요할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우리는 어느 정도로 확신할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정체성보다 더 중요할까? 공직자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이며 대리인임을 의식하며 살아갈까?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는 인생을 그저 끝없는 노동의 연속이며 알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가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어떤 모습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설교를 준비한다. 그런데 나는 매번 처음 설교하는 사람처럼 막막하게 느껴진다. 한 주간을 쉬면서 더욱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에는 쉐마에 대한 묵상을 위한 영상을 공유했다. 쉐마를 암송하는 사람들과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언약을 통해 맺어진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뜻을 알고자 노력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그리고 서로 힘을 모아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 설교를 통하여 나는 다시 한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고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실 일에 대하여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성령의 사역과 관련하여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며 늘 명심해야 할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설교 개요
1. 같은 말 다른 뜻: 자네, 육신, 루시퍼, 세상
2.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 책망
3. 어떻게 드러낼까? 사도 바울의 권면
*************
1. 같은 말 다른 뜻: 자네, 육신, 루시퍼, 세상
며칠 전에 우리 교회 장로님이 가까운 사람에게 ‘자네’라고 말했다가 반발을 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자네라는 말은 가까운 친구나 손아랫사람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로님은 고향에서 들은 대로 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자네라고 불렀는데, 그분은 자네라는 말을 손아랫사람에게만 쓰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말도 이렇게 사람이나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육신’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육신은 몸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예수님의 성육신을 설명합니다(요 1:14).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는 말은 거룩한 몸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육신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로마서 8장 6절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육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욕심덩어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고 사는 사람은 주변에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전서 3:3
그런데 루시퍼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시퍼는 본래 라틴어입니다. 빛을 가져오는 존재로서 샛별(새벽 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빛의 밝기를 가리키는 조도의 단위를 룩스(lux)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루시퍼(lucifer)는 빛을 가져오는 존재로서 샛별을 가리킵니다. 샛별은 모닝스타(morning star)라고 부르며 계명성(啓明星)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성 즉, 샛별은 마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사야 14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을 대적한 존재를 ‘계명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어떤 번역은 morning star라고 하고 어떤 번역은 Lucifer라고 옮겼습니다. 우리들도 루시퍼를 일반적으로 사탄이나 마귀의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1장 19절을 보면 샛별이 좀 다르게 사용됩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후서 1:19
여기에 나오는 단어 샛별은 모든 영어 성경에서 동일하게 morning star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라틴어 성경은 이 단어를 루시퍼로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샛별을 뜻하는 루시퍼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만하게 된 사탄을 가리키기도 하고, 보통명사로 샛별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새벽 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도 같은 단어가 다른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으므로 우리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 또 하나를 들자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세상에 대하여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한복음 5:18
같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 있고, 성도들과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풍조나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령님이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 책망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는 고별설교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별하시면서 죽음을 앞두고 유언처럼 주신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더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보혜사가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은 한자로 보면, 보호해 주고 은혜를 베풀어주는 스승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보면, 이 단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ētos))로서 도와주는 사람(helper)이나 대변자(advocate)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 교회에게는 더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을 소개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세상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풍조나 가치관에 물든 세상입니다. 성령이 세상의 어떤 모습을 책망합니까?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책망이며, 의에 대한 책망, 그리고 심판에 대한 책망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부연 설명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요한복음 16:9~11
성령의 책망은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그것이 잘못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실 때까지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심으로 세상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고 종으로 부리던 세상 임금이 쫓겨났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세상을 책망하실까요? 성령은 교회에게 보내는 보혜사입니다. 성령은 교회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세상을 책망할 때는 교회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교회가 성령의 뜻을 좇아 살 때 세상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을 좇아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으며, 또한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을 확신하고 담대하고 진실되게 살아갈 때 세상은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여전히 세상 임금의 지배를 받아 종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책망은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교회와 함께하십니다.
3. 어떻게 드러낼까? 사도 바울의 권면
그런데 교회는 어떻게 성령의 일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어떻게 세상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바른 길을 가르치고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저는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하여 적절하게 가르쳐 준다고 생각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19~21
오늘날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몹시 이상하고 힘들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영상을 통해서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대한 통쾌한 보복을 봅니다. 손해에 대하여 법적인 절차를 밟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소지하고 더 크고 위협적인 무기를 준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더 많은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모순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국가간의 평화는 물론이고 개인간에도 평화의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악에게 지지 않으려고 더 큰 악을 사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지혜롭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손해를 입어도 어떤 대책도 세우지 말고 수동적으로 당하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망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게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공동체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보혜사가 그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결코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하십니다. 다만 성령을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성령을 보낼 것이라고 약속하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굳게 붙들고 일상을 살아갑시다.
<끝>.